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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여행기 10(최종회) "타브리즈 그리고 터키로 출국"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3. 11. 11. 23:16

 

 

 

 

이란 여행기 10

 

"타브리즈 그리고 터키로 출국  "

 

 

 

 

 

 

2013년 10월 7일 아침 9:30분 전용차량으로 찰루스를 출발해 테헤란으로 향했다. 이미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찰루스와 테헤란의 경계선이 되는 고산을 넘을 때까지는 침이 넘어갈 정도의 비경이어서 눈을 부릅뜨고 버스 밖을 살펴보기로 했다. 찰루스에 올 때 이곳의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카메라 세팅이 잘못되어서, 나중에 보니 모두 안개 낀 듯이 뿌옇게 되어 있어서 단 한 장도 쓸 수가 없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이 바로 부분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고개를 올라갈 때 안개로 인 해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다. 사진을 찍어보았자 사진이 희뿌옇게 나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올라갈 때, 사진 찍을 생각은 접고,  대신 운전수가 안개속을 어떻게 뚫고 가는지 관찰하기로 했다. 운전수는 꾸불꾸불한 산길을 한손으로 운전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음식을 먹기도 하고, 할 짓은 다 하면서 갔다. 버스가 구른다면 200미터는 낭떠러지로 굴러갈 텐데, 살아 돌아온 것은 천만다행이다.

 

 

 

 

 

 

 

 

 

 

고개를 넘자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버스는 노랗게 물든 포플라 나무 숲을 지나고, 소떼가 지나갈 때를 기다려 쉬면서 갔다.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길 옆이나 산 위에 올려 놓은 무수한 호박 무더기 옆을 지나가기도 하였다. 그 주위에서 우리는 잠시 쉬면서 홍차를 마시고 싸가지고 온 음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테헤란 기차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3:00시, 우리의 기차가 6:10분 출발하므로 적어도 2시간 반은 어디 가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버스 기사가 돌아가지 않고, 복만씨에게 자꾸 돈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이다. 복만씨는 본래 계약한 요금에다가 운전수와 조수의 팁까지 충분히 주웠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운전수는 계속 물러나지 않고 복만씨를 따라 다녔다.

 

 

한참 승강이가 오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경찰이 오게 되고 통역을 하는 여자가 오게 되었다. 판명된 것은, "기사가 받은 돈을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고", 너무 적게 받은 것으로 오해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결국 운전수는 미안하다고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는 하나의 교훈이 그려지고 있었다. 외국에 나갔을 경우, 특히 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에는 모든 계약을 문서로 해야 한다. 마지막에 돈을 줄 때도,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딱딱 짚어가며, "이 100달러는 버스 요금이고, 이 10 달러는 팁"이라고 말하면서 확실하게 건네주고, 건네 받아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실제 우리가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분명 돈을 건네 주었는데, 가게 주인은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물론 나도 이런 경험이 있다. 옛날에 한번 당한 경험이 있은 후, 내가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살 때는, 살 물건을 모두 봉지에 담고, 주인과 함께 계산한 뒤, 그 자리에서 돈을 주고 집에 온다. 미리 가게 주인에게 돈을 주면, 가게 주인도 인간인지라, 가끔이 아니라 자주, 돈을 왜 안주고 가냐고 따지게 된다.

 

 

 

 

<테헤란 시내에서 만난 어떤 아이들: 아마 무슨 모델인 듯 했다.>

 

 

 

 

<테헤란 역에 있는 엄청나게 큰 코란>

 

 

 

 

 

시간이 많이 남아 우리는 테헤란역 2층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이란 자매를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국 여자분들은 그 여자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사진을 찍게 되었다. 마침내는 테헤란 여성이 검은 차도르를 한국인 여성들에게 빌려주어서, 한번씩 돌아가며 입어보고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그 짧은 시간에 정이 들었는지, 양국 여인들은 자기들 호주머니를 털어서 먹을 것을 모두 상대방에게 주고 있었다. 헤어질 때쯤에는 서로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했다. "굳 바이"라고 말할 때는 목청이 가라 앉아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기차간에서 우리 팀과 함께 한 터키인이 있었다. 나는 이 사람과 오랫 동안 아주 진지하게 이란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을 여기에 적어 보려고 한다.

 

 

그는 아버지가 터키인이고 어머니가 이란 사람인 이중 국적자였다.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치과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가 터키와 이란 양국을 자주 왕래하므로 두 나라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 어머니는 너무 운동을 하지 않아서, 운동부족으로 당뇨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이란 여자들이 외부 활동이나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만이나 당뇨병으로 죽는 여자가 아주 많다고 했다.

 

 

그가 말한 또 한 가지는, 이란 수뇌부에 대한 불만이었다. 억압적으로 모든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니까, 겉으로는 근엄한 척하고 속으로는 나쁜 짓을 다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다녀온 야즈드나 쉬라즈에는 매춘부가 많다고 했다. 이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뜻밖의 이야기다.

 

 

언젠가 그의 친구들이 놀자고 해서 갔더니, 남자가 10명, 여자가 14명이 있었다고 했다. 함께 섹스를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거부했더니, "겁쟁이"라고 말하면서 비아냥거렸다는 것이다.

 

 

한번은 친구가 자꾸 돈을 빌려 달라고 해서, 빌려주었더니 돈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달라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그를 피한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그를 이용하여 이란을 탈출하여 해외로 나갈 생각만을 한다고 했다. 사실 이란인이 해외 여행 여권을 발급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캐나다에 있는 내가 아는 사람이 한 말이 생각났다. 현재 토론토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이 한국인이 이란 종업원을 고용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란 종업원들이 거짓말하고 핑계를 많이 대고, 믿기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물론 세상 어디에 가든지, 정직하지 못하거나, 남에게 꾼 돈 갚지 않거나,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몇 퍼센트가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하여튼 외국인을 대하는 이란인들의 친절한 이면에 있는 이런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사실은 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마단의 아쉬킨도 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이란은 석유뿐만 아니라 다른 지하 자원이 많은데, 정부에서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고, 소수의 부자들만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란 정부가 좀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기차의 식당칸에서>

 

 

10월 8일 아침 7:20분경 타브리즈 역에 도착했다. 아침 고유의 찬란한 빛이 타브리즈 역과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구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거리를 가로 질렀고, 타브리즈 역사(驛舍)에 펄럭이는 깃발에 아침 새벽의 정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었다.

 

 

 

 

<타브리즈 역>

 

 

 

 

<기차역에서 만났던 대학생은 호텔까지 우리와 함께 온 후,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제르바이젠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 종업원들이 한 마디로 너무 촐랑대면서 "까불고"있었다. 아마 지금 "강남스타일"이 이란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싸이의 흉내를 내면서 중얼중얼 대더니 "Sexy lady"만은 확실하게 불러주었다. 그에게도 사진을 한 장 뽑아주었더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잠시 뒤, 그는 전기전자 전문가라고 하는 한 젊은이를 데리고 왔다. LG Photo Printer를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가 나를 만나서 LG 제품을 보기 원했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는 프린터를 한참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사라졌다.

 

 

 

 

<타브리즈 중심가>

 

타브리즈는 우르미아호(湖)로 흐르는 탈케강(江)을 끼고 있으며 해발고도 1,367m의 고지대에 위치한다. 1392년 티무르에 일시 점령된 후 투르크멘족(族)의 카라쿠윤루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란 영토로 귀속된 것은 16세기의 사파비왕조 때부터이다. 1724년 러시아·투르크의 페르시아 분할조약의 결과로 일시 투르크령(領)이 되어 나디르샤 시대(1736∼1747)까지 이르렀다. 테헤란·터키·아르메니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부근 농산물의 집산 이외에도 각종 직물업, 일용품 제조 및 농산가공업이 활발하다. 유라시아 남연(南緣) 지진대에 속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지진의 피해를 받아 사적 유물이 드물다.

<인터넷 사전에서>

 

 

9시에 호텔을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구경 거리가 모여있는 중심부는 걸어 다녀도 될 만큼 멀지 않았다. 처음 찾아간 곳이 자메 모스크였다. 자메 모스크도 훌륭하지만, 아, 그 뒤에 이 건물을 받쳐주는 하늘 색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파랗다 못해 시퍼런 하늘에 흰구름이 뭉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모스크 안에는 기도할 수 있도록 바닥에 양탄자를 깔아 놓았고, 설교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책과 물컵이 의자 옆에 놓여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이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더니 여기저기 안내해 주고, 홍차를 한잔씩 따라주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이심전심으로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자메 모스크에서 뒷문으로 빠져 나가면 엄청난 카페트 시장이 나온다. 그저 한 눈에 보아도 기름이 잘잘 흐르는 카페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의 값을 물으니 80만원 정도 한다고 한다. 같이 간 분의 말을 빌리면, 이런 것은 한국에 가면 400만원 ~ 500만원 정도 한다고 한다.

 

 

 

 

 

 

 

 

 

 

 

 

 

 

골목은 골몰으로 이어지고 또 새끼를 쳐서 서울의 남대문 시장보다 더 복잡한 구역이 바로 타브리즈 바자르이다.  파는 물건도 다양해서 쇼핑천국에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를 파는 가게에서 립톤 티백 100개가 들어 있는 한 박스를 구입했다. 약 3500원 정도했다. 스리랑카 제품이다. 이것을 구입하면서 한국에 오면 15000원은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한국에 와서 인터넷 최저가를 검색해보니 5700원에 살 수 있고, 택배비를 더하면 약 8000원에 살 수 있었다. 조금 허망했다. 이런 정도의 값이라면 끙끙대며 사들고 들어올 필요가 없었는데.  

 

 

 

 

 

 

 

 

 

 

 

 

 

 

다음으로 양 머리의 껍질을 벗겨서 팔고 있는 노인 앞을 지나고, 잡다한 옷가지와 혁띠를 팔고 있는 노인들 앞을 통과하여, 칼을 가는 사람 앞에 멈추게 된다. 느슨하게 쓴 안경 너머로, 칼을 갈면서 튀는 불꽃을 바라보는 칼갈이었다. 이 사람을 정말 멋있게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위세에 눌려 차마 카메라를 그의 얼굴에 댈 수가 없었다. 그 자리를 떠나면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아프고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마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담배를 가지고 다니나 보다. 담배 한 개피 권했으면 그와 나와의 관계가 부드러워져 그럴싸한 사진이 나왔을 것이다. 지난 번 인도의 바라나시에 갔을 때, 어떤 전문 사진사로부터 들었던 방법이다.

 

 

 

 

 

 

 

 

 

 

 

 

<오른 쪽: 아르게 타브리즈. 왼쪽: 현재 짓고 있는 모살라 모스크>

 

 

다시 호텔 근처로 돌아와 찾아간 곳이 아르게 바브리즈라는 건축물이다. Lonely Planet에 따르면 14세기에 세워진 이 성은 다 부서지고 한 쪽 벽만 남았다. 바로 성 위에서 죄수들을 아래로 던져 죽였다고 한다. 또한 여자 죄수가 있었는데, 죄수를 성 위에서 던지자, 차도르가 낙하산과 같은 역할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음을 Lonely Planet은 전한다.

 

 

점심 식사를 하고 찾아간 곳이 이슬람 예술대학이다. 정말 이 학교 찾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 이 대학교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업은 아기 3년 찾는다. 바로 옆에다 두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빙빙 돌았다. 왜냐하면 학교 입구에서 공사를 하고 있고, 빈터에는 학생이 보이지 않아서 주택 건설 현장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영국 영어를 아주 잘 하는 한 여인과 그녀의 친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끝내 이 대학교를 구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왼쪽이 이란 여자, 가운데가 영어를 잘 하는 이란 여자, 대학교수>

 

대학교에 가면서 입장료를 낸 것은 내 평생 처음이다. 키가  작고 허리가 구부정한 피천득선생님을 닮은 이 교수는, 우리를 자기 방에 데리고 가서 이 학교에 대해 설명했다. 본래 어떤 부자의 집이었는데 나중에 학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여기저기 다니면서 옛날에 손님이 올 때는 어디로 오고, 어느 건물에서 잠을 자고, 어디서 지냈는지 등을 설명했다.

 

 

 

 

 

 

어떤 방에 갔었는데, 한 학생이 알라의 신에게 기도하는 듯, 온 정신을 쏟아서 절하고 업드리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다른 방에서는 두 명의 학생이 무엇인가 만들고 있었는데, 마치 한국의 중고등학교의 공작 시간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밖에서는 몇몇의 학생이 우리를 보고 말을 걸어보려고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우리를 도와준 두 여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학교에서 나왔다.  

 

 

 

 

<학교 기도실인 듯 하다>

 

 

 

 

<학생이 무슨 물건을 만들고 있다.>

 

 

 

 

<일행 단체 사진>

 

 

 

 

<학교 캠퍼스 일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찻집이었다. 아마도 찻집과 음식점을 같이 하는 집인 듯 한데, 찻집은 젊은 사람들이 있었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한 종업원은 빨간 동그라미 무늬의 양탄자가 깔린 방바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종업원은 키가 큰 유리 컵 속에 음료수를 들고 와, 방바닥에 놓고 갔다.  왔다갔다 하다가 또는 다리를 뻗다가, 아무래도 음료수를 엎지를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순간, 누군가가 그릇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근처 사람들이 부랴부랴 휴지를 꺼내 닦는 중에, 종업원의 표정을 살폈다. 종업원이 좀 무심하게 넘어간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날 해질녁도 직감적으로 정말 사진 찍기 좋은 날이다,라고 느꼈다. 옛날 영화 오멘(omen)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무엇인가가 빛을 타고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높은 장소를 찾지 못해, 길위에 굴러가는 나뭇잎을 보고 찍다가 혼자서 서쪽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를 가니 공원이 있었는데, 나무 위에 무슨 새들이 앉아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근처는 공원이어서 인공 호수가 보이고, 노인들이 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훈수를 두는 사람이 옆에 있어서 훈수를 두다가 결국은 서로 언성을 높였다. 옆에서 보기가 민망하여 자리를 떴다. 훈수, 조언, 충고---이런 단어들은 좋아 보이는 단어이지만, 해주는 사람은 고맙다는 말 듣기 어렵고, 이런 말을 듣는 사람 별로 기분 좋은 법이 없다. 될 수 있으면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도와주는 방법이 최선이다.

 

 

 

 

 

 

 

 

 

 

 

 

 

 

10월 9일, 한글날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 올랐다. 새벽 5:30분 전용버스로 터키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이란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니, 섭섭하고 마음이 허전했다. 캄캄한 버스 의자에 앉아 모두들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같은 밤중이라 차들도 길거리에 별로 없었다. 가끔 가다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들의 불빛이 십자가를 그리며 찢어지기도 하고, 뭉실뭉실한 원을 그리며 사라졌다.  

 

 

 

 

 

 

 

 

 

 

 

 

 

날은 서서히 밝아오고 아침 햇살이 눈으로 덮인 야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끔 가다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이나, 짐을 싣고 터키로 가는 트럭을 제외하면 길은 아주 한산했다. 붉던 아침 노을은 점점 흰색으로 변해가고, 저 멀리 마을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길에 트럭이 끝없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버스 운전 기사는, 저 트럭들이 터키로 넘어갈 짐을 실은 차라고 했다. 길에 서 있는 트럭 운전수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는 듯, 차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마침내 다 왔다,는 고성이 들렸다. 재빨리 배낭을 메고 또 들고 앞 사람을 따라갔다. 돈을 바꾸라,는 환전꾼이 나타났다. 드디어 국경을 넘는구나, 라는 실감이 났다. 남은 돈을 모두 터키 돈으로 바꿨다.

 

 

우리를 이민국까지 싣고 갈 택시가 앞에 당도해 있었다. 택시를 탄지 채 5분이 안 되어 이민국에 도착했다. 이민국을 통과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이민국 직원도 혼자인데다가 동작도 느려서 시간이 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 일행은 모두 국경선을 넘었고, 내가 맨 마지막이 되었다. 이런 자리에 오면 사람들은 모두다 "바람처럼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보아서 일까,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라는 노사연의 노래를 회상해서일까, 뒤도 보지 않고 인정사정 없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터키 국기가 보인다. 이미 터키 땅을 밟고 있다.>

 

 

터키 땅을 밟고 시계를 보니 10시 35분이었다. 버스 타는 곳까지 가려면 여기서 10분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앞을 보니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도 있고, 중간에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지 이란 쪽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이란의 깃발이 아니라, 펄럭이는 터키의 깃발이었다. 드디어 터키에 왔구나. 기분은 상쾌했지만, 마음은 아쉬움이 남았다. 짧았던 지난 14일간의 이란 여행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땅을 보고 걸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면서, 테헤란, 야즈드, 쉬라즈, 이스파한, 하마단, 찰루스 그리고 타브리즈에서의 추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터키 이민국을 나와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렸다. 먼저 도착해서 나를 환영하는 일행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내 앞에 떡 버티고 있는 설살이었다. 앞쪽에는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저 멀리 구름 위에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라랏" 산이었다. 5137m나 되는 거대한 산, "아라랏"산이다. 아, 과연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산이구나! "알아랏!" 어디서 소리가 들렸다. 뭘? "너 자신을 알아랏!" "빨이 와랏!" "잔소리 좀 하지 말아랏!"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려온 소리는 "이제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닷"이었다.

 

 

나는 이란 여행기를 끝맺으면서 컴퓨터 화면 아래를 쳐다보았다. 지금 시각이 2013년 11월 11일 11시 11분이었다. 아니 늑장을 부리다가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서 글을 끝냈다. 오늘이 바로 "뻬빼로 데이 더블이닷!"

 

 

 

 

<아라랏 산>

 

<끝>

(2013년 11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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