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간 중미 여행기 21: 멕시코의 칸쿤에서 쿠바의 아바나(Havana)로
2014년 12월 8일 오후 3시 5분에 출발하기로 되어있는 칸쿤 출발 아바나 행 쿠바 항공은, 한 시간 연착하여 4시경 출발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탑승 수속을 밟느라 그렇게 허둥대지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 전 개발에 땀나도록 서둘러댔던 비행기 탑승 수속의 추억이 낮술 먹고 깬 뒤의 허무함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카리브 해의 파란 바닷물이 손에 잡힐 듯 하더니, 비행기는 동쪽 쿠바를 향해 굉음을 내며 고도를 높여갔다. 잠시 후 승무원은 음료수와 땅콩을 승객에게 주었다. 짭짤한 땅콩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잠시 후에 내 앞에 펼쳐질 쿠바의 모습을 생각했다.
쿠바는 공산국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철두철미하게 "공산당은 나쁘다" 라는 사상에 물들어 있는 나는, 지금 한가하게 땅콩이나 우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나에게 닥칠 상황을 설정해보고, 실제로 그 일이 닥쳤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생각해 두어야 했던 것이다. 지구 상에 남아있는 단 두 개의 공산국가, 하나는 북한이고 또 하나가 바로 여기 쿠바인 것이다.
이륙 후 약 40분이 지나서 비행기는 아바나 공항에 도착하였다. 말하자면 서울에서 제주도에 도착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간이 걸렸다. 여권 심사대는 모두 18개가 있었는데, 일의 진행 속도는 느릴대로 느렸다. 안내 책자에는 쿠바 입국시에, 하루에 3달러씩 보험증권을 사야된다고 써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사야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서 출국대를 지나가는 사람을 보니 가끔 어떤 사람은 퇴짜를 맞고 보험증권을 사러 가는 사람이 보였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통과 시켜 주었다. 한 마디로 "복질복"(표준말은 福不福)이었다. 우리도 보험증권을 사지 않고 운에 맡기기로 했다. |
<아바나 공항>
이민국 직원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왔느냐, 어디로 갈거냐, 아프리카에 간 적이 있느냐, 당신 아는 사람이 아프리카에 다녀왔냐, 이 여권 이외에 다른 여권이 또 있냐, 등등 고양이 방울가지고 장난하듯 끝없는 질문을 해댔다. 이런 이야기에 정신이 나갔는지, 공무원이 보험 증권 구입여부를 묻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루에 3달러씩 8일간 24 달러를 날릴 뻔 했었으니까.
여우 피해갔더니 호랑이 굴 나타났다는 말이 있다. 여권 검사 후의 세관 검사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모든 짐, 심지어 작은 가방, 지갑까지 모두 X 레이 투시기를 통과시켜야 했다. 사람이 보안대를 지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보안대를 통과했다 해도, 방망이 모양의 전자 검사기를 가진 여자 공무원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검사를 다시 받아야 했다. 앞을 다 검사하면 뒤로 돌아 다시 온몸을 샅샅이 뒤졌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여자 공무원의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 보통 이런 검사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하는 것이지, 출국장에서 이렇게 철저히 조사하는 것은 내 평생 처음있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머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말을 뇌까려야 했다. "여기는 공산국가다. 여기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달렸을 수도 있다. 조금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아오지 탄광, 아니 아바나 탄광으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사라질 수 있다. "여보게 정신차려 이 친구야. 모르겠네. 정말 난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지". 김수철이 부른 "정신 차려"가 불어터진 국수처럼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오지도 않고 입안에서 뻑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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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공항>
이제 해는 지고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몇 사람씩 조를 짜서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갈 예정이었다. K님으로부터 비행기 안에서 받은 쪽지를 다시 한번 살폈다. Industria라고 써 있는 것으로 보아 영어의 Industry(산업)와 비슷한 뜻일 거라고 짐작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묵을 곳이 무슨 공장 지대란 말인가? 너무 싼 집을 고르다가 소음과 매연으로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히는 그런 곳에 있는 여관으로 정했나보다.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 K님이 버스를 대절하여 모두 같이 타고 간다고 알려주었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곳에 그것도 밤에 뿔뿔이 흩어져서 택시를 타고 간다는 것이 꺼림칙했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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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시내로 가는 길은 가로등도 없고, 신호등도 없고, 사람이 사는지 귀신이 사는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암흑 천지였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밤에 북한과 남한을 위성에서 찍은 사진인데, 북쪽은 평양을 제외하고는 검은 색이었고, 남한은 잔칫집처럼 훤히 밝은 한 장의 사진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렇지, 지금 내가 공산국가에 들어와 있는 거야, 정신 차려야 해,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바나 시내에 가까워 오자, 가끔 노란 가로등이 보였다. 그런데 다른 나라와는 달리 희미한 불이 너무 높이 달려있어서, 가로등의 구실을 한다기 보다는 등대의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즉 여기가 길이라는 것만을 말할 뿐, 거리를 비추어 운전자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 완전 장님과 그나마 조금이라도 보이는 반쯤 장님의 차이라면 비유가 잘 되었다고 소문이 날지도 모르겠다.
버스에서 내렸다.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캄캄한 길 모퉁이에서, 길 가는 사람에게 주소를 물어, 어떤 건물의 8층으로 들어갔다. 한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자기들은 방이 2개 있는데, 다른 층에 방이 있는지 물어보겠다고 말하고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마침 여기저기 남아 있는 빈방을 긁어 모아서 5개를 간신히 마련했다. 물론 이 5개의 방은 모두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민박집이다. 내가 묵을 방은 2인 1실에 아침 식사 포함하여 35,000원에 계약을 했다.
모두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주인의 말을 듣고 여행자 거리가 있다는 방향으로 어두워진 거리를 무법자처럼 아니 패잔병처럼 터덜터덜 걸었다. 가끔 가다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만 있을 뿐이었다.
조금 걸어가니 한참 멋을 낸 파란 옷을 입은 20대로 보이는 반쯤 흑인 여인이, 요염하게 길가에 앉아 요상스런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저 여자가 소위 말하는 길거리의 여인일까? 며칠 전 멕시코의 칸쿤에서 택시 기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쿠바에 가면 길에 널려있는 것이 여자라는 것이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남자가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 여자가 지천에 깔려있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앞 사람을 따라가면서도 그 여자를 향한 시선이 고정된 것은 아마, 나만이 아니었을 성 싶다.
어떤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는데, 춘향모 이몽룡 본 것만큼이나 우리를 환대하여 맞아들였다. 그러나 웬걸 음식점의 음식 값이 멕시코보다도 비쌌다. 들어갔다가 비싸다고 나오기도 좀 그렇고, 나와봤자 문을 연 집이 없고 또 사정을 모르는 판국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집에서 먹기로 했다. 대충 먹고, 1인당 약 1만원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며 모두들 궁시렁댔다. "살다살다 이렇게 맛 없는 집 처음 보네. 맛대가리도 없는 것이 오라지게 비싸기만 하네."
민박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왔다. 못 탈 번한 비행기를 탄 일, 쿠바 공항에서 겪은 출국의 어려움, 값은 비싸고 형편없는 음식을 생각하니 내가 여기를 왜 왔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순간,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왔다. 샤워고 뭐고 집어치우고 비몽사몽간에 잠에 빠지고 말았다. |
다음 날 새벽, 날이 밝기 시작했다. 베란다에 나가 보니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바나의 아침 놀이라! 전방에 검은 건물의 실루엣이 선명하고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새떼가 이리 훨, 저리 훨 날아가고 있었다. 사방은 조용하고 어두움이 밝음으로 변해가는 장관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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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점점 밝더니, 다른 쪽 하늘에는 검은 색을 띤,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 다니고 있었다. 날은 혁명군의 구두발자국 소리처럼 시시각각 밝아왔다. 아, 내 앞에는 수십년 아니 몇 백년된 건물이 시네마스코프 영화처럼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고색창연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할 것이다. 성한 건물이 거의 없는 듯,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긴, 때묻고 퇴색되고 일부가 무너진 건물이 눈이 보이는 곳까지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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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왔다.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장식이나 치장이나 보수를 생각지도 않는 듯, 건물은 아무렇게나 뒹구는 벌레 먹은 낙엽처럼 그냥 그렇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는 1960년대 영화에서나 보았던 기가 막힌 모습을 한 자동차였다. 단지 겉만 번드르르 할 뿐, 내부는 그야말로 고장날까 싶어 만지지도 못할 그런 자동차가 굴러다녔다. 미국의 금수조처 때문에, 자동차의 모든 부속품을 스스로 만들어 갈고 갈아, 더 이상 갈 수 없는 처지에 이른 차들이 거리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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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파란색의 工자 표시를 한 집이 민박을 하는 집이다.>
<내가 묵은 건물의 801호>
아침을 먹기 위해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햇살이 옆에서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벽에는 여주인이 젊었을 때 찍었던 것으로 보이는, 영화 배우 같은 또 어찌 보면 다방 마담같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아래 소파에는 등받이가 앙증맞게 갖춰져 있었고, 옆 탁자에는 탐스런 꽃이 아침 햇빛을 받아 화사한 모습으로 인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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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식탁보가 깔린 정갈한 탁자 위에는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빵과 커피 그리고 각종 채소가 깔끔하게 놓여있어서 군침이 돌았다. 50대로 보이는 부부가 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들은 이곳에서 잠을 자지 않고, 어딘지 모르지만 다른 곳에서 아침마다 이곳으로 출근을 하는 듯이 보였다. 두 부부가 부엌에서 다정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 참으로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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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삼아 거실의 TV를 틀어보았다. TV에서는 대장금이 방영되고 있었다. 극중에 나오는 아이들이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저 아이들이 언제 스페인어를 배웠지? 나도 모르게 신기함에 빠져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강아지가 나에게로 와서 두발로 내 다리를 박박 긁어댔다. 옛날 방주연이 불렀던 "당신의 마음"의 가사처럼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가 갈색인 귀염둥이 강아지가 빤히 나를 바라보며 "식사하셔야지"라고 말하는 듯 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민박개 3년만에 세상이치 훤히 꿰뚫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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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아바나 공항에서 시내 숙소까지 버스비 1인당 약 5,000원 12월 8일 숙박비(아침 식사 포함) 1인당 약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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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