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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중국 시솽반나-라오스-방콕 11 "칸차나부리 그리고 귀국"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1. 23:01

 

 

 

 

 

시솽반나, 라오스, 타일랜드 여행기

 

 

제 11부: 칸차나부리, 그리고 귀국(최종회)

 

 

김형, 어느덧 김형께 보내는 마지막 글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여행 기간보다도 글 쓰는 기간이 더 길었습니다. 사실은 많은 기억들이 머리 속에서 이미 사라져서 사진을 보면서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경험과 추억이 쉽게 잊혀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만약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면 모든 생생한 기억 때문에 오히려 일상생활이 순조롭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방콕에서 1일 여행으로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북쪽으로 가면 "아유타야"가 있고, 북서쪽으로는 "칸짜나부리"가 있습니다. 아유타야는 역사적인 곳이고, 칸짜나부리는 영화 콰이강의 다리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지요. 우리는 칸차나부리로 가기로 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여행사에서 간단히 예약하면 됩니다. 한 사람 당 16,000원을 내고 하루 예약을 했습니다.

 

 

기왕에 말이 났으니 말이지 칸짜나부리는 하루 코스가 아니라 며칠 다니면서 쉬고 구경하고 먹고, 뭐 이렇게 느긋한 생활을 해야 하는 곳인데, 한국인의 "빨리빨리 근성"에서 인지, 콩 볶아 먹듯이 그렇게 다녀왔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헛개비가 다녀온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어떤 분이 쓴 등산기가 떠오릅니다. 그분은 일요일 새벽 2시에 서울을 떠나 설악산 오색에서 대청봉에 올랐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공룡능선을 거쳐 설악동으로 내려오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 전등불을 밝히고 터벅터벅 내려왔다고 합니다. 설악동에서 택시를 타고 다시 오색으로 가서, 주차해둔 차를 타고 그 밤중에 다시 서울로 오니,  밤 11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여행을 끝내고 집에 와 앉아 있으니 밤 12시가 되었다. 내가 귀신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귀신에 홀린 사람인지 모르겠다. 내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다. 설악산에 갔다 온 것은 헛개비가 갔다왔나 보다. 헛개비는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있지?"

 

 

 

 

 

 

 

<칸짜나부리 약도>

 

 

7시 40분에 출발한 봉고차는 10시가 조금 넘어서 칸차나부리 연합군 묘지에 도착했습니다. 깔끔하고 잘 정돈된 전사자 묘지. 비석에 써 있는 글 하나하나에 마음이 짠합니다. 「1943년 9월 25일, 25세로 사망. "그는 죽지 않았다. 단지 멀리 있을 뿐이다."」 거기에 누워있는 많은 병사들이 대체로 20대의 젊은이였습니다.

 

 

전쟁은 그 당시는 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하에 합니다만 세월이 지나면 대체로 쓸 데 없는 전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월남전 파병이 있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떠나는 형님들을 위로하라"는 선생님의 명령으로, 밤 11시에 대전 역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태극기를 흔들면서 "형님들 잘 다녀 오세요."라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합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전쟁이 얼마나 쓸 데 없는 전쟁이었고, 그 전쟁에서 죽어간 젊은이가 한 없이 딱할 뿐입니다. "내 인생, 사랑하는 애인, 어머니, 아버지, 고향 그리고 멋있게 살아보자 했던 내 미래, 옆집의 순이, 그러나 무지개 꿈 피워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이국 땅에서 내가 가는구나!"

 

 

 

 

 

 

 

 

 

 

 

 

 

 

 

 

전쟁박물관으로 가는 중에 표범 한 마리가 있습니다. 주인이 몸에 손만 대도 자지러지게 놀라며 고개를 숙입니다. 짧은 쇠줄로 묶어 놓고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만도 못한 짐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으르렁대봤자, 쇠사슬에 묶여 있는 한, 대들기보다는 죽는 시늉을 하는 것이 자기가 살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지요. 김형, 사람도 마찬가지가 일 것입니다. 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는 아무리 기고만장한 사람도 고양이만도 못한 그런 힘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박물관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중국과 태국을 점령하고 미얀마를 거쳐 인도까지 넘보겠다는 생각으로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 안에 진열된 사진과 모형 그리고 실물을 보면서, "현재 일본인이 이 박물관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두 종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는,  "참, 우리 조상들이 욕심이 과다해 너무 몹쓸 짓을 했다." 또 하나는 "우리 일본인 정말 대단하다. 그 작은 섬에서 나와 아시아를 다 먹어 버릴  생각을 했으니 말이야. 서양놈들을 노예로 삼은 것은 일본뿐이 없어. 역시 일본인은 일본인이야." 아직도 정신대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일,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일, 이런 것을 보면 아직도 과거 일본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을 그리워하는 일본인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형, 만약 우리나라가 중국과 태국을 점령했다면, 그래서 김형이 그곳에 있는 박물관을 가보았다면, 김형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귀국하여 술 한 잔 들면서 이야기해 봅시다.  

 

 

 

 

 

 

 

 

4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여행을 다니는 한국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4개월 예정으로 동남아와 호주를 여행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비용을 물었습니다. 일인당 1200만원 가져왔는데, 예상보다 경비가 많이 들어서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행 방법을 물어보니 국가와 국가 이동은 비행기로, 나머지는 버스나 기차로 여행한다고 했습니다.

 

여행 경비의 대부분이 항공비입니다. 그리고 숙박비가 좀 차지 하구요. 이를 줄이지 않고서는 경비를 줄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먹을 것은 먹어야 하고, 볼 것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먹는 비용을 줄이고, 구경 비용을 줄인다는 것은 제 생각에는 바보들이나 할 짓입니다. 왜냐하면 여행은 먹고 보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비행기로 갈 것을 기차로 가고, 3만원 방에서 잘 것을 1만 5천원에 자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 아닐까요?  

 

 

 

 

 

 

 

 

 

콰이강의 다리는 까맣고 투박한 색깔로 육중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큰 대로가 펼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도 다리지만, 그 주변의 경관이 정말 빼어났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과 그 주위의 올망졸망한 집과 초록색 나무를 조화롭게 만들었고, 그 강위를 쏜살같이 지나가는 놀이배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이것을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밑에 내려가서 물을 만져보고, 식당에서 토속 음식도 먹어보고 배도 타보고, 하루 밤 지내면서 검은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을 보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건듯 건듯 보고 또 다른 곳으로 가야하는 팔자인지도 모릅니다. 김형, 한 가지 사족을 붙인다면, 철로 한 구석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 조금은 처량해 보였습니다.

 

 

 

 

 

 

 

 

 

 

 

 

 

<웨일즈 사람>

 

 

우리 봉고차에 어떤 젊은이 5명이 뒤에 타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모두 취해서 차가 떠나가도록 헛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게엑 게엑, 끄억 끄억, 꾹꾹"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소리와 흉내와 동작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봉고차 바닥에 누워 그 발이 의자 밑을 지나, 심심하면 한 번씩 앞에 있는 사람의 발을 걷어찼습니다. 그들에게 한 마디 말이라도 하면 당장 싸움이 날 것 같았습니다.

 

 

말투로 보아, 그들은 러시아인이라고 직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술이 깬 후, 즉 점심 식사 후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영국의 웨일즈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은 남쪽의 해변에 가서 며칠 묵었다가 일 주일 후에 돌아가겠다는 그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날이 있었나 되짚어 보았습니다.

 

 

 

 

 

 

 

 

 

김형, 폭포라는 곳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건기여서 그런지 물이 쫄쫄 흘러내렸습니다. 시커먼 꾸정물에서 쥬브타고 노는 것이, 아이들의 일이요; 자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붕 위의 닭 바라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어른들의 일이었습니다. 옆으로 돌아 올라가, 폭포 위쪽으로 가보았습니다. 평평한 언덕 위에 조그만 또랑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폭포의 발원지로 보였습니다.

 

 

사실 이 근처가 모두 산악지대로 근처에 "에라원 국립 공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멋진 폭포가 있다고 했지만, 뻔한 이유로 우리는 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뻔한 이유라는 것은 너무나 뻔합니다. 다수결로 투표하여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다음에 가지" 하면서 한숨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과연 아름다운 나무와 꽃이 멀리, 가까이에서 바람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 너머로 아련하게 펼쳐져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이 마치 라오스의 방비엥처럼 느껴졌습니다. 원시림인 이곳은 공기 자체가 싱그럽습니다. 끝 없이 펼쳐진 나무와 풀, 꽃이 "열대의 삼림은 본래 이런 것이다"라고 뽐내며 서 있습니다. 사실 더 바랄 것도 없이 이곳을 느긋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행복입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기차 여행입니다. 수 십년 전에 놓아졌던 그 철로를 따라 기차를 타고 가 보는 것입니다. 이 기차는 실제로 지금도 현지인들이 타고 다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은 관광객으로,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타고 가는 것입니다.

 

 

 

 

 

 

기차가 다가 오자 우리 안내자 "리나"는 기차가 오니 뒤로 물러서라고 소리칩니다. 리나는 영어는 그럭저럭 하지만 발음이 좀 좋지 않아, 그녀의 말은 알아듣기 힘듭니다. 일본의 지진이야기를 하면서 earthquake을 "어쾍, 어쾍"이라고 발음하여, 저는 처음에 일본의 "오리"에 무슨 문제가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몇 시에 어디로 가고, 몇 시에 식사가 있고 등 기본적인 말은 통하니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기차가 다가온다.>

 

 

기차는 서서히 정차했다가, 사람을 태우고는 다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기차는 이내 깊은 골짜기로 진입합니다. 계곡에 단 한 대의 기차만 지날 수 있는 좁은 철로입니다. 옆에 자라난 나뭇가지와 풀이 사정없이 유리창을 할퀴고 지나갑니다. 얼굴이나 손을 내밀었다가는 그 순간 상처 투성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뼈다귀만 남고 살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수학 여행 때 밤이되자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이 여학생 방에 쥐방울 들락거리듯, 철로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휘몰아쳐 들어왔다가 빠져 나갑니다. 나뭇가지가 창을 때리고 빈틈으로 손길을 내밀 때마다, 사람들은 괴성을 지릅니다.

 

 

 

 

 

 

순간 멀리에 바람에 나부끼는 초목과 산천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산은 멀어져 갔다 다시 가까이 오고,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교대하며 보초를 섭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진짜 철로감독이 나타납니다. 저 옹삭하고 초라한 칸막이에서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는 시간을 보낼까요? 하여튼 무슨 생각을 하다가, 기차가 오면 손을 흔들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인지도 모릅니다.

 

 

 

 

 

 

순간 또 붉은 들판이 나타납니다. 논산 훈련소 28 연대에 비가 내립니다. 붉은 황톳빛 빗물이 땅을 적시고 흘러, 병사의 손을 적시고, 얼굴을 물들이고, 급기야 내 몸을 휘감습니다. 내 머리를 붉게 물들이며 머리카락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내 눈도 붉게 색칠합니다. 나는 온몸을 뒤흔들어 날개짓 하며 하늘로 솟아 멀리 멀리 사라집니다.

 

 

 

 

 

 

 

기차가 속도를 늦춥니다. 밖을 바라보라는 신호입니다.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한쪽으로 밀치고 또 밀칩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한국사람 유럽 사람 할 것 없이, 나오는 한 가지 말은 "와, 와!"입니다.

 

 

콰이강변에 가지런이 놓여진 파란 지붕의 맥주집이  보입니다. 아야, 저 곳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면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라는 말 저절로 나오겠다.  바람은 바람을 데려오고, 강물은 강물로 이어져 있습니다.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 세월처럼 한가롭게 흐르는 물,  부는지 마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꽃 향기 몰고와 코 끝을 스칩니다.  

 

 

 

 

 

 

천국이 어디냐고 묻지 말라. 여기가 천국이니라. 극락이 있냐고 묻지 말라. 여기가 극락이니라. 지상낙원은 지구상에 딱 한 군데이니, 네가 지금 보고 있고, 머물고 있는 바로 이곳이 낙원이니라. 저 강물을 두 손으로 담아 얼굴에 적셔보라. 그 감촉이 비단이니라. 그 손 안에 있는 물을 들여다 보라. 그 속이 바로 하늘이니라. 저 강산이 바로 고향 어머니의 품이니라.  

 

 

 

 

김형, 저는 기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 할 때가 있나 봅니다. 휴가 나온 이등병이 애인과 떨어지기 싫어 자꾸 뒤를 돌아보듯, 가지 말라고 내 옷자락을 잡는 칸차나부리를 자꾸 돌아보며 한숨 쉬며 그곳을 떴습니다.

 

 

 

 

김형,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입니다. 창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 날개와 아름다운 콰이강이 겹쳐 보이며, 눈가에 어른거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디 콰이강만이 기억에 남겠습니까? 시솽반나의 아름다운 나무와 풀, 꽃, 그리고 라오스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 산과,  꿈속의 은하수처럼 느릿느릿 흐르는 강, 그리고 여기 태국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비행기 날개 위에 춤을 춥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 괴테의 말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방황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여행 후유증으로 거의 20일 동안 끙끙 앓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노력하면서 방황할 것인가? 아니면 머무르며 만족할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머무르며 안주는 못할 것 같습니다.  머무르며 "안주"하지 못하는 저에게, 김형, 언제 술과 좋은 "안주" 사 주시지 않겠습니까? 죽는 것도 서럽지 않고, 늙는 것도 별로 섭섭하지 않습니다. 늙을수록 육체적 힘은 없어지지만, 정신적인 힘은 전과 별 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지금의 상태인 제가 그저 좋을 따름입니다. 김형  앞에서 제가 너무 장황했지요? 더 이상 헛 소리 하기 전에 이 글을 끝내야겠습니다. 아, 참, 김형, 그래도 지난 번 꿔간 돈은 갚으셔야지!  



 

(2011년 4월 2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