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1, 2를 동시에 묶어 싣습니다.
중국, 파키스탄, 인도 여행기 1 "그저 바로 길이 거기에 있었기에......."
<파키스탄: 이슬람아바드>
<파키스탄: 라호르>
길 이야기를 하려한다.
파키스탄 이슬람아바드의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길 위로 해가 저문다. 이 해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라왈핀디의 좁고 굽은 길에도 분명 비치리라. 태양이 비치는 곳에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길이 나 있다. 그 길 위로 사람이 걸어가고, 자동차가 지나가며, 당나귀가 흰 거품을 입에 물고 죽기살기로 달린다.
<파키스탄: 훈자>
<파키스탄: 훈자>
파키스탄 훈자의 길은 길 중의 길이요, 왕 중 왕이다. 밭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 사이로 아스팔트 길이 아련하게 놓여있다. 그 길 위로 학생이 지나가다 휙 돌아보고 당황스러워 한다. 저리도 착해보이는 저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얼굴을 흰 면사포로 가리고 눈만 내놓고 다니는 무슬림 여인으로 변할 것이다. 여자의 얼굴은 오직 남편에게만 보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진찍기를 거부하는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슬림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 정말 한 인간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저항할 수 없는 연약한 갈대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조상이 그래 왔기에 온몸을 가릴 뿐이다. 스님은 스님 사회가 그래 왔기에 머리를 깎고, 카톨릭 신부님은 신부님 전통이 그러하기에 신부님 복장을 갖춘다. 전통, 믿음, 정말 무서운 존재다!
<파키스탄: 훈자>
산에서 녹은 물이 계곡으로 흐르고, 그 계곡은 아래 계곡으로 사정없이 달려 내뺀다. 인간은 그 계곡 위에 다리를 놓고, 수직의 절벽에 길을 만들고, "도(道)를 닦는" 심정으로, 그 길을 닦는다. 무너지면 다시 만들고, 씻겨 내려가면 다시 채우고, 끊어지면 다시 잇는다.
<파키스탄: 훈자>
<파키스탄: 훈자>
길은 사람과 동물이 다니는 통로만은 아니다.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축제를 벌리기도 한다.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기도 하며, 행진을 하고, 온갖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낮술도 먹지 않은 사람들이 대낮에 어정쩡하게 추는 춤이 참으로 허접하기도 하다만, 그 가관인 춤을 현지인들은 백만불짜리 쇼를 보듯이 즐거워한다.
<파키스탄: 훈자>
<파키스탄: 라카포쉬>
좁은 산길에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이제 방금 피어난 5월의 연두색 잎이 햇빛을 받아 더욱 산뜻함을 뽐내고 있었고, 그 나무 사이로 당나귀 부대가 불쑥 쳐 들어와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주었다.
아스팔트 위에 휘몰아친 먼지 속을, 큰칼 옆에 차고 호령하는 이순신 장군처럼, 조그만 자동차가 목숨을 걸고 돌진하고 있었다. 그 먼지는 일진광풍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햇빛 속에서 뭉게구름으로 변해 나무 옆구리를 차고 하늘로 치솟아 바다처럼 퍼졌다.
<인도: 델리>
<파키스탄: 페리 메도우 가는 길>
<파키스탄: 라호르>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지역>
중국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려면 해발 4825미터의 좁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 침대 버스를 세워놓고 뒤를 돌아본다. 중국 공안에 대한 두려움을 멀리하는 즐거움과 함께, 지난 며칠간의 카스에서의 생활에 아쉬움과 미련이 밀가루 반죽 섞이듯 밀려온다. 저 멀리 보이는 길이, 지나온 내 인생의 길인 양, 굴곡을 이루며 펼쳐져 있다. 슬픔이나 고통의 과거도 돌아보면 즐겁듯, 뒤돌아본 자갈길이 고향 언덕을 바라보듯 정겹다.
<파키스탄: 라호르>
<파키스탄: 라호르>
<파키스탄: 훈자>
동네 꼬마들이 길 옆에 다 모였다. 단지 어떤 외국인이 자기 동네에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호기심 있게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이 아이들은 적어도 몇 년간은 외국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삽시간에 저 많은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를 가나 파키스탄 아이들은 우리를 따라 다녔다. 우리는 기분에 도취되어 연예인이 된 양 우쭐거렸고, 하루 아침에 된 스타처럼 기분이 들떠 있었다. '연예인의 인기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인기 잃은 연예인이 왜 자신을 비참하다고 여기는지,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파키스탄: 라왈핀디>
<파키스탄: 소금광산 가는 길>
<파키스탄: 라호르>
길에는 항상 장사꾼이 있게 마련이다. 호떡을 굽다가 괴성을 지르며 희한한 표정을 짓는 장사꾼이 있는가 하면, 미소를 무기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 거지떼가 몰려 오기도 하고, 똑 같은 물건을 들고 달려드는 상인들이 있어서, 누구의 물건을 팔아 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파키스탄에는 길이건 가게건, 여자가 없다. 시골에서는 논과 밭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가끔 보이지만, 사람을 상대로 장사하는 여인을 본 적이 없다. 여자들은 오직 집 안에서 집안 일만을 한다.
<파키스탄: 이슬람아바드에서 머리로 가는 길>
<중국: 카쉬가르>
<파키스탄: 파수>
<파키스탄: 페리 메도우 가는 길>
몇 센티만 잘못 발을 떼어 놓아도 200미터 아래 절벽으로 떨어지는 길도 있다. 잠깐 딴 생각을 하거나 현기증이 일어나 중심을 잘못 잡으면 바로 그 순간이 바로 자신의 제삿날임에 틀림없다. 그런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이해 못할 사람이지만, 그런 길을 만든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염원과 어떤 필요성으로 사람들은 저런 위험한 길을 만들었을까? 길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곳에 길을 만들어 놓았으리라.
<파키스탄: 훈자>
<파키스탄: 길기트>
<중국: 카쉬가르>
<파키스탄: 파수>
<파키스탄: 훈자>
<파키스탄: 라호르>
<파키스탄: 라왈핀디>
<인도: 다람살라에서 델리가는 길>
길은 아무나 누워 잘 수 있으나, 용기 있는 사람만이 그 꿀맛을 볼 수 있는 보금자리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편하고 즐거움이 될 수 있겠지만,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뇌리를 가득채운 사람은 그 보금 자리가 수레를 밀고 언덕길을 올라가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도: 델리>
<파키스탄: 라호르>
<중국: 카스>
카스의 좁은 골목을 걷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무엇을 먹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내게 신기한 것보다, 내가 그 아이에게 더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 아이가 단지 옷을 벗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메라를 들이댄 내가 좀 쑥스럽고 미안하기까지 했다. 나도 어렸을 때, 저렇게 자랐고, 저렇게 자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거늘, 이제 세상은 거꾸로 되어서, 마치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듯, 자연스러운 것이 부자연스럽게 되고 말았다.
<인도: 다람살라>
논두렁 길이 있었다. 필리핀의 바나우이나, 중국 위엔양의 논둑길이 그렇듯, 여기 인도의 다람살라의 논둑길도 올망졸망 모여들어 등고선을 만들고, 그 자체로 훌륭한 그림이 되며, 또한 벼 농사로 사람을 먹여 살린다. 수 많은 사람들의 땀방울로 만들어졌을 저 논둑길로 사람이 다니고, 소가 다니고, 당나귀가 다니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을 것이다. 저 논둑 길에 떨어졌을 땀을 모으면 강을 이룰 것이고, 그 위에 떨어졌을 눈물을 모으면 연못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 카스>
새벽에 나와 길을 걸었다. 어둠이 물러가면서 태양이 슬쩍 빛을 뿌리자 길 위에 나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를 보면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는 왜 먼 이국 땅에 와서 저렇게 긴 그림자를 만들며 전방을 응시하고 있나? 유한한 인생사 속에 오늘 그대에게 있어서 이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한 참을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가, 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 넣고 그냥 걸었다.
그저 바로 길이 거기에 있었기에........
<현장녹음 약 40초, 파키스탄: "머리"의 어떤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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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5일) |
중국, 파키스탄, 인도 여행기 2 —"우루무치에서 카스로"—
<여행 지도>
*2012년 5월 15일 한국을 떠나 중국, 파키스탄, 인도를 거쳐 6월 19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 글은, 총 36일간의 나의 경험, 생각, 그리고 상상이 두리 뭉실 뒤섞여 기록되었다.
"왼쪽으로 화장실, 오른쪽으로 분장실, 아래쪽으로 저장실, 위쪽으로 천장실이 있으니 입맛대로 가세요! 그것도 싫으면 환장실이라는 곳도 있으니 가볼 테면 가보시든지, 아니면 저기 여자가 노래하는 곳, 그쪽으로 가보시든지. 내일이면 따블로, 아니 따따블로 환장실을 만날 수도 있으니 알아서 하시든지, 뭐 마음대로 하시지요."
겉 모습으로 보아서는 장족이나 아니면 몽고족의 후예쯤으로 보이는 KC는 눈부신 가로등의 후광을 받으면서 시원, 매몰차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자못 긴장된 모습으로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이 우루무치의 첫밤에 대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첫날밤의 신랑이나 신부처럼 초조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탁자 위에 놓여진 새빨간 라벨이 붙여져 있는 맥주병만이 초점에서 멀어졌다가 가까워질 뿐이었다.
얼마간의 맥주병이 비워졌을 때, 바로 옆에 있는 시끌벅적한 가요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KC말마따나 환장하게 예쁜 아가씨가 중국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고 있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그 아가씨는 한 곡조를 하고는 마이크를 끄고 철수할 준비를 했다. 아, 이래서 환장이 따블이라고 하는구나. 역시 우루무치는 우루사를 먹은 놈이나 견뎌대는 곳이지, 김치나 먹고 자란 나 같은 놈은 눈치나 보면서 갈치 그물에 빠져나가듯 현장에서 사라져야 해.
다음 날(5월 16일) 아침, 카스로 가기 위해 우루무치 역에 도착했다. 예약 해둔 기차표를 사러 창구에 간 KC는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한데, 소식이 없으니 모두들 허공만 쳐다보다가, 다시 땅을 쳐다보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눈 앞에는 장사꾼이 쌓아놓은 컵라면이 어젯밤 본 맥주병처럼 붉은 라벨을 번쩍이며,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개찰 시간이 마감이 되어서 출입구의 문이 닫히고 있을 그 무렵, "빨리, 빨리"를 외치며, 손에 기차표 뭉치와 여권 뭉치를 든 KC가 200미터 장애물 선수 달려오듯, 몇 겹의 철제 울타리를 뛰어넘고 넘어, 바람처럼 날아왔다.
차를 타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 있는데, 철도 직원은 가방 검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다 몸수색까지,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인 듯이 보였다. "내가 뭐랬습니까? 환장을 따따블로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손님의 발길이 끊긴 기차 역에 우리만을 전담으로 안내하는 여자 승무원이 허겁지겁 따라 붙었다. 허둥대며 겨우 기차를 탈 무렵에 한 사람이 외쳤다. "아이구, 내 가방 놓구왔다. 여권, 돈 다 그 속에 들어 있는데." 가방을 조사받다가 정신이 없어 그 자리에 가방을 두고왔던 것이다. 기차역 입구로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를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중의 일이다. "J형,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글쎄, 그놈들이 가방을 주어야 말이죠.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안 주는 거예요." "어떻든 탔으니 다행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법입니다." 옆에 있던 KC가 말을 이었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환장할 일이 따따따블로 발생할 수도 있다구 말하지 않았습니까? 중국이라는 나라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우루무치가 아닙니까?" 누군가가 마지막 말로 이 사건에 종말을 지었다. "우루무치건, 보쌈김치건, 사고뭉치건,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입니다. 으하하하."
<중국 신장성 주요부>
기차는 우루무치에서 트루판을 향해가고 있었다. 거기에서 다시 방향을 남으로 틀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끼고 달려가는 것이다. 달나라인지 화성인지 모를 불모의 땅을 가르며 기차는 달렸다. 검은 바위와 검은 흙, 뿌연 하늘만이 끝 없이 펼쳐져 있었다. 죽음보다도 메마르고, 삶보다도 황량한 사막이었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 말로만 듣던 그 사막을 지금 내가 옆에 끼고 내려가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 25세의 청년을 만났다. 이미 아이가 셋이나 되는 그는 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힘이 들지 않는지 묻자, 낳아 놓으면 다 먹고 살기 마련이므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과연 "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천불생무록지인, 지부장무명지초)(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의 정신을 갖고 있는 젊은이었다. 나는 이 젊은이의 무모한 용감성에 존경심을 갖고 뒤로 물러났다.
또한 젊은이와 아버지가 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교통 사고를 당해 우루무치 병원에 다녀오는 중이었고, 이 젊은이는 새카만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 나와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계속 팔뚝과 등을 득득 긁고 있었다. 돈이 있어서 병원에 다녀온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들은 돈이 있어서 침대칸을 타고 다니지만, 다른 칸에 가보면 며칠을 앉아서 가는 사람이 있고, 돈을 아끼려고 '침대칸'과 '앉아가는 칸'을 한 가족이 사서 교대로 잠을 자며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위그르족으로 보였는데, 좋은 침대에 좋은 음식을 먹는 한족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위그르족에게 같은 기회를 부여했는데, 재주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한족이며, "좋은 직장은 한족이 다 가져갔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그르족이다.
카스에 거의 다달아서야 조금씩 나무가 보이기 시작하고, 개울가에 물기가 적셔져 있었다. 마침내 척박한 땅에서 양이 풀을 뜯고, 멀리 농부가 밭일을 시작할 때에 기차는 카스역에 도착해 있었다. 전날 아침 9시 50분에 출발한 기차가 낮 12시쯤에 도착했으니 26시간 정도 걸려서 우루무치에서 카스에 도착한 셈이다.
<카스 역: "카스(Kashi)"는 중국어로 읽은 것이고, 우리말 한자로는
<카스 시내 지도>
카스 시내로 처음 구경 나간 것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사하러 나가서 이다. 5월이지만 이미 카스시내는 더울대로 더워서, 말 그대로, "카스"시내의 "카스 방"에서 "카스 맥주"나 먹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고기를 쇠꼬챙이에 뀌고 있다가 손을 들어 반갑게 맞아주는 식당 주인을 보며, 중국의 다른 지방과는 다른 따뜻함을 느꼈다. 주문한 음식도 맛이 있어서 만족, 대만족을 외치며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이때 뭔가가 물컹하는 것이 발에 느껴져서 주위를 살피니, 고양이 새끼만한 쥐가 꼼짝도 하지 않고 발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기겁을 해서 주인에게 말했더니 주인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뭐라고 힐책하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는 어딘가로 가더니 긴 집게를 가져왔다. 긴 쓰레기 집게로, 태연하게 쥐를 집어서 봉지에 넣더니 아무 데나 휙 던져 버렸다.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쥐약을 먹은 쥐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배불리 먹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이라고도 했는데, 그 어느 쪽 해석도 신빙성이 없는 듯이 보였다. 내 생각으로는 쥐약 먹은 쥐는 사람이 없는 곳에 죽어 있어야 하고, 배불리 먹은 쥐는 어두운 곳에서 휴식을 취해야지 왜 사람의 발밑에서 "쥐 죽은 듯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가? 아마도 "카스 맥주를 먹었음에 틀림없다"라고 말하는 K형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그 식당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깊은 화덕에 빵을 구워내는 것이었다. 반죽으로 빵을 둥글게 만들어 가운데 불이 훨훨 타고 있는 화덕의 벽에 척척 붙여 놓은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고목나무에서 버섯 따내듯 척척 떼어내어 널찍한 쟁반에 얹어 놓는다. 갈색으로 구워진 빵이 얼마나 맛있게 보이는지 맨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빵의 바닥에는 화덕에서 나온 모래가 섞여 있어서 먹을 때는 잘 떼어내고 먹어야 한다.
빵굽는 사람들은 팥죽같은 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화덕 안에 집어 넣어가면서 반죽을 붙이거나, 익은 빵을 끄집어 낸다. 나는 또 뭐가 잘났다고 그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으니, 뭐 세상이 이리도 불공평한지 모르겠다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람이 살려면 저런 일도 해야하는가'라는 생각에서, 구워낸 빵에 붙어 있는 모래를 씹는 듯, 지금거리는 까칠한 모래 맛을 느끼며 허둥지둥 길을 재촉했다.
한쪽에 이발소가 있었다. 이발사는 졸면서 면도를 하고 있었다. 졸며 깨며,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시퍼런 면도날을 보면서, 사람의 목을 베지 않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다가 천둥이라도 치거나 자동차 경적이라도 울리면, 아니 재채기라도 나는 날이면, 사람 목숨 파리 목숨되는 것은 시간 문제리라. 그 뒤 한 동안, 피 묻은 면도날이, 성난 독사처럼 몸을 고추세우고 내 가슴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호텔 근처에 청진사라는 절이 있었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흔들리는 전등에 새 몇 마리가 흔들거리며 앉았다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아래에 사람들이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외롭게 한 구석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과연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함에 자리를 뜨기 힘들었다.
어디를 가나 복장이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여서, 사진 찍기는 참으로 좋았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약 10,000장의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절대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대단히 조심하였다. 솔직히 거리에서는 한 번도 대놓고 사진기를 들이대지 못했다. 그러다가는 돌로 얻어 맞거나, 카메를 빼앗기거나, 아니면 자갈밭에 눕혀놓고 구두발로 밟아버린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이 찍히기 싫어하는 것을, 나는 억지로 찍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여인을 찍고 싶은 생각을, 나는 내 사춘기 시절 성욕을 참듯이 무지막지 하게 칼로 도려내야만 했다. 정말로 사진을 찍고 싶을 때는, 먼 데서 줌 망원렌즈를 사용하여, 안 찍는 듯 찍기도 했는데, 이럴 때면 도둑이 제발 저리듯, 간담이 서늘해지고 나도 모르게 손에 진땀이 나기도 하였다.
길을 걷다가 뜨거운 풀밭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목발인지 무엇인지 그 위에 몸을 기대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의 머리 맡에 놓여진 자루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호박이나 오이일까, 아니면 고구마나 감자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 것임은 틀림없는 듯 했다. 한 동안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자리를 뜨면서 "인간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삶은 고달프다"는 생각이 시시각각으로 교차해서 떠 올랐다. 백일몽일지라도 그가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꿈을 꾸기를 바라면서, 아마 그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호텔을 향해,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2012년 6월 2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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