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Korea

관매도 (Ganmae Island)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7. 31. 17:08

관매도에서

 

 

 

<진도의 관매도>

 

 

7월 12일.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제주도에서 아침 9시 반에 출발한 돌핀호가 10시 45분에 추자도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추자도를 뒤 덮고,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은 이 배를 탔다. 그 큰 배에 탄 사람은 채 20명이 되지 않았다. 이 20명은 진도나 목포에 갈 사람들이다.  

 

 

10시 50분에 추자도를 출발한 배는 12시가 좀 넘어서 진도의 벽파항에 도착했다. 내리는 사람은 딱 3명이었다. 어떤 부부와 그리고 나였다. 마침 시내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와 같이 배에서 내린 부부도 역시 그 시내버스를 탔다. 뜻밖에도 이들은 일본 사람이었다. 잘 되었다 싶어 일본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입안에서만 맴돌 뿐 일본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일년 전에 일본인 미찌꼬, 수가코와 그럭저럭 할 말을 했던 내가 아닌가? 그러나 말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중국말이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물으려고 "전에"를 생각하려고 했느나 중국어인 "이치엔"은 생각이 났으나 일본어인 "마에"란 말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아하, 중국어가 나의 뇌의 일본어 영역을 덮어 버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그럭저럭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들은 전에 중학교 교사였고, 지금은 퇴직한 사람들이었다. 2년 전에 서울과 수원 그리고 경주에 배낭여행 왔었고, 지금은 제주도로를 경유하여 우리 나라 남쪽 지방을 배낭 여행하러 왔던 것이다. 순간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0이 가까운 나이로 보이는 그들은 한 손에 일본어로 된 한국 안내 책자를 갖고 있었다. 말을 해보니 진도의 기적이라고 하는 바닷물 갈라지는 곳을 가기 위해서 진도에 왔다고 했다. 진도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전라도 보성으로 간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일본어로 된 "태백 산맥"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그 소설의 배경이 거기여서 보성을 가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진도 시외서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그들을 도와주려고 하였으나, 그곳에 가는 버스는 앞으로 2시간이 지나야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고 말했다. 택시를 잡아주고 작별을 고하면서 나의 명함을 주었다. 내 명함은 이름 석자에 나의 핸드폰 전화번호와 이메일 그리고 홈페이지가 적혀있다. 전에는 내 명함을 주는 것이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이런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나의 명함을 받아든 그들은 아리가또를 연발하며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관매도를 가려고 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결과 주위의 섬 중 가장 아름다운 섬이 관매도라고 했기 때문이다. 관매도를 가려면 일단 진도의 팽목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조도를 거쳐 가야만했다. 팽목항으로 떠나는 버스는 오후 1시에 40분에 있었다. 버스표를 구입하고 시계를 보니 12시 40분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근처 한식 집에서 조기찌개를 시키고 팽목항에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오늘은 관매도로 가는 배가 없다고 했다. 팽목항에서 관매도로 가는 배는 하루에 한 번 뿐인데, 이미 그 배는 떠났다는 것이다.

 

 

나는 한참 생각을 했다. 1)진도읍에서 1박을 하고, 내일 아침 일찍 팽목항으로 가서 관매도로 간다. 2)오늘 무조건 조도까지 갔다가 조도에서 1박하고 관매도로 간다. 3)조도고 관매도고 다 그만두고 서울로 간다. 이 세 가지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2)번을 택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진도는 여러 번 와 봤는데, 또 여기서 잘 필요가 없었다. 또 일단 조도에 들어가면 거기에서 관매도로 가는 배가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관매도로 가는 배가 없다하더라도 조도에서의 하룻밤은 진도에서의 하룻밤과는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날이 진도 장날이어서 팽목항 시내 버스에 사람들이 가득 탔다. 물론 대부분  노인들뿐이다. 시장에서 구입한 물건을 버스 아무 데나 놓아서 보따리가 이리 쏠렸다가 저리 쏠리기도 했다. 그것을 잡으려다 할머니가 넘어지고, 또 그 보따리에 걸려서 할아버지가 넘어졌다. 할아버지는 보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동남아에서 시집 온 듯한 어떤 아낙네는 차를 잘 못 타서 중간에서 내리니, 못탄 것만큼 요금을 환불해 달라고 한다. 버스 기사는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한국말이 서툰 동남아 아낙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중간에 내려야만 했다. "이해가 안 돼요. 한국 살기 너무 힘들어요," 그녀가 내리면서 한 말이다.

 

 

 

 

<팽목항에서 조도로 출발하는 고속훼리>
 

 

팽목항에 내려 배 시간을 알아보니 3시에 조도로 가는 배가 있었다. 표를 구입하고 구경을 할 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매표원 아가씨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대합실에 있는 음료수 통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왜 먹지도 못할 물을 거기에 갔다 놨냐는 것이다. 매표원은 다른 사람들도 다 먹는 물이라고 했다. 항의하던 남자는 그러면 나와서 한 번 마셔 보라고 했다. 상냥하게 미소짓던 얼굴의 매표원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못 나가겠다고 했다. 남자는 식식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가 또 들어왔다. "아니 내 말좀 들어봐요. 차라리 물을 갔다 놓지나 말지, 왜 저런 것을 갖다 놓았습니까?" 남자는 밖으로 나왔다가 들어왔다 하면서 5 차례나 앙을앙을 댔다.

 

 

계속 되풀이되는 실갱이 속에 나도 속이 터져서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남자에게 적개심이 생겼다. 매표원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체계를 바꾸려면 과장이나 사장에게 말을 해야지, 왜 그렇게 일개 매표원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는가? 저런 놈은 뒈져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물통이 없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을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가? 내가 사장이라면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물통을 박살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왜 내가 열을 내나? 내 몸을 보살피자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조도로 떠나는 선상에서>

 

 

조도의 어류포 항에 도착한 것은 3시 45분쯤되었다. 마침 벽을 보니 "읍구"라는 곳에서 4시 20분에 관매도로 가는 배가 있다고 써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걸어서 20분이면 읍구까지 간다고 했다. 빨리 가면 된다 싶어 무거운 짐을 지고 속도를 냈다. 그런데 가도가도 읍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4시 10분이 되어서야 겨우 읍구 마을로 접어들게 되었다. 저 멀리 읍구 항구가 보였다. 도저히 10분에 항구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나는 메모해둔 배로 전화를 걸어 4시 20분까지는 도착할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구읍" 마을 초입에 왔다고 했다. 그는 "읍구"는 있어도 "구읍"은 없는데, 뭐 내가 헷갈리는 것이 아닌지 물었다. 내가 "읍구"인지 "구읍"인지 이 판국에 어떻게 판단하나? 대충 알아들으면 되는거지. 하여튼 아무리 빨리 가도 항구에는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겠지만, 젖먹던 힘을 다해 걷고 걸었다. 500미터 앞에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100미터 앞에다 두고"라는 노래 가사가 떠 올랐다. 등에서는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마침 택시가 오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택시는 30초도 안 되어 항구에 도착했다. "웬만하면 걸어가시지 그래 그 거리를 택시를 타십니까?" 택시 기사가 말했다. "힘이 다 빠져서 그렇습니다." "호랑이라도 때려 잡을 사람 같구만요." "호랑이는 못 때려 잡아도, 호랑나비는 때려 잡을 수 있습니다." 나는 200미터 택시를 타고 4000원을 지불했다. 아이구, 나는 돈도 많은 놈이다!  

 

 

 

 

<조도의 어류포 항에 도착했다.>

 

 

 

<읍구로 걸어가면서 한 민가를 찍었다.>

 

 

 

 

<관매도 주민들이 조도에서 관매도로 가는 배를 탄다.>

 

 

진도 장에 다녀오던 관매도 사람들과 함께 탄 배는 통통 소리를 내며 관매도를 향해 달리고 달렸다. 탁트인 바다를 배는 거침없이 달렸다. 지나가던 배에 탄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비는 뿌렸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 다시 뿌렸다.

 

 

 

 

<관매도로 가는 길에 우연히 옆을 지나는 배>

 

 

배에 내려 관매리 민박촌을 향해 걸었다. 입구에는 관매도 8경을 알리는 사진 틀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 때는 수 많은 관광객을 맞이할 희망으로 설치했겠지만, 관광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상황이라 먼지가 쌓이고, 색이 변해 있었다.

 

 

 

 

<관매도 안내 시설>

 

 

 

 

<관매도 민박촌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여자가 여러 명 그려져 있다.>

 

 

 

 

<관매도 숙박시설 안내판: 내가 묵은 송림민박이 위쪽에 보인다.>

 

 

민박집은 여러 집이 있었으나 집에 사람이 없었다. 어떤 집에 들르니 5-6명이 통닭을 먹고 있었다. 민박을 하냐는 나의 질문에 한 여자가 "저 위에 송림 민박으로 가봐요."라고 하는 말 속에 쌀쌀함이 오뉴월 서리처럼 내 가슴에 파고 들었다. 기분이 팍 나빴지만, 여행자는 인내심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다시 가슴에 새기며 발길을 돌렸다.  

 

 

송림민박에 도착한지 1분이 지나도록 할머니는 내가 온지도 모르고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방 하나 깨끗하게 청소해 놨더니 손님이 오네." 할머니는 한 번도 전에 본 적도 없는 나에게, 갑자기 신세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귀에서 하루 종일 소리가 나서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이다. 무릎도 관절염이 도져서 걷지도 못한다고 했다. 4년 동안 도시에 나가 병을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돈만 까먹고 다시 고향으로 왔다고 말하면서 웃었다가 다시 한 숨을 쉬었다.

 

 

갑자기 할머니는 "아이구 아파라"라고 말하면서 발가락을 가리켰다. 가운데 발가락이 벌겋게 팅팅 부어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별 것 아니었는데, 미장원하는 여자가 담배불로 지지라고 해서 지졌더니 이렇게 됐어."라고 말했다. "전에는 내가 된장을 발랐었지." 할머니 민박집 바로 앞에는 보건소가 있었다. "할머니 제발 이러시지 마시고, 저기 보건소에 가세요. 지금 생고생하시는 겁니다."

 

 

내가 어렸을 때, 발이 아프면 잉크도 발라보기도 하고, 간장도 발라보기도 하고, 침도 발라보기도 했었다. 수십 년 세월이 지난 지금, 바로 앞에 보건소를 두고도 할머니는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아들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려다가 혹시 가슴 속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까 싶어, 말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와 동네 구경을 나섰다.

 

 

 

 

<송림민박 할머니>

 

 

골목을 지나고 들판을 지나니 새롭게 단장한 바닷가가 나타났으나, 낚시꾼들이 찾아 오지 않는지, 쓰레기만 쌓여있다. 다시 방향을 틀어 눈에 보이는 마을로 가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개만 짖어 댄다. 다시 방향을 틀어 관매초등학교로 왔다. 앞에 커다란 후박나무가 서 있는데 천연기념물 212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보니 교실 창문에 학년 표시가 있고, 중학교 표시도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초등학교 학생과 중학교 학생이 함께 시설을 사용하는 듯 했다. 수십 미터는 되는 듯한 소나무에 기생하는 풀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해변으로 나왔다.

 

 

<관매초등학교 앞 소나무에 풀이 기생해 살고 있다.>

 

 

 

 

<천연기념물 후박나무>

 

 

해변에서는 자루에 모래를 넣어 운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해수욕장을 표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막대기로 해수욕장 바닥을 두드리며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막대기로 바닥을 두드리면, 물이 "뾰르륵" 올라오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곳을 파면 틀림없이 조개가 있다는 것이다.

 

 

경찰 두 명도 장님처럼 막대기를 땅바닥에 두드리고 다녔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해수욕장 개장을 한지는 오래 되어도 관광객 한 명도 구경 못했다고 했다. 나는 저녁 식사는 어디서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경찰은 마땅한 데가 없으니 자기들과 함께 하자고 했다. 나는 고맙지만 차라리 컵 라면으로 때우겠다고 말하고는 송림민박으로 다시 돌아왔다.

 

 

<잘은 모르지만 해수욕장 표시를 하는 것 같다.>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고 다닌다.>

 

 

송림민박에 와서 할머니에게 라면을 하나 시켰다.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어떤 사람이 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관매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내가 학교에 관심이 있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수교육을 전공한 선생님으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다니는, 소위 말하는 순회교사였다. 관매 초등학교의 학생 수를 내가 묻자 그는 두 명이라고 했다. 특수 교육을 받는 학생이 두 명인지 묻자, 전교생이 두 명인데, 그 두 명이 특수 교육을 받는 학생이라고 했다. 다른 학생은 모두 조도로 나가서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어떻게 특수교육을 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간단하다고 했다. "학생이 무슨 짓을 하든지, 무조건 참는 겁니다."

 

 

그는 36세의 총각인데 아직도 결혼을 못 했다고 했다. 학교에 신부감이 많을텐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여자에게 올바른 소리만 하다가 중간에 사이가 모두 끊어졌다고 말했다. "여자한테는 무조건 좋은 말만 해야 합니다. 무조건 잘 한다고 해야 합니다. 음식은 무조건 맛있다고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라는 노래 아시죠.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살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모두들 눈물을 머금고 그러는 겁니다."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관매 초등학교 선생님>

 

 

<박영을씨와 함께>

 

 

마침 지나가던 동네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와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더니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일이 있겠는가? 그 사람 이름이 바로 "박영을"이라는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박영일"로 부른다고 했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했다. 나는 "곽영을"이고, 옛날에 우리 동네 사람들이 나를 "곽영일"로 불렀었다. 나는 그의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했다. 1969년생 "박영을"이 틀림없었다. 내가 대학교 69 학번이니, 그는 내가 대학교 들어갈 때 태어난 사람이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내가 "영을"이라는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같이 식탁에 앉은 그는 우리가 마시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또 심금을 울린다. 그는 학교 다닐 때 그렇게도 부모님과 선생님 속을 썩이고,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에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선생님 말씀이나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사람은 틀림없이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은 모두 공자, 맹자와 같은 말 만하니까 말이다. 단지 실천이 어려울 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박영을씨는 성남에서 온갖 일을 하다가 결국 오토바이 중국집 배달을 했다고 했다. 자기 말로는 오토바이 선수라고 했다. 한 번은 술을 먹고 배달을 하다가 자동차에 부딪치고 다시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쳐 넋을 잃었다고 했다. 병원에 실려가 보니 그의 뇌가 함몰되었다고 했다. 그 뒤 수술에 들어가 3일 동안 수술을 받았다. 그러다가 무의식 상태로 3개월이 지났다고 했다. 막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려고 하는데, 발가락이 조금 움직였다고 했다. 언젠가 연속극에서 이런 장면을 본 듯 했다.

 

 

"5남매의 장남인 제가 그렇게 되었어요. 부모님, 동생들, 속 엄청 썩혔어요.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뭘 합니까? 술도 못먹어요. 술 먹으면 그냥 죽는다고 의사고 말했어요." 아직도 시력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뒤로 그냥 고향에 내려와서 삽니다." 나는 물었다. "그러면 뭐 해서 먹고 삽니까?" "장애인 판정을 받았어요. 한 달에 35만원 받아요. 그걸로 삽니다. 낚시도 하구요. 스카이 TV 달아주면서 용돈 받아 삽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네 마을 입구에 소나무 화석이 있는데, 다음 날 그것을 꼭 보여주겠다고 했다.

 

 

<비가 내리는 관매 해수욕장>

 

 

<물이 빠지자 그물에 송어가 걸려 나온다.>

 

 

<송어를 자루에 담는다. 100마리 정도는 잠깐 동안에 잡는다나.>

 

 

다음 날 아침, 관매 8경은 다 구경 못해도 몇 개는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빗발이 너무 세차, 판초 우의와 우산을 쓰고 찾아 나섰다. 간신히 도착한 곳이  "돌묘와 꽁돌"이라는 돌덩어리다. 아무리 봐도 바닷가에 저런 둥근 돌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조금 더 가면 하늘다리가 있다고 되어 있으나 비는 계속 내리고, 풀은 가슴까지 차 올라, 걷는 것이 불가능했다. "꽁돌"을 본 것을 만족으로 여기고 내려오니 괜히 사기꾼의 "꼼수"에 걸린 것 같아서 마음이 언짢았다.

 

 

<꽁돌>

 

 

<꽁돌 근처의 바위와 풀>

 

 

<관매 해수욕장을 떠나면서>

 

 

<아침 식사>

 

 

어제 저녁에도 라면, 오늘 아침에도 라면이다. 어제 저녁에는 라면 하나에 소주를 3병을 비웠다. 관매초등학교 선생님하고 마셨으니 내가 한 병 반은 마신 셈이다.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잘 먹을 때는 한 끼에 몇 만원이 들고, 못 먹을 때는 한 끼에 2천원이면 된다. 세상은 이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일정하게, 항상 뜨거운 밥에, 항상 뜨거운 국에 먹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되는대로 먹고 사는 것이 최상의 삶이 아니냐? 그 놈의 규칙을 깨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하기야 아무리 규칙을 깨도, 이미 나는 규칙을 깬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으니, 차라리 말을 말아야 한다. 부처님 같은 말을 하면서 관매도를 떠날 준비를 했다.

 

 

<관매도에 의료봉사 나왔던 사람들이 돌아간다.>

 

<저 위에 있는 검은 돌처럼 보이는 것이 소나무 화석이라고 박영을씨는 말한다.>

 

 

<상조도와 하조도를 잇는 다리>

 

 

한 시 반에 관매리를 떠나는 배를 탔다. 조도를 거쳐 팽목항에 도착할 배다. 배는 뿌연 안개 속을 멀리 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번처럼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여행이라는 매력에 빠지는 것이 이런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좋은 경치와 풍경을 찾아 가지만, 결국 나에게 감흥과 새로운 경험을 주는 것은 거기에 있는 사람이지 경치가 아니었다. 여행의 목적지에 사람이 살고 있는 한, 장소가 어딘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계속 만날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와 색 다른 경험을 했거나, 나의 경험과는 차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팽목항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 뒤에는 안개에 싸여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섬들이 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아, 잘 있거라, 관매도여!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나를 감싸고 저 멀리 사라진다.     

 

 

(2010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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