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기 7 —"3박 4일 푼힐 트레킹 Part II—
행여 일출(日出)을 못 볼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여, 새도록 자지 못하고, 가끔 영재를 불러 사공(沙工)다려 물으라 하니, ..................................................... 내 마음이 불안하여 한 소래를 못 하고, 감히 치워하는 눈치를 못 하고 죽은 듯이 앉았으되, 날이 샐 가망(可望)이 없으니 연하여 영재를 불러, <"동명일기" 중에서>
동이 트느냐? 새벽 3시에 잠에서 깼다. 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 뒤척이다가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눈은 말똥말똥, 귀에는 이상한 소리만 들렸다. 동이 트느냐?혼자 말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이러기를 몇 번, 참을 수 없어 다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간밤의 구름은 온데 간데 없고 희미하게 안나푸루나의 설산이 창문에 가득 차 있었다. 눈을 비비고 부릅뜨며 다시 유리창에 코가 눌려져 납작코가 될 때까지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여 관찰하였으나, 큰 윤곽만 보일 뿐, 안나푸루나의 머리와 꼬리를 구별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흐느끼는 것은 소복을 입은 여인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의미한 달빛 아래 희말라야가 흐느끼고 있었다. 땅 바닥에 패댕이 쳐진 나뭇잎 소리에 희말라야의 흐느낌은 하늘을 채우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내 주위를 엄습하고 있었다. 무섭다. 떨린다. 온 몸이 으시시하다. 큰 칼을 빼어 들고 나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는 스산한 분위기에 눌려,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군가의 "동이 트느냐?" 소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새벽 사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고 있을 때, 밖을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판자로 된 복도를 걷는 등산객의 발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발소리처럼 가슴으로 후벼 파고 들어온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반.
밖으로 나와보니 사방이 검고 바람이 차다. 벌써 우리 앞에 푼힐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 놓는 사람들의 무리가 이어지고 있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고레파니는 해발 2874미터, 여기서부터 해발 3210미터로 올라가야 한다.
땅바닥은 보이지 않고 앞 사람의 발걸음만 보고 따라 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리 속에서 한국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듯, 푼힐 언덕은 나무 반 사람 반이었다. 사람 중에는 서양인이 반 한국인이 반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한국인이 많았다.
약 50분 후 푼힐 정상에 도착했다. 수백명이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서서히 열리면서 눈으로 덮인 산의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감격스럽게 서쪽 하늘을 주시한다. 그러나 그 아래 쪽은 구름이 가리고 있어서 더 이상 산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서쪽의 눈 덮인 산이 조금 보이더니, 동쪽이 붉어지며 해가 뜰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단 몇 분만에 기대감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서쪽의 하늘은 산 꼭대기만을 보인 채 더 이상 구름의 옷을 벗기를 거부했다. 동쪽에는 해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연무에 휩싸여 버렸다. "으----음", 여기 저기서 실망의 한숨소리와 장탄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오늘 일출은 이렇게 끝나나 보네." 그렇게도 기다렸던 "푼힐의 일출"이었건만, 아쉬움만 남긴 채, 가을이 저만치 가듯 그렇게 "푼힐의 일출"은 낮술 깬 뒤의 백일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가슴을 울리는 일출이었어야 했다. 눈물이 줄줄 나와 눈물 반 콧물 반이 되었어야 할 일출이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푼힐의 일출은 바로 내 눈 앞에서 장맛비에 봇물 터지듯 속절없이 나의 기대감을 맷돌아 갈아 허공에 뿌리고 있었다.
이 정도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보다. 꿩보다 닭이라고 이 정도 본 것만도 다행이라는 분위기로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다시 살아났을까? 서울 뚝배기 주인 말대로 찬란을 일출을 기대하고 눈물을 준비한 사람들은 헤적헤적한 얼굴과 실망스런 표정으로 서로를 겸연쩍게 바라보며 헛웃음만 공중에 내 뱉고 있었다.
다시 게스트 하우스로 내려왔다. 6시 50분. 정상에서보다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는 경치가 차라리 낫다. 바로 앞에 보이는 짙은 초록의 옷을 입은, 산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설산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망원 렌즈로 당겨 본 바로 앞에 있는 설산 봉우리는, 금방이라도 나를 덥치려는 듯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할 때,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야외 식당에서 한가롭게 앉아 있는 노부부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그들은 그곳 경치가 너무 좋아 며칠 더 있다가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단지 몇 시간 보기 위해 이틀 간을 고생하며 고래파니까지 온 것이다. 2-3일간 더 머문다면 싱그러운 대자연을 즐길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야말로 눈물이 줄줄 나오는 황홀한 일출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우리는 현실과 타협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원시림으로 덮인 숲길이었다. 나무가 수명을 다하고 죽어 쓸어져 있기도 하고, 서 있는 나무는 두툼한 이끼 옷을 입고 있었다. 주위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옆에 있는 나무만 보이는,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길을 한 없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그렇게 높은 곳에 누가 갖다 놓았는지 등산객을 위한 공예품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곳이 있었다. Greenview Lodge에 도착한 것은 11시, 우리가 출발한지 두 시간이 지나서다. 쉬는 사람 무엇을 먹는 사람 갖가지 군상의 무리들이 여기저기 앉아있다.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 노인들이 많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들이 한국에 대해 인상이 남는 것은 한국 음식이라고 말한다.
중간 어딘가에서 한 없이 내려갔다가 한 없이 올라가는 코스가 있는데, 정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걸어야 한다. 몇 발자국 걷다가 쉬고 또 몇 발자국 걷다가 쉬어야 한다. 나중에는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계속 쉴 도리밖에 없었다. 큰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면 이리저리 핑계대기는 아주 쉽다. 산적이 나타나기도 하니 혼자 다니지 말라는 팻말을 보면 간담이 서늘하기도 하다.
물이 길을 덮어 신경을 써서 걸어야 하는 곳이 있고, 원숭이들이 숲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곳도 보인다. 목이 부러질 것같이 많은 짐을 지고 올라가는 원주민의 무리가 보이고, 우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서양인의 무리도 보인다.
갑자기 나타난 안나푸르나 사우스, 어째서 이런 곳에 저런 설산이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무릎이 아파 만지고 달래고 오다 보니 어느덧 우리의 숙박소인 간드룩에 도착한다. 야생화로 둘러싸인 게스트하우스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거제도에서 왔다는 한국인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외국 여행은 처음인데 겁도 없이 혼자 배낭여행을 온 아가씨였다.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에 두려움은 좀 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별 것 아니었다고 했다. 그녀의 여행 비결은 일단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에 가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나 식당에서 정보을 얻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길친구를 만나서 그와 함께 다음 목적지로 가고 또 새로운 목적지에서 낯선 사람을 친구로 사귀어 그와 함께 다시 여행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항상 이렇게 친구를 사귀며 여행을 했다고 했다. "낯선 곳에 가면 우선 한국인이 운영하는 집을 찾아라." 정말 좋은 지침인 것 같다. 7박 8일로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트레킹을 시작하는 그녀는 격투기 선수처럼 건장한 네팔 청년 포터와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기막힌 경치를 보는 것도 즐거웠겠지만, 그런 멋진 남자와 여행하는 것은 더 멋들어진 일인지도 모른다.
<다음 날 새벽 옥상에 올라 주위를 촬영한다. 달이 선명하게 보인다.>
기왕에 시작한 것 뿔을 뽑아보자는 의견이 사방에서 오뉴월 죽순처럼 올라왔다. 오늘도 닭백숙을 먹어보자는 것이다. 중이 고기맛을 알면 벼룩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 있듯, 어제 밤 닭백숙의 맛에 빠져 지금까지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행은 KC의 가슴을 또 한번 철렁하게 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것을 입맛으로 경험한 우리는, 또 한 번 왕창 썌려먹는 뱃장을 부렸으니, "아이구 내일 KC 만나면 난 몰라, 총무 다 책임져~~~~"
여기에서부터는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다. 올라오는 사람들, 당나귀 모두 힘들어 한다. 학생들이 보이기도 하고 가끔 이상한 과일을 광주리에 담아 파는 사람도 있다. 오른 쪽 산에서 폭포가 보이기도 하고, 소에게 물을 먹이는 아낙네가 보이기도 한다. 60키로나 됨직한 짐을 지고 오르는 포터가 보이는가 하면 몸이 아픈 할머니를 지게에 지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그래도 수채화 같은 들 풍경이리라. 중국 위엔양의 계단식 논처럼 조그만 논빼미에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논 여기 저기에 한 두 그루 느티나무가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바람이라도 조금 불면 벼이삭의 속삭임이, 선생님 없는 여학생반의 자습 시간처럼 시끄럽다.
우리가 출발했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3박 4일만에 다시 보는 골목길이 고향 길처럼 낯이 익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가는 꼬마들의 얼굴에 식은 땀이 송송 맺혔다. 시커먼 솥에 밥을 하는 사람이 보이고, 사랑하는 딸을 무릎에 앉히고 머리 속의 이를 잡아 주는 어머니도 보인다.
지난 세월 생각하니 모든 것이 꿈만 같다. 힘들게 올라갔던 고래파니, 황홀한 일출을 보았어야 할 푼힐, 산도둑이 가끔 나타난다는 거대한 밀림,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할 닭백숙과 네팔 토종 술. 생각이 생각을 물고 하늘어 치솟아 저 멀리 공중에 나부낀다. 석양과 하나 되어 눈물처럼 아름답다. 그 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저기 우리 차가 왔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 내일 떠나야 할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 룸비니를 생각하며 버스에 발을 올려 놓았다.
(2012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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