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5일 오전 6:30분 메리다를 출발한 버스는 아직도 밤기운이 선연한 어둠을 뚫고 칸쿤을 향해 달렸다.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칸쿤으로 가야했다. 버스는 오전 10시 반경 칸쿤 공항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시내 버스를 타고 칸쿤 시내로 돌아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호텔을 잡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호텔을 잡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방 하나에 1만원을 더 주고 덜 주고에 따라서 방의 상태가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4만원짜리 방은 너무 좋고 3만원짜리는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치상으로 생각하면 4만원짜리 잡아서 기분 좋게 자고 나오면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낮에는 돌아다니고 밤에 잠깐 잠만 자면 될 것을 구태여 생돈 1만원을 더 주고 방을 얻어야 하겠는가? 또 한편으로는 그까짓 것 1만원이면, 두 사람이 사용하니까 일인당 추가 금액은 5천원이다. 5천원만 더 주면 상쾌한 하루가 가는데, 왜 그것 가지고 그리 신경을 쓰는가? 술을 먹을 때는 몇 만원도 펑펑 쓰는 사람들이 왜 그리 째째한가? 이것은 콩나물 1,000원어치는 너무 많고 비싸고, 7백원어치는 너무 적은 느낌이 들어 밤새도록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주부의 심정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산다.
12월 5일부터 3일 동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호텔 근처의 공원에서는 밤마다 축제가 벌어졌다. 아니면 그들의 일상생활이 그런지 모르겠다. 낮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다가 저녁만 되면 공터 무대에서는 춤이나, 노래, 또는 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 공원 주위에서는 수 많은 노점상과 음식장사 또는 각종 놀이기구가 설치되어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축제 장면 비디오: 상영시간 1분 20초>
우리 몇 사람이 텅빈 칸쿤 밤거리를 걸었다. 우리가 묵은 지역은 시외버스 터미널과 가깝고, 해변 및 쇼핑센터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였다. 늦은 밤 칸쿤의 거리는, 다니는 차들도 별로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조용하고 한산한 곳이었다. 한 호텔에 장식된 목제 마야인 상이 위압적으로 보였다. 자신의 목에 귀신같은 목말을 태우고 앞을 내다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상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해골이 장식되어 있으며, 한 손에는 칼이, 또 다른 손은 가슴에 위치해 심장을 보호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댄스홀이 있었는데, 젊은 남녀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완전히 춤에 몰입하고 있었다. 콩쾅거리는 음악소리에 몸을 맡기고 시간 가는 줄 몰라하는 젊은이들의 율동이 마이클 잭슨의 몸돌림처럼 민첩하고 정교했다. 젊었을 때 오기로 배워보았던 지루박이니 블루스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붉은 등불 아래 초라하게 서 있는 키작은 목상(木像)이 서럽게 우는 밤이었다.
<12월 6일 방문한 코바와 툴룸>
코바는 AD 800 - 1100년 최고조에 달한 마야 문명 유적이다. 마야 문명지 중 면적이 가장 큰 곳은 과테말라의 티칼이고, 그 다음으로 큰 곳이 바로 여기 멕시코의 코바다. 여기 코바는 치첸 이사나 툴룸보다 이전에 건설되었다. 한창 번성할 때는 이 지역이 50㎢에 달했고, 인구는 40,000명에 달했다. 현재 코바의 인구가 1,300명인 것과 비교해 보면 그 당시에 얼마나 번창한 도시인지 알 수 있다.
마야 유적 중 많은 것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 다행히도 이곳은 정글에 묻혀서 파괴나 도굴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그런데 여기 건축술은 근처의 치첸 이사나 다른 유카탄 반도와 달리, 수백 킬로 떨어진 과테말라의 티칼을 닮았다고 한다. 피라밋 앞에 있는 비석의 내용을 보면 과테말라의 티칼에서 왕족 여인들이 코바의 왕족과 결혼을 하면서 건축가와 장인들을 데려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sacbeob라는 숲속의 길이다. sacbeob(사크베오브=white roads = 하얀색의 길)는 유카탄 지역에 나 있는 숲속의 길인데, 이 길은 코바를 중심으로 사방에 뻗어 있다. 이런 길은 코바에 약 40개가 되는데 어떤 길은 100키로나 된다고 한다.
정글 속에 나 있는 하얀 길 양쪽으로는 나무로 뒤덮인 언덕이 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 언덕 아래는 모두 유적이 묻혀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전체 유적의 약 5%만 발굴된 것이라고 하니 전체 유적을 발굴한다면 그 범위는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이 지역을 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심지만 본다고 해도 2km를 걸어 들어가서 다시 2km를 걸어 나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자전거를 빌리거나, 현지인이 운전하는 2인승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닌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유적이 정글 속에 위치해 있어서 어떤 교통 수단을 이용해도 더운 날씨지만 그런대로 참을만 하다. 우리는 모두 걸어다녔다.
<La Iglesia = 교회. 앞에 거적에 덮여있는 것이 비석인데, 상형문자가 적혀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다 벗겨져서 알아보기 힘들다. 저 위에 올라가서 보면 근처의 호수와 가장 높은 Nohoch Mul 피라밋이 보인다.>
<사원 근처에 공놀이 경기장이 있다. 규모가 작아서 치첸 이사의 1/10 정도도 안 된다.>
<또 다른 공놀이 경기장에 재규어를 새겨 놓았다.>
<공놀이 경기장에 새겨진 해골. 승자의 해골인지 패자의 해골인지는 알 수 없다.>
마침내 도착하게 되는 장소는 Nohoch Mul(큰 무더기 또는 피라밋)이다. 높이가 42m로 유카탄 반도의 마야 피라밋 중 두 번째로 높다(가장 높은 것은 멕시코 남부 Campeche에 있는 Calakmul의 Estructural II이다. 높이 45m).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라밋에 한 번 올라가 본다. 그런데 경사 45도의 피라밋을 올라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지가 않다. 일단은 가파르다. 그리고 그 높이가 위압적이다. 계단은 일부 무너져있고, 남아 있는 돌은 정상적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는 곳도 있다. 가운데 밧줄이 없으면 하루에도 몇 사람 굴러 떨어질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올라 다녀서 어떤 돌은 반들 반들하여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입장료를 내고 먼 곳을 걸어왔으니 어린 백성을 가상히 여겨 올라가는 것을 허락했는지 모르지만, 이러다가는 굴러 떨어져 죽는 사람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이 유적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이곳의 통행을 막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곳이 있다면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이 진작 터져 나오고 말았을 것이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조그만 신전이 있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주위에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사람의 상이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로운리 플래닛에 의하면 정상에 두 개의 다이빙하는 상이 나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자세히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descending) 상인 듯도 하다.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관망은 글자그대로 일망무제(一望無際)다. 작은 나무 숲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저 하늘뿐이다. 하늘과 맞닿은 저런 것을 지평선이라고 할 게다. 힘들게 올라온 관광객에게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가슴이 탁 트인 대지에서 나는 언제 이런 곳에 또 와볼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나나 보다. 저 멀리 끝 없이 펼쳐진 녹색의 장관을 한 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한 쌍의 연인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서로 미소를 주고 받았다. 여인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자 남자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며 얼굴과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사랑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 젊음은 참 좋다. 언제나 가슴을 적셔줄 애감(愛感)이 넘쳐나는 나이이니까. 시인 백석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고 읊었다. 그가 이 장면을 보면 어떤 시상이 떠오를까?
내려와 호숫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날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사람은 우리 팀 이외에 멕시코 노부부가 있었다. 마침 그날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내의 생일을 기념하여 함께 코바 관광을 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식사를 하다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러더니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자식으로부터 온 생일 축하 전화라고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전화를 받는 아내, 그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우는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 두 사람의 행동을 숨죽이며 바라보는 관중, 식사시간은 한편의 추리 영화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호수 근처의 마야인 전통 물건 판매점>
<코바의 뱀>
<식당의 개>
툴룸 유적은 아름다운 해변가에 위치해 있다. 툴룸이라는 말은 벽(wall)이라는 뜻이다. 해변가에 위치해 있으므로 바람을 막아줄 벽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마야 도시가 스페인 사람들이 침략하기 이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려졌다. 그러나 여기 툴룸은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온 후 약 75년이 지난 뒤에 방치되었다. 그들이 정든 이곳을 왜 떠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가서 비바람에 넘어지고 흩어져서 여기저기 듬성듬성 남아있는 유적들, 그나마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되어 흔적조차도 찾기 힘든 빈 공터를, 옛날과 다름없이 지키고 있는 것은 동물뿐인가 보다. 종류를 알 수 없는 까마귀를 닮은 새가 이리 훨 저리 훨 날다가, 허물어진 벽 위에 앉거나 잔디밭에 앉아 먹이를 찾고 있다. 또한 이구아나인지 도마뱀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뱀이, 옛날 깃털달린 뱀의 영광을 추억하며 풀 숲을 헤매이고 있다.
<툴룸 유적지는 높은 건물이 없이 여기저기 무너진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다. 중간에 있는 가장 높은 성이라는 것도 높이가 7.5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전 중에 코반에서 진을 뺄만큼 뺀 상태라,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고리타분한 설명을 듣기 보다는 카스피 해안에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거나, 쪽빛 바닷물에 발을 담가 보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역사의 현장에 가서는 대충 보고 들으면서 멋있는 장면 앞에서 사진 몇 장 찍는다. 나머지 시간에는 그저 잘 먹고 잘 놀고 오면 그만이다. 그러나 일단 한국에 돌아오면, 그래도 그때 설명을 좀더 잘 들을 걸 하는 후회가 앞선다. 툴룸에서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를 걸으면서도 가이드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모래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미세한 모래 가루는 마치 필리핀의 보라카이처럼 부드러워 발 사이로 빠져 올라올 때는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수영을 하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고, 바닷물을 바라보거나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비키니를 입은 늘씬한 여인들이 바닷가를 걸을 때는, 마음이 싱숭생숭한 젊은 남자들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 죄없는 코만 씰룩거렸다.
아까부터 나의 시전을 잡는 한쌍의 젊은이가 있었다. 남자는 빡빡이었고 여자는 대조적으로 빨간색 훤피스에 긴 갈색머리를 휘날리며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여자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날려 자신의 얼굴을 가로질러, 바짝붙어 앉은 남자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긴 갈색 머리 머리를, 입술로 밀어내며 여자를 향해 더욱 가깝게 다가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흔히 그러하듯, 두 사람의 눈빛은 2차원에서 1차원으로, 청색에서 붉은 색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툴물의 어스름한 저녁 해가, 카리브해의 넘실거리는 쪽빛 바닷물에 부딪혀 고혹적인 자태를 뽑내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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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 7일 3일간 숙박비: 1박당 2인 1실 약 41,000원.
12월 6일 코바, 툴룸 1일 관광버스비(점심 식대 입장료 포함) 1인 당 약 5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