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 2012년 10월 >
낭만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10월의 남이섬은 낭만 그 자체다. 울긋불긋한 단풍 사이로 태양이 스물스물 뚫고 들어와 내 눈에 부딪친다. 햇빛으로 잠시 내 눈이 먼다. 서서히 눈이 밝아지기 시작하면 한 줄기 긴 파도 꼬리를 남기며 날쌘 모타 보트가 S 라인을 그리며 질주한다. 그러다가 그 배는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렇다. 꿈과 낭만의 섬, 바로 거기가 남이섬이다.
<남이섬: 2012년 10월>
<남이섬: 2012년 10월 >
꿈과 낭만이라! 나의 시계는 나의 대학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대학교 때, 왜 그런지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본래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에 들어갔지만, 막상 들어가 놓고 보니 교사가 되는 것이 싫었다. 꼭 그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때 죽어라 공부만 한 때문일까? 공부에 신물이 난 것일까? 자유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어서일까?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기가 싫었다. 마치 칡 덩굴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자기가 타고 올라간 나무를 이리저리 옭매어 묶어놓듯, 운명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무엇이 나를 칭칭 감고 있는 듯 느껴졌다. 나는 학교 생활에 점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대학 1학년 때: 그 당시 키 185센티에 체중 60키로였다. 현재는 키는 줄고 몸무게는 늘어 183센티에 69키로 나간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수업 시간에 교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니 입시 공부만 했던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가장 난감한 과목은 독일어와 사회학과 철학 시간이었다. 독일어야 노상 der, des, dem, den만 외우다가 쥐뿔도 모른 채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갔으니 성적이 D가 나와도 뭐 딱히 할 말이 없다. 문제는 사회학과 철학이라는 과목이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들으려고 해도, 이상(李箱)의 시(詩) 오감도(烏瞰圖)를 읽는 것처럼, 도대체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철학 시간에 하이덱거니 헤겔이니 싸르트르니 뭐니 해가면서 한 시간 동안 강의하는 교수가 원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수업시간에 졸리다 못해 침을 흘리며 자기도 했다. 사회학 시간은 노상 "사회학이란 -----"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사회학에 대한 정의 또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 신물이 나다 못해, 어떤 때는 대학 교수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나의 성적이 좋지 않은 과목은 그 이유를 알 듯 했다. 왜냐하면 수업 내용을 내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A가 나온 체육과 수학은 왜 A가 나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교수님이 선풍기 앞에 학생들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날려, 그중 내 이름이 적힌 종이가 제일 멀리 날아가서 A를 맞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영어과에 들어온 놈이 영어를 A를 맞아야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체육과 수학을 A 맞아서 뭐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가? 하여튼 이래저래 나의 대학 생활은 알게 모르게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영문 성적표: 체육과 수학은 A를 맞았으나 나머지는 모두 죽 쑤어서 개줬다. 나이를 먹어서 인지 성적표를 공개해도 별로 창피하지도 않다. 그래도 나의 이름만은 지웠다. 지워도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아나마나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러면 다른 학생들은 수업 내용을 모두 다 이해하는 것일까? 물론 이해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고 이해 못 하는 학생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들 중 상당 수가 나와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여튼 학교도 싫고 수업도 싫어져서 나는 점점 자유로운 학생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학교는 나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졌고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봄에 들불 번지듯 내 몸을 점령하고 있었다.
<대학 1학년 창신동에서 자취할 때: 나, 할머니, 그리고 친구>
<사진 뒷면에 쓰여진 글: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건네주기 전에 사진 뒷면에 몇자 구시렁댔다.>
대학교 다닐 때 창신동에서 버스를 타고 용두동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 창신동은 아래 쪽은 좁은 골목이 이리저리 나 있었고, 위쪽으로 갈수록 바위 위에 판자촌이 중구난방으로 강변의 자갈처럼 놓여 있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바위 위에 만들어 놓은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양쪽으로 모든 집의 마당이 훤히 보였었다. 위통을 벗고 등목하는 사람, 식구들끼리 싸움하는 사람, 마당에서 키스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기묘한 사람들이 기묘한 곳에서 행하는 이런 기묘한 행동은, 창신동 뒷골목이 아니었다면 구경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지금도 그 시절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온다.
<대학 1학년 도봉산에서>
내가 자취하는 방과 옆방은 바로 나무 판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옆방에는 어떤 젊은 남자 2-3명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들의 말 소리나 기타 치는 소리는 바로 내 옆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옆방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는데, 그 당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들은 막노동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곧잘 어울렸고, 같이 술을 먹기도 하고 슬슬 놀러도 다니다가 마침내 아주 친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어떤 여자들을 사귀고 있었는데, 나도 같이 놀아보자는 나의 의견을 그들이 받아들여 드디어 한 패거리가 되고 말았다. 나는그들과 그들이 알고 있는 여자들과 함께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거리를 활보하하며 희희 웃기도 하고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점점 여기에 빠져서 학교고 나발이고 간에 그들과 노는 것에 정신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다. 급기야 바로 이것이 "진정한" 꿈과 낭만의 생활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 바로 나라는 자기도취적인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한번은 수업을 빼먹고 이들과 함께 도봉산에도 놀러 갔었다. 그 당시에 유행하는 것이 야외용 휴대 전축이었다. 가스 버너보다 조금 작은 휴대 전축을 가지고 가서 산에 틀어 놓고 춤을 실컷 추고, 그런 다음 준비해 가지고 간 음식을 먹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휴대용 전축을 틀면 "울리불리"라고 하는 유명한 곡이 나왔는데, "쾅-쾅쾅쾅" 시작하다가 나중에 "울리불리"라는 말이 나오고 "와자자,와자자" 뭐 이와 비슷한 소리도 나오는 곡이었다. 하여튼 그 음악만 들으면 기분이 그야말로 "째지는" 듯하고 엉덩이가 들썩거리게 되어있었다.
여자들의 손목이라도 잡아 본 날이면, 그 손을 씻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그렇게 기분이 짜릿하고 유쾌하고 통쾌하고 또한 묘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놀러 간 여자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가상 결혼도 생각해 보았다. 이 여자와 결혼하면 앞날이 어떻게 되고, 저 여자와 결혼하면 어떤 자식을 낳고, 그리고 또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깨가 몇 말은 쏟아질 것이라는 등등,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다. 그러다가 방에 누워서 천장에 상상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것이 다시 내 뇌에 각인되고 밤이 되면 꿈에 나타나고 새벽에 눈이 떠지면 아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학 1학년 때 도봉산에서: 지금 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보아도 모두 멋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아가씨들이 아주 미인인데, 이런 미인들과 함께 했다는 것만도 영광이다. 맨 오른쪽 뒤에 있는 작자가 나인데, 좀 늙어 보인다. 저 양복이며 넥타이며 와이셔츠를 도대체 어디서 가져와서 입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놀음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한 열등감만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즉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이런 것에 탐닉하다니 나는 죽도 밥도 아닌 어정쩡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꿈과 낭만은커녕, 보릿고개에 씨래기 죽도 못 먹어 누렇게 부황이 든 것처럼 내 얼굴은 곰 삭았고, 내 마음은 부평초처럼 걷돌며 갈피를 잡지 못했으며, 총맞은 노루처럼 피를 흘리며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차피 어디에 발을 들여 놓아도 떠돌이 신세일 바에는 군대에 가는 것이 제일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군대에 들어갔다. 군대에서 고참이 쳐대는 몽둥이를 신나게 맞고, 눈이 팽팽 돌아가도록 선착순을 하고, 밤을 낮 삼아 보초를 서고, 귀신이 범접하지도 못할 기율로 내무 생활을 하면서, 서울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 의장대 생활은 시계의 초침처럼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군대 생활 3년 동안 공부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군대 3년 동안 내가 영어책 한 권이라도 읽었으면 나는 정말 개새끼다. 언젠가 한 번, 고참 모르게 영어책 보다가 뒈지게 터지고 난 뒤에는, 갖고 있던 영어책을 쫙쫙 찢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맞아 뒈지든지 병신되기 전에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의도적으로 모든 책을 멀리했다.
"퉁소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고 최초로 말한 사람은 천재다. 35개월의 군대 생활은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고 말았다. 군대에서의 나의 생활은 하루가 단 몇초처럼 여겨졌으며, 3년이라는 세월이 단지 몇 개월처럼 그렇게 빨리 지나갔다.
<창신동 산마루에 있는 현재의 낙산공원: 2012년 10월.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내가 전에 살았었던 창신동에 가보았다. 그러나 너무 많이 변해 있어서 그 당시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
<낙산 공원에서 바라본 현재의 창신동: 2012년 10월>
<군대 1등병 시절 휴가 나와서>
1974년 3월 20일, 입대한지 35개월만에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3월 2일이 개학이었는데, 아무래도 한 학기를 놀면 안될 것 같아, 대신 친구에게 등록과 수강신청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다시 한 많은 대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빡빡 깎은 머리로 3년 후배들과 같이 학교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해서 마치 낮술먹고 날강도짓 하다가 들켜서 하늘 쳐다보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변산 반도: 2012년 10월>
<대학 졸업 때 어머니와 나>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3년간 영어 한 글자 보지 않다가 영어책을 보니, 마치 푸른 하늘에 날도깨비를 보는 듯 신기하기만 했다. "어, 내가 영어도 공부하네"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영어 소설도, 영어 수필도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시 시간에 영어로 된 시를 읽는 것은 마치 티벳어로 된 경전을 보는 듯 낯설었다. 무슨 변형 생성 문법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내 머리가 가장 잘 하는 일이 헷갈리는 것이었으며, 선생님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고, 집에 와서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 책 가방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나는 다른 사람이 웃을 때 웃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울을 때 울지 못하는 그런 목석 같은 사나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읍: 2012년 10월>
<변산반도 대명콘도에서 본 서해안: 2012년 10월>
방학이 되어 독한 마음을 먹고 한 달 내내 도시락을 싸들고 남산 도서관에 가서 하루에 단어 100개씩 무조건 외운다는 무서운 결심을 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도 세월이라는 무기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이런 저런 모든 결심과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은, 동지 섣달 얼음처럼 황량했고, 죽음처럼 차가왔다. 이제 남은 것은 상처이고, 가는 것은 세월이며, 오는 것은 절망이었다.
<변산반도 대명콘도에서 본 하늘: 2012년 10월>
<정읍 장성호: 2012년 10월>
그래도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갔다. 사람들은 대학이라고 하면 즐거운 상상을 많이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대학 생활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대학 생활은 지금 창밖에 보이는 비 맞은 낙엽처럼 그렇게, 처절하고 비참하게 덩그러니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태양이 떠서 빗물이 증발되면, 처절한 저 나뭇잎은 동그랗게 말렸다가,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며 떠돌아 다닐 것이다. 그러다가 시궁창에 쑤셔 박혀 조용히 눈물 흘리며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다.
<변산 반도: 2012년 10월>
<변산 반도: 2012년 10월>
사람들은 대학 생활이 젊음을 구가하며 멋진 추억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의 대학 생활은 꿈과 낭만의 시절이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꿈과 낭만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옛 추억에 잠길 것이다. 벽암록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끝낸다.
혜초가 법안 스님에게 물었다.
<변산 반도: 2012년 10월>
* 귀주성, 광시성, 중경, 무한 여행 후에 뵙겠습니다.
<2012년 11월 여행 계획>
(2012년 11월 7일 작성)
|
'Essay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도 신문(컴퓨터 용) (0) | 2018.01.01 |
---|---|
어떤 하루 (0) | 2014.10.20 |
나는 가수다 (0) | 2012.10.27 |
기보배선수의 런던 올림픽 양궁 결승전 (0) | 2012.10.22 |
이것들이 노인을 뭘로보고--- (0) | 2012.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