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파키스탄, 인도 여행기 3
—"카스 구 시가지와 일요시장"—
<치니와커 삔관>
우리가 묵은 "其尼瓦克" 호텔(위 사진)은 중국식으로 읽으면 "치니와커" 호텔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현지에서 택시를 타고 "치니와커" 호텔에 가자고 하면 잘 알아듣지 못 한다. "치니바그" 호텔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며칠을 카스에서 머물면서 느낀 것은 카스에 사는 위그르 족이 중국의 한족에게 대단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러 중국어를 배우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어른보다는 차라리 초등학생에게 중국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 강점기에 한국이 일본에 대한 태도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설음도 견디기 어려운데, 중국말까지 하다니 간도 주고 쓸개도 빼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왜 신장의 카스 위그르 족은 중국인에 대해 이런 적대감을 갖고 있는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카스(옛날 이름은 Kashgaria)는 실크로드에 있는 중요 도시 중 하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중국과 국경을 접해 있던 곳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신장은 동 터키스탄(East Turkestan)으로 독립을 선포했으며, 이는 위그르족이 중국의 국민당에 반대한다는 조건으로 모택동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결과이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신장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사탄, 타지키스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등 "----탄"으로 끝나는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탄"은 회교국에서 "땅, 대지" 등의 뜻이므로, 회교를 믿고 있는 이곳도 "투르케스탄"으로 독립하는 것이 순리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1949년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1949년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한 후, 국가문제를 협의하기위해 북경으로 가던 신장의 지도자들이 알 수 없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모두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장은 중국의 "신장 자치구"로 편입되었고, 오늘날까지 중국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서 자주 소요 사태가 발생하며, 그때마다 여행을 할 수 없는 구역이 되다보니, 일년에도 여러 차례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다. 실제로 현지에서 위그르 족을 보면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양인이다. 인종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전통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그들이다. 그들이 중국인과 섞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를 중국 관광객으로 알고 싸늘한 눈치를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때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해야만 했었다. 시내나 관광지를 돌아다닐 때, 외국인을 거의 볼 수가 없었으며, 현지 중국인을 제외하고는 중국 관광객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카스에는 올드 타운이라고 하여 본래 카스 사람들이 살던 지구가 있다. 지금은 "개조"한다는 이름하에 거의 대부분이 재건축을 하고 있거나 부서진 상태여서,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옛날 한국에서 새마을 사업을 한다고 초가집을 모두 부수고 기와집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꿔 놓은 것과 유사하리라.
옛 시가지는 여러 곳이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우리가 찾아간 곳은 호텔 근처와 위 지도에 나와 있는 두 곳이었다. 폭격을 맞은 듯, 사방이 부서져 있었으며 전기줄과 부서진 문짝, 그리고 쓰레기만 뒹굴고 있는 곳이 많았다. 골목에는 아이들이 맨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고, 가끔 가다 오토바이가 지나가거나 검은 옷을 입은 위그르족 여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기도 했다.
<벽이 위험하다고 중국어, 위그르어, 그리고 영어로 쓰여있다.>
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우리와 마찬가지로 흙을 반죽할 때 짧게 썬 지푸라기를 넣어서 견고함을 증강시켰고, 겉에는 엷은 흰색 칠을 한 것으로 보였다. 더러는 벽돌집도 보이고, 시멘트로 만든 집도 보였으나 대부분은 흙으로 쌓아올린 집이었다. 이것은 큰 단지를 이루었으며, 그 단지에는 골목이 골목으로 이어져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미로 같았다. 이미 개조된 집은 사람이 들어가 살았고, 개조되지 않은 집은 자물쇠로 잠겨있고, "改造"라고 써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허가를 내 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어떤 곳에 가니 중국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아파트에 구경하는 집이 있듯이, 그곳도 옛날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구경 하는 전통 집"으로 보였다.
<아이들은 노란 액체가 들어 있는 컵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시고, 장난치기를 좋아하였다.>
<한 아이가 웃고 있길래 안을 들여다 봤더니 염소 한 마리가 벌거벗겨져 있었다.>
사진에 나와 있는 배가 불룩한 사람이 자기 집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를 따라가 보니 이미 그의 집은 개조를 마친 상태였다. 방이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래도 잘 사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을 카스 시 공무원이라고 소개한 그는, 나보고 이런 여행을 하면 얼마 정도 비용이 드는지 물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실제 비용의 반 정도만 이야기 했더니, 그렇게 적은 돈으로 어떻게 이런 곳까지 오냐고 하면서, 내가 거짓말하는 것을 단방에 알아차렸다.
얼굴을 가린 아내가 있어서 함께 사진 찍기를 간청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는 같이 찍고 싶은 생각이 있는 듯이 보였으나, 아내는 끝까지 우리와 함께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그녀의 검은 무슬림 복장 안으로 화려한 붉은색 원피스가 섬뜻하게 아름다워 보였고, 그녀의 발에 신겨진 신발은 반짝반짝 광이 나고 있었다. 얼굴은 햇빛을 받지 않아 희멀건 했으며, 운동 부족으로 통통하게 살이 쪄 있었다. 본래가 무슬림 여인들이 속옷은 화려하게, 겉은 수수하게 입는다고 한다. 잠시 후, 딸과 아내와 함께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사라졌다. 이 모습을 보면서, 아무런 말 한 마디 없이 수줍어하는 아내의 운명적인 음지의 삶이 왜 그런지 측은하고 쓰라린지, 내 가슴 속으로 한 줄기 절망의 피가 흘렸다. 물론 본인은 훌륭한 남편, 건강한 아이와 함께 사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여기겠지만 .....
다 무너져 가는 흙집에서 빵을 굽는 부부와 아들이 있었다. 절구통만한 밀가루 뭉치를 두 손으로 쓱쓱 이겨가며 반죽하는 아내와 그 옆 화덕에서 둥근 "란"이라는 빵을 구워내는 그들 부부에게서, 부부의 정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평화롭고 다정해 보이는 그들 옆에는 열둬 살 먹어 보이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를 닮은 아들이 벙긋벙긋,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폐허가 된 지붕으로 올라가 푸른 하늘을 한 번 보고는 빵 구을 연료로 쓸 나무 판자를 길 바닥으로 툭툭 떨어뜨리는 그를 보면서, "하늘에서 준 행복을 바로 자기 집 앞에 쌓아 놓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중년 남자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왔다는 그는 50미리 단렌즈만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뒤 몇 번 그와 다시 마주 쳤는데, 사방으로 썰썰 거리며 돌아다니는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좁은 곳에서 계속 맴돌며 닫혀진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집중적으로 촬영하는 인내심을 보였다. 허물어진 집 안에서, 재봉틀 돌리는 모습이라든지, 노인이 누워서 돋보기를 코에 걸고 낡은 잡지를 보는 장면이라든지,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장면들을, 그는 집중적으로 찍었다. 며칠 동안 그곳에서 그렇게 찍을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좋은 작품을 찍는 사람은 그런 인내심과 끈기가 있나보다, 라고 여겼다.
일요 시장은 북쩍대는 군중, 수없이 몰려오는 마차, 소리치는 장사꾼, 하염없이 손님이 올 것을 기다리는 말 없는 장사꾼이 뒤섞여 발디딜 틈이 없었다. 쌀을 씻어서 솥에 넣는 사람, 이상한 차주전자를 질서 정연하게 늘어 놓고 닦는 사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소리치는 리어커꾼,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식당 호객꾼, 싱싱한 과일을 수건으로 윤을 내는 사람, 마른 과일을 수북히 쌓아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건물 안에는 양탄자와 카시미르 스카프가 갖가지 색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허름하고 번지르한 옷과 싸구려 슬리퍼와 구두를 파는 가게가 물건을 가득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지고, 코너를 돌면 다른 코너가 또 나타나서 어디에다 눈을 두어야할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땅에 오디가 떨어져 있다. 오디는 연두색이었으나 맛은 우리나라 검붉은 오디와 마찬가지로 달았다.>
얼음 장사꾼이 있었다. 만년설이 녹고 얼고를 반복하여, 그야말로 돌멩이보다도 더 단단한, 설산에서 캐온 얼음을 팔고 있었다. 적어도 몇 십키로는 먼 곳에서 가져왔을 터인데, 이 더운 여름에 저렇게 두꺼운 얼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 캐낼 때는 분명 얼음 덩어리의 두께가 1m는 넘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얼음이 실려있는 경운기 옆에는 얼음을 찍어 나르는 시커먼 쇠스랑이 있었는데, 마치 손이 없는 사람들이 팔목에 끼운 쇠손가락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저 어름 덩어리 하나 갖다 놓으면 아마 한 달은 꺼떢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길 변두리에 있는 노점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누가 이런 쓰레기 물건들을 사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전을 벌려놓고 죽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헌 옷가지, 헌 가방, 헌 주전자, 헌 기름 병, 구두, 나사, 못, 고무 줄, 깡통, 타이어, 마우스, 전기줄, 아코디온, 쭈그러진 공, 헌 책, 레코드, 유리병, 연장, 리모콘, 모자, 뱀 말린 것, 쇠뿔, .... 하여튼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몽땅 가지고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처분만 기다리는 듯 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생활 수준과 행복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 수준과 행복 지수는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였다. 밀가루 만두 속에 고기속을 집어 넣는 노인이나, 노란 고깃국에서 달걀을 담아주는 젊은이나, "란"이라는 빵을 먹으면서 길을 걷는 어린이나,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끄집어 내어 리어커에 걸려있는 닭다리 하나 사먹는 사람이나 모두 얼굴에는 만족의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인생이 별거드냐 사는대로 사는거지
(2012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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