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등산기
11월 06일(제 2일) 새벽에 눈을 뜨니 4시였다. 어둠 속에서 기억을 되살려보니, 여기는 장성의 방장산 휴양림 숙소였다. 어제 밤에 먹은 술이 아직 덜 깼다. 어제 내 친구가 소주 2병, 나는 1병을 마셨다. 확실히 하기 위해 각자의 술병은 각자가 책임지기로 하고, 각자의탁자 앞에 갖다 놓고, 각자가 알아서 따라 마셨다. 어둠 속에서 찬 바람이 솔솔 불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삼겹살이 참나무 숯 위에서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고 전국에 놓여있는 우리의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면서, 그리고 풋고추, 마늘과 함께 상추에 싸여진 삼겹살과 소주와 더불어, 우리의 첫날 밤은 그렇게 지났던 것이다. 간단히 햅쌀밥에 김치찌개로 아침을 마무리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월출산으로 향했다. 6시 반이었다.
월출산 천황사지에 도착하니 8시 반이었다. 안내 지도를 보면서 오늘 산행 길을 확인했다.구름다리-천황봉 코스는 좀 어렵다하니, 바람폭포-천황봉으로 갔다가 내려올 때 구름다리코스로 내려오기로 의견을 모았다. 바로 그때 웬 어르신이 자신이 갈 길을 스스로 말해주었다. 이분의 나이는 69세, 앞으로 3시간 동안 나의 최초의 산행 친구가 될 사람이다.지난번 설악산에서 만난 후리드리히와 수잔나가 첫 외국인 친구라면, 바로 이분이 나의
첫한국인 친구가 되는 셈이다. 三人行 必有我師라고 했던가? 여행을 하면 반드시 동료가 생기는 법인가 보다.
그분은 수원에서 오셨으며 어제 밤 밤차로 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분은 무박으로만 다니시는 분이었다. 예컨대 제주도를 갈 때는 수원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저녁에 부산에 도착한다. 저녁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하면 아침이다.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 다시 제주 항구에 오면 부산으로 가는 저녁배가 기다리고 있다. 그 배를 타면 다시 다음날 새벽에 부산에 도착한다. 그 기차를 타고 다시 수원으로 온다. 도시락은 본인이 직접 준비하고,
배나 기차 버스는 30% 경로우대를 받는다. 한 마디로 전국에 안 가본 적이 없지만 돈은 거의 들지 않은 그런 알뜰한 여행족이었다. 짐이 무거우면 파출소에 짐을 맡기고 간단히 산행을 다녀온 후 다시 짐을 찾아간다는 일, 아주 몸이 피곤할 때는 찜질방에서 단돈 7000원에 편히 자고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또는 이런 방법도 있구나라고 감탄을 하면서 그분을 따라 걸었다.
그분은 군대에서 장교 화이버로 막걸리를 마시다가 들켜서 뒈지게 맞던 일, 현재 며느리가외국인이어서 말이 잘 안 통하는 이야기, 친구가 많이 죽거나 병들어서 혼자 산행을 해야만하는 슬픈 신세라는 이야기, 젊었을 때 연애한 이야기 등 끊임없는 이야기로 나의 말동무가 아니라 내가 말을 들어주어야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문득 옛날 대학교 영시 시간에 읽었던 Samuel Taylor Coleridge의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가 생각났다.한
노인이 결혼식장에 가려는 사람을 잡고,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다. “There was a ship."으로 시작한다. 그러자 결혼식장에 가는 손님은 하는 수 없이 어린애처럼 이야기를 듣는다(The wedding guest stood still, And listens like a three year's child.). 이러다 보니 지영이가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지난번 왕짜장에서 였던가? 쵸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미국에서 말해보면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것. 알게 모르게, 많건 적건 간에, 우리는 그래도 영문학에 접해 본 사람이라는 것. 하여튼 이야기를 듣고,
걷고, 웃고, 쉬면서 우리의 산행은 계속되었다.
바람폭포 코스는, 약 200 미터 옆으로 구름다리 코스를 바라보면서 가는 코스다. 한국에서 가장 길다는 구름다리와 그 위에 끊임없이 놓여있는 철 계단을 보면서 우리는 올라간다. 지난 10월 설악산 공룡능선 코스가 위엄있고 장엄하다면, 여기 월출산은 모든 것이 아기자기하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완만하게 내려온 계곡과, 또한 산봉우리와 계곡 사이에 놓여있는 열아홉 소녀의 가슴처럼 봉긋한 바위들은, 마치 여기저기 피어있는 목화밭의
풍경과도 비슷하리라.
천황봉을 오르려면 반드시 지나야한다는 통천문을 지나니 비로소 천황봉이 보인다. 천황봉에서는 북으로 영암, 남으로 강진과 해남이 보인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사방은 모든 산이 밋밋한데(사실 이 대목에서 15분간을 보냈다. “민믿하다, 밋밋하다, 민믿하다, 밋밋하다---”무엇이 옳은지 몰랐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월출산만이 이렇게 바위로 둘러싸여있는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우리가 탄 택시 운전수는 영암사람들 돈벌어 먹고 살아라는
신의 뜻이라고 말해주었다. 어제 금산에서 대둔산을 거쳐 내장산에 올 때도, 대둔산 주위의 모든 산은 흙으로 덮인 밋밋한 산인데 왜 돼 대둔산만이 기암괴석으로 덮여있는지 모르겠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났다. 하기야 어디 그것뿐이랴.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것이 보통이지만, 어떤 사람은 인물도 잘 났고, 집도 부자고, 머리도 좋고, 착하고, 예절 바르고 모든 것이 더 바랄 것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며,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며, 그래서 인생이 더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다? 지겨워
뒈질 것이다. 내가 왜 이리 뒈지다는 말을 자주 쓰는지 모르겠다.
천황봉에서 어디로 갈까 망설였다. 천황봉에서 구점봉을 거쳐 도갑사로 갈지 다시 뒤로 돌아 아름답다는 구름다리로 갈지,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구름다리 코스는 멀리서라도 보았으니, 기왕에 온 김에 월출산을 종주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천황봉에서 구점봉까지는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며 상당히 인내력을 요하는 코스다. 이미 천황봉에 올라오면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 터라, 양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면 지루할
그런 코스다. 왼쪽으로 경포대가는 길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멀리 영암읍내를 보면서 걷는다. 갑자기 나타나는 남근바위, 오른 쪽으로 동굴을 보면서 구점봉에 도착한다.
지금부터 억새밭까지는 완만히 내려가는 코스다. 숲속을 지나간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뛰어난 바위도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바위도 가끔 나타났다 사라진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휴일은 아마 사람에 걸려서 다니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억새밭에 도착하니 마치 제주도 목장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이 나를 늘어지게 했다.
도갑사에 도착하니 3시 반이었다. 지도상에 나와있는 6시간 반 거리를 우리는 7시간 반 동안 걸었다. 힘도 들었지만, 무릅 보호가 첫 번째 우선 순위이기에, 목숨을 걸고 무릅 보호 정책를 편 것이다. 도갑사의 단풍은 약 20% 들었다. 앞으로 일 주일은 더 있어야 모두 물 들 것이다. 여기저기 음심점에서 성공적인 등정을 축하는 막걸리 파티 소리가 귀에 들린다. 한 잔 생각은 굴뚝같았으나, 차를 몰아야되기에, 꾹 참았다. 택시를 타고 다시
천황사지 쪽으로 왔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완도를 향했다. 완도에서 생선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 걸치고 잠을 자면, 내일 우리가 등정해야할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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