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판의 거리>
중국 사천성 여행기 11
-송판 그리고 다시 성도로-
7월 20일 천주사다. 아침 일찍 종업원이 각방을 돌아다니며, 어제 밤에 맡겼던 보증금을 나누어 준다. 추워 더 이상 모텔에 머물기도 힘들어서 일찍 모텔을 나섰다. 밖에는 따뜻한 햇볕이 정든 임처럼 반가웠다.
어제 자가용 기사의 말로는, 송판으로 갈 때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가면, 3400원(20위엔)이면 될 것이라고 하였었다. 우리는 지나가는 차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길에 서 있는 자가용을 불러 6800원(40위엔) 주고 차를 대절해 송판으로 향했다. 중국에서는 먼 곳을 가면 몰라도, 별로 멀지 않은 곳을 갈 때는 길에 서서, 아무 차나 손을 들고 흥정을 하면 쉽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고, 그리고 남의 집앞에 서 있는 차도 웬만하면 흥정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송판까지는 겨우 16키로, 옆을 스치는 초록의 산과 듬성듬성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채 20분이 되지 않아 송판에 도착하였다. 송판에 도착하여 유스호스텔을 찾아가니 10200원(60위엔)에 1박 할 수 있었다. 너무 저렴하여 방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천주사의 방보다도 더 깨끗하고, 밝고, 더운 물도 더 잘 나왔다. 안내 책자에 "값이 저렴한 송판에서 숙박을 하고 주위에 있는 초원으로 말타러 간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천주사에서 송판으로 가는 중에 보이는 풍경>
어차피 우리는 처음부터 송판에 가서 말을 타거나 트레킹을 할 생각이 없었다. 송판의 시내를 돌아보면서 분위기를 즐기고, 그 고장 특색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원천공주와 송첸캄포상>
송판의 중심지는 원청공주와 송첸캄포의 동상이 있는 곳이다. 바로 뒤에 "송주"라는 옛 지명이 보인다. 도대체 원청공주와 송첸캄포는 누구인가? 안내 책자를 보자.
「당나라 태종 때 티베트에서 송첸캄포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난다. 송첸캄포가 티베트인들의 영토를 토번 왕국으로 통일하고, 당나라에 버금가는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송첸캄포는 당태종의 딸과 결혼하겠다며 무리한 요구를 했다. 송첸캄포의 사절단이 송판을 지날 때, 송주의 책임자는 송첸캄포의 사절단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과 토번은 송판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1차 전쟁에서 토번이 승리하고, 2차는 당나라가 승리했다. 결국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송판은 당나라의 영토로 남는 대신 원청공주는 토번으로 시집가게 되었다.」
원청공주상 주위에 옛날식 건축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단아한 건물이 올망졸망 서 있다. 뜨거운 태양은 하늘과 옛 건물의 대비를 증대시킨다. 이것은 지대가 높은 지역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하다.
원청공주 상 뒤쪽에 있는 "송주"라고 써 있는 성문을 통과하면 바로 송판의 옛 거리가 나타난다. 서울로 치자면 사대문 안쪽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주에서나 볼 수 있는 낮은 전통식 건물이 길 양쪽으로 늘어 서 있고 또 양쪽 X 좌표 방향으로 열십자를 그으면서 골목은 골목으로 연하여 있다.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물건 파는 사람, 그리고 자전거 택시가 길을 채우고 있었다. 여기에 오면 과거와 현재는 하나다. 여기에 오면 늙음과 젊음이 하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손자 손녀가 세월이라는 강물을 따라 함께 흘러가 하나가 된다.
<송판성 내부>
<송판거리: 찻집 및 숙소 거리>
어디에서 한국 말이 들린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뒤를 돌아보니 한 여인이 붉은 양산에 이슬람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는 우선 오늘 밤 어디서 묵을 데를 정했는지 묻는다. 이미 숙박할 곳을 정했고 다음날 성도로 갈 예정이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버스 예약을 했는지 묻는다. 이미 예약을 마쳤다고 대답했다. 성도로 가려면 반드시 전날 버스표 예매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왜 거기 송판에 와 있는지 물었다. 중국 남자와 결혼하여 지금 송판에서 산다고 말하는 그 여인은, 그곳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민박집을 하면서 생활한다고 했다. 남편도 역시 여행에 관련된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금은 중국 국적을 갖고 있는지 묻자, 자기는 결혼은 했지만 아직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는 중국 여권으로는 한국에 가는 것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숙박소를 정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어떻게 해서 무슬림이 되었으며, 또 왜 사천성 사람과 결혼을 하였는지 자세하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그냥 헤어져야 했다. 사실 여행이란 명승고적을 보거나 훌륭한 산천을 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남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과 이야기 해보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직접 보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아니, 이런 경험이 자연경관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한국인 무슬림 여인>
<송판 성문>
<거리를 활보하는 군인들>
<관음각>
조금 더 길을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관음각이라는 절이 나타난다. 산 절벽의 일부를 건물의 벽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절은, 오래 전에 지어진 듯 여기저기 긴 역사의 흔적이 보인다. 촛농이 사방에 떨어져 있고, 촛불에 벽이 새카맣게 그을려 있다. 촛불 아래에 여기저기 놓여있는 시커먼 그릇이 스님의, 아니, 인간의 삶과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거기에서 올라온 쪽을 내려다보면 송판의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인다.
<관음사 위에 있는 산에서 주민들이 물을 떠 오고 있다.>
관음사 위에서 약수를 떠오는 일단의 주민들과 마주친다. 어디를 가나 몸에 좋다면 천리라도 가서 물을 떠오는 것은 우리나라나 송판이나 마찬가지다. 팥죽 같이 땀을 흘리면서 약수를 운반하는 이들을 보면서 무엇인지 모를 고달픈 서민의 일면을 느낀다.
관음사에서 내려와 다시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틀면 송판 성벽을 만나게 된다. 거대한 성벽 아래 천천히 걷는 주민과, 우리를 뒤로 하고 멀어져 가는 자전거 뒤에 매달린 짐에서, 오후의 한적함을 느낀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조금 더 걸어가면 나무 아래 멀리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들고 있는 것이, 마치 영화에서 본 한 장면처럼 가까이 다가와 내 옆에 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내 손을 잡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이미 나는 그 집 방 가운데 서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가 바로 부엌이자 거실이 되고, 거실에서 문을 또 하나 열고 들어가면 바로 침실이 된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소원인 듯이 보였다. 먹을 것을 주려고도 하고, 여기저기 방을 구경하라고도 하고, 앉은뱅이 의자를 주면서 앉으라고 권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 집은 그들의 집이 아니었다. 아들의 집인데 일년에 2-3번 다니러 온다고 했다. 거기에서 더 시골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 이 사람은, 이곳이나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나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기 그지 없다고 한다. 옛 친구도 모두 도시로 가고, 송판에 살고 있는 친구 한 사람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를 볼 겸 이 집을 찾았다고 했다. 나이 먹으면 외롭고 적적한 것은 어디가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모자 쓴 사람이 아들의 집을 찾았다. 멀리 있는 사람은 옛 친구>
<골목 풍경>
신발을 빨아서 유리창 가에 놓고 말린다. 엄마 신, 아빠 신, 언니 신, 그리고 빨간 내신. 노란 문 옆에 빨래를 말리고 있다. 바람이 심술이 났다. 옷을 흔들어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신발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네가 이래도 안 넘어져?" 바람은 기어이 한 켤레 "뎅겅" 넘어뜨렸다.
바람이 머물다 간 도시 한 복판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월처럼 흐르는 강물이다. 아낙네가 내려와 물 속에 걸레를 풍덩 담근다.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어 넓은 바위에 꾹꾹 눌러 물을 짜낸다. 서로 바라보고 웃더니 먼산 한 번 바라보고 계단을 오른다. 어제도 그랬을 것이고 내일도 아마 그럴 것이다. 작은 행복은, 재산과 학식과 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작은 행복은 흐르는 물에 걸레를 빨다가 서로 바라보며 웃음 짓는 여유에서 나온다.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또 한 차례 바람이 놀러 온다.
시골 시장은 언제나 향수를 자아낸다. 내가 어렸을 때 금산 쇠전 다리에서 보았던 호박이며 당근이며 고추가 그대로 여기 송판 시장에 나와 있다.
한 참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시장 한 모퉁이에서 자연에서 채취한 버섯을 판매하는 시골 아줌마가 있었다. 아니 한 아주머니와 처녀 두 명일 것이다. 세 명의 여인네로부터 골고루 조금씩 버섯을 샀다. 꼭 먹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팔아주고 싶었다. 나는 가격을 좀더 올려 주어도 상관이 없지만, 검은 얼굴에 상기된 표정의 버섯 파는 처녀는 다섯 번이나 버섯을 저울 위에 올렸다 내렸다 하며 저울 대를 살폈다. 그리고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비닐 봉지에 싸서 건네 주었다. 그날 그 버섯은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와 집 주인에게 모두 주었다.
거리를 기웃거리다가 찻집에 들어갔다. 찻 집에는 이미 몇몇 그룹이 모여 마작이나 트럼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를 시켜 먹기도 했지만, 어디서인지 음식을 배달해서 먹기도 했다.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맞은 편 쪽도 역시 찻집이었다. 거기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마작을 하고 있었다.
주스와 차를 주문했다. 예상했던 주스나 차가 아니었다. 조금은 실망했다. 그러나 이 먼 사천성 송판에 와서 한국의 주스와 차가 나오기를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 분위기와 그에 알맞은 그 지방의 차를 그대로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갑자기 주스에서 아련한 맛이 목에 느껴졌고, 구수하고 향긋한 차 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폐를 적셨다. 찻집을 가득 채운 차 향기가 바람을 타고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휘감고 바람으로 저 멀리 가을 하늘에 참새 날 듯 사라진다.
그날 저녁 어느 골목에서 가재를 파는 식당이 있었다. 바닷가재가 아니라 내가 어렸을 적 우리 동네 산골짜기에서 가끔 보았던 산골 가재였다. 그 가재를 주문하려는데, 그것과 비슷하지만 그것보다 더 맛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주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종업원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주문했다. 얼마 뒤에 나온 것은 큰 양푼 속에 수북하게 담아 나온 새우였다. 보통 우리가 보는 좀 작은 바다 새우였다. 바다에서 수 만리 떨어진 그들에게는 새우가 훨씬 귀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향수를 자극할 것은 시골 가재였지, 바다 새우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엉뚱하게 주문한 새우 볶음과 몇 가지 다른 안주, 그리고 이과두주로 송판의 밤은 비몽사몽간에 깊어만 갔다.
<안주로 나온 새우>
7월 21일 아침 7시 성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버스를 타면서 이 버스가 어느 노선을 경유해서 갈지 궁금했다. 만약 문천을 통해서 간다면 내가 호텔 안내원의 말에 속은 것이고, 내가 온 길 즉 핑우로 돌아간다면 호텔 종업원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버스는 원천 대지진으로 갈 수 없다는 길로 가고 있었다. 출발한지 2 시간이 지나도, 3 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계속 대지진이 났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참 세상에 믿을 놈 없다더니 또 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중국이란 나라에서 누구를 믿으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가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계속 비경이다. 사실 우리는 성도에서 멀고도 먼 구채구와 황룡을 찾아가 그곳만을 보고 오지만, 중간중간에 "무슨 무슨 풍경구"라고 써 있는 곳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다시 말하면 중간중간에 볼 만한, 그리고 쉴 만한 장소가 무수히 박혀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천미터의 산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곳에는, 그저 발길 닿는 곳이면 아름다운 계곡이나 폭포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성도로 오는 버스 안에서 찍은 사진: 여기에 보이는 작은 길로 접어 들어가면 풍경구가 나온다.>
<2008년 5월 12일 대지진 장소>
2008년 5월 12일 대지진이 일어났던 지대에 다다랐다. 잠시 후, 지도 상 "마오시엔(茂县:무현)"이라고 표시된 지점을 지나자마자 버스가 멈춰 선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찰이 제지하기 때문이란다. 그때가 오전 11시경이다. 송판을 떠난지 4시간, 지도상으로 보면 앞으로 4시간 정도면 성도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날은 덥고 아무도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고 유유히 다리 밑을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만 흘러갔다. 내 옆에 프랑스에서 온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내일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고, 또 북경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가 되어 있어서 내일 성도에서 비행기를 타지 못할 경우 그 이후의 일은 악몽과 같은 일정이 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 프랑스인은 몇 사람을 모집하여 버스에서 짐을 끌어내려 지고 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 갔다. 그러나 약 30분 후 그는 다시 돌아왔다.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초조해 하는 그와 그의 여자친구를 보면서 근처에 있는 식당에 걸어가 보았다. 안에는 차에서 내린 승객이 발디딜 틈이 없이 와글거리고 있었다. 손님이 너무 많아 아예 장사도 못하는 듯 했다.
한국의 고속도로가 막히면 장사꾼이 나타나듯, 순식간에 장사꾼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풋사과와 과자 등을 팔고 있었다. 사람들은 호떡집 불난 것처럼, 너도 나도 장사꾼 곁으로 모여들었다.
프랑스인은 결국 핸드폰으로 전화해 봉고차 한 대를 빌렸다. 그리고는 그 차를 타고 갈 사람을 모집했다. 한 사람당 3400원(20위엔)씩 내고 7명을 모집했다. 사실 그 당시 나의 입장으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해서 그 차를 타고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도 없고, 우리의 버스는 돌아가는지 영원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인지 모든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여행 중 가장 큰 문제는 돈이 떨어지거나 강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언어 소통 및 알 수 없는 사태의 변화다. 제대로만 된다면 여행처럼 쉽고 즐거운 일도 드물 것이다.
우리가 탄 버스에 서양인이 네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를 조금씩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조금이라도 중국어를 할 수 있으니까 그들이나 우리나 개인적으로 돌아다닌다고 하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여행이 불가능한 지역이 바로 여기 중국의 오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인도 전에 1년 동안 중국에서 유학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고 했다.
하여튼 몇몇 사람은 짐을 가지고 버스에서 내려 어디로 갔고, 우리는 7명이 한 조를 이루어 봉고 차를 탔다. 그때가 2시 30분, 11시부터 꼬박 3시간 30분을 기다린 후다. 그 당시 내 생각으로는 약 3-4키로 전방에 무슨 장애물이 있고, 그곳을 통과하면 성도로 가는 버스가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 7명을 태우고 출발한 봉고차는 한 없이 달렸다. 중간 중간에 무슨 풍경구로 간다는 팻말이 보이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별로 바쁠 것도 없는 우리는 중간에 내리고 싶었으나, 일말의 불안감이 앞서서 그러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불안해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듯 하다. 어디나 다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과 함께 하면 새로운 경험을 기다리는 하루가 있으련만, 공연한 두려움에 인생의 즐길 것을 즐기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 꽁무늬만 따라다니다가 인생 판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중간에 3시간 반 동안 멈추어 있던 다리 위>
<답답한 사람들이 다리 아래 강으로 간다.>
봉고차는 시속 70-80키로로 달렸다. 중간에 경찰이 서 있고 차량 통행을 막았다. 그러나 우리차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통행을 허락했다. 직감으로는 무슨 소요 사태가 나서 길을 막은 것이 아닌가 했다. 봉고차는 4-5키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약 1시간 정도 달렸다.
드디어 우리를 태운 봉고차가 멈추었다. 목적지에 다 온 것이다. 알고보니 거기에서 다른 봉고차를 타고 성도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봉고차에서 내려보니 여기서도 경찰이 길을 막고 자동차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경찰은 100미터 결승전에나 있을 법한 밧줄을 치우고는 가도 좋다고 큰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서 멈춰 서 있던 수 많은 차들이 썰물처럼 성도 방향으로 빠져 나갔다.
우리와 함께 있던 프랑스인은, 지금도 다리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버스 운전수에게 전화했다. 길이 뚫렸으니 이제 와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여튼 처음 우리를 태웠던 버스는 한 시간 후에 도착했다. 버스에 타보니, 송판에서 올 때 가득 차 있었던 승객 중 2/3는 어디 가고, 1/3만 차를 타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다른 차를 타고 다시 송판으로 돌아 갔던지,아니면 그 근처 도시에서 1박 할 것이다.
조금 가니 경찰이 교통을 차단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토사가 산에서 흘러내려 길에 쌓였던 것이다. 포크레인이 마지막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거기에서 으아해 한 것은, 토사가 흘러내린 지점에서 왜 60키로나 되는 먼 곳에서부터 차의 통행을 막았냐는 것이다. 참으로 중국이란 나라는 이해하기 힘들고도 힘들었다.
<지진 피해지역>
차의 정체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30분쯤 가던 버스는 무슨 이유인지 이번에는 터널 안에서 멈추었다. 10분, 20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30분이 지나도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날은 더워 에어컨을 켜야 했고, 모든 차들이 내뿜는 매연이 터널을 채우고 버스 안으로 몰려왔다. 매캐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차장 밖으로는 그냥 걸어서 터널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다. 터널의 길이가 몇 키로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 마당에, 잘못하다가는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는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엄마도 있었고, 할머니도 있었고, 다리를 절면서 가는 사람도 있었다. 6.25 전쟁의 피난민을 연상시키는 이들의 대열에서 여기가 바로 생지옥이라고 단정지었다.
왕복 2차선 터널이었다. 문제는 양쪽 차선을 성도로 가는 차들이 점령을 했고, 또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도 양쪽 차선을 차지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차들이 길을 채워 꼼짝도 못하게 되는 판국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의 데모대와 경찰이 얼굴을 맞대고 누가 이기나 보자고 맞장뜨는 장면과 흡사했다. 얼마 뒤에 경찰차가 나타나서 겨우 한쪽 길을 뚫어 놓았다. 그런데 경찰이 겨우 뚫어 놓으면, 다른 차들이 또 순식간에 그 경찰 뒤꽁무늬를 따라가면서 또 길을 먹통으로 만들어 놓았다.
평소에 중국 경찰의 뻣뻣한 자세에 대해 못마땅해 했던 나는, 중국 경찰은 지금보다 더 혹독하게 질서를 다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유의지로 질서를 맡겼다가는 중국이 개판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1시간 동안 차 속에서 기다린 터널>
하여튼 따가운 눈을 참아가며 속수무책으로 기다린지 한 시간 뒤인 오후 6시 30분, 버스는 천신만고 끝에 굴을 빠져 나왔다. 너무나 많이 기다렸다고 생각했는지 독기를 품은 운전사는 죽기살기로 차를 몰았다. 대지진이 발생한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참사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있고, 새로운 길과 교량을 건설하느라 덤프 트럭이 공사 현장에 분주하게 들락거리는 곳도 있다.
<지진으로 흘러내린 토사가 오른쪽에 보인다. 다리 건설 중>
<중간중간에 보이는 대지진의 흔적>
날은 저물기 시작한다. 멀리 넓은 후수 위로 노을이 마지막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호수와 다리와 주변의 산들이 오늘 하루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지진대를 통과하자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송판에서 출발한지 14시간 뒤인 밤 9시에, 멀고도 가까운 성도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결국 지진 지대에 나 있는 곳에 길이 뚫려있기는 하지만, 뚫리지 않은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리가나 저리가나 12시간은 기본으로 잡아야 구채구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성도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구채구로 갈 한국인은 서쪽 코스가 완공된 이후에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성도의 심지코지 유스호스텔에 도착>
유스호스텔에 도착하니 마침 빈 방이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일이 우습기도 하고 아이들 장난 같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중국인들은 어떤 경우든 불평이 없다는 것이다. 버스가 고장이 나면 무조건 기다린다. 왜 미리 정비를 하지 않았는지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자동차에 무제가 생겨 몇 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인 듯 했다. 이미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피속에 녹아 들어 있어서, 기다리지 않으면 이상한 듯한 그런 습관이 들어 버린 듯 했다. 하여튼 중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늘 일을 기억은 하되 오늘 일이 내일 일의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늘 모든 것을 다 잊고 내일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다. 몸이 천근만근이나 된 듯 느껴지고, 파김치가 된 듯 흐느적거렸다. 눈을 떠도 앞이 보이지 않고, 귀는 열렸어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가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을 것이다. 아마 사람이 죽을 때도, 이와 같은 비몽사몽과 같은 현실이 서서히 죽음으로 변할 것 같았다. 오늘 처음 생과 사의 무념무상의 세계를 경험하나 보다.
(정율 스님이 부른 노래 중에서)
(2011년 8월 20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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