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살았던 마을은, SBS 웃찾사 "서울의 달"에 나오는 "경상북도 무성리, 내 일년 밑의 후배 최수락이 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더 낙후된 곳이었다. 최수락은 서울에 살겠다고 3천만원을 들고 오지만, 내 주머니는 아무리 털어도 3천원도 나오지 않았다.
고등 학교는 대전에서 다녔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도시에 와서 가장 따라가기 힘든 과목 중의 하나가 영어였다. 허둥대는 나에게 선생님은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잘 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해보라고 희망적인 충고를 해 주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밤이고 낮이고 내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 기억은 공부 이외에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밤 11시 도서관 문이 닫히면 교문을 나왔다. 학교가 있던 대전 대흥동에서 누나가 살던 판암동까지 걸어왔으니 집에 오면 거의 12시는 되었을 것이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암흑 속을 헤매면서 암울한 생활을 하던 중, 고등학교 2학년 쯤 되었을 때, 어느날 갑자기 영어가 술술 읽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팍" 들었다. 소위 말하는 직독직해, 즉 읽으면서 동시에 의미가 머리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 쉬운 영어 원서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문장이 짧고 비교적 쉬우니 그 책을 읽어 보라고 했다.
어느 토요일 방과 후, 학교 정문에 책 장사가 와서 여러 권의 책을 늘어 놓고 팔고 있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있었다. 나는 대충 훑어보았는데, "별 것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 꼬깃꼬깃 감춰져 있던 아까운 돈을 꺼내 냉큼 그 책을 샀다.
He was an old man who fished alone in a skiff in the Gulf Stream and he had gone eighty-four days now without taking a fish. In the first forty days a boy had been with him. But after forty days without a fish the boy’s parents had told him that the old man was now definitely and finally salao, which is the worst form of unlucky, and the boy had gone at their orders in another boat which caught three good fish the first week. <"노인과 바다"의 첫 부분>
책을 읽다가 skiff에서 막혔다. 사전을 찾으니 "작은 배"라고 나와 있었다. "어,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으니 별 것 아니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definitely를 찾으니 "분명히"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 원서 별 것 아니야, 하면 되는 거야", 나는 점점 오만방자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salao라는 단어가 나왔다. 사전에 나오지 않았다. 몇 개의 사전을 찾았으나 그런 단어는 없었다. 나는 불안 초조해졌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가 있는 책을 선생님은 왜 쉽다고 했을까? 나는 며칠을 그 단어 때문에 고민했다. 마침내 나는 책을 내동댕이 쳤다. 한 걸음 더 나가, 나는 선생님이 실력이 없을 거라고 단정지었다. 본래 실력 없는 사람이 많이 아는 척 하고,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 한국 말에 영어를 섞어 쓰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주머니에 영어 원서를 반쯤 보이게 넣고 다닌다. 그때는 그랬다.
우리가 우리말을 배울 때, 사전을 찾아가면서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고 짐작해서 그 뜻을 알아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국어도 사전을 찾아 새로운 단어의 뜻을 배우기도 하지만, 문맥에 의해 배우는 것이 더 많다. 윗 문장 salao which is the worst form of unlucky에서 which 이하를 보면 salao의 뜻을 알 수 있다. salao라는 말은, "가장 운이 나쁜 형태" 즉 "재수에 옴 붙었다"라는 뜻이다. 영어를 이렇게 문맥을 통해 배운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 후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또, 헤밍웨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 판국에 그가 이 작품을 썼던 쿠바에 언젠가 내가 갈 수 있으리라고는 그야말로 상상, 망상, 몽상 그 어느 것도 못할 일이었다! 만약 내가 그 당시에, "40년 후에 내가 쿠바에 가서 헤밍웨이가 살았던 흔적을 살펴보겠다"라고 말했다면, 모두들 나를 잡아 정신 병동에 잡아 처 넣었을 것이다. 정말 헛소리를 해도 정도껏 해야 하고, 미쳐도 곱게 미쳐야 하지 않겠는가?
아바나에는 헤밍웨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세 곳만을 전문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관광 상품이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날은 마침 다른 손님이 없어서 우리 10명만이 같은 버스를 타고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처음에 들른 곳은 헤밍웨이가 자주 들려 모히토(칵테일의 일종)을 마셨다는 LA MODEGUITA DEL MEDIO라는 식당이었다. 무슨 일인지 식당 문은 닫혀있었고 벽은 방문객들의 장난기 어린 낙서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어디 한국말로 적힌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어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AMBOS MUNDOS 호텔이다. 1931년에 완공된 이 호텔 511호는 헤밍웨이가 투숙했던 곳이다. 그는 이 511호실에서 1932년부터 1939년까지 묵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초고를 집필했다. 헤밍웨이는 John Donne이 쓴 글을 자신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제목과 서문에 인용하여, 자신의 소설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또한 John Donne이라는 사람도 헤밍웨이에 의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John Donne>
이 세상 누구도 그 혼자서는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그만큼 줄어든다. 한 곶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토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보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고 알려고 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참고>
*종(toll): 여기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에게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 *고속도로 요금 받는 곳을 toll gate 또는 toll booth라고 하는데, 이때 toll은 "통행세"라는 뜻이다. *곶(promontory): "장산곶, 장기곶"처럼 육지가 바다로 돌출된 부분 *thy, thee, thine: your, you, yours의 고어체 표현
그런데 실제로 John Donne이 쓴 시중 유명한 것은 "죽음, 너 뽐내지 말라"라는 시인데,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Death, be not proud, though some have called thee
Mighty and dreadful, for thou art not so;
For those whom thou think'st thou dost overthrow
Die not, poor Death, nor yet canst thou kill me.
(중략)
Death, thou shalt die.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어떤 이들은 너를 힘세고 무섭다 일컫지만, 넌 그렇지 않다. 네 생각에 네가 해치운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불쌍한 죽음아, 넌 나도 죽일 수 없다. ..
(중략)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
511호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쇠창살로 만들어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입을 크게 벌려 이야기하는 것을 밖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쇠창살에 갇혀 절규하는 생지옥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 내는 "철그렁" 소리는 저승사자가 지키고 있는 지옥문 여닫는 소리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문도스 호텔의 엘리베이터>
<911호 안내인: 모자 쓰지 않은 사람>
문도스 호텔 511호는 지금 기준으로는 좀 비좁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한편에 있는 탁자에는 검은 전화기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그가 사용했던 침대가 있었다. 침대 위에는 신문지 한 장이 놓여져 있었다. 한쪽 유리 상자 안에는 그가 사용했던 타자기가 수많은 그의 지문을 간직한 채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1899년에 태어나 1961년에 죽었다.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에 수송차 운전병으로 참가했다. 1928년에는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비운을 겪었다. 1929년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다. 본래 이 소설의 제목이 A farewell to arms인데 이를 번역하면 "무기에게 안녕"이 된다. 우리가 보통 "~여 잘 있거라"라는 말의 빈칸에는 "사람"이나 "고국, 산천" 등이 온다. 즉, "친구여 잘 있거라, 고국이여 잘 있거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기라는 말이 오는 것이 적절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예를 들어 "돈이여, 잘 있거라" "식량이여, 잘 있거라" "곤봉이여, 잘 있거라"라는 말은 어쩐지 어색하다. 하여튼 이상한 말도 자꾸 쓰다보면 익숙해지는 것이 인간의 뇌인가 보다. 나도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여기다가 나중에는 멋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으니.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화자"라는 말이 있다. 말 하는 사람(speaker)이라는 뜻이다. 화자라고 하면, 여자 이름 중에 "김화자, 정화자" 등이 있고, "지화자 좋다"라고나 할 때 쓰지, 밑도 끝도 없이 화자하면 도대체 화자가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좀 익숙한 말이지만, 시골 사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화자가 무슨 말인지 아셔요?"라고 묻는다면, "미친 놈, 네 에미의 이름이 화자다. 그것도 몰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며칠 전 어떤 철학 책을 읽는데 갑자기 "화자"가 나와서 당황했기에 적어본 것이다. 꼭 이 단어를 쓰려면 화자(話者)라고 한자를 병기하든지, "말하는 사람"이라고 풀어 쓰든지, 문맥에 의해 짐작할 단서를 줘야 할 것이다. 이 글이 여행기가 아니라 화자(話者)의 화풀이 마당으로 변질되고 있구나, 지화자 좋다.
헤밍웨이는 1952년에 노인과 바다를 써서 1953년 퓨리처 상을 받았고,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1,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고 두 번에 걸친 비행기 사고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말년에 그는 온몸의 통증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마침내 쿠바와 미국의 외교전으로 두 나라가 단절되자 그는 1960년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던 그는 하루하루가 생활하기 힘들었고, 통증과 우울증으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거의 20년간이나 살았던 쿠바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것도 그가 생명을 계속 유지하기 힘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1961년 7월 2일, 쿠바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해에, 그는 총구를 자신의 입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 그의 육체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영혼은 지긋지긋한 통증에서 해방되었다. 사람의 운명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는 아버지가 자살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도 자신의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또 다른 그의 유품 중에는 그가 즐겼다는 낚싯대가 벽 한 쪽에 정렬되어 있었다. 또한 노벨상을 받을 만한 건강이 되지 않아, 수여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신문기사가 벽에 붙어있었다. 또 한쪽에는 지그시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두상(頭像) 조각(彫刻)이 쓸쓸히 놓여 있었다. 아, "임은 가고 없어도" 수 많은 관광객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오늘도 내일도 이곳에 몰려든다.
문도스 호텔에서 나와 거리를 걸을 때, 거리에서 악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한국인이 한 명 있었는데,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저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먼 이국의 거리 모퉁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까? 그는 과거에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으며,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낯선 이곳에서 저런 생활을 하고 있을까?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는 것이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인지도 모른다.
<동영상>
헤밍웨이가 자주 들렸다는 식당으로는 Floridita 식당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헤밍웨이가 자주 마셨다는 다이끼리를 마시고 있었다. 다이끼리라고 쓰여진 칵테일 제조대에는 수 많은 다이끼리 제조 원료가 놓여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마시는 사람보다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았고, 북적대는 소음으로 옆 사람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놓여져 있는 헤밍웨이의 동상은 마치 친한 친구를 바라보는 양 그렇게, 방문객들에게 시선을 던져 주고 있었다.
(2) 헤밍웨이 박물관
우리가 헤밍웨이 박물관에 입구에 도착했을 때, 공터에서는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다. 이 공터도 헤밍웨이의 박물관의 일부인데, 쿠바인들이 워낙 야구를 좋아하여 박물관 일부를 내놓아 놀이터로 만들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 후 이곳 '핀카 비지아'(전망 좋은 농장이라는 뜻)에 땅을 구입하고 1928년부터 머물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박물관 앞에 놓여있는 옛날식 자동차>
박물관 안으로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가 없고,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만 구경할 수 있다. 안에는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물품, 그가 읽었던 책 등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벽에는 그가 아프리카에서 잡아 가지고 들여온 동물의 박제품이 방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벽에는 그가 그린 많은 그림들이 무심하게 걸려, 지나가는 방문객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다. 넓은 바닥에는 의자와 소파가 시원스럽게 배열되어 있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었던 헤밍웨이가 나는 내심 부러웠다. 이런 넓은 집에서 며칠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 헤밍웨이가 이런 호화 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을 불러 파티를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여, 나는 안내자에게 물었다. 그는 그 당시에 정부나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의 인맥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카스트로를 만난 적도 있다. 또한 그는 스키, 낚시, 사냥 등 취미도 다양해서 수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사귈 기회가 있었다. 박물관에 있는 각종 트로피는 그의 이런 활동에 남다른 정열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의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벽에 깨알 같은 글씨로 수 많은 숫자가 쓰여있는데, 자세히 보니 그의 체중을 매일 기록한 것이었다. 대체로 200 파운드 이상으로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체중은 90키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다른 종이도 있을텐데 왜 이렇게 깨끗한 벽에 낙서처럼 적어 놓았을까? 알 수 없지만 체중은 늘지, 술은 마셔야지, 담배도 피워야지, 몸은 아프지, 이런 저런 이유로 체중에 강박관념을 갖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벽에 적혀있는 그의 체중 기록: 자세히 보면 -- 내가 이런 것을 왜 자세히 보았는 지 알 수 없지만 -- 200파운드에서 242파운드까지 적혀있다. 아마도 그의 체중은 90 - 110kg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하얗게 칠한 높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창을 통해 열대의 햇살이 들어와 초록의 바닥에 밝은 무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헤밍웨이가 아바나 시내를 내려다 볼 때 자주 사용했다는 망원경이 있었다. 탁자 위에는 타자기가 놓여있었다. 박물관 사방의 탁자에 많은 타자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방 저방을 다니면서 소설에 대한 착상을 하고 타자기를 이용해 글을 썼을 것이다. 모서리에 서 있는 예쁘장한 여자 관리인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양, 그저 시계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듯 했다.
그가 사용했다는 Pilar라는 배 옆에는 그가 사랑했다고 알려진 네 마리의 개 무덤이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당시 그곳에는 고양이 50 마리가 있었고, 개는 10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속담도 이제 바뀔 때가 되었나 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개는 죽어서 묘비를 남긴다." 사람은 아버지를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개는 주인을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헤밍웨이 사진: 겉으로 보아도 체중이 100키로 이상은 되었을 성 싶다.>
헤밍웨이 박물관 앞에는 칵테일 바가 있었다. 이 노점 바에는 중국인 몇 사람이 둘러 앉아 칵테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빛과 떠들썩한 분위기로 보아 이미 몇 잔은 마신 듯이 보였고, "나는 돈이 많네"라고 만천하에 고하는 듯 중국인 특유의 남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옆에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가게 앞 전시대에는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의 사진이 들어간 소품이 주를 이루었으며, 가게 안에는 각종 기념품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3) 코히마르
코히마르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약 10키로 떨어진 작은 항구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모델이 되었던 곳이다. 코히마르로 가는 길은 넓고도 시원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원주민들이 한가롭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보였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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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히마르 가는 길>
<코히마르 약도>
코히마르는 헤밍웨이 자신이 소유했던 El Pilar라는 배를 이용해 낚시질을 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 들러 낚시를 했을 뿐만 아니라 테라사라는 찻집에서 자주 모히토를 마셨다. 수 많은 사람이 다녀갔을 테라사에는 헤밍웨이와 관련된 많은 사진이 벽에 걸려있었다. 그중에서도 헤밍웨이와 카스트로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밖으로 나올 때 몇몇 악사가 나타나 악기를 연주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힘차고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어디를 가나 들을 수 있는 음악가들의 노래지만, 헤밍웨이의 숨결이 배어있는 어촌에서의 노래에는 색다른 깊은 맛이 있었다.
<코히마르 마을의 모습>
Gregorio Fuentes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헤밍웨이와 사귀게 되었고 어느날 그가 바다에서 겪었던 경험을 헤밍웨이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로 간 후 53일간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큼직한 물고기 6마리를 잡았으나 상어떼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이야기를 듣던 헤밍웨이는 Fuentes의 이야기를 소설화하기로 결심한다. 실제 이야기에 헤밍웨이의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 것이 바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이다. 소설이 대 성공을 거두자 헤밍웨이는 그레고리오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 덕에 이렇게 대 성공을 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좋은 음식과 술을 사 주시오. 그것이면 됩니다." 헤밍웨이는 입에 쩍쩍 붙는 술과 기름진 음식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대접했다. 그리고 2만 달러를 어부의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이 어부는 104살까지 살다가 2002년에 죽었다.
<라 테라사 식당: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코히마르 바닷가에 있다.>
<헤밍웨이와 카스트로>
<테라사 식당 벽에는 헤밍웨이와 관련된 많은 사진이 걸려있다.>
<테라사 식당에서 바라 본 바닷가>
<테라사 식당 안의 헤밍웨이 상>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들. 그들 앞에 돈통이 놓여있다.>
밖으로 나와 조금 걸으니, 시멘트로 축조한, 툭 튀어 나온 방파제가 있었다. 사실 방파제인지 배를 타기 위한 부두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위에서 동네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어른도 한두 명 보였으나 대부분은 아이들이었는데, 고기를 잡으려는 눈초리가 전쟁터의 파수꾼처럼 매서웠고 시선은 송곳처럼 예리했다. 아이들이 잡아 아무렇게나 시멘트 바닥에 놓아 둔 작은 물고기가 가엾었다. 검은 줄에 아가미가 꿰인채 피투성이가 된 물고기였다. "불경(佛經)처럼 서글퍼" 보이는 오후였다. (백석: "여승"의 일 부분 인용)
파란 둥근 기둥이 하얀 천장을 받치고 있는 대(臺)가 있었고, 그 아래 헤밍웨이의 조각상이 바닷 바람을 맞고 있었다. 1962년에 동네 주민들이 헤밍웨이를 기념하여 만든 기념물이다. 그 앞에는 관광객들이 오면 음악을 연주하고 돈을 받아내려는 야심으로 가득찬 악사들이 매처럼 사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돈을 내기 싫어하는 관광객들은 마치 흉물스러운 괴물이라도 피하려는 양, 멀리 원을 그리며 그들을 피해 돌아 다녔다.
그날 내가 가본 마지막 장면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옛날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성이다. 1762년 이 성을 빼앗고 육지에 상륙한 영국군은, 그후 아바나에 있는 성도 공격하여 빼앗게 된다. 그날 벌어진 전쟁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요새는 말없이 바닷바람에 몸을 맡긴 채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여기서 발생한 또 다른 비극적인 사건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미국에서 보내는 방송을 듣고, 수 천 명의 쿠바인들이 배와 뗏목을 타고 미국의 플로리다로 향해 출발하게 된다.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한 그들 중 상당 수가, 나쁜 날씨와 마실 물의 결핍 그리고 상어 떼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운이 좋은 소수만이 이런 역경을 뚫고 목적지인 플로리다에 도착하였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그날, 바다에는 단 한 척의 배도 없었다. 미국의 플로리다가 너무 가까워 도망을 못하도록 아예 배 자체를 띄우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목숨을 걸고 쿠바를 탈출한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비참하게 탈출하는 승객들의 모습과 비슷했을 쿠바인들의 탈출 장면이 머리 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 장면과 겹쳐서 헤밍웨이가 배를 타고 한가롭게 낚시하는 모습이 머리 속을 스쳤다. 2014년 12월 13일 뜨거운 오후, 코히마르 바닷가의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며 텅빈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