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여행기 7 "거니에쉬에샨(盖聂雪山: 개섭설산) 1박 2일 투어"
<거니에 설산 1박 2일 여행 코스>
2019년 5월 24일 오전 8시, 리탕을 출발하여 거니에 설산으로 향했다. 사실 일행 중에 아무도 거니에 설산을 가본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한국인 중에서도 우리가 처음 가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행 오기 전에 네이버나 구글을 찾아 보아도 거니에 설산이란 말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가본 적이 있다는 장족 기사 한 사람의 말만 믿고, 차에 앉아 멀뚱멀뚱 황소처럼 눈만 깜빡이며 거니에 설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병 훈련을 마친 병사가, 자기가 근무할 부대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이 그저 자동차 가는 대로 그냥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다. 신병은 가기 싫은 새로운 부대로 "끌려"가는 것이고, 우리는 가고 싶은 새로운 곳을 찾아 "이끌려" 가는 것이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천장남선(川藏南线: 추안짱난시앤)이라고 부르는 G318도로를 따라 리탕에서 서쪽으로 달린다.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왼쪽 산길로 접어든다. 이미 다녀온 토끼산이나 해자지질공원과 연결되어 있으리라고 추측되었다. 방향이 비슷하고 수 많은 돌 밭의 연속이다.
수많은 돌로 가득찬 들판을 지나고, 작은 호수가 보이는 축축한 대지를 돌고 돌아 자동차는 서쪽으로 향한다. 사람이나 자동차나 거의 구경할 수 없다. 가끔 지나가는 야크 떼와, 저 멀리 동충하초 채취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하얀 천막만이, 들판의 황량함과 고요함을 잠시나마 단절시킬 뿐이다.
조금은 지루한 길을 지나 오전 11시에 거니에 설산의 한 자락 끝인 렁다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자동차는 우회전하여 산밑으로 시속 4키로의 속도로 엉금엉금 기어가다 보면 바로 큰 사찰이 나타난다.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고, 오라는 사람도 없고, 가라는 사람도 없다. 사찰의 이름이 무엇인지, 사찰의 역사가 어떤지 모른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그냥 덩그러니 황야에 놓여있는 사찰이다.
<New Kampo Nenang Temple: 우리가 묵은 사찰>
<위의 지도가 나오기까지: 위의 사진과 아래 맵스미 지도 현장 캡쳐 사진 참조>
사실, 내가 가는 지점이 어디든지 간에, 지도상에 확인되지 않으면, 나는 껄쩍지근하고 답답함을 느낀다. "맵스미"라는 핸드폰 지도를 확인하니 내가 지금 있는 사찰의 이름이 New Kampo Nenang Temple이라고 나와 있었다. 좀더 확대해보니, 이 절과 가장 가까운 마을은 冷达(냉달: 렁다)라는 지명이었다. 사찰에 도착하기 약 1시간 전에 章纳(장납: 장나)라는 곳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개울을 따라왔으니, 대충 여기가 어딘지 짐작이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 날인 25일날 방문한 계곡이 어디냐, 였다. 현장에 도착하여 맵스미를 작동시키니 현재 나의 위치가 나타나지 않고, 좀 확대하면 "Redi"라고만 나와 있었다. 그 근처에 좀더 큰 마을이 없으니 여기가 어디인지 지도에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에 가서 구글맵이나, 바이두맵에서 "Redi"를 찾으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여행기를 쓰면서 "구글맵, 바이두 맵, 맵스미, 네이버, 다음"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25일 방문한 곳을 지도상에 적시할 수 없었다. 그때 "아마 이곳이 어디인지 지도상에서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는 케이씨님의 말이 생각났다.
여행기를 쓰려면 Redi가 어디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다. 매일같이 네이버, 다음, 구글, 바이두, 맵스미에서 "엄마 찾아 3만리" 가듯 ,날만 새면 찾고, 날이 져도 찾았다. 사실 이런 나의 방법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나 다름 없었다.
어느 날, 구글 지도의 축적을 여러 번 바꾸어가며 렁다와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다(사실 어렸을 때, 이를 잡은 기억이 있는데, 이 잡듯이 뒤져야 이를 잡을 수 있다!). 그때, Redi가 눈에 띄었다. 어두운 교실 바닥에서 머리카락 하나 발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심봤다", 라고 외쳤다! 아니 중국의 지명이니, "동충하초 봤다!", 라고 외쳤다. 그때 내가 알게 된 것은, 지도의 확대-축소를 수십 번 아니면 수백 번 해봐야 내가 찾는 지명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을 찾는다고 할 때, 100만분의 1의 지도에는 나타나겠지만, 1000분의 1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광화문은 1000분의 1 지도에는 나타나겠지만, 100만분의 1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든 Redi의 지명을 확인한 후, 나는 이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Redi를 찾지 못하면, 나는 여행기를 더 이상 쓰지 않고, 중간에 그만둘 생각이었다. 아이구,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나갔다! 하여튼 Redi를 발견하였으니, "Ready, go!"
<5월 24일 우리가 묵게 된 사찰에서 맵스미를 찾아 캡쳐해 두었던 사진이다.>
<역시, 5월 24일 사찰에서 화면 캡쳐하여 두었던 사진이다. >
<한국에 와서 어느 중국인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본 내용이다. 이것을 근거로, New Kampo Nenang Temple은 중국어로 新冷谷寺라고 결론 내렸다. 이 사찰은 지금 건설 중이다. >
<다음 날 즉 5월 25일 찾아간 Redi라는 마을: 역시 그 당시 맵스미에서 캡쳐한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기에, 훗날 기억에 도움이 되도록 "아이들"이라고 적어 놓았다. >
<앞으로 사찰이 완성되면 사찰에 찾아 오는 사람들이 묵을 숙소이다. 겉은 완성되었지만, 내부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 옆에 완성되지 않은 다른 건물들이 있다. >
<사찰 앞 쪽에 있는 건물. 겨울에 사용할 땔감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5월 24일과 25일 트레킹코스>
우리는 당일만 이곳에서 트레킹할 예정이었므로, 숙소에 배낭을 갖다 놓자마자 바로 트레킹을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30분이었다. 나는 큰 카메라를 숙소에 남겨두고, 핸드폰과 물, 그리고 점심으로 먹을 포도 한 송이를 작은 배낭에 넣어 메고,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 물론 우리 운전수가 앞장 서고, 그 뒤에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개울가에는 오랫동안 다닥 다닥 걸어 두었던 깃발들이 바람에 시달려 낡고 찢어져 있었다. 어떤 곳은 깃발이 너무 많아 깃발을 헤치고 걸어가기가 어려웠다. 습기가 많은지, 흰 이끼가 나무에 척척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듬성듬성 나 있는 붉은색 나무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가시 덤불을 헤치며 앞으로 나가기도 했다.
운전수는 수 많은 깃발이 나부끼는 개울가의 바위 틈에서 나오는 약수터를 가리키며 한 잔씩 마실 것을 권유하였다. 약수가 나오는 샘의 안쪽은 논산 훈련소 황토처럼 누렇게 변해 있었다. 약수터에서 물 한 사발 들이키니, 시원하기도 하고 찝찝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나무 이끼>
<약수터>
<약수터 근처의 바위>
약수터를 지나서는 빨리 가는 사람들은 앞서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뒤에 쳐져서, 자신의 체력에 따라 보행 속도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나는 내 체력이 닿는 범위에서 되는대로 하고자 마음 먹었다. 계곡의 양쪽에 쭉쭉 뻗어 올라간 검은 바위산의 절벽을 보기도 하고, 풀과 나무, 그리고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넓고,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잘 나 있는 계곡이 나타났다. 이런 산중에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넓은 곳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개울 양쪽으로 평평한 땅에는 잡목과 잡풀이 자라고 있었으며, 누군가 이름 모를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나무로 된 색바랜 다리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노인 머리를 풀어 헤친 듯, 하얀 풀 사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난쟁이 분홍 꽃이 봄이 왔음을 알렸다. 눈 녹은 맑은 물이 소리내며 흐르는 물 속에 물가의 나무 모습이 보이고 흘러가는 구름이 보였다. 혹시 물고기가 있을까, 유심히 찾아보았으나, 물 속에는 가끔 떠 내려오는 나뭇잎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잠시 뒤, 우박과 비가 섞여 내렸다. 우박을 손바닥에 올려 놓으니, 금방 녹았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비는 멈추고, 깎아지른 듯한 정상의 구름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었다. 산 정상에 눈이 보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구름이 또 나타나 눈을 가렸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멀리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빨간 옷에 빨간 모자, 목에 염주를 걸고 있는 두 노인이 나물을 뜯고 있었다. 노인의 자루에는 이제 나오기 시작한 연초록 나뭇잎이 들어 있었다. 아마 나물로 요리해서 먹을 모양이었다.
중국어로 말을 걸어보니, 자신들은 중국어를 할 수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런 산 속에 두 노인이 살고 있다니, 너무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핸드폰 커버에 넣고 다니는 사진 한 장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런 사진을 뽑아줄 터이니,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손짓 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핸드폰으로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포토 프린터로 뽑아 그들에게 건네 주었다. 그들은 신기한 듯이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였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출발한지 아마 2 시간 정도 걸어 올라갔을 것이다. 더 넓은 대지 위에 마을이 나타났다. 20여호 정도의 마을로 보였는데,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집이 돌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주위에 있는 많은 돌을 이용하여 환경친화적으로 지은 집들이 정말 멋 있게 보였다. 주위를 둘러 보아도 진흙은 보이지 않았다.
좀더 가까이 가보니 대부분의 집들의 지붕에는 나무가 얹혀있었고, 가끔 양철로 된 곳도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지붕은 거의 없고, 일부가 날라가거나 구멍이 난 곳이 많았다. 돌로 된 벽은 허물어지고, 마당에는 오랫동안 방치된 나무 토막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아마도 몇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듯이 보였다.
이상하다! 집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분명히 사람이 살었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집의 거주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기도 한국처럼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바람이 불어 모두 도시로 이주해 갔단 말인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생활방식과 사고 방식이 바뀌어서 더 이상 시골이나, 산골에 살지 않고 좀더 돈벌이가 되는 곳으로 떠났을까? 그것도 아니면, 인디아나 존스가 탐험하는 미지의 세계처럼 아무 이유없이 고대 도시로 변해가는 하나의 과정일까? 아무튼 20여호의 집중에서 실제 사람이 사는 집은 다섯 채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 중의 한 집은 지붕이 노란 원형으로 되어 있어서 사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린 날씨에 가랑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며 쌀쌀한 바람이 몸을 감고 지나갔다. 분위기가 으스스 하여 그집에 들어가기 싫었지만, 호기심으로 들어가 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커튼이 쳐져 있었다. 커튼을 열면, "내가 몽다리 귀신이다, 이놈!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하면서 이빨 빠진 할망구 귀신이 흰 머리를 날리며 긴 고양이 발톱으로 즉시 내 목덜미를 낚아 챌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확 열었더니, 그 안에는 누군가가 오체투지 기도를 했었을, 때가 반들반들 낀 매트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얼른 밖으로 나와 크게 호흡을 하며 다른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보니, 거니에 설산의 일부분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 설산이 좀더 잘 보이는 곳까지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기야 야딩에서 우유해, 오색해도 못 보았는데, 저 설산 못 본 것이 뭐 그리 대수일까?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도 나니까 올 수 있는 것이다. 자화자찬을 하며 돌아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방향을 틀어 아래 쪽을 보니, 저 멀리서 아까 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두 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일단 사람이 살 것 같은 집을 찾아 여기저기 살폈는데, 마침 마당 가운데 조그만 태양열 발전기가 있는 집이 보였다. 이 집이 틀림없이 노인의 집이라고 단정지었다.
문을 들어서며, "계세요?" 하려고 보니,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 좀더 자세히 말하면 티벳 장족인들이 사는 멀고 먼 중국 사천성이었다. 언젠가 티비에서 본 장면이 떠올라, "有人吗(사람있어요)?", 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나왔는데, 아까 본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멍하니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정말 그 사람이 맞을까?
방에 들어가니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왔기에 컴컴하여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나를 안내한 노인이 빨간 모자를 썼다. 모자를 쓰니 아까 본 그 노인이 틀림없었다. 모자를 벗었을 때와 썼을 때가 너무 달랐던 것이다.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방안이 점점 밝아졌다. 자세히 보니, 창가에서 희미한 물체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집에 노인이 또 한 사람 있었다. 또 방 옆에 긴 의자에는 아기가 자고 있었다! 노인이 세 명, 아이가 한 명, 모두 네 명이었다. 아, 노인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네! 그렇다면 저 아이의 아빠와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잠이 깬 아기에게, 나이가 뭐냐, 이름이 뭐냐, 물어도 눈만 멀뚱거렸다. 그러다가 입이 삐뚤어지며 으앙 울더니 참았던 눈물이 얼굴을 지나 턱까지 가서 마침내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방 한 가운데는 난로가 있었고, 난로 위에는 물이 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우유와 비슷한 음료인 짜이(수유차?)를 따라주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솥을 가져와 뚜껑을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만두 또는 송편을 닮은 음식이 들어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겉은 좀 딱딱했으며,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맛은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먹었던, "개떡"과 아주 비슷했다.
내가 먹는 모습을 할머니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할머니 집에 갔을 때, 할머니가 준 개떡을 꾹꾹 목구멍에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 할머니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족 할머니의 얼굴에는 인자하고 따뜻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좀더 자세히 보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입이 보였다. 이들은 모두 위에 나 있는 두 개의 이빨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구부러진 허리로 몸을 지탱하며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대접하려고 안절부절 하였다. 잠자다가 일어난 듯한 세 번째 노인은 일어나려다가 비틀거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이 없이 한 동안 적막이 흘렀다. 이제 울음을 그친 아기의 옹알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산골의 정막을 깨고 있었다.
눈을 돌려보니, 방바닥에 놓인 오래된 매트리스, 방 구석에 놓인 초록색 물통,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있는 색 바랜 주전자며 검게 그을린 솥이 산골에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아, 이 노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까? 말 없이 멀뚱거리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노인을 보면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 노인들이 병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방에 돌무더기와 듬성듬성 나 있는 잡풀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혹독한 이 환경을 이들은 어떻게 헤쳐 나갈까? 나뭇잎과 나물을 채취하는 것 이외에 무슨 생활 수단이 있을까?
나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점심으로 가져온 포도 한 송이를 드렸다. 이들이 이빨이 없으니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주려고 가방을 뒤져보니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앞으로는 공을 몇 개 가지고 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 몇 푼의 돈이 있었다. 돈도 주었다. 뭔가를 더 주어야 할텐데, 이 불쌍한, 꼭 우리 할머니를 닮은, 이빨이 빠져 입이 합죽한 이 노인들에게, 내가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입던 옷이라도 벗어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나는 짠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면서 보니, 집의 한쪽 구석에는 노인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갖가지 물품들이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천이 없이 밖으로 드러난 벽은, 돌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쪽에 창고로 보이는 작은 방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내던져진 상태로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사립문 밖으로 나오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떠나는 나에게, 할머니와 아기가 힘 없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보낸 30분이 마치 30년이나 된 듯 길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승에서 이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분위기와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따뜻한 마음은,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과 머리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오늘의 추억은 내 삶의 모퉁이마다 문득문득 모습을 드러내며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멀리 설산 위로 검은 구름이 짙게 깔려 미동도 없는, 티벳의 깊은 골짜기의 오후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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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래 사찰로 내려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날 저녁 날이 춥고 마땅히 요리할 데가 없어서, 우리는 스님들이 먹고 지내는 곳에서 저녁을 보냈다. 우리는 삶은 돼지 고기와 라면을 먹었다. 바로 그 옆에서 건장한 스님들은 이곳 특유의 빵인지 떡인지 모르지만, 아까 할머니가 먹던 음식과 비슷한 것을 먹으면서 수유차를 마셨다. 스님들의 저녁식사 메뉴는 나물이 대부분으로 한 마디로 소박하고도 소박한 음식이었다. 우리가 먹는 돼지 고기를 스님이 보시더니, 한 주먹 덥석 집어갔다. 나중에 그 돼지 고기를 어떻게 먹을 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방의 다른 구석에는 스님들이 먹다 남은 고기와 큰 부엌칼이 무섭게 놓여있었다!
<스님들의 부엌>
<스님들이 기거하는 방의 일부분>
<난로에 먹을 라면을 끓인다.>
<스님들의 저녁 식사>
<스님들이 드시는 음식>
<한 구석에 스님들이 먹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고기와 섬뜩한 칼이 있다.>
그날 저녁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숙소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이 숙소는 전기가 딱 1 시간만 들어왔다. 그 한 시간에 물을 끓여 유담뽀(뜨거운 물을 안에 넣어 이불 속에 넣고 자는 고무 주머니)에 넣고 자는 바람에 추위를 거뜬히 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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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즉 5월 25일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사찰 앞에 있는 들판에 나갔다. 사찰 뒤편의 산 위에 거대한 설산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바로 사라졌다. 사찰 경내에 있는 텐트에서 파릇한 두 줄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들판에는 추위에 견딜 수 있는 가시 돋친 나무만이 새벽의 쓸쓸함을 더했다. 새벽부터 말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고, 덩치 큰 산 토끼가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물가 어디에선가 꼬리를 나불거리는 새 한 마리가 새벽의 적막을 뚫고 끽끽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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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아침 8시 반에 다음 목적지 Redi(惹迪: 야적: 르어띠)로 출발했다. 사실 그때까지도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운전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던 곳이었다. 자동차는 약 1시간 가다가 오른쪽 강을 따라 한 없이 올라갔다. 맑은 강은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흘러갔다. 강 기슭은 옆집에 사는 순이처럼 그저 평범하기만 했다.
운전수는 꿈에서나 볼 수 있는 기막힌 장소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느낌이었다. 아, 이런 것을 일망무제(一望無際)라고 하던가? 멀리 시퍼런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그 아래 설산이 아래로 퍼지고 옆으로 새끼 치며 길게 뻗어 있다.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산자락이 서로의 기세를 뽐내듯, 팽행한 철사출처럼 상대방 산자락으로 무섭게 파고들었다.
<한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간다.>
멀리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그냥은 아래로 내려가기 싫다는 듯, 뱀처럼 꿈틀 거리며 평원을 휘젓고, 머물고, 한숨 쉬며 지나간다. 어떤 것은 반원을 그리고, 어떤 것은 갈지자를 그리고, 어떤 것은 사정없이 옆쪽으로 빠지며 며칠 저녁 굶어 뾰루퉁한 시어머니 눈꼬리처럼 매섭다. 거대한 설산을 배경으로 엉덩이를 이리 빼고 저리 빼며 들판이라는 무대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물줄기는, 마침내 큰 한숨을 내쉰다. "이제는 놀만큼 놀았노라. 이제 쉬려 하노라"라고 말하는 듯, 나풀거리던 흰 수건 공중에 내 던져 멀리 멀리 사라진다.
발 밑에는 풀인지 나무인지 모를 잔잔한 식물들이 보라색 꽃의 잔치를 여는구나! 모진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온몸을 동여매고 웅크리고, 급기야 몸의 일부가 가시로 변한 앉은뱅이 나무에서 어쩌면 이다지도 예쁜 보라색 꽃이 피는 것이냐? 저 밑 평원에서 시작한 보라빛 불꽃이 여기저기 꽃을 뿌리며 위로 올라와, 마침내 여기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한바퀴 돌고 언덕으로 가는구나! 그러다가 마침내 원을 그리며 하늘로 꼬리를 감추는구나! 아, 너희들은,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서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눈 녹은 앞산 모습 초연(超然)히 나타날 때, 어르신 맞이하듯 구비구비 펴는 것이렸다! (황진이 시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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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있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혼자 남아 집을 보는 아이들"이 아니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신" 것도 아니다. 엄마와 아빠는 그놈의 돈 좀 벌겠다고 동충하초 캐러 가셨단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모이면 스스로 알아서 잘 논다. 엄마가 없어도, 놀이 기구가 없어도, 스스로 개구쟁이가 되어 잘 논다.
아이들은 누가 시켜서 카메라만 갖다 대면 저런 자세를 취하는 것인가? 아니면 습관적으로 외부인만 보면 저런 자세가 나오는 것인가? 누가 얼굴에 흰 회칠을 해 준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저렇게 치장한 것인가? 저 아이들에게 공이나 볼을 선사했어야 했다! 공을 선물로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마음껏 들판에서 차고, 뛰고, 달리도록!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찾아보니, 책을 읽다가 중요한 것이 나오면 표시하는 책갈피가 있었다. 이런 것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줘봐야 어디에 쓰는지 알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이마에도 붙여주고 손에도 붙여 주었다. 그랬더니, 어떤 아이는 떼어서 옷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였다. 어떤 아이는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혀로 핥기도 했다. 가장 기발한 아이는, 쪽지 하나를 떼어서 내 이마에 붙여주었다! "에따, 너도 엿이나 먹어라!"라는 심사였을까?
아이들은 섭섭한 듯 떠나는 우리에게 작은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에게 준 빵은 이미 다 먹었는지 보이지 않는 아이가 많았다. 한 노인이 나타나, 번갈아 가며 우리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들이 보기에, 우리는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질 뿐인 어떤 이상한 사람들일 것이다. 아마도 저 아이들 중 많은 수는, 엄마나 아빠처럼 땅을 기어 다니면서 눈이 빠져라 동충하초의 작은 이파리를 찾아 한 평생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살아갈 세상, 고초당초 맵다 한들 동충하초 당할소냐?
아이들과 작별하고 다시 리탕으로 오는 길, 간헐적으로 설산이 보였다. 설산이라 먹을 것도 없으련만, 설 산 위 하늘에는 몇 마리의 새들이 훨훨 날아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만년설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파란 하늘과 구름을 벗삼아 놀고 있는 "놀자 설산"도 보였다.
어느 지점에 와서 기사는 두 개의 호수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쌍 호수가 있었다. 주위에는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봄 풀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호숫가 가까이 가니, 그야말로 금싸라기를 뿌린 듯, 수많은 꽃들이 기지개를 켜며 찬란한 여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그러나 여기 티벳의 자연에 녹아 있는 꽃들은 누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꽃이다. 혹독한 추위와 바람을 이겨내며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며 꽃을 피운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이라 부르고 그들은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자연(自然), 스스로 "자", 그럴 "연" ,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거친 자연에서 운명이라는 꽃을 피운다.
거니에 설산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차를 멈추고 모두 돌아온 길을 바라본다. 여전히 거니에 설산은 뭉실거리는 구름 아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저 산 어느 계곡의 컴컴한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또 어느 산 자락에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손으로 사랑의 표시를 하며 웃고 있을 것이다.
리탕에 다 왔음을 알리는, 광화문을 닮은 노란 지붕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두들 이틀 간의 여정을 회상하는 듯,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추억이 슬며시 살아나 모두의 입가에 엷은 미소로 나타나는 듯 했다.
<호텔 초원지야>
어느새 우리의 자동차는 시내를 통과하여 호텔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저 멀리 우리의 호텔인 초원지야(草原之夜)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 밤 초원지야에서 마음껏 백주(白酒)를 마시며 밤을 보낼 것이다. 그 얼굴로 내일 백주(白晝)에 나다니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렇게 많이!
(다음은 리탕-신두치아오-캉딩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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