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014년 12월 8일부터 12월 15일까지 7박 8일간 쿠바에 머물렀다. 이중 1박 2일로 단체 관광을 떠난 하룻밤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에 숙박했던 민박집 "올가(Olga)"에서 머물렀다. 따라서 낮에는 여행사를 이용해 근처 관광지를 다녀왔고, 저녁에는 매일 아바나 시내에서 먹고 구경했다. 쿠바 여행기는 날짜별이 아닌, 장소별 또는 사건별로 적어 내려갈 것이다.
쿠바! 말로만 듣던 쿠바! 지금도 쿠바 생각을 하면 "아쉽다"라는 단어가 먼저 떠 오른다. 쿠바는 일 주일 머물 장소가 아니다. 쿠바는 최소 한 달을 머물러야 할 곳이다. 수도인 아바나에서 6일, 기타 지역을 24일 정도 돌아 다녀야 기본적인 여행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쿠바에 도착할 때까지 중미 8개국을 여행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멕시코를 제외하면, "더 머물러야 하는데, 떠나게 되어서 아쉽다"라는 나라가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좀더 샅샅이 찾아보면 구경할 데가 있기야 있을 것이다. 말하면 무엇하나? 한국만 샅샅이 구경하려 해도 평생을 구경해도 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번 여행 7개국(멕시코 제외)의 볼거리를 점수로 환산해 모두 더한다 해도 쿠바 한 나라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만큼 쿠바는 구경할 것이 많고, 그 만큼 독특한 나라다. 내 생애에 쿠바를 구경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고 어찌 보면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쿠바를 떠나면서, 내 다시 이곳을 찾아 한 달간 머물다 가겠다고 굳게 맹서했다.
<여행기에 나오는 주요 지점. 구글 지도 이용. Adobe Illustrator 사용 작성>
(1)우리가 묵은 민박집 근처
처음에 우리 민박집 주소를 받았을 때, 우리가 묵을 민박집이 있는 거리 이름인 "Industria(산업)"이라는 말 때문에, 무슨 공장 지대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공장 지대와는 관계없는 곳이었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자동차가 끊임없이 다니는 거리였다. 아바나의 관광 명소는 우리가 묵은 민박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숙소 근처에 한 가게가 있었는데, 빵을 파는 가게였다. 밤 늦게까지 사람들이 늘어서서 빵을 배급받는 것을 보았는데, 공산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필수품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보였다. 쿠바에는 두 가지 형태의 돈이 있는데, 외국인이 사용하는 "쿡"이라는 것이 있고, 현지인이 사용하는 "모네다"라는 것이 있다. "1쿡(1 달러 정도) = 24 모네다" 정도 된다. 외국인은 대부분 쿡을 사용한다. 한번은 달라를 모네다로 바꾸어 바로 이 가게에서 모르는 척하고 10모네다(한국돈 약 500원)을 냈더니 혼자 실컷 먹을 정도의 빵을 주었다. 그러나 일반 외국인이 이용하는 가게, 즉 "쿡"을 받는 가게는 분명히 한국보다는 저렴하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어느 날 함께 간 사람들이 야간 디스코장에 가보자고 하여 같이 갔었다. 디스코장 앞에 젊은 사람들이 10명 정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일행들은 전날 그곳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곳에서 춤은 추지 않고 맥주 한 잔 마시고 나왔다고 했다. 그곳 젊은이들이 춤추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더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엉덩이를 홱홱 돌려 추는 춤이 너무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분위기라도 파악하려고 들어가보려고 하다가, 어차피 춤도 못 출 것이고, 또 젊은 사람들만 있는데, 괜히 물을 흐릴까 싶어 발길을 돌렸다.
마침 근처에 공터가 있고, 그 옆에 술집이 있었다. 술집이라고 해야 텅빈 1층 건물의 한 코너에서 맥주를 사서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탁자에 앉아 정말 무미건조하게 술을 마시는 집이다. 다시 말하면 맥주 판매원은 있어도 주점 종업원은 없는 곳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술을 마시는구나, 생각하며 한쪽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그 나마 몇 사람이 앉을 빈 자리가 없었다.
술을 사 들고 밖으로 나와 컴컴한 공터의 벤치에서 술을 마셨다. 아바나 젊은이들이 자기들에게 술을 사달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들에게 맥주 한 캔씩 사주니 얼굴이 갑자기 밝아지며, 무슨 횡재나 만난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또 그 옆에는 요상한 옷 차림의 여자들이 몇 명있었는데, "재들 꼬시면 넘어갈 것 같은데요."라고 우리 일행 중 한명이 말했다. "그것 좋은 생각여. 하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영원히 쿠바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한국 돌아가기 싫은 사람들 모여서 한번 일 내 보시지! 각자 알아서 기어!"
<한 소년의 외침. "사요?">
(2) 캐피톨리오 나시오날(Capitolio Nacional: 국립 국회의사당)
캐피톨리오는 아바나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엄있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민박집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멀리 보이는 이 건물은, 수시로 나타나는 저녁놀이나 아침 놀을 배경으로 더욱 그 위풍을 자랑한다. 이 건물은 1926년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자 Gerardo Machado에 의해 시공되어 3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둥근 돔의 높이가 92미터이며 여기에 25캐럿 모조 다이아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450키로라고 말할 때 시작점이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표석이듯, 쿠바의 각 지역 간의 거리는 바로 이 캐피톨리오로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국회 의사당으로 사용되었으나 1959년부터는 큐바 과학원과,그리고 과학기술 도서관으로 사용된다. 본래 2013년에 수리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공산주의라 그런지 우리가 갔을 때도 여전히 수리 중이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어떻든 밖에서 보는 화려함과 웅장함은 그때가 낮이건 밤이건 보는 이의 영혼을 빼앗아가게 되어 있고, 그 아름다움은 그의 가슴에 잔물결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이 캐피톨 건물 맞은 편에는 중앙 공원이 있다. 시내 관광 버스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나와서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고 햇빛을 쬐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누구나 쿠바에 가면 자동차에 눈이 휘둥그래지는데, 바로 이 건물 앞에 광약으로 반들반들하게 닦아서 눈이 부실정도로 광채가 나는 50년 이상된 택시가 즐비하게 놓여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차를 타고 시내를 관광도 하지만, 그 차에 기대거나 운전석에 앉아서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 차가 더 많았다. 한번 차에 올라 사진을 찍는데 얼마를 요구하는지 모르지만, 차 세워 놓고 돈받는 재미 쏠쏠할 것이다.
아바나에는 옛날 헐리우드 영화 촬영장에만 있을 그런 택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발로 밟고 가는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택시도 있고,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택시도 있다. 모든 것이 국유화되어 있는 쿠바에서 외국 돈을 만져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택시 운전수는 외국인이 사용하는 돈(CUC)을 벌어들인다. 보통 웬만한 거리는 1달러(1쿡) 내면 타고 갈 수 있다. 그들이 하루에 얼마 버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하루에 한국 돈 만원은 벌 것이다.
쿠바에서 의사의 한달 봉급이 한국돈 3만원 정도다. 3만원 가지고 어떻게 한 달을 버티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들은 교육비, 의료비 등 거의 모든 것이 무료다. 그리고 이들도 물건을 사려면 외국인이 사용하는 CUC을 가지고 물건을 산다고 한다. 현지 화폐인 모네다는 식료품등 생필품만을 사는데 필요하다고 한다. 아바나 거리를 다니다 보면, 간단한 안내를 해주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국에서 장날 걸어가다가 술취한 사람 만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아기에게 먹일 우유를 사야 하는데, 모네다 돈으로는 우유를 살 수 없으니 딸라 좀 달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잔돈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안내를 받고 그런 사람에게 노상 돈을 뿌리며 여행을 하든지, 아니면 안내책을 보고 혼자 다녀야 한다. 그리고 택시를 탈 때는 얼마에 갈 것인지 흥정을 하고 타야 한다.
참고로 2011년,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쿠바는 의료 종사자는 많으나 수입이 많지 않아 매년 해외로 의사를 송출하고 있다. 2011년 현재 약 15,000명의 의사와 기타 의료 종사자 38,000명이 세계 66 개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 중 대다수인 3만명의 의료전문가가 베네수엘라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에 베네수엘라는 연간 32억달러어치에 해당하는 하루에 9만2000배럴의 석유를 쿠바에 공급하고 있다. 이같은 의료수출은 쿠바 경제에서 60억달러를 제공하며 공식적 수입원 1위인 관광의 25억달러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
(3) 구경거리 밀집 지역(Vieja: 비에하 지역)
위의 지도의 (3)번에 해당되는 지역을 비에하라고 부른다. 육중한 건물 사이로 나있는 좁은 길 양쪽으로 수 없이 많은 박물관, 미술관, 식당, 공연장이 늘어서 있다. 이은상 시인이 쓴 "오륙도"라는 시는 이렇게 끝난다.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안개나 자욱하면/아득한 빈 바다라/오늘은 비 속에 보니/더더구나 몰라라" 오륙도가 섬이 5개인지 6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 아바나의 볼거리는 수백 개인지 수천 개인지 도저히 그 수를 가늠할 수가 없다.
16-17세기에 건설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옛 건물은 깨끗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미덕이라도 되는 양,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세월에 부대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무렇게 매단 빨래줄에는 아무렇게나 빨래가 널려있다. 빨래 줄 뿐만 아니라 베란다에도 장대에도 무질서하게 빨래가 널려있다. 출입문은 녹슬었고 문턱에는 먼지가 쌓여있으며, 유리가 없거나 깨진 유리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건물에서 주민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여행객은 이런 주민을 바라본다. 우리는 이들을 우러러 보게 되고, 이들은 우리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바라본다.
이 건물 사이로 여행객이 걸어가고 마차가 지나가고 자전거 택시가 지나간다. 길 옆 건물 안에서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 차서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다. 어떤 곳에서는 악단이 음악을 연주고 있으며, 그 옆에 있던 종업원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들어와 물건을 사거나 식사를 하도록 유도한다. 또 어떤 곳에서는 살사춤을 가르치고 또 배운다. 어떤 거리에는 사람이 오건 말건 물을 뿌리며 골목 청소를 하지만, 수백년 동안 쌓이고 쌓인 건물의 낙서에는 결코 손을 대지 않는다.
이런 거리 사이로 저녁이 되면 붉으레한 석양이 살며시 얼굴을 내민다. 고색창연한 골목에 사각으로 비취는 햇빛은 아련한 봄날의 아지랑이 길이 되기도 하고, 인디아나 존스가 가야할 수백년 된 지하 돌길이 되기도 한다. 이 길 위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서성거리고, 길 한 모퉁이에서는 길거리 악단이 살사를 연주한다. 다른 공터에서는 리어커를 개조한 노점에서 온갖 고서적이 팔리고, 그 옆에는 어디에 사용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괴상망칙한 물건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상인들은 장사가 안 되면 자기들끼리 모여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그래도 너무 심심하면 낮잠을 자기도 한다.
아바나에는 아바나 사람들이 산다. 아마 70% 이상은 흑인으로 보였다. 스페인들의 학대로 수 많은 원주민이 죽자,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의 후손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달라고 했다. 담배를 주니 더 달라고 하고, 나중에는 빼앗아가기조차 했다. 음식을 갖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음식을 사서 마음 놓고 거리에서 먹기도 한다. 사진 찍는 내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던 젊은이는, 내가 사용하는 셀카 봉을 보면서 너무나 신기하다고 혼자 킬킬거리며 웃었다. 넓은 길을 가나 좁은 길을 가나 코너를 돌면 볼거리요, 아무 구멍이나 틈으로 들어가면 쉬었다 갈 곳이다. Lonely Planet은 이 좁은 비에하 지역에 봐야할 곳으로 66개의 명소를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서울의 명동만한 곳에서 66개를 보려 해도 며칠이 걸릴 것이다. 하도 많다보니 유네스코에서는 이곳 비에하 전체를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바다 건너 쪽 마을과 구름을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산비탈에 위치한 마을은 붉은 물감으로 물들여져 있었고, 그 위에서 꿈틀거리는 검붉은 구름은 뭉실대며 나에게로 꿈실꿈실 몰려오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정열을 불태우려는 듯, 꿈틀거리던 구름 떼는 총칼을 든 군인처럼 사방에서 일보 전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의 색깔과 모양을 바라보며, 낚시꾼들은 낚시질을 하다가도 하늘을 보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제 멋에 겨워 미친 듯이 웃기도 했다. 마침내 구름은 짙은 노란색으로 변하여 성당 꼭대기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에서 자신의 최후의 빛을 폭발시키고 분쇄시켜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마무리했다.
(4) 말레콘(방파제)
로운리 플래닛에는 아바나에서 반드시 경험해야할 첫 번째로 쿠바의 음악을 들고 있고, 두 번째로 경험해야 할 것으로 말레콘을 가볼 것을 추천하고 있다. 말레콘은 아바나의 북쪽에 있는 방파제다. 방파제를 때리는 바닷물은 파랗다 못해 검은빛이 돌았다. 몰려왔다 몰려가는 파도는 마치 평원에서 손을 잡고 군무를 즐기는 군중들이 박자에 맞추어 고함을 지르는 듯, 보는 이의 앙가슴을 때렸다. 파도가 잔잔한 때에도 파도는 방파제를 넘어 간헐적으로 도로를 갈겼다. 바람이 세계 부는 날은 파도가 방파제를 부딪치고 하늘로 솟았다가 원을 그리며 날아가,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가 거대한 물속을 뚫고 달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내가 시티 버스를 타고 말레콘을 지나칠 때는 비교적 바람이 잔잔한 오후였다. 사람들이 방파제에 앉아 검은 파도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무엇을 먹기도 하면서 오후의 따가운 태양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파도가 치건 바람이 불건 개의치 않고 방파제에 엎드려 세월이 흘러감을 바닷물과 공감하는 듯 했다. 어떤 사람들은 파도가 자기 몸을 적실 때마다 몸을 비틀고 괴성을 질렀다. 연인들은 연인들대로 몇 시간 즐길 수 있고, 삶에 지친 사람들은 자신의 답답함을 풀 수 있는 오아시스, 여기가 바로 말레콘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것은, 거대한 파도가 방파제를 먹어치우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거리를 집어삼키는 성난 파도의 울부짖음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방파제의 파도: 인터넷에서 내려 받음>
<말레콘 옆의 도로를 시티 버스가 달린다.>
(5) 모로 성(Castillo del Morro: 요새 지역)
요새 지역은 아바나 시내에서 차를 타고 지하차도를 건너서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일몰 장면은 그야말로 대 장관이었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더니 아바나 시내의 건물 사이로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태양은 마침내 녹쓴 대포의 포신 사이로 자신을 감추어 빛을 잃음으로써 찬란한 하루가 웅장한 서사시로 마감되었다.
1603년에 완공된 이 성은 성벽의 두께가 3미터나 되어서 그야말로 글자그대로 철옹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건설되었다. "이 언덕을 점령한 자가 아바나를 가질 것이다."라고 건설자인 안토넬리가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1762년 영국 원정대가 이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함락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영국군은 측면에서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이 성을 빼앗은 후, 바다를 향했던 대포 머리를 돌려 아바나 시내로 돌려 공격함으로써 아바나를 점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군의 피해가 너무 심해, 영국군은 미국의 플로리다와 쿠바를 맞바꿈으로써 스페인이 다시 쿠바를 차지하게 되었다.
언덕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예수 상이 있다. 높이 솟아서 아바나 시내를 바라보며 시를 보호하는 듯이 보였다. 근처에서 우뚝 솟은 예수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근처에 있다는 박물관을 찾았으나 이미 어두워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니 원주민들이 타는 배가 있었다. 원주민이 타는 배라 그런지 요금이 채 200원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서 영어를 잘 하는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동계 평창 올림픽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도대체가 일년 내내 더워 죽을 정도로 더운 이 지방에서 어떻게 스키 연습을 하는지 물었다. 그는 정부에서 돈을 내서 러시아에서 훈련을 한다고 했다. 순간, 어차피 참가해봤자 꼴찌를 면치 못할텐데,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 한 명이라도 더 먹여 살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로 성에 있는 지하 통로>
<언덕에 있는 예수 상>
(6) 혁명 광장
더운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혁명광장은 비수기라 그런지 관광객이 없는 텅빈 공터였다. 언덕에 위치한 109미터의 거대한 탑 아래에는 18미터의 대리석 조각상이 위엄있게 놓여있다. 이 사람이 바로 쿠바의 독립 운동가이며 문학가인 호세 마르티이다. 호세 마르티는 누구인가? 그는 쿠바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인 "관타나메라"의 작사이자 독립 운동가였다. 2015년 4월 16일자 프레시안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관타나메라>
"쿠바는 1514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19세기 초반부터 중반에 걸쳐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지역 대부분이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카리브해의 진주'로 불리는 쿠바의 독특한 위상 때문이었습니다. 쿠바인들은 1868년부터 30년에 걸쳐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습니다. 1868년부터 10년간의 무장 항쟁은 1878년 불완전한 휴전으로 끝났고, 1879-80년 2차 봉기 역시 실패했으며 1895년 봄 세 번째 독립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열다섯의 나이에 1차 독립항쟁에 참여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변호사 겸 외교관이자 시인인 호세 마르티(1853-1895년)가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선봉에 나섰다가 스페인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에서 광장을 지나 맞은편 건물에, 한쪽에는 체 게바라 또 한쪽에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선형(線形) 조형물이 장식되어 있다. 체 게바라의 조형물 아래에는 Hasta la Victoria Siempre라고 쓰여 있는데,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뜻이다. 또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상 아래에는 Vas Bien Fidel이라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잘 하고 있어, 피델"의 뜻이다. 체 게바라 이야기는 다음에 있을 "산타 클라라" 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혁명 기념 탑과 호세 마르티 상>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상>
<혁명 광장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시티 투어 버스에서 본 체 게바라 상>
(7)공동묘지: 네크로폴리스 데 콜론(Necropolis de Colon)
아바나 시내 공동 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 묘지로 알려져 있다. 면적이 56만 제곱미터라고 하니 상상하기 힘든 규모다. 우리를 태운 시티 버스는 그곳에서 차를 세우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말로 몇 마디 안내하고 방향을 틀어 버렸다. 그러나 버스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규모에 압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런 거대한 묘지를 조성하고 예를 다하여 이들을 받들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죽은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므로, 산 사람만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약하다. 죽은 사람을 일순간에 잊고, 새로운 삶을 살기 어렵다. 죽은 사람이 남긴 무한한 흔적이 세상 도처에 남아 있으며, 살아 있는 사람의 뇌리 속에도 죽은 자의 흔적이 남아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죽은 자의 대한 생각은 더 나게 마련이다. 죽은 자를 이렇게 극진히 모시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해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자신을 살리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이 이러한 거대한 무덤을 조성하게 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