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여행기 8 "리탕-신두치아오-캉딩-성도"
리탕은 해발 4014미터(무엇이 기준인지 모르지만 Tibet Travel Guide라는 지도에 그렇게 나와 있다)로, 티벳어로 “거울 면처럼 평평한 초원”이라는 뜻이다. 리탕은 시내 한 가운데에 동서로 나 있는 길을 "행복로"라고 하고, 남북으로 나 있는 길을 "단결로"라고 한다. 이것만 기억하면 어디든 쉽게 목적지를 찾아 갈 수 있다. 생각보다 도시가 좁다. 숙소인 “초원지야(草原之夜)”에서 출발하여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위 지도에 표시하였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중학교가 있다. 학생들이 운동장을 도는데, 독서하면서 걷기고 하고, 그냥 걷기도 한다. 단상에도 학생들이 앉아 공부를 한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서 감시하는 듯 하다.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아침 7시반이다. >
<백탑사 가는 중에 있는 거리. 겉보기는 그럴싸 하나, 이곳을 두 번 갔었는데, 소수의 가게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항상 문이 닫혀있었다.>
<큰 길 옆에 세워둔 광고판: 무심결에 촬영해 두었다가, 궁금하여 한국에 와서 일부를 해석해 보았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일람표인 듯 하다. 아래는 맨 위 첫 줄(위에 파란색 부분)을 해석해 본 것이다. >
<위 광고판에 나온 첫 줄 해석>
1. 호주 성명: 쓰랑즈마
2. 신분증 번호: 513---(신분증 번호가 길다. 18자리 수다.)
3. 가족수: 3명
4. 장애인 수: 0
5. 노동 가능 수: 2명
6. 가족 종류: 최저 생활 빈곤 가구
7. 집이 무너질 위험: 없음
8. 이사 가기를 원하는지 여부: 아님
9. 생산이나 직업을 얻도록 도와준 수: 2명
10.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킨 사람 수: 0명
11. 최저보장제도에 해당되는 사람 수(해석 불분명): 3명
12. 의료 보살핌 수: 1
13. 재난 후 도와준 수: 0명
14. 도움 책임자: 류시앙신
15. 도와주는 관청: 고성 파출소
아이구, 한국이라면 일단 사생활 비밀보호 어쩌구 하면서 난리법석을 부릴 것이다. 이런 것을 왜 길거리의 게시판에 알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여튼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이런 일을 맡은 부서가 경찰이다. 중국의 다른 지방에도 이런 것이 있는지, 아니면 사천성에만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주 낙후된 곳에만 있는지 알 수 없다.
위의 내용을 사전을 찾아가며 해석해 보면서, 이것이 공부인지 노동인지 생각해 보았다. 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기 바란다. 하기야 본래 대부분의 시간을 쓸 데 없는 짓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행복로를 따라서 백탑 공원 가는 길: 이제 막 해가 떠 올라와 태양 빛이 비스듬히 들어온다. 대부분의 티벳 도시의 건물은 붉은 색이 많아서 화려하다. >
<오토바이에 돼지 고기를 싣고 간다.>
<중국 국기가 햇빛을 받아 펄럭이는 거리를 따라서 몇 명의 여인들이 걸어간다. 햇볕이 따가워 모자를 썼다. >
<행복로와 단결로 교차로 근처>
<역시 촬영 당시 구름이 인상적이고, 입체감이 뚜렷했다. >
5월인데도 양지에 나가면 뜨겁기가 한 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밤에는 추워서 덜덜, 낮에는 뜨거워서 헐헐, 아마도 걷기에 알맞은 때는 구름 낀 낮이 될 것이다.
백탑이 있으면 백탑사라고 부르면 되는 모양이다. 코라를 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아름답기로 따지면 간즈의 백탑사가 훨씬 아름답다. 위치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간즈 백탑사에 훨씬 뒤진다.
<사찰 앞 오체 투지 하는 곳>
<어마어마하게 큰 마니차를 돌린다.>
<사찰 안에서 거대한 마니차를 돌리면서 사람들이 걷고 있다. 더위와 사찰 내부의 고유한 냄새가 많이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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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강고가를 알리는 안내판: 옛날 사람이 거주했던 곳이다. 과거에 유명한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인데, 아마도 가장 유명한 집은 달라이라마 7세의 출생지이다. 인강이라는 말도 달라이라마에서 따왔다.>
<100미터를 가면 7세 달라이라마 탄생지가 나온다는 안내판>
<길거리 벽에 붙어 있는 시>
洁白的仙鹤,
请把双翅借给我。
不飞遥远的地方,
只到理塘就回。
희고 흰 선학이여,
두 날개를 나에게 빌려다오。
멀리 날아갈 필요 없이,
날아서 리탕에 다녀오리라。
작가는 달라이라마 6세인 창양지아추어(仓央嘉措)이다. 골목길에 붙어 있는 시다. 시의 내용을 보면, 멀리 가봤자 리탕만 못하다는 내용으로 리탕을 찬양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리탕이라는 도시 자체는 황량한 들판에 들어선 밋밋한 도시다. 하지만 리탕 주위에 있는 수 많은 설산과 초원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길거리 벽에 있는 시>
跨鹤高飞意壮哉,
云霄一羽雪皑皑,
此行莫恨天涯远,
咫尺理塘归去来。
학을 타고 높이 날아가니 내 마음 비장하구나
높은 하늘로 한번 나니 눈과 같이 희구나
이번 길이 멀고 힘들다고 한탄하지 않고
곧 다시 리탕에 갔다 돌아오리라
이 시의 저자도 역시 달라이라마 6세다. 학을 타고 높이 구름 위로 날아가 리탕을 다녀오겠다는 것이다. 구름 위, 학을 타고 다니는 것은 신선이나 대붕(大鵬: 하루에 구만 리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의 새)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위대한 존재들이 리탕을 다녀온다는 것은, 리탕이 위대한 곳임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사전을 찾아가면서 번역해보았으나,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틀려도 해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달라이라마 7세 출생지>
<달라이 라마 출생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촬영한 사진: 안에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위로 올라가 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위로 올라가니 모든 문이 잠겨져 있었다!>
<달라이라마 출생지 앞 거리>
<달라이라마 출생지 근처 골목>
<어느 사진 작가가 해마다 이곳을 방문해서 사진을 촬영하고 전시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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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싸얼왕 광장>
인터넷에서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거싸얼왕전이라는 서사시가 있는데,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 바로 거싸얼왕이다. 60만 구절의 시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티베트 족에게 널리 전파되어 있다고 한다. 거싸얼왕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옛날 자연적 재해와 인위적인 재난이 장족지역을 휩쓸고, 요사스런 마귀들의 행패로 일반 민중은 커다란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때 거싸얼(格萨尔)은 요괴와 마귀를 항복시키고 강자를 누르며 약자를 도와주어 백성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성스러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는 특수한 품격과 비범한 재능을 갖추고 신(神), 용(龙), 념(念, 장족 원시종교 상에서의 일종의 신)의 세 가지 특성을 지닌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영웅이었다.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역량과 천신의 보호로 인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요괴와 마귀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후 거싸얼(格萨尔)은 어머니 곽모(郭姆), 왕비(王妃) 삼강주모(森姜珠牡) 등을 데리고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인터넷 인용>
<거싸얼왕: 약간 코믹하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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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탕사>
<리탕사>
1580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리탕사는 문화혁명 당시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처음 이곳에 갔을 때, 사람도 거의 없고, 겉보기에 별 볼일 없는 절로 보였다. 더구나 사찰 건물의 문이 잠겨 있어서 그냥 돌아 나오려고 하였다.
그때 버스 두 대가 오고 신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사찰의 앞쪽이 아니라 옆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무작정 그들을 따리서 옆문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그 크기와 화려함, 웅장함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본 사찰 중, 가장 크고 감명 깊은 절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스님이 이상한 물건을 받쳐 들고 간다.>
<사찰 내부의 앞 쪽은 수리 중이다.>
내부가 컴컴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 앞 사람만 따라 다니다가 몇 번 넘어질 뻔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늘어서서 스님이 주는 무엇인가를 받고 있었다. 스님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무엇인가 질문을 했다. 벽에는 달라이 라마로 보이는 초상화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 옆 건물에서는 무슨 부처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 하늘을 떠받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스님이 사람들과 일일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엇인가 나누어 준다. 너무 어두워 잘 안 보인다. >
사람들은 모두 돈을 한 뭉치씩 들고 다니면서, 사찰 내부의 곳곳에 돈을 놓고 갔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놓는지 유심히 살폈다. 보통 사람들은 1위안(180원)짜리를 한 뭉치 가지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사방에 돈을 놓았다.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은 1각(18원) 짜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돈을 놓았다. 좀 비싼 옷을 입고 있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50위안(9000원)을 도처에 놓고 간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날 그곳에서 10만원 가까이 시주하고 갔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런 절이 건설되고 운영되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어떤 사람(위 사진에 절하는 사람)은 앞에다 돈을 놓고 절하고, 그 돈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절하고, 그 돈을 가지고 또 다른 곳으로 갔다. 결말은 모르지만, 맨 마지막에 절하는 곳에 놓고 크게 절을 한 후 사찰에서 나갔을 것이다. 부처님에게 복도 받고, 돈도 절약하고, 좋은 방법인 듯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단체 신자들을 따라 다니면서, 신도들이 원하면 큰 단위의 돈을 잔돈으로 바꾸어 주는 여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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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밖으로 나오는 데, 한 노인이 썬 글라스를 끼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흥흥흥"일까, 아니면 "헐헐헐"일까,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인사를 해도 "흥흥흥", "돈을 원합니까?", 라고 물어도 "헐헐헐"이었다. 겉보기에 도사처럼 보여서 좀 무섭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맹랑하게도 보였다. 아무래도 좀 특이한 사람 같아서 포토 프린터를 꺼내서 사진을 뽑아주면서, 말을 계속 걸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계속 "헐헐헐"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노인이 선글라스를 벗으면 어떨지,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노인에게 선글라스를 벗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사진을 찍어 줄 터이니 앉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 노인의 선글라스를 끼면 멋있을테니 한번 빌려 써보라고 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벙글거리면서 노인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 어쩌구 저쩌구 말을 하더니 노인이 선글라스를 벗어 옆 사람에게 건네 주었다. 마침내 노인의 맨 얼굴이 나타났다. 아이구, "좀 근엄하고, 무섭고, 영화 배우일 것같던 사람"이,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순식간에, "좀 웃기고, 개구쟁이 같고, 어설프고, 평범한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 이번에는 나중에 온 평범한 사람이 선글라스를 끼니까 또 멋들어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글라스, 그거 참 요물이다!
나도 언제 저런 선글라스 하나 끼고 종로 3가에서 "헐헐헐" 하면서 앉아 있어봐야겠다. 혹시 또 누가 아나? 지나가던 사람이 돈 몇 푼 건네줄지! 그 돈을 잔돈으로 바꿔 옆에 있는 조계사에 가서 여기저기 절하면서 시주 한번 멋들어지게 해봐야겠다. 이때는 "흥흥흥"하면서 돈을 내야겠지! 돈이 들어와서 흥해야 하니까, 興興興!
리탕사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아담하고,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 길이었다. 성처럼 보이는 곳에 말이 풀을 뜯고 있었고, 민가처럼 보이는 집 앞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 똥을 벽에다 붙여 놓은 듯: 겨울에 땔감으로 쓰려고!>
검은 소가 자꾸 뒤를 따라와 겁이 나서 빨리 걸어야만 되었다. 빨리 걸으면 소도 더 빨리 걸어 쫓아왔다. 그러면서 소들은 한 마리 한 마리씩 자기의 집으로 들어가,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중에 삐쩍 마르고 털이 부시시한 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송아지도 나를 따라 오더니 어느 빨간 대문 앞으로 갔다. 그 집이 자기 집인 듯 했다. 그런데, 그 송아지는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를 보다가 땅을 보다가, 한 바퀴 돌기도 하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자꾸 바라보니, 무서웠나 보다. 나는 저 소가 결국 어떤 행동을 취할지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소는 문 앞에다 뿔을 대고 약 5분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너무 싱겁게, 뿔로 문을 팍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음, 나는 강아지가 아니야. 나는 강하지!"라고 말하면서 뿔이나서(=화가 나서) 뿔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것이다!
<망설이던 송아지는 결국 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혼자 심심한 듯이 놀고 있는 아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소가 따라오는 골목에서 아이가 뒤뚱뒤뚱 걷는다.>
<어느 골목에 있는 집. 낡은 집에 광주리가 걸려있는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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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리탕을 출발하여 신두치아오로 향했다. 5월 21일 이곳에 왔으니까 날 수로 치면 거의 일주일 가까이 리탕과 그 근처를 돌아보고 있는 셈이다. 그 동안 정들었다면 정들었던 리탕을 떠나려니, 좀 섭섭하고 허전했다. "초원지야"라는 호텔도 내 집처럼 느껴졌고, 매일 빨래해서 마당에 널던 아줌마도 동네 아줌마처럼 친숙해졌다. 다른 곳에 먹을 것이 없는지, 그리고 초원지야의 마당에 풀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심심하면 찾아오던 동네 송아지들도 모두 고향 사람처럼 낯익었다. 그러나 어쩌랴, 여행이라는 것이 인생과 같아서, 정들자 이별인 것을! 그러다가 마침내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가자랍산: 카쯔라샨. 표지석 아래쪽에 해발 4718미터라고 씌어 있다. >
우리 버스는 마지막 높은 지점 해발 4718미터 카쯔라산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서 잠깐 쉰다. 아, 넓은 들판에 멀리 산들이 병사처럼 열병을 하고, 또 그 위에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다. 이제 너무 보아서 지긋지긋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는 산과 구름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보아도, 쭉 뻗어 오른 산과, 하얗게 하늘로 용솟음 치는 구름은 여전히 내 마음을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는다. 구름 아래 산에는 풀과 나무가 조화를 이루며어 산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표지석 옆에 자전거가 놓여있다. 이 길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사실, 이런 곳에서 걷기도 힘든데, 오르막길을 자전거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 그때 케이씨님이 한 마디 한다. "전에 어떤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해발 4000미터 이상에서는 절대 나무가 살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내 눈으로 4000미터에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라고 말했더니,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과는 더 이상 대화가 안 되겠구나 싶어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본래,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싸우면,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한 번 믿으면, 여간해서는 그것을 바꾸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 종교적인 신념까지 모두가 그렇다. 정치적인 것도 그런 것 같다. 내가 아는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한국당을 지지하다가 민주당으로 돌아서고, 반대로 민주당을 지지하다가 한국당으로 돌아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단 한 사람도! 놀라운 일이다! 서로가 자기가 지지하는 당을 상대방이 왜 지지하지 않는지, 상대방을 비난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임제 의현 선사는 말하지 않았던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고! 이 얼마나 강렬한 메시지인가! 얽매인 삶을 살지 말아라!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대로 살아가라. 아무도 너의 삶에 관여할 수 없다! 집단적, 개인적 우상들을 과감히 타파하라! 고정관념을 깨라!
그런데 고정 관념을 깨라, 라는 말도 고정 관념 아닌가?! 깨지 말아야 할 것은 그냥 두고, 깰 것만 깨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깨야할 것과 깨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판단하는가? 아, 이거 혼돈(混沌)의 시대가 다가오는 도다! "혼돈"! 혼자 돈 쓰는 것? "혼술", "혼밥"은 들어 봤어도 "혼돈"은 처음 들어본다. 하기야 마누라 몰래 꼬불쳐 둔 돈으로 "혼돈" 하는 재미를 어디에다 비교하리요! 아, 더 이상 "혼돈"에 빠지기 전에 다음으로 넘어가자!
< 갈지자(之) 길을 만난다.>
<중간의 어떤 휴식처>
신두치아오에 도착한 것은 점심 때가 조금 넘어서 였다. 마침 그 날이 일요일인데도 신두치아오에 많은 학생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일요일에 왜 이리 거리에 학생이 많은지 식당 종업원에게 물었다. 산골에 사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가 없으니, 일 년 중 몇 달을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다시 산골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요일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몇 달 간 여기 와서 수업을 받고, 산골 집에 가서 몇 달 간 자습을 하는 그런 형태였다.
<신두치아오>
점심 식사를 하고, 신두치아오에서 약 40키로 떨어진 타공 초원으로 갔다. 타공 초원에서 보는 야라 설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길은 잘 닦여져 있어서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고, 길가에는 노란 꽃이 이제 막 피어나고 있었다. 길 옆을 흐르는 시냇물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나와 숨바꼭질을 하였다.
타공초원은 무야진타라는 황금색 사찰에서 시작되는 나즈막한 언덕이다. 나무 계단을 따라 몇 분이면 바로 정상에 도착한다. 몇 년 전에 갔을 때는, 입장료도 없었고 나무 계단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달라졌다. 영수증을 주거나 무슨 표시를 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주머니 몇 명이 앉아서 되는대로 입장료를 받고 입장시킨다. 물론 울타리도 없어서 조금만 눈을 피해 들어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듯 하다.
<타공 초원 입구 근처: 서양 아이들 두명이 뛰어 놀고 있다.>
<여기서부터 나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멀리 보이는 야라 설산>
<입구에 있는 무야진타 사원>
<야라 설산이 멀리 보인다. >
언덕의 정상에서 그 앞에 펼쳐진 초원과 멀리 아름답게 뻗어 있는 야라설산을 바라본다. 바로 이런 것을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것이다.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시원하고 후련하다. 어른이나 아이나 사진 찍기 좋고, 앉아서 쉬기 좋다. 그냥 한참 동안 앉아서 먼 야라 설산에 눈을 떼지 않고 바라 보았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클래식 음악이 있었다면 더욱 분위기가 살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카프를 가져와 바람에 날리며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독특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촬영을 했다.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고, 가끔 사람을 태운 말이 "으흐흥" 소리 내며 지나갔다.
설산을 배경으로 자신의 딸로 보이는 아이를 피사체로 삼아 사진 찍는 사람이 있었다. 팔을 이렇게 해라, 다리를 이렇게 해라, 시선을 어떻게 해라, 내가 봐도 잔소리가 너무 심했다. 딸은 따라하다가 나중에는 지겨워서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바닥에 앉아 딴 짓만 하고 있었다. 화를 내던 남자는, 옆에 있던 자기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설산을 배경으로 서 있으라고 했다. 여자에게 다리는 어떻게, 팔은 어떻게, 손가락은 또 어떻게, 하나하나 지적했다. 나같아도 신경질 나서 그만 산을 내려갈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아내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자세가 나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봤을 때는 딸이나 부인이나 모두 훌륭한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마침내 식식 거리던 남자는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다리 하나를 약간 구부리고, 팔은 뻗되 좀 안쪽으로 반원을 그리고, 손가락은 V 자를 그렸다. 그리고 여유있게 시선은 설산을 향했다. 그러더니, 딸에게도 그리고 아내에게도 똑 같이 하라고 말했다. 결국 남자가 원하는 대로 원만하게 사진 촬영이 끝났다. 역시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그림이 낫고, 백 마디 지시보다 한 번의 시범이 낫다!
타공사를 떠나 기사는 우리를 싣고 어떤 집으로 갔다. 막상 가서 보니, 자기의 집이었다. 우리를 2층으로 초대한 그는 간단한 다과를 내 놓았다. 방에는 아기 그림을 포함한 많은 그림이 붙어 있었다. 실내는 전체적으로 장족의 특성인 듯 울긋불긋한 분위기였다.
부엌에는 주전자며, 냄비며, 플라스틱 통이 시렁에 가지런히 꽉 채워져 놓여있었다. 이런 그릇이 다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어쩌면 부의 상징으로 채곡채곡 쟁여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리도 옛날에, 장식장에 각종 그릇을 방이나 거실에 폼나게 늘어 놓았던 것처럼.
<운전수의 집>
<운전수의 집>
<2층에는 사람이 살고, 1층에는 장작이 쌓여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다.>
<운전 기사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부인은 유순해 보였고, 아이들은 성실해 보였다. >
화장실에 갈 일이 있어서, 화장실이 어디인지 물었다. 남자 아이는 자기를 따라 오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는 돌을 딛고 올라가 담장을 넘어갔다. 나도 돌을 딛고 담장을 넘어갔다. 거기에는 보리인지, 밀인지, 아니면 칭커인지 알 수 없는, 이제 한창 자라기 시작하는 초록색 식물이 있는 밭이었다. 그러더니 거기가 화장실이라고 했다. 정말 훌륭한 자연 화장실, 보리 냄새 향긋하고, 파란 하늘에는 바람이 불고 구름이 지나가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화장실이었다!
그 사이 우리를 다음 목적지로 데려다 줄 운전 기사가 바뀌었다. 캉딩으로 가는 자동차는 좀더 작은 차였다. 그래서 짐은 차 위에 싣고, 사람만 차 안에 앉아서 캉딩으로 출발했다.
캉딩으로 오는 중, 멀리 공가산으로 짐작되는 설산이 보였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고개를 넘으면 공가산을 볼 수 있는 행운이 따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지자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와서 몇 미터 앞을 볼 수 없었다.
내가 봐도 운전이 불가능할 산길을, 운전수는 전에도 많이 겪었다는 듯이, 능숙하게 안개를 뚫고 차를 몰고 내려갔다. 사실 앞에서 오는 차와 몇 번 충돌할 뻔 했는데, 한 마디로 운이 좋아서 살 수 있었다.
<캉딩의 "물을 등에 멘 아가씨">
약 7시경에 캉딩에 도착하였다. 캉딩은 도시 한 가운데로 급류가 흐르고, 강 양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밤에 보이는 도시는 화려했고, 멀리 보이는 산에는 수 많은 작은 등불로 인해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
<캉딩 시내: 멀리 은하수처럼 달아 놓은 수 많은 전등>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근처 시내를 둘러보았으나, 시끄러운 물소리 때문에 말을 크게 해야 들릴 정도였다. 곳곳에 놓여있는 인공 조형물이 조명을 받아 뽐내고 있었다. 쌀쌀한 밤 공기가 위에서 내려와 밖에서 오래 있기 힘들었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집단 무용을 잠시 보다가 호텔로 들어왔다.
<캉딩 광장의 무용>
<다음 날 아침 캉딩 시내 모습>
다음 날 즉 5월 27일, 우리 일행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에 여기에 와본 경험이 있기에, 일찍 성도로 떠나기로 했다. 나도 전에 이곳에 와서 무거추어 호수 등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떠나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 날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아쉬움을 달래려고 아래 쪽에 있는 채소 시장 근처를 돌았다. 여기서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서 있었는데, 동충하초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 옆에는 빗 속에서 거지로 보이는 사람이 찬비를 맞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등교하는 학생들은 그 길을 따라 가다가, 비 맞고 자는 사람을 보고 길을 돌아 원형을 그리며 피했다. 어떤 나라건 빈부의 격차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찬비 맞으며 잠을 자야 하는 사람이 불쌍할 뿐이다.
27일 11시 35분 성도행 버스가 출발했다. 처음에 버스는 좁은 산길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거대한 댐이 있는 지점을 통과하자, 버스는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일단 고속도로에 진입한 버스는 시속 100키로로 달렸다.
버스 안에서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지난 여행 동안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이 미술 전시장에 진열된 그림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창밖을 보니, 성도를 떠나 마얼캉으로 갈 때보다 성도의 산천은 더 푸르러 있었다. 또 다시 잠든 사이, 비몽사몽 간에 어디서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버스는 이미 성도의 신난먼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거기가 버스 종점이자, 이번 여행의 종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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