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China

사천성 1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2. 08:41

 

 

 

 

*2011년 7월 3일부터 7월 25일까지 중국 사천성 여행기입니다.

 

 

제 1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인천공항에서 청두(成都:성도)까지-

 

 

대체로 어떤 일에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조짐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해가 뜨기 전에 여명이 있다거나, 장대비가 오기 전에 습한 무더위가 온몸을 휘감는다. 지진이 나기 전에 동물은 지진이 날 조짐을 눈치채고 피하기도 하고, 태풍이 오기 전에는 고요함이 있는 법이다.  

 

 

보통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들뜬 마음으로 서성이기 마련이고,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무엇인지 모를 씁쓸함이 휩싸이는 것이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2011년 7월 3일 아침 10시 40분, 동서울 터미널에서 인천 공항으로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마음이 들뜨기는커녕, 폭우가 발길을 붙잡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여행 전에 이런 폭우를 만난 적이 없다. 설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랴!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도 있지만 설마, 일은 무슨 일!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의 리더 KC와 낯선 얼굴 몇 사람이 보인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가방 속에 있는 돈과 여권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아내가 "자기, 여권 있어, 난 여권이 없는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권이 없다니 무슨 말?" 내가 물었다. "아니, 3월에 중국 갈 때, KC가 여권을 가져왔고, 5월에 북유럽 갈 때도 여행사에서 비자 받는다고 가져갔다가 가져왔잖아. 이번도 KC가 비자 받아서 가져오는 것 아니야?" 아내의 입장으로는 부주의해서도 아니고, 생각을 안 해서도 아니고, 일말의 의심없이 이번 여행의 여권은 KC가 가져 온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월에 이미 중국 1년 비자를 받아 두었기에 이번에는 본인이 여권을 가져왔어야 했던 것이다.

 

 

 

 

<지우자이꺼우(九寨溝:구채구)의 물빛>

 

 

3시 반 출발 예정 비행기에, 현재 시각 1시 반이다. 2 시간 남겨 놓고 여권이 없다! 옷이 없으면 구입하면 되고, 돈이 없으면 빌리면 되지만, 여권 없이 외국에 갔다왔다는 이야기를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혹시 대통령은 여권 없이도 갈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뭐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판국에, 여권 없이 무슨 재주로 한국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 머리 속이 깨끗하게 지워지고 있다는 것만 간신히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되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먼산을 쳐다 보고 있었다. 나도 아내도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내 머리 속에는 이제 여행은 끝났음에 틀림없다는 불안감이 덥쳤고, 입안의 침이 마르고 온몸의 힘이 쑥 빠져가고 있었다. 아내가 여행을 갈 수 없다면, 나도 못가는 것인가? 아니면 나 혼자라도 가야하는가? 나 혼자 여행을 간다해도, 그 여행이 즐거울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나까지 안 가면 겨우 12명뿐이 되지 않는 멤버가 10명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나 혼자 간다해도 문제고 둘다 안 간다 해도 문제였다.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물어 간다.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이라는 말도 얼핏 머리 속을 파 휘집고 사라진다.  

 

 

 

 

<청두의 소각사>

 

 

무릇 모든 큰 일은 항상 남의 일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일이 되는 법이다. 지금 이 일은 어떤 의미에서 일생 중 내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처럼 보였다. 나는 우선 침착해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우선 내가 직접 집에 간다면, 설령 택시를 타고 갔다 온다해도 2 시간은 걸릴 것이므로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가 집에서 여권을 가져와야 할 것이다. 우선 아들 준영이가 집에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타면 한 시간이면 인천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아내에게 여권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귀신에 홀린 듯, 아내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벽만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내 생각에 영겁이라고 생각되는, 그러나 실제로는 1-2분이 지난 뒤, 아내는 정신을 되 찾았다. 여권이 어디 있는지 생각이 났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준영이에게 핸드폰 전화를 걸었다. 준영이는 근처의 식당으로 밥먹으로 가는 중이었다. 나는 준영이에게 일단 집에 가서, 나에게 전화를 걸라고 말했다.

 

 

잠시 뒤, 준영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에 열쇠 꾸러미가 있고, 그 중 어떤 열쇠로 어디를 열면 여권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니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는 것을 가져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준영이는 여권을 찾았다고 말하면서 택시를 타고 출발하겠다고 말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일초 일초를 초조하게 씹어가면서 나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준영이가 바로 택시로 오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놓이기는 했으나, 너무 빨리 오다가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출발했다는 전화를 받고서도, 나는 자주 전화를 걸어 지금쯤 어디 오는지 확인했다.

 

 

택시는 얼마나 악셀레이터를 밟아댔는지, 30-40분이 지난 2시가 좀 넘어서 공항에 도착했다. 준영이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춘향 어미 악써 말하듯 핸드폰에 말하는 모습이 멀리 창너머로 보였다.  

 

 

준영이에게서 여권을 받아 들고, 잘 가라는 말 한 마디 없이,  급히 안으로 들어와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너무 일찍 수속이 끝나 버렸다. 수속을 밟는 짧은 순간에 나에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자식을 키우다보면, 마음에 안드는 일도 많고, 속상한 일도 많다. 이래 저래 돈도 많이 들고, 차라리 무자식이 상팔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일을 당하고 보니, 가족이란 정말로 내가 꼭 필요한 때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쟁에서 단 한 차례 써 먹기 위해 수 없이 많은 돈을 들여 공군 조종사를 육성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 내 몸으로 이런 것을 체험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핸드폰의 중요성이다. 아무리 아들이 있어도 핸드폰이 없었다면 오늘 여행가는 것은 불가능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핸드폰 요금이 비싸다고 투덜대지만, 정말 꼭 필요할 때는 어떤 다른 것도 이것을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기계가 바로 핸드폰이다. 옛날에는 약속을 하고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 났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생긴 후, 그런 일은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납치당했다가 핸드폰으로 연락하여 도망친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핸드폰, 정말로 중요한 생활 필수품이다.

 

 

 

 

<단빠의 전통가옥>

 

 

그 후 비행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순조롭게 한국을 출발하여 중국 안휘성의 허페이(합비)에 도착했다. 청두(성도)에 비가 많이 와서 몇 시간 더 기다리기는 했어도, 가지 못할 여행을 가는 판국에 무엇을 더 참지 못하겠는가? 이제 나는 염라대왕의 심문도 이겨낼 수 있다. 독거미를 물리치고 앞으로 나가는 인디애나 존스처럼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것이 나다. 오늘 가도 상관이 없고, 내일 가도 상관이 없다. 그 급박한 순간을 침착히 대처해 여행을 떠나온 내가 아니더냐? 나는 정말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해했다.  

 

 

밤 10시쯤 도착하기로 되어있던 비행기는 12시쯤 사천성 청두에 도착했다. 한꺼번에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으로 공항 앞은 발디딜 틈이 없었지만, 경찰의 철저한 단속으로 별 탈없이 순서대로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청두의 무더운 밤바람이 택시 창문을 통해 후끈 얼굴을 덥혔다. 하지만, 못 올 여행을 왔으니 이 따위 조그만 역경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대단한 놈이 아니더냐?

 

 

 

 

<캉딩의 군무>

 

 

12시 40분쯤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리는데 아내가 돈 지갑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아래 바지 주머니에 뭔가 불룩한 것이 있어서, 바지 속에 있다고 말했다. 호텔 안으로 돌아와 짐을 내려 놓고 수속을 밟는 시간에, 정말로 돈이 거기 있는지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그것은 돈지갑이 아니라, 안내 종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침착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는 나였지만, 타국 땅에 도착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되어 제 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허름하게 생긴 지갑 속에는 약 34만원(2천 위엔)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분명히 기억되는 것은,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이니, 손 아귀에 꼭 잡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그래서 실제로 지갑이 찢어질 정도로 꼭 쥐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지갑이 달아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항상 왜 이리 병신 같은 짓만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나는 정말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에서, 병신 머저리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여권 문제를 해결한 것은 먼 옛날의 일이요, 돈 잃어 버린 것만 나의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KC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이미 택시는 떠난 지 5분은 되었을 것이고, 택시의 번호도 모르고, 잃어 버린 것은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 퍼뜩 떠 올랐다. 그 순간 누가 "땅 바닥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라고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5-6명이 소나기 호박잎에 우두둑 떨어지듯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그 짧은 순간에 머리 속에 떠오르면서, 흥분을 겯들인 희망과 또 한 차례 닥쳐올 절망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이거 아닙니까?"  빗물에 젖고 사람들의 발자국에 의해 밟힌 흔적이 보이는 볼품없는 면으로된 돈 지갑을 건네면서 KC가 흰 이빨을 들어내며 웃었다. "맞다, 그거다." 내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나보다.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심지어 나 자신도 놀랐기 때문이다. 지갑을 열어보니 붉은 인민폐 2000원이 고스란히 그대로 들어있었다. 돈에 그려져 있는 모택동이 싱글벙글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청두의 양꼬치 집에서의 저녁 식사>

 

 

새벽 1시에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너무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왔기에 모두 지쳐있는 듯 했다. 양꼬치를 비롯한 몇 개의 음식이 주문되고 맥주가 들어왔다. 맥주가 몇 순배 돌아가니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어슴프레 해져 보였다. 맥주 옆에 놓여 있는 장미 꽃이 언젠가 내 나이 젊었을 때 금산의 쇠전다리 선술집에서 보았던 술집 아가씨 입술처럼 빨갛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몇 잔 술에, 오늘의 이 엄청난 일이 먼 옛날 일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아니,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여기는 중국이었다. 아내는 분명히 내 옆에 있었다. 그리고 34만원이라는 거금도 지금 내 가방 속에 있었다. 못 올 것을 오게 되고, 잃어 버린 돈을 다시 찾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 하니 결국 "0"이 되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소설인지 영화인지 수필인지 그런 말이 떠 올랐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천 여행의 첫 밤은, 옛 사랑이 멀어져 가듯, 그렇게 어둠을 뚫고 사라져가고 있었다.  

 

 

(2011년 7월 2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