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천성 여행기 13(최종회)
-핑르어꾸전(平乐古镇:평락고진) 그리고 다시 성도로-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간 대나무 장대가 차양 막 모서리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 아래 좁은 길로 사람들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구경합니다. 어떤 노인은 담뱃대를 물고 쓸쓸히 걸어가고, 어떤 부부는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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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물건을 사기보다는 구경하는데 열중해 있습니다. 아이들 장난감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짚세기입니다. 짚세기는 한국 고유의 신발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시골에 이렇게 많은 짚세기가 있는 것을 보고 으아해 했습니다. 하기야 신발이 없을 때는 벼가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짚세기를 만들어 신었겠지요. "사랑이 별거더냐, 좋아하면 사랑이지 ~ "라는
김세레나의
노래의 제목이 "짚세기 신고 왔네"입니다. 짚신보다는 짚세기가 더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짚신의 여기 저기에 밝은 빛깔의 천을 덧대어서 짚신은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너도 나도 풍덩풍덩 강으로 뛰어듭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뛰어듭니다. 운 좋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남자는, 버들가지처럼 흐느적 거리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 안아 자기 몸에 바짝 붙이고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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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4일 가본 곳 핑르어꾸전(平乐古镇)의 위치>
꾸전(古镇: 고진)이란 "장이 서는 옛 마을"이란 뜻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의 "인사동"이나 순천의 "낙양 읍성" 또는 "경주"와 비슷한 개념의 작은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꾸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년 전 신장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서점에서 구입한 두 권의 책 때문입니다. 한 권은 "중국 100개의 매력적인 꾸전"과 또 한 권은 "꾸쩐추안싱(古镇川行: 고진천행)"입니다.
대충 짐작되는 내용과 거기에 실려있는 사진은 내가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중국의 다른 면을 깨닫게 해주었고, 한편으로는 어릴 적 향수를 들추어 내기도 하고, 어머니의 따스함을 되찾아 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역사도 깊고 땅 덩어리도 커서 이런 종류의 꾸전은 흔히 찾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운남성의 리장이나 따리도 이런 꾸쩐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든 가벼운 배낭을 메고 이런 고대 도시를 한가롭게 찾아 다니며 즐기는 것도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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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구입한 꾸쩐 여행 책 두 권: "매력적인 중국 꾸전 100"과 "꾸전추안싱">
핑르어는 성도의 신난먼 버스 터미널에서 갈 수 있습니다. 치옹라이(邛崃:공래)라는 도시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탈 수도 있고, 신난먼에서 핑르어로 직접가는 버스도 있습니다.
핑르어 꾸전에서 조금만 더 가면 티엔타이샨(天台山:천태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다고 합니다. 이 천태산에 관한 이야기는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옆에 있는 대학생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대학교 사진학과 재학생으로 1박 2일 일정으로 천태산 풍경 촬영가는 중이었습니다. 저도 하루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들을 따라 천태산으로 갔을 터인데, 다음 날 비행기로 한국에 와야 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채 그들과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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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르어" 마을 입구에 오면, 길 양쪽으로 대나무 숲이 아취를 이루며 관광객을 환영합니다. 본래 쭉쭉 하늘로 뻗는 것이 대나무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길 양쪽에서 자란 대나무가 가운데로 모여 이렇게 둥근 활을 그리며 외부인을 환영하고 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니 차라리 감격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겠습니다. 꽃을 가슴에 안고 가거나, 머리에 꽂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고사리나 소철나무처럼 생긴 초록색 잎을 묶은 후, 그 가운데에 빨간색 꽃을 장식한 꽃다발입니다. "핑르어에 오시면, 꽃을 꽂으세요. 핑르에 오시면 꽃다발을 드립니다. 사랑의 마음이 담긴 꽃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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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음식으로 이어집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곡물에 꿀을 발라 바삭바삭하게 구운 누릉지와 비슷하기도 하고 강정 같기도 한 음식입니다. 처음에는 잣을 구웠나 했는데 잣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중국에서 산 음식은, 끝까지 다 먹지 못하고, 나중에는 버리는 것이 많은데, 이 음식만은 조금 더 많이 사오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울 정도로 맛이 있었습니다.
골목길에 접어들면 온갖 종류의 잡화와 음식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목각을 해주기도 하고 화지(花鸡:화계)라는 닭을 구어서 팔기도 합니다. 이 화지라는 새가 어떤 새인지는 저도 먹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부채를 부치던 할머니는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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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중국에서 장아찌를 먹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장아찌를 파는 곳이 많았습니다. 무 말랭이, 오이 등의 장아찌 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백화점에서 그렇게 하듯이, 주인 아줌마는 이쑤시개로 찍어 먹어보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더니 길을 가로막고 막무가내로 우리를 자기 집 가게로 밀어 쑤셔 넣었습니다. 다른 중국 음식이 그렇듯, 맛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짠 것이 병이라면
병이었습니다.
아줌마가 추천해주는 대로 몇 가지 구입해 한국에 가져와, 지금도 가끔 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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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르어는 강을 끼고 있습니다. 강 바닥에는 일부러 돌을 갔다 놓았는지, 아니면 본래 이런 돌이 많은지 모르지만, 자갈이 강바닥에 쫘악 깔려 맨들맨들 빛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위에 앉기도 하고 맨발로 걸어서 지압도 받아봅니다.
강은 수영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린 후, 강가를 따라 한 없이 걸을 수도 있습니다. 힘이 부치면 그냥 강옆 노천 술집에서 맥주 마시며 이야기 하면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곳은 신랑신부의 결혼 촬영장이 되기도 하고, 배를 타거나 카약을 즐기는 장소도 됩니다. "강이란 다리 위에서 바라보라고 존재하는 것이요, 다리란 강에서 바라보라고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강과 다리는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 하는 존재입니다. 강에 다리가 없으면 밋밋하고, 강이 없는 다리는 삭막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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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바람 한 점 없습니다. 다리 위에서 강을 봅니다. 강물도 멈춰있고 시간도 멈춰 있습니다. 대지라는 화판에 강이 그려져 있습니다. 나도 저 그림의 한 부분이 되고 싶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나무 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과거를 회상해보고 미래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지난 일을 되돌아 보기는 하되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과거의 나의 행동이 불만족스러운 면이 있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미래도 이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지금 나의 행동이나 생각이 옳다고 믿기에 미래에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기야 지금 후회할 것이 뭐가 있으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잘 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안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순간을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옳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과거는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런 좋은 자연에서 삶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놈은 아마 저 같은 바보뿐이 없을 것입니다. 그냥 자연이나 즐기면 오죽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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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은 골목길로 이어지고, 사람의 꼬리는 또 사람의 꼬리로 이어집니다. 골목길은 장사꾼이 돈벌이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이 부채를 부치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곳이기도 합니다.
골목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어렸을 때 골목에서 많이 놀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적, 골목길에서 비석치기나 딱지치기를 했고, 구슬치기를 하고 자치기라는 것도 했습니다. 벽에다 낙서하다가 주인에게 들켜서 욕을 얻어 먹은 적도 있습니다. 도망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복한답시고 그 집 담벽에다 "쉬"하다가 또 들켜서 귀방망이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 골목을 오늘 여기서 다시 봅니다.
온통 한자로 써 있는 담 위의 판자 위에, 한글도 보입니다. "안녕하세요"라고 써 있습니다. "소금은 적게 먹고 식초는 많이 먹어라."도 보이고 "모택동주석 만세"라는 글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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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두 명과 할아버지 한 명이 매미를 열심히 돌리고 있습니다. 빨리 돌리면 돌릴수록 실제 매미와 비슷한 소리를 냅니다. 세 명의 어른들이 만들어 내는 매미소리는 강가에서 울어대는 매미를 창피하게 만들 정도로 시끄럽습니다. 구경꾼이 보건 말건 이분들은 습관적으로 대나무 매미를 돌립니다. 저도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보았다가, 순간적으로 습관이 되어 한참 동안 구경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사 주었습니다. 값은 하나에
500원입니다.
기분이 좋은지 할머니는 더욱 열심히 돌리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포즈도 취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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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건물은 많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지만, 그래도 시내 여기저기에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기와지붕 아래 중국 전통의 등불이 걸려 있기도 하고, 기둥 주위에 붉은 천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도 합니다.
마침 근처의 옥상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너무 웃는 바람에 주름살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특히 여인은, 웃을 때 더욱 아름다운가 봅니다. 그런데 지금보니 조금은 귀신처럼 보이는 것을 어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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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다보면 걸어 다닐 곳이 따로 있고, 오토바이가 끄는 마차를 탈 때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태운, 나이가 지긋한 운전기사는 우리를 이상한 골목으로 데려가더니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도착한 곳이 바로 옛날 이곳의 족장, 이 사람들의 말로는 왕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이전에 왕이 살았던 곳이면 뭐합니까? 그 당시에는 떵떵 거리며 천하를 자기 발밑에 두고 에헴 하며 다녔겠지만, 지금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의 후손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보다 앞서간 선배들이 설파했듯이 인생이란 뜬 구름 아니겠습니까? 짧은 인생, 죽은 후 한 줌의 흙으로 되었다가 그것도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왕이 썼던 세수대야는 찬란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으나 언젠가는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쓰던 확독(예전에 곡식 등을 빻는데 사용했던 돌그릇)은 파란 이끼가 돋아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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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 마리가 저 멀리 한 점이 되어 날아갑니다. 그 뒤 안개 속으로 어슴프레하게 산이 보입니다. 옥수수 줄기 사이로 한 아낙네가 지게를 지고 밭 사이에 난 길을 걸어 갑니다. 저 아낙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 우리도 이제 성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가야한다고 말하지만, 발길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정처 없이 떠돌듯, 이제 우리도 우리가
가야할 길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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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7월 24일 오후 5시입니다. 성도의 수많은 볼거리 중에서 두보초당(杜甫草堂)은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이네(國破山河在)"라는 글귀가 떠오르는 두보,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생애는 좌절과 빈곤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 장안(현재의 서안)에서 하급관리직을 맡고 있던 두보는 안사의 난을 피해 이곳 성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5년간 거주하면서 240편의 시를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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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기념관 전시실에 있는 두보의 시>
20만 제곱미터나 된다는 두보 초당을 걷습니다. 당시 두보가 살았다는 암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광대한 공원에는 대나무와 동백나무를 비롯한 수목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고대 유물 출토 현장도 보이고, 연못도 보이고, 그리고 또 내가 들어가 보지 못한 많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평생을 떠돌아 다니며 비참하게 살았던 두보, 결국 그는 59세의 나이로 악양이라는 도시로 가다가 사망했습니다. 어쩌면 천재 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재 시인은 아닌 듯 합니다. 그들이 처한 처참한 현실에서 몸소 겪은 체험이 시로 녹아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참한 현실을 겪으면 다 시인이 될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디 세상살이 하면서 처참한 고생을 한 사람이 두보 한 사람뿐이던가요? 두보는 시인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고생만 하다가 이름 없이 죽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역시 시인도 선천적인 능력과 노력의 결합의 결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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摘花不插髮
采柏動盈掬
天寒翠袖薄
日暮倚修竹
꽃을 꺾어도 머리에 꽂지 않고
잣을 따니 이내 손아귀에 차지요
날씨 추워지니 날씨에 푸른 옷소매 더욱 얇은데
날 저물자 긴 대나무에 기대어 섰네.
<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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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간 곳이 바로 콴짜이 시앙즈(宽窄巷子)라는 곳입니다. "宽=넓다, 窄=좁다, 巷子=골목"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넓고, 좁은 골목"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조금은 넓은 골목이 하나가 있고, 조금은 좁은 골목이 또 하나 있습니다.
거리에는 찻집과 음식점, 그리고 기념품 판매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물건을 사거나 먹는 사람,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이 물결이 되어 움직입니다. 혼잡한 곳에 담뱃대를 팔겠다고, 누워서 뺨이 쏘옥 들어가도록 빨아대는 아저씨가 계십니다. 그 옆에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목에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목청을 돋구어 소리를 하는 중년의 남성이 보입니다. 이런 저런 수많은 군상의 사람들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사천의 유명한 산을
촬영한 사진
전시회장이 보입니다. 현장에 가서도 보지 못했던 스꾸냥산이나 공가산의 정상도 바로 여기서 사진으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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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이 거리를 덮습니다. 어느 식당에 들어갑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종업원이 음식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해 줍니다. 북경 오리 반 마리와, 이름도 생소한 음식 몇 가지 시켰습니다. 마침 칭다오에서 마셨던 "원장"이라는 생 맥주가 있었습니다. 칭다오에서 마셨을 때는 커다란 생맥주 병에 담겨져 있었는데, 여기서는 캔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칭다오에서 들은 이야기는 "원장"이라는 술은 제조된
후 하루 이틀
안에 마셔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처럼 캔에 담지 않고서는 칭다오에서 사천까지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2년전 어느 추운 겨울날, 칭다오에서 마시던 그 "원장"의 맛이 고스란히 그대로 그 속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입과 혀와 그리고 목에 쩍쩍 달라붙었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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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안주가 몇 순배 돌았습니다. 붉은 등이 더욱 붉어지더니 이제는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그러다가 앞뒤로 흔들리더니, 이번에는 내가 흔들렸습니다.
지난 23일 동안의 사천성 풍경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처럼 머리 속에 펼쳐졌습니다. 해로구의 빙하가 생각이 나더니, 타공의 아름다운 산이 떠올랐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을 단빠가 머리 속에 잠시 들어왔다가, 어느 골짜기에 있었던 붉은 돌의 축제장이 지금 내 눈앞에 움직이는 붉은 등과 하나로 합쳐집니다.
머리 속의 필름은 이제 재깍 재깍 소리를 내며 서서히 속도를 늦춥니다. 눈이 닿는 데까지 펼쳐진 야생화의 천국 스꾸냥산을 거쳐,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보지 못할 눈물처럼 처절한 구채구의 푸른 물빛이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오늘 본 "핑르어" 시골장이 내 고향 금산 장날과 겹쳐져 밀물과 썰물되어 흐느적거립니다. "핑르어"의 다리는 금산 쇠전 다리이고, 혼잡한 "핑르어"의 골목은 장돌뱅이들이 이집
저집 재미삼아
들렀던 금산 선술집 골목입니다.
인생의 본질은 본래 "방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가 잠시 머물고 가듯, 나의 인생도 언제나 떠나는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가 며칠간의 머물다가, 나는 또 어디인가로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운명이기 이전에, 인간이 본래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단지 떠나라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불응하느냐의 문제만 남았을 뿐입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 떠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떠나지 않으면 나라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기에" 떠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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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음날 즉 7월 25일 아침 8시 30분 비행기로 중국 사천성 청두(成都)를 떠나 한국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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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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