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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천성 여행기 10
-황룡 그리고 천주사-
7월 19일 새벽 6시 누군가가 노크를 한다. 한 중국인이 문밖에 서 있다. 문밖에 있는 그대? 박강성의 노래? 멍하니 서 있는데, "니취황롱마?(당신 황롱갑니까?)" 그가 말했다. 오늘 갈 계획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황룡으로 가겠다고 여행사에 예약한 것이 생각났다. 구채구에서 황롱까지는 지도상 약 164키로,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6시 30분과 7시에 황룡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러나 버스 터미널까지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고, 또 차표를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어서, 여행사에 찾아가서 전세차를 예약했던 것이다. 요금은 일인당 22,100원(130위엔), 10위엔이라도 깎아보려고 했으나 기술이 부족해서인지 도저히 깎을 수가 없었다. 예약을 마치고 나오는데, 길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내일 황룡갑니까?"라고 물었다. 자기들은 17000원(100위엔)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속상해서 속까지 쓰렸다.
좌우지간 허겁지겁 준비를 해서 그를 따라 나섰다. 밖에서는 검은 색 자가용에 두 명이 이미 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를 포함해서 네 명이 자가용 영업차를 타고 황룡에 가는 것이다.
내몽고에서 왔다는 젊은 아버지와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이미 차 안에 타고 있었다. 아버지는 운전수 옆에 앉아 있었고, 딸은 뒤 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또 여전히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한참을 천천히 이야기하니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내몽고에서 온 사람이 오늘 오후 3시 반에 근처에 있는 황룡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탈 예정이니, 황룡 구경을 마치고 1시 반까지 황룡입구로 걸어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자가용 운전수가 우리를 황룡에 데려다 준 후,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다시 태워서 밖으로 데리고 나오고, 몽고에서 온 사람은 비행장까지 태워다 준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교통요금이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거의 하루 종일 차를 대절하고 일인당 22000원이면 뭐 그렇게 대단한 금액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가용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사원으로 보이는 붉은 건물 안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니차(경전을 적어 놓은 둥근 통)가 끝 없이 보였다. 배경으로 있는 뒷산에 걸린 조그만 흰 달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듯 했다. "여전히 안녕하시군요. 수고하세요."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길 양쪽으로 내용을 알 수 없는 깃발이 내가 군대 의장병으로 있을 때 깃발처럼 나열해 있었고, 출근을 하려는지 서너 명씩 모인 사람들이 손을 들어 태워 달라고 하기도 했다.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친 산 아래, 자욱한 안개가 늦잠을 자고 있었다. 안개는 바람에 쫓기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늘로 솟더니, 고무줄에 묶인 풍선처럼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자동차가 급격한 커브를 브레이크 없이 돌 때마다, 잠자는 아이는 자동차 문에 머리를 부딪치며 울상을 지었다.
<내몽고에서 온 사람의 딸>
고개 정상에서 자동차는 잠시 쉬었다. 그때가 아침 9시쯤 되었으니, 구채구에서 출발한지 2시간 반만의 휴식이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키며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해발 약 4000미터라고 한다. 여기가 4000미터라면 저 멀리 높게 보이는 산은 5000미터는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상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있고, 식물하나 자라지 않는다.
9시 50분쯤 황룡 풍경구에 도착했다. 구채구에서 약 3시간 걸린 셈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매표소 앞 길에서, 삶은 계란과 방금 구운 빵, 그리고 오이를 샀다. 산 물건을 건네 받다가 오이가 땅에 떨어졌다. 오이를 건네 주려던, 그집 딸로 보이는 소녀가 미안해 어쩔줄 몰라했다. 어머니는 오이를 다시 가져 오라고 손짓했다. 돼지를 잡아도 수십마리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큰 칼로, 오이 껍질을 척척 벗기더니, 오이를 "뎅겅" 가운데를 잘라 비닐 봉지에 담아 주었다. 과연 여장부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는데, 매표원이 내가 준 여권을 자세히 살피면서 정말로 내가 60이 넘는지 물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더니 여권에 찍혀 있는 비자를 보기도 하고, 여권의 겉 표지를 계속 보면서 힐끔힐끔 내 모습을 훑어 보았다. 가끔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매표원의 의심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다. 그러기를 약 5분, 다른 입장권 구매자가 나타났다. 그제서야 그녀는 하는 수 없었는지 할인 입장권을 건네 주었다. 구채구의 입장권이 두 사람에 100,300원(590위엔)인데 여기 입장권은 두 사람에 87,000원(510위엔)이었다. 하여튼 중국에서 풍경구 한 번 들어가려면 기본적으로 4-5만원은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도 입장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보면, 중국에 부자가 많기는 많은가 보다.
<황룡 안내도>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니, 방금 우리가 넘어 온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발 4000미터 고개에서 해발 3100미터인 황룡입구로 내려오는 길인 것이다.
<황룡으로 오는 길>
케이블카에서 내린 지점부터는 옆길로 평평한 길을 걷는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저 멀리 황룡계곡의 수정같은 물이 보이기도 하고, 절의 지붕이 보이기도 한다. 거기에서 계속 걷다가 황룡사 바로 아래에서 좌회전해서 마지막 힘을 내어 걸어 올라가야 한다.
<절로 보이는 건축물 지붕이 보이기도 한다.>
<해발 5588미터의 수에바오딩(雪宝顶: 설보정)산이 저 멀리 보인다. 여기서부터 아래로 용처럼 펼쳐진 계곡이 바로 황룡 계곡이다.>
<황룡사>
황룡 계곡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아름답다는 오채지에 가려면 젖 먹던 마지막 힘을 내야 한다. 해발 3570미터에 위치해 있어서 몇 발자국만 걸어도 힘이 든다.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걸어야 한다. 오채지는 길을 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 바퀴 돌도록 되어 있다.
오채지를 돌다보면, 관망대가 두 곳이 나온다. 이곳에서 보면, 오채지는 옅은 파란색, 연두색, 그리고 노란 색으로, 마치 한국 시골의 논배미를 붙여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신안 앞 바다에 있는 염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름답다! 구채구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감명이다. 모든 것이 놀랍다. 물빛도 놀랍지만, 사람의 손으로 논두렁을 저렇게 막아 놓은 것이, 아니, 어떤 자연의 힘이 저렇게 물막이를 해 놓았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채지>
<오채지>
<계곡 전체에 이런 잔교가 깔려 있다.>
구채구가 그렇듯, 계곡 전체가 호수와 호수를 연결해 놓은 듯 하다. 그 중간에는 노란 바위가 몸통을 들어 내 놓고 있다. 본래 이곳이 황룡이라고 불려진 이유는, 계곡의 맞은 편 쪽 산에서 황룡 계곡을 보면, 이 계곡 전체가 초록, 파랑, 연두의 오색 비닐을 달고 있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곡을 계속 따라 내려오다 보면 정말 노란 바위가 용의 비늘처럼 울퉁불퉁 솟아 있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얕은 논배미 비슷한 호수가 나타나고 그 아래 다시 누런 바닥이 보이다가 다시 또 호수가 나타난다. 정말 몇 키로의 계곡이 호수와 노란 바위로 덮여있다.
우리는 케이블 카를 타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 오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예 케이블 카를 타지 않고 걸어 올라오는 사람도 있다. 체력을 테스트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케이블카 비용을 아끼려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3500미터 정도의 산을 오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얼굴 표정으로 보아 도저히 올라가지 못할 사람들이 다리를 떼어놓지 못하고 발발 떨면서 숨만 할딱거리고 있다.
계곡의 마지막 부분에 폭포가 보이면 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구경꾼도 별로 없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한 팀의 한국인들이 보였다. 좀 오래 돌아다니다 보니 겉 모습만 보고도, 대충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별할 수 있다. 중국인은 약간 검은 색 계통의 옷을 입고, 한국인은 대체로 등산복 계통의 화려한 옷을 입는다. 중국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한국인은 동작이 빠르다. 중국인은 등치가 좀 작고, 한국인은 좀 크다. 중국인은 좀 시끄럽고 한국인은 좀 조용하다. 더 확실한 것은 중국인은 중국말로 떠들고, 한국인은 한국말로 떠든다!
한시 반에 입구에서 운전수와 만나기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1시까지 황룡입구에 내려왔다. 그러나 1시 15분이 되어도 우리를 태우고 온 운전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급해지고 속이 탔다. 경찰에게 여기가 입구인지 물었다. 경찰은 거기가 황룡입구라고 했다.
잠시 한국 말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하나투어를 이용해 관광 온 한국인들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아이들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한군데에 모여 큰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화이팅"을 외치면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플래카드에는 "XX신용금고 연합회 직원 연수"라고 되어 있었다. "직원연수"인지 "직원의 가족 연수"인지 모르겠다. 해발 3500미터에 대한 겁을 먹었는지, 한 사람에 하나씩 산소통이 쥐여져 있는 모습이 마치 포탄을 들고 적진에 뛰어 들려는 육탄 용사처럼 보인다.
한시 반이 다 되어도 운전사는커녕 우리와 함께 왔던 내몽고에서 왔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여행사에서 준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급한 김에 아무나 붙잡고 그 쪽지를 주며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쪽지를 보던 사람은 전호 번호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보아도 시커먼 종이에 이상한 글자만 써 있었다.
순간 나는 내가 속았다고 생각했다. 전에 KC가 말한 적이 있었다. "중국 사람들과 돈 거래를 할 때는 반드시 일이 다 끝난 뒤에 돈을 줘야 한다"는 말이다. 속으로 중국놈들 나쁜 놈이라고, 전체 중국인을 대상으로 욕을 해댔다. 또한 속은 내가 바보라고 욕하며 병신 머저리 같은 놈이라고 되는대로 말해 버렸다.
바로 그때 내몽고에서 온 남자가 나타났다. 산에서 보물을 들고 나타난 산신령처럼 반가웠다. 차가 많아서 빠지지 않아 그러니 좀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하고 내심으로 욕을 해댄 중국인에게 속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병신 머저리라고 했던 말에는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늘 그런 녀석이다!
차를 다시 타고 돌아 나오는데,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다. 운전수가 "삥빠오"라고 소리쳤다. 얼마나 큰 우박인지 자동차 유리창에 떨어지는 소리가 자갈밭에 수레 바퀴 굴러가는 소리 같다. 우박이 앞 유리창에 수북하게 쌓이자 운전수는 치우고 다시 갔다.
우박은 "삥빠오(冰雹)라는 것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 당시 그 단어는 생생한 감각으로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수 많은 단어를 종이에 쓰면서 외우는데 사실은 이렇게 외운 단어는 며칠 못 가서 거의 다 잊어 먹기 마련이다. 이렇게 현장에서 생동감있게 배워야 오래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유학을 가면 대체로 쉽게 말을 배워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황룡 고개 길은 더 할 수 없는 경치다. 갈 때나 올 때나 마찬가지로 시원스럽다. 위압적인 바위가 나타났다 하면 금방 또 뭉게구름을 동반한 언덕이 굴러 들어왔다. 저 멀리 말과 염소가 풀을 뜯는 것이 보인다 싶으면 끝없는 들판이 여지 없이 나타났다.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왜 이리 중국은 볼 데가 많은 겨?" 운전수가 무슨 말인지 나에게 묻는다. "당신 참 운전 잘 한다고 합니다.(你开车开得厉害)“ 라고 통역해 주었다.
자동차는 천주사 앞을 지나고 있었다. 만국기와도 같은 각종 색깔의 깃발이 보인다.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단장한 티벳 기와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운전수에게 여기에서 내릴테니 세워 달라고 했다. 운전수는 "내몽고"에서 왔는지 "네몽고"에서 왔는지 아니면 "몽고간장 장수"인지 뭔지 하는 사람과 그의 딸을 싣고 황룡 공항으로 달린다.
본래 송판으로 가서 1박 하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눈앞에 펼쳐진 천주사의 아름다움에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하기야 25일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만 타면 되었지, 천주사에서 자건, 송판에서 자건, 나무판에서 자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별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배낭을 메고 천주사 시내로 들어간다.
천주사는 본래 절 이름이다. 그 절을 중심으로 작은 읍 정도의 마을이 생겼는데, 그 마을 이름도 그냥 천주사라고 해 버린 것이다. 훤히 뚫린 도로를 따라 조그만 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간다. 도로 한 가운데 붉은 꽃밭을 만든 것은 누구의 착상일까? 저 멀리 거대한 아치가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며 나를 환영한다.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다니, 이런 것을 보는 나는 너무 팔자가 좋은 놈이다!
우선 아무나 잡고 싼 방을 찾는데 도와 달라고 말했다. 한 남자가 안내한 방은 싸기는 싸지만 화장실과 샤워실이 없는 방이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비싸도 더운물과 샤워실이 있는 방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 눈에 "만복산장"이라는 호텔이 나타났다. 종업원들은 카드 놀이와 골패놀이를 하느라고 내가 오는지 가는지 정신이 없었다. 23800원(140위엔) 짜리 방이 있었는데, 그런대로 괜찮았다. 여기저기 찾아 돌아다니기 싫어 그냥 들어간다.
사람이 별로 없는 이 면 소재지 정도의 거리를 활보하니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 한국 사람이 이곳에 올 이유도 없을테니 내가 한국 사람으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숙박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천주사를 통해서 황룡에 갔다는 사람은 보이는데, 천주사에서 숙박했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여튼 호텔을 나와 천주사를 찾았다. 화려한 기와집을 배경으로 넓게 뚫린 도로가 내 마음도 뻥 뚫리게 해준다. 차도 없는 사거리에서 교통 정리를 하는 경찰관이 어쩐지 외로워 보인다. 사람이 거리에 별로 없다. 동물 가죽을 걸어 놓고 장사야 되든지 말든지 상인들은 그저 이야기만 주고 받는다. 파카를 입고 있는 이들을 보면 해발 약 3천미터나 되는 이곳의 기온을 짐작할 수 있다.
붉은 색으로 멋들어지게 쓴 천주사 현판을 지나 천주사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게 웬일이냐? 천주사는 대대적인 수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렸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수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기야 법당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떠하랴? 그 절이 다 그 절이지. 주위를 한 바퀴 둘러 보기로 했다.
우선 벽을 아름답게 장식한 천연색 그림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기둥 모양의 장식에서부터 꽃 모양의 장식까지 종류가 다양한데, 단아하고 깔끔하다. 각 집의 대문도 동물과 식물 그리고 화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이번 여행이 주로 티벳 여행이다. 그래서 회상해 보면, 티벳의 집들은 대체로 화려하고, 색채가 밝으며,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인 것 같다.
조금만 걸으면 교랑이라는 건축물이 나온다. 시내를 흐르고 있는 빠른 시냇물을 건너가는 징검다리 바로 앞에 세워져 있다. 사람들이 비를 피하기도 하고 햇볕을 피해 쉬기도 하는 곳이다. 그 옆에는 큰 석상이 있는데 리빙(李冰)상이라고 되어 있다. 리빙은 중국 진나라 촉군의 태수로 댐없이 물을 끌어 들이는 수리시설을 만든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성도의 북쪽에 있는 주장옌이 바로 리빙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비교적 손님들이 많은 거리가 나타난다. 어떻게 보면 이 도시는 유령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개의 큰 산장 또한 호텔과 작은 호텔이 있지만 대부분의 숙박업소는 빈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호텔에 들어와 잠시 쉰 후, 오랜만에 만두를 먹어보자고 밖으로 나왔다. 한 집에 들어가니 집안 식구끼리 하는 식당이있다. 그들은 옥수수와 알 수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찌꺼기를 바닥에 마구 버렸다.
물만두가 있냐고 물으니 있다고 했다. 물만두를 시켜 놓고 기다리는데, 그집 딸이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 말을 걸었다. 중국의 도시는 잘 모르겠지만, 시골로 가면 그들은 대체로 일본인에게는 반감을, 한국인에게는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제 시대 남경 대학살을 기억하는 그들이 일본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류의 영향이 대단하여 한국 사람은 한국 연속극에 나오는 것처럼 모두 마음이 좋고 멋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집 딸은 한국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한국에 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우선 한국말을 배운 뒤, 홍익대 앞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맥주를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 다음에 뭐 하고 싶은지 물었다. 강남에 가서 좋은 옷 사 입어 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소식이 이 먼 곳에 이렇게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만두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간장처럼 시커먼 국물 속에 만두 몇 개가 담겨져 있는 사발이 나왔다. 아이구, 이제 나는 죽었다. 저 짠 만두를 어떻게 먹지? 그러나 놀랍게도 이것은 우리나라의 만두국과 같은 음식으로, 만두도 맛있고, 만두국도 입에 척척 달라 붙었다.
한국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딸은 말했다. 한국 사람이 와본 적이 없는 동네는 이번에 처음 가봤다. 내가 이곳이 신기하듯이 그들도 우리가, 우리의 말이, 우리의 태도가 신기했을 것이다. 앞으로 한국인과의 접촉이 없는 곳을 좀 집중적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눌리 수에한궈위바(努力学韩国语吧=열심히 한국어 공부해보세요.)"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떴다.
호텔에 돌아와 보니,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온몸이 떨리더니 온 이빨이 다 떨렸다. 더운 물은 밤 9시가 되어야 나온다고 했다.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양탄자에는 조그만 잡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방의 등불을 조절하는 장치는 떨어져 덜렁 거렸다. 다른 것은 참으면 되지만, 고장난 것은 가서 말해야 했다. 왜냐하면 고장 냈을 경우를 대비해 보증금으로 돈을 맡겼는데, 이를 알리지 않으면 그들이 나에게 덤터기를 뒤집어 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로비에 가서 이야기 했더니,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한다.
밤 11시가 되니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시각에 손님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천주사는 송판, 구채구, 황룡, 황룡비행장, 그리고 핑우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서,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숙소로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 위에 모포를 또 덮었다. 추위는 가시지 않고 눈은 말똥거렸다. 며칠 전 타공에서 겪었던 불면의 밤이 떠올랐다. 그때 밤새도록 얼마나 떨었던가? 여기 중국 사천 지방은 알맞은 기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추워 죽지 않으면 얼어 죽는 것, 둘 중의 하나의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일 송판으로 가야하는데, 송장이 되어서 가는게 아닌가? 시계의 초침 소리가 침략군의 구두발처럼 크게 들리며 불면의 밤은 깊어갔다.
(2011년 8월 15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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