중국 중원 여행기 6 "낙양(洛阳: 루어양)


내가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노래 중에 성주풀이가 있다. 가수 김세레나는 덩실덩실 춤을 추어가며 무대를 휘어잡고 흥겹게 이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이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여기서 낙양성은, 바로 이 여행기에서 다룰 중국의 도시 이름이다. 십리 허에서 “허”는 “그쯤 되는 곳”이라는 뜻의 접미사다. 즉, 낙양성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무덤이 있는 곳이 망산이다. 북쪽에 있어서 북망산(北邙山)으로도 불린다. 옛날 높은 관직의 사람들이 죽어서 이곳에 많이 묻혔다. 영웅호걸이건 절세가인이건 죽으면 모두 무덤으로 간다는 뜻이다. 인생은 짧고 삶이 허무하니,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잘 먹고 잘 놀아보자, 라는 것이 노래의 주제다.

2025년 4월 2일 해질 무렵에 낙양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묵을 낙양 여가주점(如家酒店)은 체인 호텔로, 저렴하면서도 깨끗하고 친절한 중급 호텔이다. 골목이 골목으로 이어진 마치 서울의 인사동 골목같은 곳에 이 호텔이 위치해 있다. 넓은 마당 한 가운데 자리잡은 휴게 공간이 이채롭다. 넓고 낮은 탁자와 휴식 의자가 한가롭게 놓여있어 캠핑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길에 특이한 글씨를 본다. 삼추몽화(三秋梦华)라는 민박집의 벽에 붙은 낙양(洛陽)이라는 글자 속에 수 많은 그림이 들어 있다. 사람, 건물, 산, 강, 식물 등이 조화롭게 그려져 있다. 이런 민박집의 내부가 어떨지 궁금하다. 다시 중국의 낙양에 간다면 이집에서 꼭 머물고 싶다.

또한 一日不见如三秋兮(일일불견여삼추혜)라는 문구가 보인다. “하루라도 그대를 보지 못 하면 아홉 달을 못 본 듯 그리워지네.” 이 표현은 시경 등 여러 곳에서 나온다. 나는 고교 시절 국어 시간에 이 말을 처음 들었고, 삼추라는 말은 가을이 세번이니 3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이후로 이 생각에 전혀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니, 일추(一秋)는 “석 달”의 뜻이다. 따라서 三秋는 아홉 달이다. 즉, “一秋三月, 三秋为九月”(일 추는 삼 개월이고, 삼 추는 구 개월이다)이라고 중국어 대 사전(汉语大词典)에 나와 있다. 어떻든 “너”를 하루라도 못 보면, 그 하루가 아홉 달 같다, 라고 말한 사람이나,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나, 존경스럽고 부러울 따름이다. 하기야 이런 사람도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세월이 지나면, “너를 하루 보는 것이, 아홉 달을 보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혼은 정녕 지옥문으로 가는 장엄한 변장술을 펼쳐내는 무대란 말인가?

호텔 근처에 낙양 옛 골목이 있다. 끝없이 이어진 이 골목의 양쪽에 수많은 음식점, 술집, 상점 등이 들어서 있다. 또한 도처에 당나라 시대의 옷을 빌려주는 집이 있다. 당나라 복장을 하고 다니는 젊은 여인들이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골목을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구경하는 일을 최소한도 일 주일은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다음 날, 처음 찾아간 곳은 용문석굴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약 20키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용문석굴, 말로만 듣던 용문석굴을 가보는 날이다. 중국의 3대 석굴은, 용문석굴, 운강석굴, 그리고 둔황의 막고굴이다. 운강 석굴은 가보지 못했고, 오래 전 막고 굴에 갔을 때는 수리한다고 막아 놓아서 입구에서 몇 미터만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말로만 듣던 용문석굴을 내 발로 딛고, 내 눈으로 보고, 내 피부로 느껴본다.

용문석굴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있듯이, 이강(伊河)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용문산이 있고, 맞은 편쪽에 향산이 있다. 용문산에는 수 많은 석굴이 들어서 있고, 맞은 편에 있는 향산에는 향산사가 있다.


용문산에는 아침부터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었다. 중국 각지에서 몰려든 중국인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집결하고 있었다. 지면을 걷다가,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서 보고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한참 가다가 또 올라가서 보고 내려오는 식으로 몇 번을 그렇게 한다.
몇 개의 석굴을 살펴보니, 어둑어둑한 동굴 속에,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머리가 반쯤 남은 부처가 끝 없이 놓여있었다. 하여튼 여러 석굴을 보았으나, 온전한 상태로 남이 있는 조각품을 나는 단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석굴을 보느라 오르락내리락 해야지, 태양은 내려 쬐지, 응달은 없지, 바람은 불지 않지, 사람들은 소리지르며 밀치고 달려들지,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나는 인파에 묻혀 되는대로 가보기로 했다. 모든 것이 팔자려니 생각하며 그냥 설렁설렁 넘어간다.




이 산의 중간 부분에 가장 큰 굴이 있다. 굴이라면 굴이고, 그냥 노천이라면 노천이다. 수 많은 석굴 중 가장 크고 장엄한 불상 9 개가 있다. 이곳은 봉선사동(奉先寺洞)이라고 불려진다. 그 중간에 있는 불상은 높이가 약 20미터가 된다고 한다. 그 불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한상, 보살상, 신왕상, 인왕산등으로 불리는 불상들이 구경꾼들을 내려다 보고, 구경꾼들은 반대로 이 불상들을 올려다 본다.


이곳 가운데 있는 불상들은 비교적 원형 상태로 보존되었다고는 하나, 부서지고 떨어지고 깎여나간 흔적은 도처에 볼 수 있다. 이 불상들이 훼손되기 이전에 볼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 아름다움과 위압감에 벌어진 입을 닫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가운데 큰 부처상이 있는 곳을 지나면 또 작은 동굴이 수 없이 바위 산 비탈에 산재해 있다. 여기에 있는 석굴에도 모든 불상들이 머리가 없거나, 사지가 없다.
그러면 이런 불상들이 왜 이리 훼손되었을까? 문헌을 찾아보면, 불상의 머리를 소지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에 훼손되기도 하고, 도굴단에 의해서 반출되기도 하고,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 때려부수었다고도 한다. 한 마디로 저 불상을 박살내자, 라는 기류가 형성되면, 가만이 있는 놈이 바보요, 때려부수는 놈이 정상이다. 옛날 마녀 사냥에서 마녀라고 지목된 사람은 수 많은 사람들의 돌에 맞아죽거나 불에 타 죽었다. 이런 때는 돌을 던지는 것이 정상이요, 가만이 있으면 바보인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용문산의 끝 부분에 놓여진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 용문산의 반대쪽에서 용문산을 바라다 보면, 용문석굴의 전경이 그림처럼 멋지게 보인다. 아니, 멋지다기 보다는 해골 산에 구멍이 뚫린 것 같기도 하고, 벌이 떠난 헌 벌집을 보는 것처럼 해괴해 보이기도 한다. 불심(佛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대단하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신이 있느니 없느니, 이 종교가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세월은 흐르고 이 세월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도 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기도 한다. 반면 처형을 당하기도 하고, 가족과 친지와 헤어지기도 하고, 소중한 삶을 허송 세월하면서 신세를 망치기도 한다.

<용문석굴 전경>



용문석굴에서 시내쪽으로 오면, 관림이라는 유적지가 보인다. 관림은 관우의 머리가 묻혀있다고 믿어지는 능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무덤을 파혜쳐 관을 꺼내기도 했다고 한다.


한 가지 내 눈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측백 나무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측백 나무가 순수한 한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찾아본 즉, 측백은 측백(側柏)이라고 쓴다. “본래 소나무는 백수의 으뜸으로 삼아 ‘공(公)’이고 측백나무는 ‘백(伯)’이라 하여 소나무 다음 가는 작위로 비유됐다. 그래서 주나라 때는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를 심고 그 다음에 해당되는 왕족의 묘지에는 측백나무를 심었다. 측백나무에는 무덤 속 시신에 생기는 벌레를 죽이는 힘이 있는데, 좋은 묘 자리에서는 벌레가 안 생기지만 나쁜 자리는 진딧물 모양의 염라충이라는 벌레가 생기므로 이걸 없애려고 측백나무를 심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아하, 그래서 무덤 주위에는 측백 나무를 심었구나!


안으로 들어가면 사당이 보이고 그 안에 무시무시한 얼굴의 조각상이 보인다. 이런 건물이 몇 채가 더 있고, 그 안에는 뭐라고 설명되어 있는 상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마사는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이라고 한다. 동한 시대에 명제라는 왕이 AD 65년에 사신 12명을 인도에 파견하여 불법을 구해오도록 했다. 이들은 인도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2년 뒤(AD67년)에 불경, 불상 등을 백마에 싣고 낙양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이 절의 이름이 백마사이다.

운강석굴과 관림을 거쳐 오면서 힘이 다 빠진 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 더 돌아다닐 힘이 없었다. 여기가 거기고, 이 절이 그 절이고, 이 건물이 저 건물이고 뭐가 뭔지 여기저기 헤매기만 하였다.


한 가지, 미얀마 사찰 단지, 태국 사찰 단지 등이 있어서, 국제적인 사찰로 거듭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마사에 있는 그림 중에 불교의 전파도가 있었다. 이 그림을 보면 불교는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 카불-중국의 카스 – 둔황 – 낙양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으로의 전파는 두 갈래이다. 하나는 서안에서 북한으로 전파되었다. 또 하나는 낙양에서 남경으로, 그리고 바다를 건너 백제로 전파되었다.
다음 낙양 고성으로 간다. 낙양 고성은 한국식 이름이고 실제 중국에서는 낙읍 고성이라고 불린다. 이런 사실은 백마사에서 낙양 고성으로 갈 때, 택시 운전사가 알려준 내용이다.

낙읍 고성에서는 전통 및 현대 예술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용수들의 현란한 춤, 젊은이들의 무술 공연, 그리고 전통 노래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좀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관우 장비 등의 복장을 한 무사들이 거대한 체구에 인조 무기를 들고, 눈을 부라리며 거리를 활보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하고, 구경꾼들을 불러 사진을 찍자고도 한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들은 무섭다고 울기도 하고, 가짜 관우 장비라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오히려 이들을 놀리기도 한다.


그 뒤로 넓은 낙양 고성에는 연못이며, 고대 건축, 식당 등 각종 시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너무 지친 우리는 낙양 고성의 반의 반도 보지 못 하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아쉬움에 “여경문(麗景門)”에 갔다. 아름다운 여경문은 수많은 조명등을 받아 화려하게 우뚝 서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전통 건축물이 황금빛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견고하고 높은 성벽 위에 자리 잡은 이 누각은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지붕과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뻗은 처마선을 자랑하며 하늘로 솟고 솟아 공중으로 사라지는 듯 하였다. 건물을 감싸는 황금빛 조명은 고대 낙양의 신비로움을 더해주며,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화려하게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여기를 또 와봐야 하는데, 길거리 음식을 더 먹어봐야 하는데, 목청 돋구어 호객행위하는 젊은이와 중국어 연습도 더 해야하는데,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다.






사족:
아침에 여경문 근처를 산책하던 중, 한 노인이 고무줄 새총으로 무언가를 향해 쏘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으로 바짝 다가가서 약 5분간 관찰하였다. 이 노인은 약 20미터 전방 공중에 매달린 깡통을 향해, 고무줄 총 6발을 발사하여, 6발 6중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깡통이 너무 작아 내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이런 실력을 보이다니, 나는 이 어른이 소림사에서 새로운 무술을 배워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옆에는 새장이 있었는데, 아마도 집에서 새를 키우다가 새에게 “밖에는 이런 세상도 있단다”라고 알려주려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은 화산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