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사 중심부>
티벳 여행기 02
"달 떠오르면 그대 향하리"
인도가 세계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아니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남아메리카가 최후의 여행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인도나 아프리카 또는 남아메리카는 내 평생 혹시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라사의 포탈라궁은 내 평생 내가 가보지 못할 곳으로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운이 좋은지, 세상이 좋은지, 또는 무슨 팔자가 좋은지 정말로 꿈에 그리던 라사의 포탈라 궁에 가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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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는 1950년 중국이 침략하여 현재까지 이 곳을 점령하고 있으며, 가끔 민중 폭동이 일어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중국인들은 이것을 "해방"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티베트인들은 "침략"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기야 1950년에 중국 땅이 되었다면, 이미 60세 이하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자기 나라가 중국인지 티베트인지 헷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티베트는 어디를 가나 구경을 한다는 것이 대체로 사원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를 조금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티베트 불교는 문헌에 의하면 홍모파라는 종파가 전통적으로 있었고, "총카파(이것은 종파가 아니라 사람 이름)"라는 사람이 개혁하여 황모파(종파)를 만들어 오늘날 초대부터 달라이 라마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달라이는 "바다", 라마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현재 14대 달라이 라마가 있으나, 그는 중국이 침입해 오자 인도로 피난하여 세계를 떠 돌고 있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는 대승불교와 밀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티베트를 돌아다녀 보면 대승불교인 우리 나라 불교와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고, 어떤 곳에 가면 남녀가 교합하는 불상이 있기도 하여 헷갈리기도 한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으나, 좀더 자세히 알려면 티베트 불교에 대해 각자 공부 좀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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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6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티베트 불교 사원이라는 포탈라궁을 찍으러 별이 초롱초롱 할 때, 호텔을 나섰다. 포탈라 궁 앞 큰길 건너 좌측에 있는 사진 촬영대에는 이미 수 많은 사람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진을 치고 있었다. 사진 촬영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느낌은 봄에 찾았던 위엔양의 계단식 논 촬영지와 비슷했다.
촬영대에는 이미 차지한 자리를 내 주지 않으려는 암묵적 자리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나도 남에게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죽기살기의 각오로 자리를 지켰다. 양쪽 팔로 난간을 굳게 버티면서 비집고 들어오려는 여인네에게 끝까지 양보의 미덕을 보여주지 않았다. 자비를 주장하신 부처님께는 좀 미안한 일이었지만, 휩쓸려가는 분위기에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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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라 궁은 처음 도착했을 때 붉은 가로등 불빛 아래 있었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옅은 붉은 빛으로 바뀌더니, 곧 연기를 동반한 뿌연 빛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사진에서만 보았던 130미터의 위압적인 모습을 들어냈다. 포탈라궁은 자주색과 흰색의 조화를 이루어 장엄하며 환상적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위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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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을 때부터 포탈라궁 주변은 티벳 각지에서 올라온 신자들의 코라 행렬(절 주위를 도는 것)로 붐비기 시작했다. 젊은 아낙네가 가끔 보였으나,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와 아저씨 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마니차를 돌리며 걷는 사람, 염주를 세면서 걷는 사람, 주문을 외우면서 걷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의 종류도, 모습도, 그들이 내는 소리도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울면서 3보 일배를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어른을 리어카에 태워 끌고 갔다. 어떤 사람은 정말 보기에도 딱한 팔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장애인이었는데, 하늘을 보며 울부짖는 그 소리가 광야에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세레 요한과도 같았다. 코라를 돌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돈을 건네 주었다.
코라의 한 쪽에는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신발, 옷, 장갑, 모자 등을 파는 물품점과 수퍼가 자리잡고 있었다. 식당 어디를 가나, 가게 어디를 가나 순례자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은 남루하고 피로해 보였으나 눈동자만은 한 밤중의 호랑이처럼 초롱초롱했고, 햇볕에 그을린 그들의 피부는 가시밭에 굴러도
피가 날 것 같지 않을 것처럼 탱탱했다.
그들이 돌고 있는 코라 옆에는 라사 시민들이 나와 체조를 하고 있었고, 호숫가를 따라 조깅을 하고 있었다. 좀더 눈을 들어보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요가를 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코라를 도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어 마치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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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많은 입장료를 내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 궁전의 내부는, 한 시간만 관람이 허용되었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방이 약 1000개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본 것은 겨우 몇 십 개에 지나지 않으니, 강물에 물수제비 날아가듯,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포탈라궁 내부를 관람할 때 통풍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지, 또는 사방에 켜 놓은 촛불 때문인지 냄새가 퀴퀴했고, 그로 인해 머리가 띵하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가 거처했었던 곳은 생각보다 검소하고 좁아 보였다. 여기를 지나서 위 아래로 오르고 내리며, 또 돌고 돌면, 과거 달라이 라마의 불상이 죽 늘어서 있는데, 모두 금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금도 녹이
스는지 모르겠지만, 금인지 동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검은 색깔이 입혀져 있었다.
안내에 따르면 7세기에 송첸캄포 왕이 처음 이 궁전을 세웠다고 한다. 송첸캄포는 웬만한 절에는 다 불상이 세워진 티베트의 영웅적인 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보는 이 궁전은 1645년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문화 혁명 시대에는 홍위병들이 파괴하려고 하였으나 주은래가 군대를 보내 파괴를 막았다고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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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를 도는 사람들>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사람들>
또한 사방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군데를 땅에 댄다는 뜻이다. 먼저 두 무릎을 땅에 대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팔을 쭉 뻗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나도 전에 오체 투지를 시험 삼아 해 보았으나 108번은커녕 단 10회도 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부터 오체투지를 하면서 이곳 라사까지 온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며칠, 몇 달,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이렇게 오체투지를 할까? 이것은 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지던 예법 가운데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불·법·승 삼보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예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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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사 거리에 북경 중로니 북경 동로니 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사진만 보아서는 여기가 북경인지 라사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조캉 사원 주위에 해가 저물고 있다.>
<조캉 사원 앞에서 오체 투지하는 신자들>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사람들. 종교를 떠나 도대체 사람이 무엇인지 인간의 근본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때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진다.>
<조캉사원 근처에 해가 진다.>
지금부터 약 300년전, 티베트의 라사에 있는 조캉 사원 근처 길 한 모퉁이에 조용하고 아담한 술집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동산에 달이 뜨기 시작하면 한 남자가 도포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살며시 문을 열고 땅을 바라보면서 수줍은 듯 나타났다.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보아 귀족의 자녀처럼 보였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망울에서 우수에 어린
신비스러운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가 내품는 담배 연기가 공중에 고리를 형성하며 퍼져 올라갔다.
종업원: 오늘은 무엇을 드시겠는지요? 젊은이: 예, 백주 한 잔 주시오. 저기 떠오르는 달과, 여기 창문으로 들어오는 산들 바람을 벗삼아 한 잔 하려 하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으로 보아 종업원과 젊은 남자는 안면이 있는 듯 했다. 초겨울의 바람을 즐기는 듯, 젊은이는 먼산을 바라보며 다시 한 모금 담배를 빨았다. 담배 연기는 겨울 바람을 타고 서서히 반대 쪽으로, 계곡의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이때 출입문에 매달린 종이 쨍그렁 울리더니, 문을 열고 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티베트 전통 가죽 구두를 신었고, 티베트 전통복에 전통 모자를 쓴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입술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아차릴 정도로 아주 부드럽게 떨렸으며, 땅을 바라보고 걸어들어오는 그녀의 눈에는 우수와 애수의 강물이 흘러 갔다. 그 여인은 한 숨을 쉬더니 의자를 끌어
당겨 젊은 남자 앞에 천천히 앉았다.
그들의 만남은 길지 않았으나, 남녀의 사교 경험이 전무했었던 그들은, 짧은 시간에 애틋하게 정이 들었던 연인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만남에서 이 남자의 정체가 드러나, 여자는 오늘 이 남자와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여인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산산이 부서진 사랑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사랑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사랑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사랑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이다. 사랑하던 사람이여! 사랑하던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에 지고 사슴의 무리 슬피 우나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면 저기 떨어져 나가 앉은 산처럼 그렇게 이제 작별을 고하나이다. 아,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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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심금을 울리는 시 한수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남겨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흐느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무런 말 대꾸할 시간도 없이 사라진 여인의 뒷 모습을 멍청히 바라 본 후, 그 남자는 긴 한 숨을 쉬며 거리로 향했다. 찬 바람에 그의 도포자락이 공중에 펄럭였고, 땅 위의 낙엽이 사방에서 어슬렁거렸다. 뚜벅뚜벅 조캉 사원 앞을 지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히고, 마음에서 솟아나는 알 수 없는 눈물에 어깨가 움직였다. 그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포탈라 궁을 향해 걸었다.
그날 밤, 서글픔과 애절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는, 창문을 열고 그녀가 시 한수를 남겨 놓고 떠났던 조캉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달은 휘영청 밝았다. 분노와 절망과 애절함에서 몸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수년간 닦은 수양으로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그대 향한 일편단신 그 누가 알겠느냐 사랑이 병이 되어 잠 못 들어 하노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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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방적으로 사랑의 단절을 선언한 후, 목이 메이고 가슴이 터져내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던 이 가련한 여인은 옷 소매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하늘을 보아도 눈물이요, 땅을 보아도 눈물이요, 고개 숙여 밥을 바라보면 밥그릇에 눈물이 가득이었다.
뫼는 높디 높고 물은 길디 길다 높은 뫼 긴 물에 갈 길도 그지없다 님 그려 젖은 소매가 마를 날이 있을까
세월은 무정한 법. 인정사정 없는 세월은 흘러 어느덧 3년이 되었다. 속담에 있었던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멀어지는 법이다." 하나 이들의 사랑은 속담도 틀리게 만들었다. 서로 볼 수 없게 되자 오히려 이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갔다. 하지만 세월인들 이 두 연인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야속한게 세월이라 누가 말했던가? 눈에 보이는 라사강처럼
또 3년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여인을 잊지 못하는 젊은이는 매일 밤 여인을 꿈꾸며 창문을 열어 조캉 사원을 바라보며 한 숨 섞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초저녁 달빛 아래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님도 날 생각하는가 지척에 임을 두고 꿈만 꾸고 있노라.
남자의 애틋한 사랑이 바람으로 전달된 것일까? 남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 한다는 말이 드디어 여인의 귀에 들려왔다. 기막힌 현실을 어쩔줄 몰라 눈물로 일어나고 눈물로 잠을 청했던 이 여인은 연인이 있는 포탈라궁을 향하여 한 숨을 쉬었다.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뵌단 말이 그 더욱 거짓말이 날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보이리
무심한 세월은 흘러 또 3년이 되었다. 여인은 이제 뼈만 남은 앙상한 해골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모의 속타는 기원과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라마시여!"라는 말 한 마디를 남겨두고 한 많은 이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제 저는 가옵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연 저 세상에서 이루어지길 간절히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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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남자의 거처에도 알려졌다. 남자는 묻고 물어 여인이 묻혀있는 시골마을을 찾았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여인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흐느껴 울었다. 이제는 풀이 자랄대로 자란 무덤 위에 손을 얹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내 이제 그대를 대할 수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남자는 바로 달라이 라마 6세였다. 이 달라이 라마 6세가 사랑했던 여인을 그는 Makye Ame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만났던 술집도 Makye Ame라고 이름 지었다. Makye는 "성스러운"이란 뜻이고, "Ame"는 "어머니"란 뜻이다. 이 술집이 지금도 조캉 사원 모서리에 있는 Makye Ame 술집이다.
어느 날 밤, 마키 아메라는 술집에 내가 들렸을 때, 그 집은 3층까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분을 기다렸으나 자리가 나지 않아, 차 한잔 마셔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곳에 있는 내부와 마키 아메가 그려져 있는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거리를 걸었다. 달라이 라마6세가 여인과 헤어졌던 그 날처럼 바람이 찼다.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들의 슬픈 사랑의 감동이 온몸에 바람과 함께 휘감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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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메 내부의 사진>
그대와 함께 했던 마키 아메가 저기 보이는구나. 달이 뜨면 언제나 그대 사랑 내 마음에 있었지. 오늘 밤 달이 뜨면 내 발길 나도 몰래 그대 향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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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 아메 내부>
<마키 아메>
<조캉 사원 근처의 마키 아메>
*이 글의 후반부는, "달라이 라마6세가 자주 마키 아메라는 술집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소월의 시와 한국 고시조를 필자 마음대로 인용, 변형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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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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