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항 전경: 상추자도의 핵심 부분. 상추자도는 도시적인 느낌, 하추자도는 시골스런 느낌이다.>
<추자도 올레 코스: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항에서 출발하여 하추자도를 돌아 다시 추자항으로 온다. 총 17.7키로 6-8시간 코스로 난이도 최상의 올레 코스다.>
추자도에서
7월 11일(토요일 아침) 추자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 올레 11코스를 돌면서 정난주 마리아 묘에서 황사영의 아들 황경헌의 묘가 있다는 추자도를 가봐야 한다고 맹서했기 때문이다.
추자도라! 추자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김추자라는 가수다. 그녀는 "임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을 불러 히트시켰다. 내가 젊었을 때, 그녀도 젊었으나, 내가 늙은 만큼 그녀도 늙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어렸을 때 우리집에 추자나무가 있었다. 이것을 서울 사람들은 호두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추자도(楸子島)라고 쓰는 것을 보면, 분명히 호두를 의미하는 것 같고, 추측컨대 옛날에 호두가 많이 났던지, 섬 모양이 호두를 닮았을 것이다. 지금 호두나무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섬 모양이 호두를 닮아 그렇게 이름이 지어진 듯 하다.
지난 밤 술에서 반쯤 깬 상태로 여장을 꾸리고 모텔을 나섰다. 9시까지는 제주연안여객선 터미널로 가야했다. 9시 반에 추자도로 출발하는 배가 있기 때문이다. 서일주 버스나 동일주 버스는 20분에 한 대씩 오도록 되어 있다. 마침 오는 버스를 타니, 승객은 약 20명, 대부분 출근 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제주 시내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8시 20분에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9시 반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 돌핀호는 아직 표를 판매하지 않고 있었다. 8시 반이 되자 사람들이 줄을 서고 표를 판매했다. 추자도까지 약 한 시간 15분 걸린다는 이 배의 요금은 1만원이 조금 넘었다.
표를 구입하고 2층에 올라가 김치찌개를 시켰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 큰 소리가 들렸다. 한 여자가 목청을 높여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같은 일행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여자가 그녀에게 "아이구 자세히 보니 목에 주름이 많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말한 사람은 정말 몰랐다가 자세히 보고 한 말이고, 듣는 사람은 "맨 날 보아오던 사람이 주름이 많다고 하니, 신경을 일부러 긁겠다는 뜻이 아니냐?"고 따졌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한 것을 감정적으로 판단한 결과 말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싸움이 끝날 기미가 안 보여 반쯤 밥을 먹다가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다른 사람, 특히 여자에게는 나쁜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명심했다.
<핑크 돌핀호는 제주-추자-진도-목포 노선을 운행한다.>
9시 반에 출발한 돌핀호는 10시 50분에 상추자도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승객이 여기에서 다 내렸다. 마치 데모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물밀 듯이 몰려 나가더니, 기다리던 트럭이나 봉고차를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 거리다가 눈에 띄는 태흥여관이라는 곳으로 갔다. 얼마인지 물으니 4만원을 내라고 했다. 혼자이니 좀 깎자고 했으나 주인은 오늘이 주말이라 안 된다고 했다. 안 깎아주면 그만이다. 그냥 해본 소리니까? 전에는 이런 소리도 안 해보고 달라는 대로 주고 다녔다. 주인은 나를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좁은 방에 52인치 텔리비전이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11시가 되었고 오늘 걸어야 할 코스가 17.7키로, 평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산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 최상으로 나와 있다. 시간상으로도 6-8시간이 걸리는 코스이므로 이것저것 망설이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큰 배낭을 내려놓고, 작은 배낭에 물과 카메라, 초코파이 몇 개 넣었다. 그리고 주인의 안내를 받아, 근처의 김밥집으로 갔다.
<김밥을 주문하는 동안 아이들이 장난을 친다>
김밥집에는 이미 아이들 네 명이 와서 떡복이와 순대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어디 사람이고, 나이가 몇이고 이름이 무엇이고 등등을 생각나는대로 묻기 시작했다. 대답을 마친 나는, 복수라도 하듯 그들에게 온갖 질문을 다했다. 그들은 추자초등학교 학생들이며, 3학년과 4학년이었다. 학생 수가 얼마인지 묻자, 모두 합쳐서 약 50명 정도 된다고 했다. 선생님은 7명, 이 7명 중에는 학과 선생님, 예능 선생님, 원어민 선생님, 그리고 일하는 아저씨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들이 어디에서 살다가 왔는지 궁금하여, "너, 어디에서 태어났냐?"라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저는 목표 중앙병원에서 태어났어요." "저는 제주 대학 병원에서 태어났어요." 라고 말했다. 요즈음 아동 성추행이니 뭐니 이런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서, 더 이상 말을 그만두고, 김밥 두 줄을 덜렁덜렁 들고 올레길로 접어 들었다.
<최영장군 사당 옆은 들꽃으로 덮혀있다.>
추자초등학교와 붙어 있는 최영장군 사당 근처는 노란 들꽃 천지였다. 공민왕 때 제주도로 가던 최영장군이 심한 풍랑을 만나 이곳에 머물며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최영장군은 어민들에게 어망을 만들어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생활이 크게 좋아진 주민들이 장군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최영장군 사당>
최영장군 사당부터 본격적인 올레 코스가 시작된다. 봉글레산 입구가 나타나면, 운동기구가 놓여있는 낮은 동산이 나타나고 다시 추자도 마을로 내려가게 된다. 여기에서 다시 추자 등대를 향해 한참을 올라가게 된다. 11시 반에 걷기 시작하여 약 45분만에 추자 등대에 도착했다. 몇몇 사람들이 갈 길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3층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 김밥을 먹었다. 바람이 얼마나 센지 난간을 바람 방패로 삼아 쪼그리고 먹어야 했다.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추자 등대>
<등대에서 바라본 하추자도: 저 멀리 희미한 곳까지 갔다 와야 한다.>
추자교를 건너면 묵리로 가는 산길로 다시 올라가게 된다. 좋은 이름을 두고 왜 하필이면 묵리라고 이름을 졌는지 알 수 없지만, 묵리하면 "묵사발"이 우선 생각이 나고, 그 다음으로 "도루묵, 메밀묵" 뭐 이런 생각이 난다. 나는 어떤 단어가 나오면 연관된 단어가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병이라면 병이다. 주민들이 걸어 놓은 "추자도 올레길 개장"이라는 단어를 보고서는 "개장"이 아니라 "닭장"이겠지, 아니 "개장국"이겠지, 뭐 이런 저런 단어가 자꾸 떠오른다. 정말 큰 병이다. 그래도 병신 육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야겠다.
<묵리를 지나서 묵리를 찍었다.>
묵리 주민 일동이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보고 묵리를 지나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묵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개에서 초코렛 하나 먹고 다시 내려가면 신양리에 도착하는데, 꼬마 두 명이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한다. 제주도에 가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제주도 사람은 절대로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안녕하세요"를 연발했다. "우리 어머니 어디 갔어요?" 아이들이 나한테 묻는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신양2리에서 아이들이 손짓을 한다.>
대물 민박에서부터 바닷가를 끼고 걷게 된다. 신양항을 지나면 다시 마을로 들어가는데, 언덕길로 올라가야 한다. 모진이 몽돌 해수욕장에 도착한 것이 2시 30분이다. 8.3키로를 점심시간 포함 3시간 걸려서 걸은 셈이다.
몽돌해안 즉 모진이 해변에 트럭을 개조해 간이 식당으로 만들어 국수와 오뎅을 팔고 있는 아저씨가 있다. 콜라 한 잔 사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나타날 황경헌의 묘에서 사진 찍은 것을 제외하면, 이 지점 이후에 찍은 사진은 거의 없다. 계속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3시간을 더 걸어야 할텐데 비가 와서 망서렸다. 여관 집 주인이 나에게 준, 반쯤 찢어진 1000원짜리 우의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온 길로 다시 가서 버스타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일단은 황경헌의 묘까지는 비를 무릅쓰고 가 보기로 했다.
<황사영의 아들인 황경헌의 묘: 황경헌의 어머니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는 11코스에 있다. 11코스의 정난주 이야기는 나의 홈페이지에 있다.>
황경헌의 묘는 알려진 이름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이름없는 묘에 안내판 하나가 전부다. 황사영은 충북 베론에 피신하여 "황사영 백서"를 썼다가 발각되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어머니는 거제도로 보내졌고,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에서 관노 생활을 했다. 1801년 두 살의 아들을 가슴에 안고 귀양길에 오른 정난주는 추자도에 이르렀다.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걱정하여 젖내나는 어린 것을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사공들에게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갯바위에 놓여진 황경헌은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찾아온 어부 오씨에 의해 키워졌으며, 성장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때부터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마을이 바로 예초리 마을로, 앞으로 30분 정도 걸으면 나타난다.
수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어왔던 종교지만, 그 종교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에 나온 종교 전쟁부터, 역사에 실려 있지 않은 종교에 연관된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어디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겠는가? 사실 핵 폭탄보다도 무서운 것이 종교다.
저기 동쪽으로 보이는 바다로 튀어나온 바위가 바로 두 살 아기가 버려져 울던 장소다. 그는 나중에 자기의 처지를 알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매일 울었다고 한다.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황경헌의 눈물이라는 샘이 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끓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황경헌의 눈물을 내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경헌의 눈물인 샘물: 사연이 서글프다.>
황경헌의 눈물 샘을 지나면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반복되고, 바닷가를 끼고 도는 비경이 시작된다. 천길 만길 낭떠러지 위로 걷는 예초리 기정길(기정: 절벽이라는 뜻으로 제주도의 방언)은 발아래 펼쳐진 철석이는 파도와 함께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안개는 왔다 가고 바람은 나를 뒤에서, 앞에서 떠민다. 우의가 몇 번 벗겨졌다 입혀졌다 했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이 바로 황경헌의 묘에서부터 엄바위 장승까지 약 2키로 구간의 사진이 없다는 점이다. 장대비 속에 도저히 사진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예초리를 지나 엄바위 장승에 오니 비가 좀 잦아 들었다. 기암 절벽 아래에 조그만 목조 장승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어쩌구 저쩌구 하는 전설이 써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빨리 사진 하나 찍고 다시 산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돈대산 정상에서 내가 나를 찍었다.>
<돈대산 정상에 있는 정자>
돈대산 정상에 있는 정자에 도착하였다. 짙은 안개와 바람으로 땅 바닥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바람과 비가 잦아들지 않아 그냥 내려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보는 추자도의 경치가 일품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늘은 일품은커녕 안개밭에 지나지 않는다. 셀프 카메라로 나 자신 사진 한 장 찍고 빗속을 또 걸었다.
돈대산 정상에서 목적지까지는 약 5키로다. 힘들지 않는 코스다. 계속 비는 내린다. 비를 맞고 걸으니 힘이 나는 것 같다.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노래방에 가 본지도 오래된다.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바로 이 올레길에서 나 혼자 노래 하며 비를 맞으며 걸어간다. 비가 와도 여기저기서 꿩은 푸드득 날아간다. 묵리 교차로를 지나, 담수장, 그리고 다시 추자도 다리를 건넌다. 중국집 철가방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간다. 목적지인 추자항이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관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5시 반이다. 6-8시간 걸리는 거리를 6시간에 걸은 셈이다.
<저녁식사: 쥐치와 설치>
샤워를 하고 잠시 쉰 뒤에 옆에 있는 횟집에 갔다. 3만원짜리 하나 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하더니 뭐 이상한 고기를 가져왔다. 무엇인지 물었더니 쥐치와 설치라고 했다. 쥐치는 알겠는데, 설치는 무엇인지 처음 들어 본다. 광어보다는 약간 질기고 맛은 광어와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주인은 정말 맛있는 회라고 했지만 광어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여관으로 가는 중에 찍었다.>
<내가 묵은 태흥여관>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왔다. 아마 10시쯤 되었을 것이다. 여관 직원 3명이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같이 합석을 하게 되었다. 서로가 술이 취해서인지 그들이 여기 와서 여관업을 하게 된 배경, 자라온 배경 등 모든 것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나도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모두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손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방이,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태풍이 불어 배가 뜰 수 없다는 예보를 듣고, 모두 제주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올레길을 돌 때 사람들을 구경하기 힘들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주인은 돈벌 좋은 기회를 놓쳐 허탈한 심정에 술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뒤집어 보면, 이것을 핑계로 일상의 분주함에서 해방되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여관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와 함께>
나야 배가 끊기건 말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아닌가? 100일 동안 배가 끊겨도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카드 한 장만 있으면 되는데, 카드가 석 장이나 되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내일 지구가 망해도 마실 것은 마셔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시고 먹었다. 주인은 무공해 해산물 안주를 푸짐하게 내 놓았다.
술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얼마를 마셨는지 모르겠다. 내일 배가 뜨지 않는다면, 할 일이라고는 또 술 마시는 일뿐이 없을 터이니 내일을 위해 조금 참아도 될 듯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라고 했다. 한 잔하고 밖에 나가 바다를 바라보고 바람 쏘이고, 다시 들어와서 또 그렇게 하고, 술판은 고스톱 판 돌아가듯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해 윙윙 울어대는 전봇대의 전기줄 소리, 정박해 있는 배들이 부딪쳐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 옆집 간판이 찢겨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네 사람은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며, 마시고 또 마셨다. 추자도의 밤은 깊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2010년 7월 17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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