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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시아 여행기 12
"오쉬의 하루"(키르키스스탄)
<오쉬 시내 도보 여행 코스>
<오쉬(Osh)>
중앙 아시아를 여행 다녀오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쉬라는 도시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오쉬는 인구 약 30만의 도시(한국의 여수시의 인구가 약 30만 정도 된다고 함)로 키르키스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오쉬에는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다섯 개의 험준한 봉우리가 있는 산이 있는데, 보통 솔로몬 산이라고 하며, 정식 명칭은 술레이만 투(Suleiman Too)이다.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이 도시는 현재 역사적 유물이 거의 없다. 단지 중국이나 우즈베키스탄, 또는 타지키스탄으로 가는 거점 도시의 역할을 한다.
로운리 플래닛에 따르면, 솔로몬왕에서 알렉산더대왕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의 건립자라는 전설이 있으며, 이 도시가 건설 초기부터 실크로드 상의 주요 거점이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이 13세기에 이 도시를 초토화시켰지만, 다음 세기에 다시 일어나 번창했으며, 1762년 코칸트 카네이트(Kokand Khanate)라는 나라에 흡수되었다가 후에 러시아에 굴복하였다.
이 도시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약 40% 살고 있는데, 시민들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존재해서, 1990년과 2010년에 민족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계는 여행자들은 잘 모르지만, 속으로는 꿈틀 거리는 용광로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잠재 위험 요소로 존재한다고 한다.
<솔로몬 산>
솔로몬 산(Suleiman Too)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솔로몬 산은 수 천년 동안 숭배의 대상이 된, 아시아의 성스러운 곳 중 가장 완벽한 예"라고 한다(According to the UNESCO, the mountain is "the most complete example of a sacred mountain anywhere in Central Asia, worshipped over several millennia).
2016년 10월 7일 아침, 선라이즈 호텔에서 솔로몬 산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어떤 학교가 보였는데,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올려 환영의 표시를 보냈다. 학교 운동장은 산인지 들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길은 비교적 깨끗했으나 길 양쪽에 있는 하수도 뚜껑이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어서, 술 먹고 걸어가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곳에 한눈을 팔다가는 그 속에 빠져 전치 60일 이상 진단서 나오기는 여반장이었다. 역시 선진국과 후진국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일반 시민이 얼마나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듯 하다.
<학교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웃고 있다.>
<시장 근처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시장>
중간에 오른쪽으로 바자르와 작은 강을 바라보며 걸어가는데, 맛있어 보이는 큰 황갈색 빵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강의 물살은 빨랐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올라가다가 덧버선을 파는 할머니를 만나, 너도 나도 하나씩 사겠다고 난리다. 여기의 덧버선은 진짜 양털인데다, 아주 두껍고 질감이 좋다. 이런 물건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이 직접 짜서 가져온 것이라, 몇 개씩 산 사람들도 있었다. 값은 2,500원 ~ 5,0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장>
<악부라 강>
<덧 버선을 산다>
솔로몬 산 입구에 오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는 석조 대문이 있다. 그 옆에는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바로 여기에서 입장료를 내고 등산을 시작하게 된다. 올라가면서 점점 오쉬 시내가 보이기 시작하고, 갈지자를 그리면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올라가는 중 누군가가 예리한 칼로 낙서를 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서는 역시 한국인이 쓴 "클라라"라는 글씨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임을 알리는 표지판>
<오쉬 시내>
<위에는 "아이지랙" 중간에는 "클라라입니다"라고 써 있는 글자가 보인다.>
<여행로 정상에 있는 판매대. 산의 정상은 아니다.>
정상에 오르니 인형 및 장신구를 판매대에 진열하는 장사꾼이 보인다. 그 옆에는 돔 바부라(Dom Babura)가 있었는데, 그 안에 한 사람이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989년에 재건축된 이 건물은, 본래는 1497년 자히루딘 바부라라는 사람이 14살 때 기도처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 전쟁과 지진으로 건축과 붕괴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돔 바부라>
<돔 바부라 기도소 안에 누군가가 아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산의 중턱을 따라 내려간다.>
꼭 대기에서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맨진맨질한 돌이 나온다. 사람들은 누워서 한 번씩 타고 내려가 보기도 한다. 그 위에는 수 많은 글인지 그림인지가 새겨져 있으나, 그것이 미끄럼틀 타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 한다. 길을 계속 걸어가면 수 많은 굴이 나타나는 데, 이런 동굴은 병을 치료하는데 효험이 있다고 한다. 솔로몬도 수 많은 동굴 중 어떤 동굴에서 수면을 취했고, 이를 기념하여 이 산이 솔로몬 산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도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로 가는 길에 이곳에 왔다고 한다. 또한 예언자 무하마드도 이곳에 들러 기도를 했다고 하니, 차라리 유명한 사람 중 이곳을 들르지 않은 사람을 세는 것이 더 쉬운 일인 지도 모르겠다.
굴 앞에는 위엄있는 풍채의 노인이 선글라스를 쓰고 만면의 웃음을 지으면서 앉아 있는데, "그대들, 이곳에 적선 좀 하시오. 앞날이 밝을 것이요. 내가 솔로몬은 아니나, 비슷한 용모이므로 돈좀 내고 나와 같이 사진 한 방 찍으면 뭐, 별로 본전 생각 들지 않을 것이요. 강요는 하지 않으나, 이런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 하지 않소이까?"라고 말하는 듯 하다. 모두들 꼼짝없이 한푼씩 적선하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조금 더 내려오면, 동굴 박물관이 나온다. 이런 산 중턱에 어떻게 보면 스피커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시골 할머니 콩밭 맬 때 쓰는 모자 같기도 한다. 그 안에는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 또는 그들이 이용했을 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 나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호랑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백두산 백호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르키스스탄에서 백두산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르지만, 백호인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동굴 박물관>
<박물관 안의 물건들>
<분명히 백두산 또는 시베리아 백호인 듯 하다.>
<박물관 바로 옆에 어떤 가족이 놀러온 듯 하다>
<놀러온 가족들>
<솔로몬 산의 다른 쪽으로 내려오는 출구이다.>
<멀리서 본 동굴 박물관: 아래쪽이 박물관 입구(잘 보이지 않음), 모자처럼 보이는 것이 박물관 출구>
<산 아래에 있는 이슬람 모스크>
<공동 묘지가 있었는데, 고의인지 사고인지 모르지만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솔로몬 산 근처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바로 옆에 영어 소리가 들려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 즉, 60대로 보이는 스위스 여자가 이곳에서 영어 학원을 하는 선생님이었고, 그 앞에 있는 젊은 남자가 독일인으로 보조 교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젊은이는 오쉬에 사는 젊은이로 그들로부터 영어로 배우고 있었다. 이 청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저 애는 중국어도 합니다."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네 이름이 뭐냐?(你叫什么名字?)라는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모르고 빙긋빙긋 웃기만 하였다. 영어 선생님이, "무슨 어려운 중국어 질문을 하여, 저 아이가 대답을 못 합니까?"라고 물었다. "너, 한국에 가본 적이 있냐?, 라고 중국어로 물었더니 대답을 못 합니다."라고 말했더니, 선생님은 박장대소하였다.
<길을 걷다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촬영하였다. >
<거리를 걷다가 벽면이 특이하여 촬영>
<화덕 벽면에 빵울 붙여 굽는다. 중국의 카스에서 많이 본 장면이다.>
시내 중심부에 악부라 강이 흐른다. 강 주위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서, 휴식처 및 유원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끔 가다 놓여있는 나무 의자에 젊은이들이 앉아, 우리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머리 수건을 쓴 여인들은, 이슬람이 흔히 그렇듯, 절대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녀 친구의 사진을 빼 줘봤다. 그 사진을 보더니, 히잡을 쓴 그 무슬림 아가씨도 사진을 찍겠다고 달려들었다. 역시 소형 프린터는 가지고 다닐 만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숲 속에 차를 파는 집이 있었다. 차를 시켰는데, 설탕이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슈거" 또는 "설탕"이라는 말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제스처로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숟가락으로 떠 넣는 동작을 하니, 숟가락을 가져왔다. 또 다른 제스쳐를 하니, 접시를 가져왔다. 하여튼 5-6번의 제스쳐를 해 보이고, 실수를 한 뒤에 마침내 각설탕을 가져왔다.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본래 차에 설탕을 넣지 않는지, 아니면 우리와 신호 방법이 다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가져온 각설탕>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는 맞은편 쪽에 노인 몇 명이 나와 신문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빵을 먹는 사람도 있고 차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술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고, 또 일부는 졸고있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상황으로 보아, 우리 나라 어르신들이 아침에 양로원이나 종로 3가에 나와서 하루를 보내다가 집에 가듯이, 이곳의 노인들은 이곳에 와서 몇 시간 동안 먹고, 마시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술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는데, 그가 갖고 있는 쇼핑백에는 먹다 남은 술이 들어 있었고, 우리에게 한 잔 마실 것을 권하기도 했다. 약간 비틀거리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늙으막에 오는 외로움과 서러움 그리고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
<우리에게 술도 권하고,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던 노인. 키르키스스탄 노인의 단면을 보는 듯 했다.>
<바자르를 거쳐서 호텔로 오는 중 만난 사람들>
<역시 어디가나 항상 빵이 많았다.>
<이곳에도 족발이 귀중한 것일까?>
<이슬람 여인들의 복장 마네킹. 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
<그러나 이렇게 멋진 이슬람 여인도 있다. 거리 광고판에 있는 이슬람 여인 모델>
그날 저녁 시장에서 김치를 포함한 갖가지 음식 재료를 사왔다. 그 음식을 재료로 하여, 김밥을 비롯한 몇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호텔 마당 한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키르키스스탄의 마지막 식사는 반은 한국 음식이요, 반은 키르키스스탄 음식 또는 두 나라 음식의 짬뽕이었다. 한국에서 몇몇 사람이 준비해온 밑반찬도 나왔고 이런 곳이면 빠질 수 없는 맥주도 당연히 나왔다. 이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 먹어댔으니, 모두들 나 죽네 하고 나자빠질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키르키스스탄의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나와 감천님은 시원한 밤바람을 쏘이려 밖으로 나왔다.
<에피소드>
감천님과 호텔 밖으로 나와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었는데, 트럭 한 대가 높은 단 위에 전시되고 있었다. 달은 밝고, 주위는 컴컴했다. 왜 길 옆에 자동차를 갖다 놓았지? 너무 이상해서 사진이나 찍어두고자 했다. 감천님이 딱 한 장 찍고, 내가 찍으려는 순간, 군인들의 발걸음이 들리고, 몇 대의 소총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내가 뭘 잘못 보거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분명히 무장 군인이었다. 아니 무장 경찰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들은 총부리를 겨누고 눈을 부릅뜨고 무슨 말을 해댔다. 나는 혹시 우리가 IS의 사냥감이 되었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왜?" 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Why?"라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그 순간,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파울했다는 심판의 호르라기 소리를 들으면, 항의의 표시로 노상하는 말이, "Why?"뿐이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특히, 구자철 선수가 툭하면 "Why?"라는 말을 잘 한다. 그 짧은 순간에, 구자철 선수를 생각하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감천 님의 카메라에 남겨진 트럭 사진>
결국 그들은 총부리를 겨누며 우리 두 사람을 바로 옆에 있는 어떤 철문으로 데려갔다. 이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36계 줄행랑을 칠까도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튀면 몰라도, 사전에 아무런 협의가 없었기에 아무런 조처도 취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큰 철 대문 옆에 있는 작은 대문을 통해 가본 적이 없는 "남영동 고문실"처럼 보이는 골방으로 끌려갔다. 숨이 막히고,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참을 그들은 키르키스스탄 말을, 우리는 되는대로 생각나는 한국말과 영어"Why?"를, 반복할 뿐이었다.
얼마동안 이런 일이 있은 후, 자기들끼리 뭔가 신호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미소를 조금씩 보이며 그들은 우리가 하는 영어 몇 마디 Korea, South Korea, tourist 등을 알아듣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우리를 석방시켰다. 아,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된 민족이 바로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외국에 나가서 돈 빼앗기고, 여권 빼앗기면 끝장인데, 그런 일이 없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돌아오면서 그들이 왜 자동차 하나 사진 촬영했다고 그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재수없으니 별 일이 다 발생한다고 투덜거리면서 오로지 앞만 보고 급히 서둘러 들어왔다. 먼 곳을 돌고 돌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패잔병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호텔 마당에서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일어난 일을 일행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누구하나 우리가 겪은 일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이 없었다. 뻥꾸라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차라리 "귀신을 보고 왔다고 말하면 믿겠다."고 말했다. 감천님과 내가 겪은 것을 믿건 말건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혹시 다음에 Osh에 올 사람이 있으면, Osh Sunrise Hotel 옆에 생뚱맞게 놓여있는 트럭을 한 번 촬영해보기 바란다. "피눈물이 난다"는 말은 대통령의 전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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