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등산기 제 2 부>
가야 산이면,
가지 않으면 강일까?
그러면, 가다 말면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가다 말아라.
하다 말아라.
우리는 살다 만다.
그것이 인생이다.
<등산 코스: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해인사-토신갈림길-헬기장-철계단- 상왕봉(가야산)-칠불봉-서장대-백운동>
아침 7시에 식당에 내려왔다. 잠시 후 언니는 생긋생긋 웃으며 나타났다. "그래 양주가 그리도 아까웠어? 정말 딱 한잔만 더 마시고 싶었는데. 무정한 사람." 아직도 그녀의 눈에 양주에 대한 그리움이 강물처럼 묻어있다. 「경기도 양주군 마실면 취하리」로 시집 갔어야할 여인네가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살게되니, 이 사람에게 가도 치이고, 저 사람에게 가도 치이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언니, 우리 갑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어제 밤은 정말 미안했습니다." 친구는 말했다. "정말, 다음에 오셔서 며칠 푹 ∼ 쉬다 가이소." 언니의 말이다. "그럼요. 올 해가 가기 전에 꼭 옵니다." 보통은 뻔한 거짓말을 잘하는 내 친구지만 오늘은 그의 말에 진지성이 있어 보인다. 이 친구가 나 몰래 혼자 여기에 오지는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한이 서린 모텔을 나선 것은 아침 8시다. 그런데 어제 한 밤중에 도착했는지라 어디로 가야 해인사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두리번거리는데 여 스님 한 분 나타난다. "저쪽으로 가서, 이렇게 돌아서, 저쪽으로 가이소." 질문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말을 모두 해 버렸다. 누가 잡아먹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저 만큼 멀리 가 있다. 바람의 여인이다. 「아마 젊어서 바람이 났을거야. 그래서 소박을 맞았을 거야. 그래서 스님이 되었을 거야.」 온갖 상상을 다하는 내가 싫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스님이 경상도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경상도 말하는 스님은 내 생전 처음 본다. 아마도 드라마에서도 경상도 말하는 스님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참으로 신기하다!
걸어서 25분 정도 가니 해인사가 나타난다. 멀리 허리가 굽은 스님을 도와, 젊은 스님이 어디로 간다. 스님은 많이 보았으되 저 정도로 노쇠한 스님은 처음 본다. 젊어서 절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희노애락을 겪어가며 그렇게 한 세상 살았으리라. 학창 시절에는 보통 사람처럼, 부와 명예 그리고 권세를 추구했을지도 모른다.어쩌다 어쩌다, 상류의 돌이 굴러 하류로 내려가면서 이리 깎이고 저리 깎이듯, 세월이 스님을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정말 멋있는 사찰이다. 기와지붕 위로 먼 산이 그림처럼 보인다. 며칠 있으면 초파일이다. 마당에도, 절의 기둥에도, 그리고 담벽에도 등이 걸려있다. 그때 한 무리의 스님들이 용감하게 우리 쪽으로 온다. 용감한 군인들이 임무를 수행하러 어디로 가는 것 같다. 아니, 우리를 잡으러 오는 것 같기도 하다.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니, 나머지 스님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스님에게서 서릿발 같은 군인 정신을 본다.
군인정신이라. 나도 한 때는 군인이었었다. 나는 그 이름도 찬란한 육군 의장대 출신이다. 그 당시 나는 군대 고참이 나뭇잎을 먹으라면 먹었다. 지나가는 여자의 가슴을 만지라면 만졌다. 왜냐하면, 언젠가 그런 쓸데없는 명령을 듣지 않았다가 네 시간 동안 맞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네 시간 맞아봐라. 누구나 다 그렇게 된다.
정말 네 시간 맞을 수 있다. 정말 맞는다면 맞는다. 아구창, 후꾸, 빳다, 심지어는 이단 옆차기를 돌아가며 맞았다.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건 말건, 이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본래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다.
가야산 정상을 향해 해인사를 출발한 것은 9시다.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 초입은 수수한 그런 산이다. 길 양쪽으로 작은 대나무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여기저기 초록의 나뭇잎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대나무 밭은, 바람에 흔들리는 강물 밭이다. 이름 모를 산새가 풀숲에서 서성이고, 노란색 꽃이 발아래 밟힌다. 작년, 경기도 가평의 연인산에서 본 얼레지가 발디딜 틈 없이 깔려있다.
정상의 8부 능선 쯤 왔을까? 대낮에 두 남녀가 바로 길 옆에서 껴안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뒤에 바짝 앉아서 여자의 엉덩이를 자기 허벅지에 붙여 놓았다. 두 손은 여자의 가슴에 놓여있다. 그 둘은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우리는 눈을 들어 그들을 볼 수 없었다. 내 친구는 “경치 한 번 좋다.”라고 나즈막하게 중얼거린다. “저 것들은 우리에게 자랑하는 거야, 뭐야. 사방이 대나무 숲인데, 숲에가서 그러시지. 왜 하필 길 옆에서 저러는지 모르겠네. 에이, 기분 나뻐.” 나는 내 친구의 말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좋을리는 없지만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갑자기 나타난 바위를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저 아래 해인사 쪽으로, 민둥산에 초록의 나무들이 점처럼 박혀있다. 오른 쪽에는 저 멀리 산 중턱으로 끝없는 에스(S) 자 길이 나 있다. 반대 쪽에는 긴 능선을 따라 검은 바위가 띠를 두르며 이어져 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아까 길 옆에 있던 두 남녀가 또 길 가운데서 그짓을 하고 있다. “연애대학 포옹학과 출신 남녀 또 등장이요.”라고 내 친구는 허허 웃으면서 말한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또 말 없이 빙긋빙긋 웃는다. 정면에서 그들의 사진을 찍어 두려고 했으나 그들은 완강히 거부하여, 뒤에서 몇 방 찍을 도리 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몇 번이나 목격되었는데, 나중에는 나도 신경질이 났다. 급기야 나는, 저자들의 쌍판때기를 찍어 인터넷에 올려 개망신을 주어야겠다는 독기에 몸부림쳤다. 저 사람들이 나한테 밥을 달라나 떡을 달라나, 나는 왜 핏대를 올리나? 사촌이 땅을 사니 배가 아프나? 잘 모른다. 좌우지간 그랬다.
정상을 100 미터 앞에 두고 오른 쪽으로 가파른 절벽이 있다. 그 위에 서 있는 내 친구가 마치 개미 새끼처럼 보인다. 무서워 죽겠다는 말이 들리고, 자세가 또 그렇게 보인다. 아니다. 그보다도, 바라보는 내가 전율을 느낀다.
계속 박차를 가해 철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1430 미터라고 써 있는 정상임을 타나내는 표석이 나타난다. 11시 반쯤 되었으니 해인사를 출발한지 두 시간 반 정도 되었다. 몇 명이 이미 올라와 있다. 그 옆에 펑퍼짐한 마당 바위가 있다. 가져온 팩 소주로 등극주 한 잔 한다. 어제 먹은 소주빨이 막 가실까 말까하는데, 또 요것으로 몸을 적신다. 등산과 술은 본래 어원이 같음에 틀림없다.
<협천군이라고 읽고 싶다. 그러나 합천군이라고 읽어야 한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칠불봉이 나온다. 칠불봉(七佛峰)이라고 하니, 그 뜻은 좋을지 몰라도, 귀에는 거슬린다. 칠불출이나 팔불출이 먼저 떠 오른다. 의미도 중요하지만 소리가 더 중요함을 느낀다. 중학교 때, 내 친구 중 이일성이라는 사람은 아이들의 놀림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충성으로 갈았다. 윤성기라는 사람도 이름을 갈았다. 윤윤수로 갈았다. 어떻게 말을 해 놓고 보니, 좀 이상하다만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안성기라는 사람은 이름을 갈지 않았다. 성기가 아니니까 말이다.
칠불봉은 1433 미터다. 가야산의 정상인 상왕봉이 1430 미터이니까, 사실은 칠불봉이 3 미터가 더 높다. 칠불봉의 정상은 좁아서 많은 사람이 함께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엉덩이를 깔고 비켜설 줄 모른다. 무슨 배짱이 그리 센지 모른다. 센 것은 바람 또한 마찬가지다. 여차하면 고꾸라져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기세다.
동서남북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어제 오늘 찍은 사진이 칠백 장 정도 된다. 칠백장과 칠불봉은 무슨 연관이 있는지 혹시 모르겠다. 남쪽을 보니 가파른 철 계단을 개미 이사가 듯, 사람들이 줄줄이 꽁무니를 잇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성주군 백운동 쪽에서 올라 오고 있는 것이다. 혹시 휴전선이 터지면 북한 주민이 저렇게 몰려올까? 한 마디로 볼 만하다.
칠불봉에서 성주군 백운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본 산 중, 가장 많은 계단이다. 또 시간 상으로 경상도 쪽에서 오는 단체 관광객이 몰려드는 시간이어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기를 데리고 올라오는 엄마도 보였다. 이 아기는 1000 미터 이상을 오르는, 내가 본, 최연소 등산객이다. . 엄마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지만, 기쁜 마음은, 빙긋이 웃는 입술과 아이를 향하는 어머니의 눈매에 나타나 있다.
얼마를 내려갔을까? 배가 고팠다. 처음에 올라올 때 무방비 상태로 올라온 것이 그 원인이다. 아침에 김밥을 사서 올라가려고 전날 계획했으나, 어제 먹은 술 기운 덕분에, 깜빡 잊고 그냥 올라와 버린 것이다. 잊을 걸 잊어야지, 그래 생명줄을 잊나?
배낭 속에는 카메라와 그 부속 품, 필요 이상의 겉옷, 그리고 영양갱 하나가 전부였다. 이런 것들은 그저 평소에 항상 배낭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내 친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굶고, 물만 마시면서 갔다. 기왕에 이렇게 된 것, 먹는 것 없이도 등산이 가능한지 시험이라도 해봐야겠다. 오늘 먹지 않고도 두 발로 종점에 도착한다면, 앞으로 어떠한 음식도 없이 등산에 임할 것이다.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또 얼레지가 지천으로 깔려있다. 사진을 찍는 데, 웬 여인이 우리 주위를 맴돈다. “피곤하신데 한 잔 하시겠습니까?”라고 내 친구가 말을 건다. “무슨 술입니까?” 그녀의 말이다. “뭐든지 다 있습니다.” 내 친구의 말이다. “양주도 있는교?” “그럼요, 있습니다.” “그럼 양주 한 잔 주이소.”
그녀는 두 잔을 거푸 마셨다. 도대체 이 경상도 여인네들은 양주에 귀신이 씌였나? 양주하면 사족을 못 쓴다. 어제 밤에 겪은 양주 사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 2의 양주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까, 나는 좌불안석이다. 그녀는 쑥떡을 꺼내서 우리에게 준다. 아침 식사 이후 곡기를 끊은 우리는, 쑥떡을 보고 이게 웬떡이냐고 생각했다. 우리가 점심 굶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나는 괜히 불안 초조 하여 여기저기 사진만 찍었다. 내가 왜 불안초조한지 모르겠다. 어떤 책에 보면, 미인 앞에서는 남자들이 그렇게 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은 있다. 내 친구는 그럴싸한 언사로 여인네의 넋을 빼 놓고 있었다. 이 여인네는 자기가 넋을 잃는지도 모르고,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최면에 걸려들고 있었다. 대학교 때 읽었던, T.S. Eliot의 싯귀 그대로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와 값싼 일박 여관에서 편안치 못한 밤이면 밤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 새어나오는 골목으로 해서, 굴껍질과 톱밥이 흩어진 음식점들 사이로 빠져서 갑시다. 음흉한 의도로 싫증나게 질질끄는 논의처럼 연달은 그 거리들은 그대를 압도적인 문제로 끌어넣으리다. 아,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우리 가서 방문합시다.
"Let us go then, you and I,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 Like a patient etherised upon a table; Let us go, through certain half-deserted streets, The muttering retreats Of restless nights in one-night cheap hotels And sawdust restaurants with oyster-shells: Streets that follow like a tedious argument Of insidious intent To lead you to an overwhelming question... Oh, do not ask, "What is it?" Let us go and make our visit."
***이 시를 이해 못한다해도 슬퍼허지 말라. 이 시를 쓴 사람의 잘못이다.
알프스 산보다도 더 아름다운 가야산을 배경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과거사와 현대사의 흑백 영화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여인의 뻗은 손으로 이메일 주소가 적힌 종이 쪽지가 친구에게 건네진다.
이제 내 친구가 양주를 가져온 깊은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여행의 필수품은 밥이나, 옷, 물이 아니라, 양주라는 새로운 사실. 기쁜 마음으로 확인한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계곡 물은 불어만 갔다. 물소리도 여름 매미 소리만큼이나 크다. 매표소까지 왔으니 다 왔나 보다. 매표소 앞에 “풀을 밟아라”라는 시 한 수 적혀 있다. "그래, 맞아. 우리는 땅을 밟고, 풀을 밟고 자라야지. 앞으로 더 많은 풀과 흙을 밟아야 해. 포옹학과 출신 남녀를 밟듯이 말이야! " 아직도 그자들에 대한 증오가 나를 짓누른다.
이런저런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다시 고령에 오니 오후 3시 반이다. 4시 반 버스표를 끊고, 고령 역전에 있는 해물 칼국수 집에 들어갔다. 땀을 흘려가며 그릇을 깨끗이 비운 우리는,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야, 전에는 잘 따라오지도 못하더니, 오늘은 뒤를 보면, 항상 바짝 따라와 있데.” 내 친구가 말했다. “아니. 이까짓 것 1400 미터 아무 것도 아니데. 다시 갔다 오라고 하면 또 갔다 올 수 있어.” “어제 밤에 술을 먹고도 그래? 그 동안 뱀탕이라도 먹었나?” 친구가 재차 물었다. “놀라지 말게나. 등산을 못한다고 하도 구박을 주어서, 절치부심(切齒腐心), 그 동안 헬스클럽에 다녔네.” “헬스클럽에 다녀? 어허, 이거 일났네, 일났어. ” 내가 놀라지 말라고 경고를 했건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했다. “체력만큼은 나를 못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야, 이거, 인생 역전이네.” 친구는 장탄식을 했다. “인생 역전(逆轉)이라구? 아니, 여기는 고령 역전(驛前)이야.” 한 바탕 웃고 보니, 지나가는 아저씨가 더 큰 소리로 웃는다.
"우리, 기도나 하고 가자" 기독교도도 아닌 친구는 이상한 제안을 했다. 덥지도 않은데, 더위를 먹었나? 나의 건강에 쇼크를 먹었구나. 이제는 별 짓을 다 하는구나. "무슨 기도?" 내가 물었다. "너는 끝에 「아멘」이나 해라." "어서 한 번 해봐." 내가 말했다. 그는 근엄하게 눈을 감고, 양손을 모으고 말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제발, 이번 서울에 올라 갈 때는 버스기사로부터 야단맞지 않게 해 주십시요."
"아-멘."
(2008년 04월 28일 00시 15분 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