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Korea

경산 밀양 김해 여행기(Kimhae Milyang, Kimhae)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7. 31. 07:56

 

 

 

 

 

 

 

 

<경산-청도-밀양-김해-진해-창원을 국도로 드라이브했다.>

 

 

 

경산, 밀양, 봉하마을 여행기

 

8월 16일 2박 3일 일정으로 경남지방에 가기로 했다. 주 목적은 봉하마을에 가보는 것이고, 그 다음 진해를 구경하는 것이다. 중부내륙 고속 국도를 이용하여 선산 휴게소에 도착한 것이 9시 30분이니, 체크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서울을 출발한 것이 6시 반쯤 되었을 것이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5시 반쯤 잠에서 깨었을 것이다.

 

 

 

 

 

선산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하여 빈 곳에 주차를 마친 순간, 내 앞에 시커먼 차가 내가 주차한 곳으로 꽁무니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경적을 울려야 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어, 어"하다가, 급기야 그 차는 내차의 앞 범퍼를 들이받고 말았다. 내려 살펴보니, 내차는 좀 긁히었고, 상대방 차가 훨씬 더 많은 상처를 입었다. 내려서 그 운전수와 말을 해보니, 그가 내 차 앞을 지나갈 때는 빈 자리여서, 당연히 빈자리인줄 알고 뒤도 보지 않고 후진하여 주차하려다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 운전사는 얼마를 주었으면 좋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나 나나 이런 경험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페인트나 칠하려고 2만원만 달라고 했다. 내가 너무 적게 불렀는지, 그는 2만을 즉석에서 내주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가고 난 후, 아내는 아무리 그래도 3만원은 받아야지, 2만원은 너무 했다고 툭 한 마디 했다. 나중에 밀양에 와서 알아보니, 그 정도 차가 다쳤으면 10만원 이상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떤 사람은 범퍼를 갈 비용을 청구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고차 가지고 터무니 없이 받아먹는 것도 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일진이 좋지 못하니 정신 바짝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차를 계속 몰았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경산에 구경갔다왔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경산의 유명한 곳을 알리는 글을 읽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유명하다는 경산의 몇 군데를 체크하고 그곳을 가보기로 했다. 도대체 얼마나 볼 곳이 없으면 그곳에 다녀온 사람이 없나?

 

 

경산 IC에서 빠져 나왔다. 잘 모르지만 대구와 경산은 이어진 것 같았고, 어디까지가 대구이고 어디가 경산인지 알 수도 없었다. 압량 유적지를 찾아 가면서 길 오른 쪽으로 참외를 팔려는 사람들이 약 100 미터 간격으로 한 없이 길게 서 있었다. 쉬는 곳이 있으면 멈추어 구경도 하고 시식이라도 하련만, 마땅히 차를 멈출 만한 곳이 없어서, "경산 참외가 유명하기는 하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기원전 1세기에서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 전까지 약 800년간  실존했던 고대왕국 "압독국"이 바로 경산지역이라고 한다. 나는 가야국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압독국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내가 대학교 입학 시험볼 때, 선택과목이 국사였다. 그 당시 국사 상설이라는 약 500페이지나 되는 참고서를 거의 외우다시피 공부를 했어도, 압독국이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경산시 관광 명소: 압량 유적, 임당동 고분군, 계정숲에 가보았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허둥대다가 처음 간 곳이 압량 유적지다. 이곳은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훈련시킨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선덕여왕이라는 MBC 프로그램이 머리에 떠 올랐다. 김유신 역으로 나온 탈렌트가 연기가 좀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 하여튼 압량 유적지란 큰 학교 운동장만한 평평한 들판이다. 2~3일 전에 풀을 베었는지, 풀냄새가 곳곳에 스며있다. 하지만 빈 터라는 것 이외에는 옛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면 부채처럼 사방으로 퍼진 거대한 나무 한 그루였다. 이렇게 인물 좋은 나무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빈 터이지 이게 무슨 유적지인가?   

 

 

 

 

 

 

 

길도 좁고, 도시 속 시골이어서 천천히 길을 빠져 나오는데, 바로 앞 코너에서 트럭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아, 이번 충돌은 피할 수가 없겠구나. 어, 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나의 손이 운전대에 얼어 붙었는지, 경적을 울릴 수가 없었다. 나는 처분만 바라고 운전대를 꼭 잡고 있는데, 천지를 진동하는 브레이크 파열음과 함께, 그 트럭이 약 50센티 앞에서 멈추었다. 타이어 고무타는 냄새와 먼지가 뿌옇게 내 차를 덮고 있었다. 운전수는 내려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20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었다. "골목을 이렇게 질주하면 어떻합니까? 아무리 바빠도 천천히 다녀요."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선산에서 주차 중 부딪힌 것과 또 사고가 날 뻔한 이번 일이 마음에 걸린 듯, 아내는 어떤 사고가 또 날지 모르니,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일진이 사납다는 것이다. 나는 간신히 아내를 달래서 다음 목적지인 임당동 고분군으로 향했다.

 

 

 

<압량 유적: 김유신이 군사훈련을 했다고 한다.>

 

 

 

여전히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임당동 고분군을 찾았으나, 가다보니 엉뚱한 곳이 나왔다. 현재 내비게이션이 잘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어떤 곳은 정말 엉터리가 많다. 가라는 곳으로 가다보면 길이 막히는 곳도 많이 있다.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한 노인에게 물었다. 그 노인은 너무 친절하게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의 아들로 보이는 사람도 따라 나와서,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으며 마치 준비된 안내원처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안내한 것도, 내가 이해한 바와는 달라, 한참을 돌고 돌아 임당동 고분군에 도착했다.

 

 

운동장 한 개 정도의 넓이에 몇 개의 큰 묘가 보였으며 그 옆에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니 그곳은 묘 하나를 발굴하여 그 내부를 보여주는 방이었다. 발굴된 유물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으로 이미 다 옮겨져 있었고,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마침 그곳에서 풀을 베고 있던 사람이 그 고분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었다. 뭐, 묘지라는 것을 보고 또 보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바로 우리는 자리를 떴다.

 

 

 

<임당동 고분>

 

 그 다음으로 간 곳이 계정숲이라는 곳이다. 입구에 비석이 죽 늘어서 있다. 조금 들어가면 한 장군 묘가 나온다. 이곳은 "신라말 또는 고려 초 도천산에 왜구가 출몰하여 주민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이 누이와 함께 화려한 꽃관을 쓰고 도천산 아래 버들못으로 왜구를 유인하여 칡그물로 섬멸시켰다는 전설이 전한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서 좀더 들어가면 겉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기와집 한 채가 있는데 들어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전통 무용을 배우고 있었다. 본래 안내에 따르면 "계정(桂亭)숲은 구릉지(丘陵地)에 남아있는 천연림군락(天然林群落)으로 경상북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보기드문 자연숲이다. 이팝나무,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의 향토수목(鄕土樹木)들로 낙엽활엽혼효림(落葉闊葉混淆林)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숲 속에 있으니 그런 것이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한 장군 묘>

 

 

 


<경산 자장면집: 453-2444>
 

경산에서 나와 청도로 가기 위해 25번 국도를 찾는 데, 중국집이 나타났다. 우리는 시골에 가면 막국수나 자장면을 자주 먹기 때문에, 사실은 아까부터 점심 먹을 곳을 찾는 중이었다. 정통 중국요리를 한다는 북경루라는 음식점이다. 겉보기는 그냥 보통 그런 집이었지만, 들어갈 때 구수한 자장면 냄새가 코를 진동시켰다. 잠시 뒤에 나온 자장면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먹어본 자장면 중 가장 맛있는 자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입이 쩍쩍 들어붙는 그런 감칠 맛이 나는 음식이다. 혹시라도 경산에 갈 계획이라면 한 번 들어가 보라고 여기 사진 한 장 올린다.

 

 

 

 

 

<청도에 들어서면 소싸움을 알리는 동상이 있다.>

 

 

25번 국도를 타고 경산을 지나면 청도가 나온다. 청도 소싸움이라는 브랜드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여기저기 소싸움하는 그림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조금 더 가면 "지도리"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새마을 운동 발상지라고 한다. 동네 입구에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복숭아를 궤짝으로 내다 놓고 팔고 있었다. 값을 물어보니 서울 값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난처한 것이, 여러 장사꾼 중에서 어느 사람에게 가서 물건을 사느냐하는 것이다. 자기 물건을 팔지 못해 섭섭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그리 썩 좋지는 않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리면서 우리는 무조건 첫 집에 가서 사기로 하고, 실제로 첫집에 가서 좋은 것 한 궤짝 골라 빨리 사 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고, 냅다 차를 타고 떠났다. 내 돈 가지고 내가 물건 사면서, 내가 왜 눈치를 봐야 되는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청도 신도 마을: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다.>

 

 

청도에서 밀양까지는 고속도로와 국도가 서로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그런 길이다. 조그만 강이 보이기도 하고, 산이 나타나기도 한다.

 

 

밀양 영남루에 도착한 것이 오후 3시였다. 작년 10월에 천황산 등산 했을 때도 들렸던 곳이다. 아, 지금도 천황산 사자평의 억새가 눈에 선하다. 올해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사자평의 억새는 나의 "영혼을 울리는 것"으로 내 두뇌에 각인되어 있다.  

 

 

영남루는 넓은 누각인데, 진주의 촉석루와 대동강 부벽루와 더불어 한국의 3대 루로 알려진 곳이다. 영남루 마당에서는 사람들이 윷놀이와 제기차기를 하고 있었다. 영남루를 감돌고 돌아가는 밀양강에는 분수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서는 전국 한시 경연대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오전에 대회가 끝나서, 참가자들은 채점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한시(漢詩) 대회에 참석한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그는 경주에서 왔으며, 한시 대회가 있는 곳이면 항상 찾아가 대회에 참가한다고 했다. 상을 타본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장원을 해 본 적은 없으나, 입상은 여러 번 해 보았다고 의기 양양하게 말했다.

 

 

밀양 무용 연구원에 있는 사람들이 학춤을 추겠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우리는 편히 앉아서 등을 벽에 대고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20명 정도로 구성된 여성들이 한복에 갓을 쓰고 남성 분장을 했다. 그들은 마치 학인양, 너울너울, 사뿐사뿐, 간들간들거리며 마치 조지훈의 "승무"를 연상시키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그룹을 짓고, 때로는 한 데로 뭉쳐, 버선발이 스키타는 듯, 마루 위로 미끄러졌다.  

 

 

 

<밀양 영남루>

 

 

 

<전국 한시대회가 벌어지는 영남루에 학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밀양 연극촌에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경이다. 넓은 논에 연꽃 잎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대부분의 연꽃은 이며 시들어서 열매만 보였다. 군데군데 한창인 연꽃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연꽃이 없는 곳에는 희귀한 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고, 그 사이로 하늘과 산과 연꽃이 물에 비치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문이 조금 열려있는 연극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연극 연습을 하고 공연하는 곳이었다. 기차 앞에서 사진을 찍는 데,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 여기는 출입하면 안 되는데 왜 들어왔는지 빨리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넋놓고 있다가 당한 우리는, 다른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마치 죽을 죄를 지은 듯이 고개를 땅에 닿게 숙인채 밖으로 나와야 했다.

 

 

 

<연극촌 주위의 연꽃>

 

  

 

<연극촌 정문 옆에 있는 개똥이>

 

 

김해 봉하마을에 도착한 것이 5시 10분 경이다. 이미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주차장은 일반 자가용과 관광버스 등으로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 마치 시골 장터 같은 인상을 주었다.

 

 

차에서 내리니 TV에서 보았던 낯익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선 멀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봉하마을 회관 바로 옆에 걸려있었다. 말이 없이 노대통령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과자를 만드는 소규모 공장이 있었는데, 그 과자를 사려는 사람의 줄이 길게 뻗어 있었다. 교실 한 칸 만한 과자 공장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구매자가 만드는 과정을 다 관찰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마을 앞을 지나 가면, 경찰이 노무현 대통령 집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서 있다. 왼쪽으로 저 멀리 마을 사람들이 사는 작은 집이 몇 채 있었는데, 아마 열 채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눈에 띄는 것은 그러했다.  

 

 

바로 눈을 들어 보니 눈에 익은 바위 두 개가 보인다. 멀리 보이는 바위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 있다. 경찰에게 그 바위의 이름을 물으니 사자 바위란다. 사자 바위에서 왼쪽으로, 즉 노무현 대통령 집 쪽에 있는 바위가 바로 부엉이 바위다. 부엉이 바위 위에도 역시 사람들이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고, 바위 아래쪽에는 노란 리본이 긴 새끼줄에 매달려 바람에 펄렁이고 있었다.  

 

 

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을 했다는 사람이 저 바위 위에서 죽어야만 했던 현실이 싫다. 대통령이건 아니건, 죄를 지었건 짓지 않았건, 늙었든 젊었든, 죽기를 결심하고, 이른 새벽 자기가 몸을 던져, 자기 몸을 바위에 부딪쳐, 결국은 피투성이가 될 시신을 생각하면서, 저 바위로 올라가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선연한 새벽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집을 나선 시각부터 천길 낭떨어지 아래로 몸을 던진 약 30분간의 그 짧은 시간이, 평생 자기가 살아온 60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답답함과 서글픔으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고,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부엉이 바위>

 

 

부엉이 바위와 사자 바위와 삼각형을 이루는 지점 평평한 땅에 노 전 대통령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조그만 돌 덩어리다. 몇몇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다. 무덤은 조촐하게 국화로 장식되어 있었고,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사람이 비를 들고, 모래를 쓸어내고 있었다. 돌에 황토색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조그만 비석을 세워라"라는 노대통령의 유언에도 미치지 못하는 평평한 돌덩어리 하나가 전부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욕하는 소리를 나는 자주 들었다. 쥐나 개나, 좌우지간 입을 가진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노대통령에게 욕을 해댔을 것이다. 그를 찬양하는 사람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노사모가 있다고는 하나 인터넷 상이나 TV에서 보았지, 실제로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만약 역대 대통령 중 한 사람을 골라 같이 술 한 잔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노대통령을 선택하겠다. 왜 그런지 그는 나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을 것 같다. 격식을 차려 거들먹거리지도 않을 것이고, 상대방 눈치를 보며 이 말할까 저 말할까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그저 툭 터 놓고 하고 싶은대로 소탈하게 본인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것 같다.

 

 

나는 평소에 애써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한나라당도 싫고, 민주당도 싫다. 노무현 대통령을 둘러싼 소위 386 세대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을 나는 좋아했었다. 그가 정치를 잘 했는지 못 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는 대통령이었지만, 권력도 없었고, 힘도 없었고, 빽도 없었고, 재력도 없었던 정말 바보 노무현이었던 것 같다. 그는 바위를 깨뜨리려고, 계란을 던졌다가 계란만 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진 계란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은 계란을 온몸에 뒤집어 쓰고, 부엉이 바위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던져야만 했던 불운한 한 인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한 시민이 참배를 한다.>

 

 

 

<무덤에 새겨진 글>

 

 

 

해가 지는 것을 보고 김해로 향했다. 봉하마을에서 김해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길 안내판에는 부산으로 간다는 표지판이 많은 것으로 보아 부산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김수로왕 묘 근처에 차를 세우고 근처의 모텔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모텔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보려고 했으나, 마주친 사람은 중국인 아니면 동남아 사람들이었다. 근처의 공원으로 갔으나, 역시 거기 나와 있는 사람은 모두 한국말이 아닌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타고 시내를 직접 돌아다녀 모텔을 고르기로 했다. 그러다가 시내에 그렇게 좋은 모텔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으리으리한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숙박료 특별 할인이라는 네온 사인이 번쩍거렸다.

 

 

 

 

근처의 아구찜 집에 들어갔다. 우리 이외에 손님 한 팀이 더 있었다. 그들은 부부로 보였는데, 남자는 곱추였었고 여자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여자는 말이 없이 조용했고, 남자는 말이 많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하며 불안해 보였다. 그러다가 주방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음식을 가져다가 되는대로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런 모습을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 손님이 시킨 아구찜이 먼저 나왔다. 여자는 소주를 시켰고 남자는 환타를 시켰다. 여자가 소주 한 병을 다 비울 때 쯤, 남자도 환타 한 병을 다 비웠다. 말이 없던 여자가 술김에, 딸에 관한 문제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딸로 보이는 사람과 전화를 걸어 투덜거리는 말투로 무슨 이야기를 했다. 여자가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아니, 자기가 직접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남자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가져온 술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자 여자가 이에 항의하고, 남자가 신경질을 냈다. 여자가 문을 박차고 나갔고, 곧 이어 남자가 허허 웃으면서 그녀를 뒤 따라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에 우리가 주문한 아구찜이 나왔다. 굵직한 콩나물에 고추장과 각종 양념이 잘 버무려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구찜을 보고 술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크나큰 배신 행위다. 노대통령에 대한 애잔한 생각으로 소주 두 병을 시켜서 거의 다 내가 마셨다. 멀리 보이는 냉장고에 있는 대나무 술 두 병을 더 시켰다.

 

 

더 이상 손님이 없던 아줌마는 심심했던지 우리 테이블 옆에 와서 앉았다. 대나무 술 두 잔을 마신 아줌마는 금방 떠났던 손님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곱추 있잖아요. 그래도 재주는 많은가 봐요. 이 근처에 사는데 지금 두 번째 부인 얻은 거예요. 돈을 잘 번대요." 아줌마는 우리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해대기 시작했다. "그 부부 사이에 문제는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잘 모르지만, 돈도 잘 벌고, 정력도 세대요. 이 동네 소문 다 났어요." "음, 믿는 구석이 있군요."내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저런 사람 싫어요. 그냥 보통 사람이 좋지." 아줌마가 계속 말했다. "아줌마, 저는 어떻습니까?"내가 술김에 물어보았다. 아내가 옆구리를 툭 쳤다. "글쎄, 아저씨 인물은 훤하오만, 머리 뒤가 다 빠졌네요. 이를 어쩌나?" 나는 괜찮은데 아줌마가 나의 대머리를 더 걱정했다. "아줌마, 대머리가 정력이 세다는 말 못들었어요? 제가 지금 대머리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아줌마가 깔깔대며 웃어 댔다.

 

 

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모텔로 돌아왔다. 모텔에서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술이 과해서인지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몰랐다. 나는 화장실로 간다고 갔지만, 아내는 "아니, 화장실은 저긴데 왜 자꾸 문으로 나가지?"라고 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아내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여 보냈다. 그때가 밤 11시쯤 되었을 것이다.

 

 

잠을 자는데, 왜 그런지 몸이 불편했다. 어디가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을 틀기도 힘들었다. "이 좋은 모텔이 왜 그렇지?" 하면서 계속 잠을 잤다. 그런데 아내가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자는 사람을 왜 자꾸 깨워?" "아니 왜 여기서 자고 그래, 일어나. 방으로 가서 자야지. 빨리 일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화장실에 있는 욕조에 앉아 있었다. 어제밤 11시에 화장실에 들어와서 그때까지 욕조에 앉아 쭈구리고 잠을 잤던 것이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 보니,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009년 9월 2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