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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여행기 5 "민드로에서 보라카이까지"(From Mindoro to Borakai)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7. 28. 12:06

필리핀 여행기 5


-민도로 화이트비치에서 보라카이까지-

 

 

<여행 경로: White Beach-Puerto Galera-Calipan(Baco)-Socorro-Roxas-Caticlan-Boracay>

 

 

다음날 새벽 우리는 일찍 일어났다.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으니 일단 일찍 시작하면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국인 주인 아저씨는 우리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생수도 그냥 가져가게 했고, 우리가 가져간 소주도 그 식당에서 부담감없이 먹어라 했다. 운전수를 시켜 호텔 자가용으로 화이트 비치에서 프에르토 갈레라까지 태워주었다. 말이 호텔 자가용이지, 우리나라 같으면 폐차감 봉고차다. 시간 상으로 약 25분 정도 걸린다.

 

프에르토 갈레라에 도착하니, 마침 한 지프니 운전수가 큰 소리로 "깔라판"이라고 외쳐댔다. 그 소리가 마치 "빨래판" 같았다. 따가로그를 배워 본 적은 없으나, p는 ㅃ으로, t는 ㄸ로 발음하는 것을 보면, 따가로그에는 ㅍ 발음과 ㅌ 발음은 없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Pasay라는 지명은 "빠사이"가 되고, Let's go together는 "레스 고 뚜게더"라고 마닐라 주인집 도우미들이 말했던 기억이 났다.

 

 

<길 옆에 보이는 논>

 

 

우리의 계획은 Calapan까지 지프니로 가고, Calapan에서 Roxas("로하스"로 발음한다)까지는 버스로 간다. 일단 로하스에서 상황을 보아 하룻 밤 잘 수도 있고, 자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가능하면 자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나머지 두 분은 어떤지 모르겠다.

 

 

지프니는 삼분의 일도 손님을 태우지 못하고 출발했다. 기름 값도 비쌀텐데, 이래 가지고 기름값이나 나올 지 걱정이 됐다. 지도에서 보면 알겠지만 깔라판 가는 길은 왼쪽으로 바다가 끝 없이 펼쳐져 있다. 해변을 끼고 지프니는 비포장 길을 잘도 달렸다. 인적이 닿지 않은 남국의 해변이, 멀게 또는 가깝게, 손에 잡힐 듯이 때로는 아련한 아지랑이처럼 꿈속에서 아롱거렸다. 덜커덩거리면서 가파른 언덕과 급격한 경사로를 통과할 때마다 두 발에 힘을 주었다가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가 신경을 바짝 써야 한다.  

 

 

 

 

10분 정도 갔을까. 사람이 하나 둘 타기 시작했다. 마닐라의 지프니는 조수가 없었는데, 여기는 조수가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조수가 없이는 운전수 혼자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승객들이 늘어가니 급기야 짐을 지프니 위에다 싣고, 사람들이 뒤에 매달리며 갔다. 조수는 차를 멈추라고 할 때는 차를  "퉁퉁" 쳐서 신호했고, 출발하라고 할 때는 "에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지프니의 맨 앞쪽에 탔는데, 내 앞에는 다소곳하고 얌전해 보이는 40대 여인이 한 명 타고 있었다. 스카프로 머리를 예쁘게 묶고, 영화 배우 한가인처럼 코에는 작은 점이 있었다. 달걀 모양의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너무 붉지 않게 칠했으며, 매연을 막느라 입과 코에 손수건을 내내 대고 있었다. 아마도 깔라판까지 출근을 하는 여자처럼 보였는데, 왜그런지 모를 신성일 엄앵란 옛날 영화를 보는듯한 애절함이 그녀의 얼굴에서 묻어 나왔다.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이 오랫 동안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있는 경험을 한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리라. 말한마디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그 여인의 모습은 한 동안 밤에 잠자기 전 천장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녀에 대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L형이 하는 것을 보면 남자들은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나보다.

 

 

한 시간 반정도 지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밖에서 "로하스, 로하스"라는 소리와 더불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들렸다. 우리는 깔라판 버스 정류장에서 로하스로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중간에서 로하스라는 말이 나오니 이상했다. 서너 명의 남자가 지프니 주위를 돌며, 또 "로하스"라고 외쳤다. 나는 Roxas?라고 물었다. Yes, Roxas. 라고 분명히 들렸다. 나는 "내려, 내려!"라고 외쳤다. 왜 이런 갑작스러운 일이? 아무런 예상도 없이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급습을 당하다"는 영어 표현이 떠 올랐다. "be taken by surprise"다.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외워두었으면 이 상황에서 영어 표현이 떠오를까? 내가 영어에 세뇌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허리를 구부려 벅벅 기듯이 지프니에서 내렸다.

 

 

<문제의 봉고차와 운전수 및 그 친구들>

 

 

우리는 지프니 운전수에게 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우리를 태워갈 봉고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K 형이 요금을 지불하려고 지갑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불과 몇 초 뒤 K형은 "내 배낭 어딨어? 내 배낭을 차에다 두고 내렸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바깥에서 빨리 내리라고 소리지르는 바람에 지프니 안에 배낭을 두고 내렸다고 했다. 우리가 타고왔던 지프니는 이미 50 미터나 멀리 가 버렸다. 나는 "어, 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L 형은 "저 지프니를 잡아라"라고 마치 암행어사 출동한 듯이 외쳤다. K형은 지프니를 쫓아갔다. 지프니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지프니에 탄 사람들이 왼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왼쪽에 배낭이 떨어졌는지 그쪽을 보아도 배낭은 없었다. K 형은 더 힘차게 달렸다. 대낮에 한 편의 영화를 본다. 나도 그 장면 중의 등장 인물이다. "맨발의 기봉이"가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달려가던, K형의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이구 포기하는구나!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내 입에서는  계속 "어, 어" 소리가 나왔다.

 

 

그 순간 뒤를 보니 뜻밖에도  "로하스"라고 외치던 봉고차 운전수가 배낭을 가지고 머쓱하다는 듯이 나타났다. 알고보니 우리들 짐을 들어준답시고, 미리 짐을 빼내서 우리가 타고갈 봉고차에 실어 놓았던 것이다. 길 옆에 있던 구경꾼이 배꼽이 빠져라 웃었고, 멀어져가는 지프니 속의 승객들도 차가 요동치듯 웃는 모습이 보였다. 지옥과 천당을 오고간 K형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 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깔라판에서 차를 갈아타려고 했던 우리는 사실은 지도상의 Baco라는 지점에서 차를 갈아탄 셈이 되었다. 깔라판 시내에서 쉬면서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차를 타려고 했던 우리는 엉겁결에 시내에 들어가지도 않고 Roxas 행 직행 봉고차를 탔던 것이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오른쪽으로 위압적으로 뻗어있는 High Rolling Mountains를 배경으로 들판은 들판으로 이어졌다.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 가면 잡목이 우거진 들이 나타났다. 가끔가다 소도시가 나타나기도 했다. 졸며 깨며, 꿈을 꾸며 또 그 꿈을 지웠다. 그렇게 그 봉고차로 네 시간을 달렸다.  로하스 항구라는 외침 소리에 잠이 깼다. 12시였다. 아침 6시에 출발하여 6시간 걸린 셈이다.

 

 

로하스 항구 앞에 눈에 띄는 식당이 두 개가 있었다. 더 좋아 보이는 곳을 택해 들어갔다. 먹을 음식이 한국의 찐만두 담아두는 쇠그릇 같은 곳에 죽 담겨져 있었다. 내용물을 하나하나 열어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자기가 원하는 양만큼 주문하는 식당이다. 물론 처음 시도해 보는 음식이다. 각자가 알아서 이것 저것 주문해 놓으니 여러 종류의 음식이 밥상에 놓였다. 날은 더운데 사방에서 파리가 공격해 왔다. 파리를 쫓아가며, 부채를 부쳐가며, 밥먹기 싫어하는 유치원생 억지로 먹듯이 먹었다. 그때 숨겨두었던 마지막 김치를 누가 꺼냈다. 나머지 밥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오후 2시 30분에 까띠끌란으로 가는 배가 있었다. 사실 나는 로하스에서 하룻밤 보내기를 속으로 바랬다. 다른 사람은 여기는 볼 것도 없으니 그냥 보라카이까지 가자고 했다. 볼 것이라는 것은 대단히 주관적이다. 나는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지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산, 큰 강, 번쩍이는 건물만 볼 것이 아니라, 쓰러져가는 초가집도, 코를 찌르는 쓰레기 더미도 때에 따라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경험이냐 아니냐의 간단한 문제로 귀결된다. 두 사람은 항구의 휴게실에 머물었다. 나는 혼자 트라이시클을 타고 약 2키로 되는 로하스 시내로 구경갔다.  

 

 

 

<로하스 거리: 우리나라의 읍 정도 되는 것으로 보였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왜 이리도 트라이시클이 많으냐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빈 트라이시클이  여름에 하루살이 왱왱 거리듯 돌아다녔다. 타는 사람도 없었고, 트라이클 운전사도 탈 것을 기대하지 않는 듯 했다. 그저 습관적으로 돌아다니는 듯이 보였다.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갖가지 식료품과 고기가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우리네처럼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팔려는 의지는 왕성해 보였다. 이방인인 나에게 그들은, 다른 곳에서 그렇듯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사진찍히기를 바랬다. 아저씨도, 아줌마도, 그리고 아가씨도 사진에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정육점에서 일하는 모습>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좋아하면서도 수줍어 한다.>

 

 

 

 

<빨간 달걀이 신기하여 물어보니 벙긋벙긋 웃기만한다>

 

 

<도마 위의 파리>

 

 

파리로 들끓는 정육점 옆에 한가로이 놓여있는 도마 위의 파리 떼가 징그러우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동네의 뒷골목 술집은 어떨지 궁금했다. 우리 나라 식의 시골 다방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더 보았다해도 미련은 남는 것이어서, 발걸음을 돌려 다시 트라이시클을 타고 로하스 항구로 왔다.

 

 

 

<아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여서>

 

 

로하스 항구 휴게실에 앉아 있는데, 한 부부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일로일로 시티에서 망고라는 과일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한 참을 이야기하다가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그 후 펜팔로이어졌고 지금도 가끔 이메일이 왔다갔다한다. 후에 그곳에 태풍이 불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는 메일을 받고, 나는 시티은행으로 3만원을 일로일로 시장에게 보내기도 했다.

 

 

<호세 부부: 후에 펜팔이 되었다. 키가 차이가 나서 "도, 시, 라" 음계 같다.>

 

 

망고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필리핀에 온 지 얼마 안되어 L형이 얼굴이 팅팅 붓고, 몸에 붉은 반점이 솟고, 가려워했다. 한참 심할 때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까지 얼굴이 부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참다가 나중에는 병원에 갔었는데, 망고를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망고가 한국의 옷나무와 비슷한 종류여서, 일종의 망고 옷이 올랐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주사를 주고 약을 주더니, 이제 마음대로 망고를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먹지는 않았지만, 그 의사는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떻든 L형은 그 뒤 거의 10일 동안 망고 옷으로 생고생했다. 다행스럽게도 인천공항에서 보험들은 것으로 병원비는 깨끗하게 해결되었다.

 

 

오후 2시 반에 까띠끌란 행 배는 출발했다. 6시간 이상 배를 타야하니 사람들은 담요를 하나씩 가지고 배 안 여기저기 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서 자는 사람, TV를 보는 사람, 잡담하는 사람, 각자가 요령껏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다.  

 

 

나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 하늘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다시는 와보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하니, 피곤함과 졸음이 몰려오는 중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이라고 할 때 모든 것은 아쉬움이 남는 법인가 보다.

  

 

 

<까띠끌란으로 가는 배 위에서>

 

 

 

밤 9시 우리 배는 까띠클란 항에 도착했다. 보라카이 섬으로 가는데 입장료, 통행세, 청소세 등을 포함하여 몇 가지 표를 사야한다. 표를 사는 중에 한 여인이 싸고 좋은 호텔이 있다고 하여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방이 작더라도 깨끗한 방을 원한다고 했다. 가보니 우리의 목적에 부합되는 방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볼까도 생각했으나, 다른 곳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그냥 거기에서 묵기로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는 일종의 삐끼(승객을 유인하는 사람)였는데, 그녀가 엉터리 삐끼나 바가지를 씌우는 삐끼는 아니었고, 대충 합리적인 삐끼였다. 그 집에서 3일간 있으면서 우리는 종종 그 삐끼에 걸려 오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녀는 자기들이 유인해서 성공하는 경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보고 다른 한국사람보다 영어 발음이 좋다고 한다. 다른 한국인의 발음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I'm an English teacher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I was an English teacher라고 하기도 이상했다. 나는 씩 웃고 말았다.

 

 

 

잠을 자려고 하니 11시가 되었다. 아침 6시에 출발하였으니까 무려 17시간이나 걸쳐서 온 셈이다. 내일 새벽이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보라카이 해변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밀가루 같은 모래, 야자수 늘어진 해변, 둥둥 떠 있는 구름, 절벽에 매달린 집들이 벌써 내 눈에 아른거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