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봉평 메밀꽃 축제(3)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이른 아침, 강릉 해수욕장이다. 나는 왜 술만 먹으면 일찍 잠에서 깨는지 모르겠다. 아마 술을 먹으면 잠을 푹 자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쿨쿨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해변으로 나왔다.
해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걷거나 앉아 있었다. 해변에 만들어 놓은 그네에 앉아 서로 포옹하고 있는 연인들도 있었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들에게 자연 공부를 시키려는 듯 이런 저런 설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는 한 무리의 꽃이 있었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무리를 이루어 집단으로 핀 꽃이었다.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이 꽃은, 전체적으로 보면 싸리나무 꽃이 붉게 피어있는 듯이 보였다. 양귀비꽃처럼 진하고 청순한 꽃이었다.
<꽃 한 송이를 접사로 찍었다.>
해변의 바람은 예상 밖으로 쌀쌀했다. 올해 강릉은 여름 내내 선선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짧은 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기야 지금 서울도 선선하다는 뉴스가 전한다. 먼 곳으로 한 떼의 갈매기가 꼬리를 물고 날아간다. 오징어 배인듯한 배 몇 척도 지나가고, 또 다른 갈매기 떼가 배 후미에서 모기 떼처럼 붙었다가 떨어진다. 바로 그 때 붉은 낙하산 한 대가 공중을 가르고 해수욕장 저 너머로 사라진다.
<해수욕장에 낙하산이 내려온다.>
나는 햇빛에 반사되는 동쪽 바닷물을 촬영하고 있었다. 화이트밸런스의 색 온도, 내장된 필터 등을 바꾸어 가며 모래 바닥에 앉아 수십 커트를 찍었다. 특별히 감동시키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기에 좀 따분했다. 그저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고 찍고 지우고 또 환경을 달리하여 찍고 또 지웠다. 마치 지루함과 싸워 끝장을 보려는 어리석은 인간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태양을 바라보며 찍어 보았다.>
바로 그때 어디서인지, 쿵쾅거리는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길 옆에 차를 세워두고 몇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얼씨구나, 지루한데 잘됐다."라는 생각으로 그쪽을 향해서 갔다. 대 여섯 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웃으며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미쳤어, 미쳤어." 모든 사람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고, 이 말은 또 모든 사람의 귀로 들어갔다. 자동차 안에 노래방 장치가 있었다. 귀가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틀어 놓았다. 서로를 미쳤다고 하던 사람들은 목청이 찢어지도록, 강릉 바닷가가 떠나가도록,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멤버 중의 한 사람이 이 장면을 계속 사진 찍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은 "저것들이 일어나자마자 소주 한 병씩 나발불고 저럽니다. 미쳤어, 미쳐."라고 말했다.
이 꼴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던 한 여인이 차 안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취해서 이러면 안되지."라고 말하면서 이들을 만류했다. 여인의 말을 듣기는커녕, 그들은 오히려 더욱 의기양양하여 더 큰 소리로 노래를 해 댔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 여인은, 마이크를 빼앗으려고 한 남자에게 달겨들었다. 그러자 마이크를 뺏기지 않으려고 발광을 하던 남자가, 열이 받았는지, 그 여자의 따귀를 갈겼다. 순간적인 일이라 누가 때렸는지 멀쩡한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은 나도 술이 좀 취해 있어서 몰랐을 것이다. 그러자 여자가 무슨 말을 하면서 "앙을앙을" 대들었다. 불쌍한 그 여인은 다른 뺨을 한 대 더 맞고서야 물러나 눈물을 닦으며 자동차 뒤로 빠졌다.
여자가 울든 말든 그들은 천지가 진동하도록 노래를 계속 불러대고 있었다. 여자의 따귀를 날린 그들이 부른 노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신을 향한 나의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당신을 향한 나의사랑은 특급사랑이야~~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짜짜짜~"를 반복하는, 내가 많이 들어본 듯한, 그런 노래였다. "보통 사랑은 한 쪽 따귀만 때리고, 특급 사랑은 양쪽 따귀를 때리는 사랑이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다.
더욱 기고만장해진 이들은 "샹하이~ 샹하이~ 샹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온 동네를 주름 잡았던~"을 계속하면서 온몸을 비틀고 있었고, 옛날에 한 가닥한 한 듯, 양손을 입에 넣어 고막이 찢어질듯한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개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해롱거리며 배삼룡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따라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양손에 든 무거운 카메라 덕분에 억제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얼마나 소주를 먹었는지 모르지만 급기야 한 사람은 한쪽으로 빠져 땅에 주저 앉아, 오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분을 풀지 못하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던 처량한 여인네가 다시 자동차를 타는 모습이 눈가에 들어왔다.
모르면 몰랐지 오늘 술만 깼다가는 이 남자들은 이 여인에게 맞아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치의 앞을 보지 못하고, 날뛰는 날파리 같은 인간들! 그들 앞에 닥쳐올 저 무시무시한 보복을 어찌할 것인가? 가슴 속에 숨겨진, 한을 품은 여인네의 앙칼진 비수가 저 불쌍한 남정네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과연 그들이 알기나 알까? "니들 인제 죽었다."라고 말하고는 나는 모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좀 걷다가 나는 미련이 남아 뒤를 다시 돌아 보았다. 이제 그들은 아예 어깨 동무를 하고 눈을 감고, 자기도취되어 비몽사몽간에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눈을 들어보니, 아무 말 없이 이런 일을 지켜보는 해는 중천에 떠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오늘은 서울을 가되 몇 시간이 걸리든 국도로 가보기로 했다. 9시 반쯤 숙소를 떠났다. 바로 앞에 있는 경포호수에 잠깐 들렀다. 조깅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경보를 연습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주위를 많이 정비해서인지 마차가 관광객을 싣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2-4인용 자전거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타볼 만한 자전거가 있어서 요금을 물어보았더니 15000원 내라고 했다. 소나무 아래 잠시 앉아 있다가 차를 몰고 대관령으로 향했다.
<강릉 경포호수: 좀 밋밋하여 색온도(약 2500도)를 낮추어 찍어 보았다. >
옛 고속도로를 이용해 대관령을 향해 달렸다. 언제 여기를 와보았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경치가 좋으면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으려 하였으나 길 양 쪽으로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거의 정상에 와서야 비로소 발전용 풍차와, 하늘을 가르는 제트기에서 내뿜는 한 줄기 구름을 볼 수 있었다.
<대관령 거의 정상에 있는 휴게소에서 찍었다.>
대관령 정상에 도착하니 등산객들이 식사를 막 끝내고 있었다. 그 시각이 10시 10분쯤 되었으니, 아마도 아침 식사이리라. 그렇다면 곧 등산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하늘은 푸른 빛을 더해가고 있었고, 바람 또한 차가와서 반팔로는 여기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차를 몰아 횡계 쪽으로 향했다.
얼마를 가니 멋있는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목장인 듯했다. 간판을 보니 "고랭지 연구소"라고 되어 있다. 나는 수위에게 가서 사진 좀 찍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스파이도 아니니 제발 저 산 좀 찍어가게 해달라고 다시 애걸복걸했다. 그는 "안 됩니다."라는 말 이외에는 아는 단어가 없는 듯이 그 말만 되풀이 했다. 그냥 오면 될 것을 왜 갑자기 화가 치미는지, 카메라를 내동치려다가 그냥 발걸음을 돌려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수위가 바라보는 정문 앞에서 시간을 질질 끌며 여기 저기 촬영하고 그 자리를 떴다.
얼마를 내려오니 오른 쪽으로 고호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멋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우리는 차를 멈추고, 산 위까지 걸어 올라갔다. 넓게 펼쳐진 밭, 그 가운데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 그리고 구름을 배경으로 자동차 한 대가 그림처럼 놓여져 있었다. 산너머는 또 다른 평원이었다. 바로 아래에 있는 양배추 밭에서는 농부들이 양배추를 뽑아 자동차에 싣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농부의 얼굴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들의 땀을 식혀주려는 듯,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언덕을 지나 그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관령 옛길을 따라 오다가 횡계 바로 직전에 찍었다. 고호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우리의 차는 다시 봉평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계속 6번 도로를 타고 횡성을 거쳐 양평으로 갈 예정이다. 마침 일요일이라 이미 봉평 입구에서 차량이 정체되어 있었고, 안내 경찰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전날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동네 잔치에 거지떼 모여들듯, 봉평으로 봉평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봉평에서 조금 지나면 양두구미재라는 길이 나온다. 그야말로 꾸불텅거리는 길을 계속 숨을 헉헉대며 올라가야 한다. 내가 올라가지 않고 자동차가 올라가니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이런 길을 자전거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말 악물고 올라가는 것 같다. 양두구미재 정상에 오르니 980미터라고 되어 있다. 대관령보다도 높다. 여기에서 오른 쪽으로 태기산 쪽으로 새로운 큰 신작로가 나 있다. 우리는 그 길로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태기산 쪽으로 가는 것이다.
<없는 길로 계속 갈 때까지 가 보았다. 오른쪽 통신탑이 있는 곳이 태기산인 듯 하다.>
태기산은 1261 미터다. 길은 번듯하게 잘 나 있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발전 바람개비가 "쉬이익, 쉬이익"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왼쪽을 보아도 끝없는 산이요 오른쪽을 보아도 끝없는 산이다. 길은 비포장 도로와 포장 도로가 번갈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자동차 안에 있는 내비게이션에는 길이 아닌 산 속을 우리가 가고 있는 것으로 계속 표시되었다. 길 옆에는 이미 등산을 마친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과속방지턱인지 아니면 수로인지 모를 흙무더기가 있어서, 그 흙 무더기를 넘을 때마다 자동차 뒤에 쿵쿵 거리며 받혔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자고 나는 고집을 피웠다. 약 2-3키로 가니 더 이상 갈래야 갈 수가 없었다. 불룩하게 나온 이 흙무더기를 넘으려고 하다가는 아예 자동차 뒤가 땅에 닿고 바퀴가 공중에 떠서, 견인차를 불러야할 형편이 되었다. 거기까지 온 것이 너무 아깝고 안타까웠다. 지금까지 10개 이상의 장애물을 넘지 않았던가?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방향을 틀어 다시 6번 도로로 나와야 했다. 마치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는데 진눈개비까지 맞는 장교의 심정이었다.
6번 도로로 나와 우연히 방송을 틀어보니, 벌써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오늘이 연휴에다가 벌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본래 의도했던대로 횡성을 거쳐 양평 그리고 서울로 가느냐 마느냐 생각을 많이 했다. 막힌 길에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침 둔내에 오니 막국수를 파는 기사 식당이 있었다. 왜그런지 우리는 밖에 나가면 막국수를 자주 먹는다. 말이 나온 김에 전라남도에 가면 막국수 파는 집이 없다. 막국수가 없는 동네만 돌아다닌지는 모르겠지만, 전라남도에서는 한 번도 막국수 파는 집을 본 적이 없다.
막국수 집에 들어가니, 마침 동네 어떤 사람의 잔치가 한창이었다. 동네 사람이 다 모인 듯 북적댔다.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비빔 막국수를 시켰다. 막국수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고춧가루를 넣었는지, 국수 한 번 먹고, 물 한 모금 먹어야 했다. 마치 병아리가 모이 먹고 물먹고 고개들어 목구멍으로 넘기는 듯 그렇게 했다.
지옥 훈련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매운 음식 때문에 난 땀으로 젖어 있었다. 차를 몰고 달렸다. 바로 둔내 IC 표지판이 보였다. 라디오에서는 문막을 중심으로 이미 8키로가 정체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2박 3일간의 여행이 마치 꿈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구경도 많이 하고, 음식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먹었다. 웃기도 많이 웃었다. 길이 막히면 막히는 대로 가면 되고, 그래도 막히면 하루 더 자고 가면 되지 하는 배짱이었다. 아니 차라리 아주 길이 많이 막혀서 서울로 가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누비라는 이미 둔내 IC 하이패스 차량 통행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2009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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