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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중국 티베트-라오스-인도 18 "룸비니 그리고 인도로 출국" (라오스 8)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3. 07:51

 

네팔여행기 8 (최종회)

 —"룸비니 그리고 인도로 출국"—

 

 

 

 

2011년 10월 18일, 포카라를 출발하여 룸비니로 출발한다. 아이들을 만나면 주려고 가게에서 캔디를 샀다. 하나 먹어 보았더니 맛이 너무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캔디가 아니라 양초였다. 그렇게 조그맣고 앙증맞은 양초를 어디에 쓰는지 모르지만, 비닐 봉지에 50개 정도가 들어있었다. 다시 가게로 가서 교환한 후 비닐 봉지를 읽어보니 싱가포르에서 수입한 캔디였다. 의도적이건 실수건 내 인생에서 양초를 먹어본 것은 처음이다.

 

 

<중간에 잠깐 정차한 곳에서, 어떤 사람이 기계를 작동하여 가위를 갈고 있다.>

 

 

우리가 타고 가는 자동차는 토요타 자동차였다. 오늘 정말 좋은 자동차 한 번 타본다고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막상 타고 보니, 속은 중병이 들고 겉만 멀쩡한 차였다. 모든 시설이 엉망인데다가 문도 밖에서 열어야 열렸다. 더구나 운전수는 시간을 아끼려고 그러는지 좁은 길을 엄청나게 빨리 몰았다. 반대편에서 오는 자동차와 부딪칠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으으음"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난폭운전사라고 숙덕거렸고, 한국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운전사는 우리의 걱정과는 관계 없이 자동차 경주 선수처럼 차를 몰았다. 한 마디로 운전수는 열나게 운전했으며, 승객인 우리는 열받으며 타고 갔다.

 

 

<중간에 "부트왈"이라는 도시를 지난다.>

 

 

룸비니에 있는 한국사찰 대성 석가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경이다. 부처님이 태어난 곳 주위를 국제 불교문화 단지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지역의 일부에 한국의 사찰인 대성사가 들어서 있다. 자동차 접근을 금지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한 참을 걸어가야 나오는 한국 사찰은 첫 눈에 보면 황량한 들판에 시커먼 대궐같은 느낌이었다. "뭐가 이리 시시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보면 볼수록 위엄있고 기품있는 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다른 나라 사찰을 모두 돌아본 후에도 역시 "단아하고 품위있고 위풍 당당한 지구 내의 최고의 사찰"이라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룸비니 국제 사원구역 안내지도: 대성 석가사 유인물 인용>

 

 

학교 다닐 때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났다고 분명히 배웠었다. 한국에 "룸비니"라는 이름의 유치원이나 식당 등이 많은 것은 알았지만, 막상 룸비니가 네팔에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몇 달 동안 불교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비디오를 보며 불교 세계에 빠진 적이 있다.그 당시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일반인으로서의 불교의 세계였지, 신앙인으로서 불교를 알아본 것이 아니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서 발을 빼고 밖으로 나왔다.  

 

<네팔 대사가 석가모니 탄생에 관한 잘못된 내용을 고쳐 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냈다. 석가모니는 룸비니에서 태어났으며, 룸비니는 네팔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2011. 12. 27일자 Korea Times>

 

 

 

<대성 석가사>

 

<대성 석가사의 식사>

 

 

대성 석가사의 숙박비는 자는 것과 먹는 것 세 끼를 포함하여 일인당 하루 5,000원이다. 엄청나게 싸다. 우리는 천장에 큰 선풍기가 돌아가는 널직한 2층 방을 배정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더위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얼마나 더운지 머리가 지끈 거리고 아팠다. 다른 사람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이미 한 사람이 밖에 의자를 갖다 놓고 모기를 쫓아가며  졸고 있었다.

 

 

<대성석가사의 2011년 10월 결산내역. 이런 것을 공개하는 것도 흥미롭다. 대성 석가사 홈페이지 인용>

 

 

<새벽의 대성 석가사>

 

 

법당 주위를 기웃거렸다. 스님 한 분이 염불을 하면서 천천히 법당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니 또 인간의 근원적이 문제를 만나게 된다. 머나먼 한국에서 와서, 왜 이 밤중에 염불을 외우면서 이국 땅을 밟고 다닐까? 나는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보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더 골똘히 생각했다. 모기에 물리며 한 참을 서 있다가 신발을 벗고 법당으로 들어가 방석을 깔고 앉았다. 약 20명의 신도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국 땅에 와서 여기에서 묵상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인가? 도대체 뭐가 이상한 것이고 뭐가 이상하지 않는 것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이상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상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 참 자리를 지키다가 밖으로 나왔다.

 

 

<대성 석가사 건물 위로 해가 뜨고 있다.>

 

 

<국제 불교 단지 안내도: 대성 석가사 홈페이지 인용>

 

 

<연못>

 

 

아쇼카 기둥이 있는 석가 탄생지로 향했다. 봄날 안개 끼듯 연무인지 수증기인지, 연못 위에 히끼무레한 안개가 덮여있다. 좀더 걸어가면 모두 신발을 벗으라는 지점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 성지(Sacred Garden)인 셈이다.

 

 

 

<보리수 나무 주위에 스님이 앉아 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큰 보리수가 서 있다. 둘레에 승복을 입은 스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고 사람들이 그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돈 지불한다. 그 중에는 평복을 입은 젊은이도 한 사람 있었는데, 왜 그가 거기 앉아서 돈을 받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절 터>

 

 

<아쇼카 석주>

 

 

이 석주는 현재 싯다르타 연못 북쪽에 위치하며 약 7.2m의 높이로서 지면으로부터 약 3.3M 지점에 아쇼카 왕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석주에 새겨진 명문에는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야댜시(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왕은 즉위한지 20년이 지나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여기에서 붓다 샤카무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했음을 경배하기 위함이다. 룸비니 마을은 조세를 감면하여 생산물의 1/8만 징수케 한다." 라고 새겨져 있다. (다른 지역은 생산물의 1/6을 징수함.)<대성 석가사의 홈페이지 인용>

 

 

<석가모니가 태어난 지점을 표시하는 돌이 안에 들어 있다.>

 

 

흰 건물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여기저기 무장 경관이 서 있는 가운데 놀라운 장면이 목격된다. 바로 지름이 약 50cm 정도의 돌덩어리다. 거기에 "정확하게 석가모니가 태어난 지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의 태어난 장소가 "정확하게" 바로 거기라고 한다! 내가 뭐 별로 할 말은 없지만, 그 동안에 전쟁도 수 차례 일어났을 것이고, 지나가는 사람이 발로 차기도 하고 수레가 지나가다 건들기도 했을 텐데, 지금도 그곳이 그렇게 "정확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 바라보기가 좀 무서웠다.>

 

 

어디서 굳 모닝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바라보니 이상한 사람이 휠체어에 타고 있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사람을 현실로 보니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끝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떴다. 

 

 

<아무나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

 

 

<태국 사찰>

 

 

<먼 곳에서 촬영한 사찰: 현재 건설 중인 사찰로 미얀마 또는 캄보디아 사찰로 보인다.>

 

 

<일본 사찰>

 

<네팔 사찰>

 

 

자전거 택시를 대절하여 여러 나라의 사찰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이 지금 건설 중이어서 현장 접근이 어려웠다. 박물관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으나 볼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때까지 건설된 것 중 가장 볼 만한 것은 일본 사찰과 중국 사찰, 그리고 네팔 사찰이었다. 일본 사찰은 흰 건물이 주위의 녹색과 잘 조화를 이루었고, 네팔 사찰은 화려한 것이 특징이었으며, 중국 사찰은 자금성의 모양을 본뜬 듯 하였다. 그래도 가장 정서에 맞는 사찰은 한국의 대성 석가사였다. 앞으로 이곳을 방문하려고 하는 사람은 몇 년  더 세월이 지나, 국제 불교 단지가 제 모습을 갖춘 후 여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국 사찰>

 

 


 

<불교 유적지를 향해 떠난다.>

 

 

<유적지를 향해 가는 중 보이는 풍경>

 

 

 

 

대성 석가사의 스님으로부터 안내를 받아, 그곳에서 대절해주는 차를 빌렸다. 불교 유적지로 처음 찾아간 곳은 쿠단이라는 곳이다."부처님께서 교화를 하시다가 카필라국에 돌아오셨을 때 성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잠시 머무신 곳이다." 풀이 푹푹 빠지는 넓은 들판에 돌무더기만 남아 있는  유적지였다.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동네 아이들 몇 명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남루한 옷 차림에 아무 것이나 주면 좋아하는 그런 아이들이었다. 한 쪽에서는 아이들이 손으로 밥을 먹고 있었는데, 불쌍해서 못 봐줄 상황이었다. 아프리카에 가면 어떨지 모르지만 여기 네팔만 하더라도 시골만 가면 그 가난함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처음 간 곳: 쿠단. 대성 석가사 유인물>

 

 

 

<쿠단>

 

 

 

 

 


 

<카필라성 입구>

 

 

<대성 석가사 유인물>

 

 

어린 시절을 보냈던 카필라 성에 도착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시달다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왕자로서의 지위와 함께 호화로운 생활을 향유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마음 속에는 많은 고민이 누적되어 갔다. 청년 시절의 싯달다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는가? 왜 늙고 병들며 죽어야 하는가?"로 고민했다. 19세에 결혼한 그는 인간이란 무한한 욕망의 덩어리여서 어디까지 가더라도 욕망을 채울 수 없음을 깨 닫게 된다. 드디어 29세에 그는 바로 이 카필라 성을 탈출하여 수행의 길로 접어든다.

 

 

<카필라 성>

 

 

<카필라 성 터에 있는 코끼리 상>

 

 

<카필라 성의 연못>

 

 

카필라 성은 수 많은 관광객이 있을 법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뜨거운 햇빛이 내려 비치는 성터는 허리만큼 올라오는 풀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한쪽에는 숲이 있었으며 또 한 쪽에는 연못이 있었다. 넓은 들판 저너머로 동네가 있었는데, 그 동네를 포함한 것이 카필라 성인지 아니면 철조망을 쳐 놓은 내부만 카필라 성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동네에 사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이비 안내원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안내한답시고 달려들었다. 그는 돌무더기만 남은 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응접실이고, 저기가 부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진정으로 듣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시큰둥하게 들으며 발길 닿는대로 돌아다녔다.

 

 

<카필라 성에 사람들이 다녀서 만들어진 길>

 

 

<카필라 성을 나와 목적지인 소나울리로 향하는 중 찍은 사진>

 

 

카필라성에서 나와 인도와의 국경도시 소나울리로 향했다. 넓은 들판이 누런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갖가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가기도 하고, 검은 물소 떼가 아스팔트 위를 활보하기도 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손을 흔들기도 하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 쓴 여인네들이 할 일 없이 길 옆에서 노닥거리고 있기도 했다.  

 

 

<한 여인이 물 속으로 걸어가더니 그냥 물 속에 '풍덩' 주저 앉는다.>

 

 

 

<소나울리에 도착한다.>

 

 

소나울리는 그야마로 더러움의 상징인 그런 도시였다. 사람들은 아무 데나 버리고 길옆 담벼락에 자유롭게 물지도를 그렸다. 병든 개가 자기들끼지 짖어 대다가 김이 빠지면 그냥 큰 대자를 그리고 잠을 잤다. 며칠을 굶었는지 다리가 휘청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엇인가를 주워보려고 땅만을 바라보며 걷는 젊은이도 있다. 가게는 먼지로 뒤 덮여 있어서, 그 안에서 파는 생수를 마셔야 할지 말아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가 지나치게 끼끗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깨끗하지 않은 것인지 뭐가 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새벽의 소나울리>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 주변을 다시 걸어서 돌았다. 사람들이 좀 적을 뿐 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였다. 50미터만 가면 바로 네팔에서 인도로 가는 국경선이 나온다. 수 없이 왕래하는 사람들이 마치 6. 25 전쟁을 피해 남으로 몰려드는 피난민 같다. "여기보다 인도는 더 하다고 하던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 한 사람이 말했다. "울지마, 여기는 소나 우는 도시야. 그래서 소나울리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소나 울어야지, 그러면 내가 울리?"

 

(2012년 2월 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