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양도에서
2010년 7월 9일, 아침에 일어나 항구 주변을 걷기로 했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항구의 분위기를 느끼고 사진을 찍어두기 위해서 였다.
오늘도 아침부터 작렬하는 태양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땅에, 바다에 깔려있다. 바람 한 점 없는 이 항구,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인적도 뜸하고 들어오는 배도, 나가는 배도 없다.
마침 한 할머니가 젖은 생선을 널빤지 위에 널고 있었다. "할머니, 무엇하십니까?" "응, 생선 널고 있어. 이거 중국산이여." 목이 반쯤 쉰 할머니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돈 많이 벌었습니까?" "돈은 뭐 돈. 그냥 하는 거여."
눈을 돌려보니 거기에 마침 비양도 가는 매표소가 있었다. 비양도라? 많이는 들어보았어도 내가 가보겠다고 생각했던 그런 곳은 아니었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저 섬 아닌가? 하루에 두 번, 즉 9시와 오후 3시에 비양도로 가는 배가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려던 나의 계획은 순식간에 비양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계획은 바꿔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래 비양도로 가야해.
나는 근처의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실 근처에는 통닭 집이나 오뎅 집 같은 곳은 있어도 한식집은 한 군데 뿐이 없다. 통통하게 살이 찐 아주머니가 무더운 여름을 무시하는 듯, 치렁치렁 땅에까지 닿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동태찌개 하나 주세요."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능숙하다. "돈 많이 벌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곳에 가면 말을 거는 습관이 생겼다. "갈치가 웬수예요. 우리는 새벽 밥 장사하는데 갈치가 잡혀야 선원들이 와서 밥도 먹고 술도 먹거든요. 그런데 갈치가 요즘 통 잡히지 않아서, 선원이 없어요. 그러니 뭐, 장사가 되겠어요." 아주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아주머니는 시키지도 않는 말을 이어간다. "저 청주에서 왔어요. 언니가 한 번 와서 해보라고 해서 왔는데, 이거 낭패네요, 낭패. 언니는 하필 나한테 왜 오라고 그랬는지 몰라."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장사가 잘 될거예요." 나도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하고서는 아주머니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밥상을 차려주더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뉴월드 모텔로 돌아왔다. 하루 더 머물겠다고 했더니 아저씨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여러번 반복한다. 그 넓은 모텔에 모르면 몰라도 손님이라고는 서 너 명만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어디를 가나 모텔은 많아도 장사는 잘 안된다. 한림항 근처의 노래방, 술집 등이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식당 또한 장사가 안 된다.
9시 정각에 비양도 행 배가 출발했다. 9시 15분에 도착한다고 한다. 마침 배에 탄 사람도 모두 15명이었다. 15야 밝은 달이 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오늘은 15로 시작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내가 비양거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뭐, 내가 가는 곳이 "비양도"가 아니던가? 이것은 A 양뿐만 아니라 "B 양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배에 탄 사람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날씬한 몸의 자태로 보아, 예사롭지 않은 여인네처럼 보인다. 계속 핸드폰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데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무슨 일이 크게 잘못되었던지 아니면 비양도로 팔려가는 듯한 여인의 냄새가 풍겼다. 그렇다고 내가 말을 걸 그런 분위기도 아니어서 시간이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양도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고 온 배를 타고, 한림으로 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사람들 틈을 뚫고 나와 어느 쪽으로 먼저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어디서 "어디 찾으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아까 배에서 본 그 아가씨다. "한 바퀴 돌아 보려고 하는데 이 길로 가면 됩니까?" "예, 그 쪽으로 쭉 돌아가면 한 바퀴 돕니다. 잘 구경 하시고 점심은 우리 식당으로 오세요." "식당 이름은요?" "호돌이 식당!" 경쾌한 목소리가 비양도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오른쪽으로 틀어서 맨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펄랑못이다. 펄랑못은 바닷물로 된 습지로 바닷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형성된 못이라고 한다. 생각보다는 넓어서 한 바퀴 도는데 30분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앞쪽은 길이 잘 나 있으나 뒤쪽은 길을 잡초가 덮고 있어서, 배로 풀을 밀면서 나가야 한다. 물론 옷을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쐐기나 벌레에 물리는 것은 덤이다. 뱀에 물리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
바로 그때 오리 한 마리가 새끼를 데리고 저쪽으로 가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렬 종대로 가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뒤에 쳐졌던 한 마리가 서둘러 대열 끝에 합류한다. 어미 오리는 계속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망원렌즈를 가져갔었더라면, 그럴듯한 사진이 나왔을 터인데, 아쉬움만 남는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비양도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길은 시멘트로 되어 있는데, 자동차도 다닐 정도의 넓은 길이다. 왼쪽으로는 산 정상에 있는 등대가 보이고, 오른 쪽으로 넓은 바다와 비스듬하게 제주도가 보인다. 비양도의 흙은 검붉은 색이고, 바다는 제주도와 같이 검은 돌로 덮여 있다. 이 섬은 동서로 약 1키로, 남북으로 약 1키로이기 때문에 한 바퀴를 돌아도 4키로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 수 있다. 출발점의 반대쪽 그러니까 섬의 서쪽에 구경할 바위가 많은 데, 어떤 새는 바위에 앉아 내가 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볼 뿐,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라면 돌이라도 던져서 훼방을 놓았을 법하지만, 안녕하면서 그와 작별을 고한다.
한 바퀴를 돌면 다시 항구로 돌아온다. 항구에는 "봄날"을 촬영했다는 표지판이 크게 눈에 띄고, 바로 그 뒷길을 따라서 가면 정상에 있는 등대로 가는 길이 나온다. 평지는 무성한 풀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고, 동물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 쳐 놓은 그물망이 밭 여기저기 보인다. 좀 가다가 본격적으로 등대로 올라가는 오르막 길이 나타나는데, 나무로 된 계단으로 되어 있다. 좀 힘이 들 만한 곳에 가면 첫 번째 정상이 나타나는데 그 곳에서 분화구를 볼 수 있다. 분화구에는 풀과 키 큰 나무가 들어 있어 차 있어서, 실제로 분화구인지 아닌지는 구별하기 힘들다.
분화구에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5분 정도, 다시 왼쪽으로 틀어 10분 정도 가면 등대가 있는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등대 정상 주변에는 쑥이 깔려 있으며 이름 모를 들꽃이 흩뿌려져 있다. 등대 입구는 누군가가 술 한잔 마시고 도끼로 찍어낸 듯 너덜너덜 찢겨있고, 그 사이로 전깃줄이 볼품없이 이어져 있다. 등대는 나그네에게 햇빛을 가리는 가리개 역할을 할 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여기서는 그냥 사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그늘에 앉아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항구로 오니 11시 반이다. 3시에 차가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할지 막막하다. 우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무슨 인연인지, 아까 아가씨가 호돌이 식당으로 오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었다.
호돌이 식당에는 세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겉보기에는 할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손녀딸로 보였다. 물론 아까 배에서 본 아가씨도 있었다. 그런데 세 사람이 내가 온지도 모르고 계속 전화통을 잡고 열을 내고 있었다. 한 참 있다가 배에서 만난 아가씨는 "이모, 매운탕 하나."라고 주문해 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들은 내가 도착한 때부터 내가 식사가 끝나는 한 시간 동안 전화통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옆에 있던 사람이 뺏어서 이야기하고 그러면 "이래 내놔"하면서 다른 사람이 또 뺏어서 이야기 했다.
들어보니 결론은 이러했다. 할머니가 통장이 있는데, 할머니 통장으로 누군가가 50만원을 보내왔다고 했다. 그런데 통장은 아들이 가지고 가서 잃어 버렸다고 한다. 도장은 할머니가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찾아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돈이 없어진 것이다. 할머니가 아는 사람에게 모두 전화를 해 보아도 찾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개설한 은행에 전화를 걸어보니 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고 했다. 찾아간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중앙지점으로 문의하라고 한다. 중앙지점에 문의했더니 처음에는 통장에 돈이 없다고 했다가 다시 전화를 걸으니 있다고 했다. 나중에는 또 없다고 말 하면서, 그곳에 오면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 주겠다고 한다. 내가 들어보아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모와 딸은 알았다는 듯이 "아아." 소리를 연발했다. "할머니 기절하면 병원에 데려갈 준비나 해라."라고 이모가 젊은 여자에게 말했다. 그들의 표정과 정황으로 보아 나의 추측은 이러했다. "아마도 할머니의 통장을 가지고 가서 잃어 버렸다고 한 아들이 범인일 것이다. 도장이 없어서 돈을 찾지 못하지만 비밀번호만 알면 다른 통장으로 이체가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통장을 분실했다고 말한 아들이 가져갔음에 틀림없다. 이런 사정을 알면 배신당한 아들에 대한 좌절감으로 할머니가 기절할 것이니 앰블란스를 부르는 등 만반의 태세를 확립하자."
점심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한 시간 동안 식당에서 있다가 나왔다. 동네 근처에 있는 두 개의 정자 중 한 군데에 앉아 있다가, 누워있다가, 서 있다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개를 한 마리 데려와 물 속에 집에 넣었다. 날이 얼마나 더운지 개는 물 속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 개가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끄집어 내려고 하면 이빨을 들어내 물려고 대들었다. 주인의 간절한 노력에도 그 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주인은 그냥 밖으로 나오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잠시 뒤 그는 개 머리보다도 더 큰 돌을 들고 바닷가로 올라가더니, 개 뒤에 던지고 말았다. 천지를 진동하는 쿵 소리와 사방에 튀는 물 소리에 개는 혼비백산하여 물 밖으로 나와 도망치고 말았다.
어느덧 3시가 되어 배를 타고 나오게 되었다. 제주도에 있는 3명의 아주머니와 함께 돌아다니던 분홍티셔츠의 아가씨가 "안녕하세요" 하면서 웃는다. 아주머니들도 수십 년을 제주도에 살았지만 비양도는 처음이라고 했다. 뱃머리를 갈라 부서지는 하얀 파도와 푸른 바다 그리고 미녀의 나부끼는 머리가 남태평양에 온 듯하다.
여행의 3대 중요 요소는 좋은 구경거리, 맛있는 음식, 그리고 좋은 잠자리다. 이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두 가지가 아무리 좋아도 미련이 남는 여행이다.
나는 우선 어제 밤에 먹어보지 못한 생선회집을 찾았다.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 병사에 일듯, 원한이 사무쳐 해가 지자마자 횟집을 찾았던 것이다. 광어회와 고등어회가 내가 먹기에 알맞은 양으로 나왔다. 한라산 맑은 물 소주가 군침을 돋군다. 썩어도 준치라고 작은 전복이나마 몇 개 상에 올라와 있다. 소주 두 병을 깠다. 기분이 더 좋을래야 없을 정도로 좋았다. 이미 밤은 깊었고 주위에 사람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배에 매달아 놓은 전등에서 나오는 강렬한 불빛이 눈에 부시다. 잠시 해변을 걸어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술의 위력은 나의 정신력을 덮어 버렸다.
눈을 들어보니 여기저기 다방이 보였다. 커피 숍도 아니고 그냥 다방이다. 어떤 다방에 들어갔다. 마침 문을 닫으려고 하다가 내가 들어가니 대환영이다. 아니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아줌마 두 명이 있었는데, 술김에 보아도 40-50대로 보였다. 노래방 도우미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떠 올랐다. 웬만하면 술기운에 예쁘게 보이련만, 술기운에도 늙은 여우처럼 보였다. 한 여자가 내 앞에 앉더니 자기도 한 잔 하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잠시 뒤에 다른 여자가 오더니 자기도 한 잔 하겠다고 했다. 또 그러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정쩡한 마음과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내가 본래 그런 사람이다.
어정쩡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름없는 항구에서 술 한 잔 하며 밤을 새워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던 생각이 났다. 두리번거리다가 어디 다른 집으로 또 들어갔다. 술집 아주머니가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 앞에 어떤 손님과 이미 한 잔 걸친 듯 취기가 얼굴 구석구석에 덧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알아서 술 몇 병을 가지고 와 내 앞에 앉았다. 얼굴은 불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반쯤 드러난 그녀의 어깨만은 흰 불빛을 받아 백옥처럼 빛났다. 오래 전 노래 중에, "가방을 둘러맨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 활짝 핀 웃음이 ~"로 시작되는 노래가 생각났다. 아, 가방을 둘러멘 어깨는 저런 어깨를 말하는구나, 어쩐지. 나는 어깨 좀 만져봐도 되는지 물었다. 그리고 나서 금방 후회했다. 그냥 만지면 될 것을 쓸 데 없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예의를 너무 차리는 것이 문제다. 그녀는 그러라, 그러지 말라라는 말 대신 생긋 웃어 보였다.
얼마를 지났을까, 어디서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저쪽 어떤 소파에서 술에 취해 있던 사람이 술이 깨었던 것이다. 그는 다리가 하나 없었는데, 목발을 잡다가 땅바닥에 목발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 소리가 천둥보다도 컸던 것이다. 그가 교통 사고로 다리를 잃은 뒤에 실의에 빠져 자주 그 집에 온다는 것이다. 그는 그곳의 유지이며 돈도 많다고 했다. 그 술집의 중요한 단골 고객인 듯 했다. 그녀를 그 사람에게 인계했건, 빼앗겼건 간에, 아쉽지만 그 술집을 나왔다.
내일은 어디로 간담? 내일은 무엇을 한담? 걱정하지 말라.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잘 되게 되어 있다. 내 인생에 잘못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면 그것이 바로 최상의 선택인 것이다.
듬성듬성 붉은 빛이 보이는 가로등 밑을 걸어갔다. 인생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더니 인생은 중국어로 "人生(런셩)"이라고 발음한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중국말 조금 배운 것이 내 인생을 이리 지배하다니. 그래 어떻든 인생이란 떠날 때를 아는 거야. 미련을 버려. 가자. 가야해. 떠날 때를 아는 것이 인생이야!
(2010년 7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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