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Essays

어떤 하루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4. 10. 20. 14:13

 



 

어떤 하루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백화점에 납품하는 상품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납품을 할 수가 없어서 싸게 파는 티셔츠가 있으니, 빨리 와서 맞는 옷을 골라서 가져가라는 친구의 숨넘어가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옷이길래 이리도 급박하게 독촉을 할까? 온갖 상상을 다 하면서 강북구에 있는 친구의 가게에 도착했다.

 

 

3만원에 무조건 골라가라는 쪽지가 붙어 있는 옷이 노점에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바람에 건들건들 움직이는 파란색, 갈색의 티셔츠가 내가 오는 것을 반겨주는양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백화점에 납품하는 옷 100벌을 내가 후려쳐 가져왔다. 여기봐라. 정가 12만원이다. 지금 3만원에 팔고 있는데, 너에게는 2만원 원가에 주겠다. 지금 저거봐라. 불티나게 팔려나가지 않냐? 다른 사람이 다 사가기 전에 빨리 맞는 사이즈를 골라라." 아무리 낮게 잡아도 6만원은 할 법한 옷을 가리키며, 친구는 싱글벙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려,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지! 나는 내것과 아내 것을 골랐다. 아무래도 아들 것도 골라야할 것 같아서 세 벌을 비닐 봉지에 골라 담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형님과 누님에게 옷을 사드려 본 적이 없어서, 전화로 사이즈를 물어 두 벌을 더 샀다. 다섯 벌  정가 60만원어치의 티셔츠를 단돈 10만원에 샀다! 음, 그래, 이게 인생이지!

 

 

감나무 아래 누워있다가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홍시를 맛보는 심정이랄까? 하여튼 오랜만에 기분 좋은 일이 나에게 닥치니 하늘을 뚫고 치솟는 흥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구매가 끝나자, "저기 쭈꾸미 집이 잘 하니, 점심이나 먹자."라고 말하면서 친구는, 길거리 밤아가씨 손님 끌고 방으로 향듯이 억지로 내 손을 잡고 건너편 식당으로 향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소주 한 병을 시켜서 반병씩만 마시자고 그렇게 철석같이 맹서했건만, 시간이 지나자 각자 1 병씩 마시자로 변경되었고, 결국 또 한 병을 시켜서 일인당 1.5병을 마셔서 취할만큼 마시게 되었다. 일단 알딸딸하게 취하게 되니 친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디 더 마실 데가 없는지, 며칠 굶은 패잔병 거리를 헤매듯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걷다보니 어느 중학교가 나왔는데 마침 바자회가 열려, 한쪽에서는 물건을 팔고 또 한 쪽에서는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친구가 발이 넓은지 손이 큰지 모르지만, 친구는 공짜 막걸리와 부침개, 홍어회를 10명이 먹어도 남을만큼 들고 나타나 사자처럼 포효했다. "내 가 본래 이런 사람이다. 내 능력봤지. 으하하---." 우리는 거기서 완전히 갔다.

 

 

오늘부터 지공선사가 된 김에 그냥 지하철 타고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지하철로 가면 틀림없이 새로 구입한 옷을 지하철에 두고 내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 이 옷이 어떤 옷이냐? 천재일우의 기회로 얻은 옷이 아니더냐?" 좁은 소견으로 궁리한다는 것이, 오히려 택시 안이 더 잠들기 좋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동서울 터미널 근처에서 택시기사는 이제 다 왔으니 빨리 내리라고, 졸고 있는 나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었다. "아니 벌써 왔습니까?" 서둘러 내려서 단 두발짝 걷는데, 택시 안에 옷을 두고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내옷, 내옷!" 소리를 질렀지만, 택시는 5미터 전방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술취한 내가 꼴보기도 싫었는지 모르지만, 택시는 오토바이 방귀뀌고 사라지듯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묻혀 버렸다.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자, 마누라는 동백아가씨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 기다렸다는 듯, 옷부터 보자고 입을 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또 차에 놓고 온겨?"라고 실망과 아쉬움과 경멸과 허탈함이 섞인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할말이 없네. 아마 그런가봐." 옛날 같으면 "살다보면 뭐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그까짓 걸 가지고 그래. 신경 너무 쓰지마."라고 얼버무렸을 것을, 얼마 전부터는 그저 천장만보다가 방바닥을 보면서 한숨만을 크게 쉬는 것 이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처지가 된 것이 나다.   

 

 

다음 날 눈을 뜨니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었다. 정신이 좀 들자 어제 옷을 택시에 두고 내린 일이 먼저 머리 속을 후벼파고 있었다. 어젯밤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벗어 놓은 옷을 정리하는데, 조그만 쪽지가 눈에 띄었다. 어제 택시를 타고 카드로 지불했던 영수증이었다. 그래! 영수증에 택시 전화번호가 있을지도 몰라. 놀랍게도 택시를 탄 시각과 내린 시각, 택시 번호, 전화번호, 요금 등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술먹은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따귀를 한대 맞은듯이 순식간에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인정사정보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대답은 냉랭했다. "택시에 두고 내린 물건이 없는데요. 두고 내린 물건은 아마도 다른 손님이 가져갔을 겁니다." 희망이 실망으로, 다시 절망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이었다. 내 팔자에 무슨 잃어 버린 물건을 찾는다고, 날아가는 참새가 웃을 일이다!

 

 



 

 

 

"잊자, 잊자 오늘만은 미련을 버리자, 울지 말고 다 함께 그렇게"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인지, 다함께 짜자잔인지가 입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천장을 바라보면 천장에 옷이 보이고, 방바닥을 보면 방바닥에 옷이 보였다.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든지, 애인의 얼굴이라도 보여야 뭐 낭만이니 센티니 애련 따위를 들먹일텐데, 여기서도 여전히 잃어 버린 파란색 옷을 배경으로 늙어빠져 쭈구렁 바가지를 덮어쓴 수심어린 노인의 얼굴만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일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더 못 나간다. 다시 가서 옷을 사와야 다음 일이 진행되는 거야. 옷을 주섬주섬 걸쳐입고 또 새옷을 담을 큰 배낭을 걸치고 방에서 나왔다. "당신, 등산가는겨?" 아내가 물었다. "아니, 그 옷을 다시 사와야겠어. 그 일이 해결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 내가 말했다. "혹시 택시 기사가 갖다줄지 모르니 좀더 기다려보지 그래."  "내가 택시 기사라도 그 옷 주었으면 안 갖다 주겠다. 빨리 단념을 해야해. 그리고 빨리 다시 사다놔야 내가 제 정신이 들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아파트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뒤에 도착한 쌍문동은 어제 밤 희희낙락하던,  붉은 등불 아래 춤추던 그런 쌍문동이 아니었다. 낮과 밤의 차이랄까, 술 취한 후와 술 깬 후의 차이랄까, 달빛 아래 흐느적거리던 갸냘픈 술집 아가씨가 통닭에 맥주를 한달 동안 마셔재낀 후의 몸매와 같다고나할까? 하여튼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뭐 한 마디로 말하면 분위기 꽝이었다. 옷보따리 잃어 버린 놈이 무슨 염치로 분위기를 찾나, 내 안의 내가, 염치없는 다른 나에게 말했다.

 

 

가게에 도착하니, 친구는 없고 일을 도와주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오늘 아침 경찰에서 전화오고 난리났었습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경찰에 옷 잃어 버렸다고 신고하지 않았는데." 내가 말했다.

   "아이구. 어제 밤에 우리 사장님이 엄청 취해서 오셨더라구요. 그래서 오토바이 타고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타고 가다가 결국 다른 차를 들이 받았답니다." 그가 말했다.

   "저런!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답니까?" 내가 물었다.

   "글쎄요. 아마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음주 운전으로 걸릴까봐, 오토바이 두고 36계 줄행랑을 놓았다고 합니다. 걸리면 구속에다가 운전면허 빼앗기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잖아요. 이것은 난리 부르스가 아니라, 난리 락앤롤이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취중에 판단은 잘 한 것 같습니다. 술 취했으면 현장에서 튀는 것이 상책이지요." 내 친구는 오토바이로 다른 차를 치고, 행방불명이 되었던 것이다.

 

 



 

 

나와 헤어진 뒤의 일이지만, 같이 술을 마신 공범으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면서, 나는 안절부절하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곧 연락이 오겠죠. 하여튼 어제 옷을 잃어 버렸으니, 다시 5벌 가지고 갑니다. 친구오면 그렇게 되었다고 전해주세요." 말을 마치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으면서 뭐, 이런 세상이, 이런 세계가 다 있나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는 옷 잃어 버린 것은 두 번째의 일이요, 당장 친구의 일이 내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이다. 그 순간 핸드폰 전화가 왔다. "야, 걱정하지마. 내가 누구냐? 깔끔하게 다 잘 처리했다. 사고는 보험처리하여 보상하고, 경찰에 맨 정신으로 찾아가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고 오토바이 찾았다. 인생 뭐 다 그런거지. 판교 사고 얘기 들었지? 본래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는 거예요. 엉뚱한 놈이 당하는 것이 이 세상이예요. 우리 같은 놈은 아무리 죽어라 해도 안 죽어요.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고, 그래서 또 공평한 거예요." 그는 일장 개똥철학을 늘어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그 일에 대응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르다. 나는 본래 어떤 일이 닥치면 그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잘 못 하는 성격이다. 전에는 어떤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컴퓨터가 문제가 생겨,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컴퓨터를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느라고 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태블렛PC나 아이패드를 잘 이용하고자, 독서대를 구입하고 밑에 구멍을 내고, 잘못 내서 다시 목공소에 찾아가고, 갔다오니 또 잘못해서 다시 가고 그런 허접한 일을 내 성미에 맞을 때까지 하는 그런 사람이다.

 

 



<내 책상: 독서대 밑으로 구멍을 내서 전원선을 연결하는데 몇 번이나 목공소를 드나들었다.>

 

 

무슨 일을 하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하는 내 성미인지, 기질인지, 정력인지 모르지만, 이런 일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계속되겠는가?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나의 육체나 정신력도 이미 쇠퇴의 길을 걸은 지가 오래 되었다. 누가 말했다. 65세부터는 노년기가 아니라, 노쇠기라고. 이날부터는 전과 달리 하루하루가 달리 느껴지는 나이라고.

 

 

지공선사의 처지라! 사실 "~한 처지가 되었다"는 말은 좀 한심한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무료지하철 표를 달라고 애걸한 적이 없다. 국가에서 주는 것을 그냥 고맙게 받아 쓸 뿐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내가 65세의 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은 흘렀고, 이제 내 나이가 그런 나이임을 처절하게 느끼고 있다. 

 

 


                       <글에 언급된 티셔츠 중의 하나>

 

 

지금 서울 하늘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참으로 오래 살기도 살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세월이 짧게만 느껴진다. 10년 뒤 내가 살아 있다면 75세가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서 있을까? 오늘처럼 창밖을 바라보면서 10년 뒤의 일을 생각할까, 아니면 10년 전 오늘을 생각할까? 앞으로 흥미롭게 내가 나를 지켜볼 것이다.

 

 

*사진 중 설명이 없는 것은 2014년 9월 17일 - 10월 6일 인도네시아 여행 중 자카르타 시내에서 촬영되었습니다.

 

(2014년 10월 20일 작성)

 


'Essay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도신문(핸드폰용)  (0) 2018.01.13
유도 신문(컴퓨터 용)  (0) 2018.01.01
낭만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0) 2012.11.07
나는 가수다  (0) 2012.10.27
기보배선수의 런던 올림픽 양궁 결승전  (0) 201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