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간 중미 여행기 16: 벨리즈 "벨리즈 시티"
2014년 11월 29일 오전 6시 50분, 며칠 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버스 기사 안토니오와 헤어져야 했다. 그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허허허 하면서 자주 웃었던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였다. 그가 하는 말 중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si(=yes)와 no(=no) 뿐이었다.
완전히 입을 덮는 그의 콧수염을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음식을 먹는지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다. 그는 한 손으로 수염을 들어 올리고 입안에 음식을 넣었다. 다른 한 손에는 항상 내프킨이 들려있었는데, 음식 하나 집어 넣고 수염을 닦고, 또 음식 한 숟갈 집어 넣고 수염을 닦았다. 마치 얼굴을 가린 아랍 여인들이 얼굴 아래 부분에 나 있는 구멍을 들어올려 음식을 입안에 넣듯이 그렇게, 능숙하고 재빠르고 스리슬쩍 음식을 입에 쓸어 담았다. 음식 먹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지 물었을 때, 그는 이미 습관이 되어 있어서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본인이 불편하지 않다면 그대로 믿어야 하겠지만, 내 콧 수염이 그렇게 길었다면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숟가락을 내 던지고 차라리 식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우리는 이미 예약한 전용차로 벨리즈 국경을 통과하여 벨리즈 시티까지 직접 갈 예정이다. 플로레스에서 벨리즈 국경까지 가는 데는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중미 국가 중, 입국 서류에 비자가 필요한 나라는 벨리즈가 유일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출국하기 전에 서울에 있는 벨리즈 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았었다. 비자비는 무려 8만원이라는 거금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기사에게 물었더니 과테말라에서 벨리즈 입국 비자를 받으려면 5만원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
<벨리즈 국경을 넘은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닭고기 아침 식사를 했다. 얼마나 맛있게 구워졌는지, 바라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
*벨리즈는?
17세기에 영국인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영유권을 주장하는 에스파냐와 충돌, 1798년에 이르러 영국인 거주자가 에스파냐군(軍)을 격파하고 1862년 영국 왕실 식민지로 편입시켜 자메이카 총독(總督)의 관할에 두었다. 1884년에는 자메이카에서 분리되어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1973년그 때까지 사용해 왔던 명칭 ‘영국령 온두라스’를 ‘벨리즈’로 개칭하였다. 영유권을 주장해 오던 과테말라와 영국 등 3개국 회담의 결과 1981년 9월 21일 마침내 독립하였다.
면적은 전라남북도보다 조금 더 큰 2만 2963㎢, 인구는 30만 1270명(2008년 현재), 수도는 벨모판(Belmopan)이다. 종족구성은 메스티조 49%, 크레올 25%, 원주민 11%이며, 언어는 영어가 공용어이나 스페인어가 통용된다. 종교는 국민의 50%가 가톨릭교를 믿으며, 개신교가 27%이다. 2007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7900 달러이다. |
벨리즈 시티로 가는 길은 마치 평원을 달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높은 산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재 해발을 알 수 있는 나의 시계를 보니 해발 70미터 - 140 미터를 유지하며 자동차는 달렸다. 작은 나무만 있는 것으로 보아, 토양은 비옥하지 않은 듯 했다. 가끔 나타나는 강에는 최근에 많은 비가 와서 흙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 동안 나는 차를 타고 제주도의 어떤 지방을 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길이 너무 단조로운지, 배가 볼록 나온 버스 기사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수도인 벨모판을 지나왔으나, 거기가 수도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특색이 없는 도시였다. 마치 시골 마을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역사가 짧고 나라의 면적이 얼마 되지 않으니 수도 또한 한적하고 고층 건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벨리즈의 최대 도시 벨리즈 시티에 도착한 것은 햇빛이 내리쬐는 12시경이었다. 우리 버스 운전수가 연락을 해놓았는지, 키가 큰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자기 차를 타고 다니면서 호텔을 잡자고 말했다. 50,000원에 흥정을 하고 그가 권유하는 집에 10명이 함께 갔다. 중국 할머니가 경영하는 여관이었는데, 아무리 배낭여행자라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낡고 변색된 집은 더럽기 그지 없었고, 통풍이 되지 않고 냄새가 나서 거기에서 잠을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몇 분 동안도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안내 책자를 보면서 다음 호텔로 갔으나, 10명이 잘 수 있는 방이 없었고, 또 다음 호텔로 갔으나 우리가 필요한 5개의 방이 있는 집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로운리 플래닛에 나와 있는 벨코우브라는 호텔인데, 강옆에 위치해 있어서 하늘을 나는 갈매기와 강을 통과하는 배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업원은 빈방이 5개가 되는 지를 계산하는 데 10분 이상이 걸렸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버스를 대절한지 거의 40분 정도 흘러갔을 것이다. 운전수는 시간이 흘렀으니 돈을 더 내라고 했다. 우리가 거부하자 큰 소리로 뭐라고 궁시렁 대면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70,000원을 주고 그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떤 흑인 젊은이가 호텔로 들어와 체크인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말했다. 눈동자가 풀려있는 것으로 보아 마약을 투여한 것으로 보였다. 호텔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핏대를 올려가면서 나가라고 말하자, 그는 마지 못해 비틀거리면서 호텔 밖으로 나갔다. 그 짧은 몇 분 사이에 버스 기사에게 당해, 흑인에게 겁먹어, 아주머니 큰 소리에 넋 나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순간 이 나라의 수도가 벨모판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침판도 아니고 메모판도 아니고 벨모판이라. 벨놈의 판대기도 다 있구나. 아이구 모르겠다. 이판 사판이다. 개판이 안 된 것만을 천만다행이라고 가슴판에 새겼다. |
도시가 작아 한 나절이면 대충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고향인 금산의 인구가 55,000이고, 이곳 벨리즈 시티의 인구가 65,000이니 그 크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옆집이 해산물 식당인 Marlin's Seafood이었다. 생선회나 랍스터 같은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했지만, 종류를 알 수 없는 고기만 판매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렴한 것에 끌려 틈만 나면 그집을 찾았다.
저녁을 먹고 강이 보이는 베란다에 앉아 있으니 붉은 등불이 희미하게 물 속에 자신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밖은 어둡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으면 멋진 사진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거리는 무한 대로 놓고 항상 자동으로 놓고 찍는 것이니 날이 흐리면 무조건 흐리게 나올 도리밖에 없었다. 너무 답답하여 죽은 자식 어디 한번 만져보자고, 고장난 DSRL 카메라를 꺼내서 스위치를 무심코 on 으로 올려보았다. 웬걸 LCD에 검은 색 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거 봐라. 이거 작동이 되는 것 아닌가? 줌을 작동시켜보니 렌즈통이 길어지고 짧아질 때 덜덜 소리를 냈다. 초점을 보니 자동초점을 잡지 못했다. 어떤 때는 검게 찍히고, 어떤 때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나왔다. 또 어떤 때는 놀랍게도 제대로 찍히기도 했다. 죽었다고 전사 편지 받은 남편이 살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처럼 가슴이 떨렸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벨모판의 저주가 널뛰기 판을 통과하여 꽃장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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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이후의 사진은 대부분 DSRL로 찍은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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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죽었다 돌아온 카메라를 가슴에 품고 일찍 바닷가로 나갔더라. 곧 일출이 있을 모양이더라. 붉은 기운이 서서히 동쪽에 보이기 시작하더니, 하늘이 점점 밝아오며 붉은 기운이 노란색으로 그리고 흰색으로 시시각각 변하여 그 눈부심에 차마 눈을 뜨지 못하겠더라. 붉은 구름을 배경으로 갈매기 떼가 날아들어 이리 훨, 저리 훨, 너울거리며 하늘을 누비고 다니더라. 동명일기에 나오는 "소 혀처로 드리워 물 속에 풍덩 빠지는 듯 싶은 것"은 없으되, 넘실거리는 파도는 붉은 구름을 품에 안고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 타령을 하고 있더라. |
마침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자, 주위의 색의 명암이 더욱 대비되어 선명해지더라. 배의 접안 시설로 연결되는 긴 나무 판자길이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다리처럼 무한히 뻗어있더라. 한참 넋 놓고 있다가 머리를 돌려보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등대가 하늘로 뻗쳐 있더라. 또 한쪽에는 무수한 배들이 정박하여 회색 빛 바닷물에서 출렁출렁 춤을 추고 있더라. 내 뺨 위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 카메라에 떨어지더라. |
그러나 여기 벨리즈 시티에는 신의 조화(造化)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벨리즈 사람들이 살고 있다. 비를 피해 건물 아래 서 있는 사람, 오는 비를 마다하지 않고 맞고 가는 사람, 건물 모퉁이에서 찬비를 피해 하룻밤을 보내는 사람, 그리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바닷가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사람. 마치 바닷가 자갈밭에 온갖 형태의 자갈이 존재하듯, 여기에도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자기 나름의 삶을 영위하며 지구의 한 모서리를 장식하고 있다. |
<세인트 존 성당>
세인트 존 성당에 갔을 때였다. 문이 잠겨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돌아서 걸아 나오니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지나가며 카메라 조심하라고 나에게 말했다. 잠시 뒤 경찰차가 나에게 다가왔다. 순간 긴장을 했다. 경찰은 이 근처가 위험하니 조심해야하고 될 수 있으면 빨리 이곳을 벗어나라고 말했다. 아무리 봐도 위험할 것 같지 않은데 경찰까지 나서서 그런 말을 하니, 그 말을 듣고 그곳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저쪽에서 험상궂게 생긴 흑인 한 명이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순간 긴장했다. 경찰이 경고를 보낸 것이 저런 사람을 피하라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를 피해 다른 길로 걸어서 곧장 호텔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일행 중 한 사람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벨리즈 사람이 벨리즈 사람의 핸드폰을 나꿔채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소매치기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고,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그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여행자의 운명인지 뭔지 모르지만, 이런 저런 사건들은, 나에게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단지 어떤 곳이 위험한지, 안전한지라는 두 개의 범주로만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
<어느 학교의 담벼락>
1박을 하고 벨리즈를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한 나라에서는 최소 2박을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오자마자 2박을 예약했었다. 특별히 갈 곳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3일간을 머물러야 했다.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시는 것이다. 벨리즈 시티의 강과 바다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앨코브 호텔에서 우리는 죽장 마셔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시간의 촉박함에 서서히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볼거리가 쌓여있다는 멕시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세계에서 꼭 가봐야 할 곳 2위에 있는 쿠바가 우리에게 윙크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라마다 르네쌍스 호텔 음식>
해가 졌다. 주위와 물이 또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호텔에 비치된 안내책자에 또 검푸른 사진이 걸려있었다. 바로 Great Blue Hole 사진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곳이기에 웬만하면 그곳에 가보고자 하였다. 벨리즈 시티에서 직선 거리로 약 60키로 떨어진 이 푸른 구멍은 폭 305미터 깊이 122미터로 그야말로 환상적인 바다 속의 "푸른 구멍"이다. 그러나 내가 너무 낭만적으로만 생각했나 보다. 일단 블루 홀에 가는 일반적인 목적은 약 40미터 상공에서 다이빙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곳에 가서 3회의 다이빙을 하는 데 약 40만원을 내야한다고 했다! 결국 이곳에 간다는 것은 돈 많고, 시간 많고, 건강하고, 젊어야 한다는 쓰디쓴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들어 허공에 헛기침 한번 하고 냉수먹고 속차릴 도리밖에 없었다. |
<결국은 가보지 못하고,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 미련이 남아 있는 Great Blue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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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플로레스에서 벨리즈시티까지 버스비: 1인당 약 22,000원 11월 29일 시내 버스비: 1인당 약 7,000원 11월 29일 호텔비: 2인 1실 약 33,000원
11월 30일 호텔비: 2인 1실 약 3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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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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