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기 6 - Borac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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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의 "깃발"> |
<곽영을의 "깃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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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사진사는 빛을 쫓는 사람인지라, 찬란한 빛을 찾으러 새벽과 저녁에 들판을 헤맨다. 피사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사진에서는 빛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찍을 것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찍으면 되지만,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찍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보다는 아침 저녁의 빛은 황홀감을 주는 색인지라, 사진사는 대낮에는 낮잠을 자고, 새벽과 저녁에 어슬렁거리며 빛을 찾아 나 다.
어둠을 뚫고 화이트 비치 위쪽에 위치한 디니위드 비치에 갔다. 산 위로 올라가니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지면서 호텔이 나타났다. 절벽 위의 호텔이다.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돌아올까 하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구경해도 좋은지 물었다. 그는 방명록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들어오라고 했다. 아방궁이 따로 없었다. 바다 절벽에 이런 호텔이 있다니. 이런 호텔에 또 이런 시설이 있다니. 여기저기 안내해 주는 안내원을 따라, 구석구석 구경하면서,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생각이 들었다.
<디니위드 해변 위의 산에 위치한 고급 호텔>
<호텔의 일부>
<호텔의 객실: 특별히 구경하도록 안내해 줬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화이트 비치로 왔다. 어깨에 물고기를 메고 가는 청년이 보인다. 따호를 파는 청년도 보인다. 과연 보라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트인 시야에 구름이 떠 있는 것이 마치 하늘에 바다가 있는 듯했다. 하늘도 바다요, 바다도 바다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아니다. 위압적인, 때로는 한가로운 구름은 빛의 방향과 구름의 방향, 태양의 고도에 따라 수시로 모양을 달리했다. 이런 보라카이의 풍경은 저녁에는 더욱 그 자태를 뽑냈는데, 하늘과 바다와 모래로 구성된 아이맥스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때로는 황홀감을, 때로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과연 보라카이의 노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자연미의 극치다!
<젊은이가 고기를 막대에 꿰어 지고 간다.>
<젊은이가 "따호"라는 음식을 판다>
또한 모래는 밀가루보다 더 가늘면 가늘었지 굵지는 않으리라. 시루떡이나 찹쌀 떡을 해 먹으면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자수도 바다에 어울리는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야자수가 완벽한 삼 박자를 이룬다.
<모래 사장에 쌓은 성>
<보라카이 해변>
<보라카이 해변의 아이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한다.>
<해변 풍경: 노을 빛을 받아 얼굴이 붉다.>
<해변 풍경>
<해변 풍경: 무지개가 보인다.>
우리는 3박 4일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바다와 하늘과 구름과 야자수에 취해 있었다. 더위를 피해 호텔에 머물러야할 내 몸은, 자신도 모르게 바다로 향하는 내 발에 얹혀 바닷가를 맴돌았다. 나는 바다를 볼 때마다, "와~, 와~,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정말 말이라는 것은 사람이 보고 느낀 것을 극히 일부만 표현할 수밖에 없나 보다. 글보다는 사진에 주목하기 바란다. 황홀감에 흠뻑 취한 우리는 황홀한 음식을 찾아 나섰다. 한국에서 비싸다고 한 바닷가재를 소주와 함께 먹어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우리는 화이트 비치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바닷가재 판매 식당에 왔다. 키가 크고 육중한 몸매의 주인은 한국말을 섞어가며, 곧잘 장사를 했다. 우리는 큰 바닷가재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바닷가재: 통속에 소주 뚜껑이 보인다.>
얼마 떨어진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국 식당이 있고, 그 앞에 못말리는 한국의 아줌마들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마 한국의 아줌마들처럼 신기한 집단도 드물리라. 나이가 30을 넘고 아이를 한 둘 낳으면, 전혀 딴 판의 인종이 된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못할 일, 못할 짓이 없는 전대미문의 여황제, 금순이, 가장, 기형아, 독불장군, 똘마니, 장똘뱅이, 등등, 좌우지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중성의 여인이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줌마들 노는 것을 호기심있게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 알맞게 양념을 하여, 야자 껍질 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어진 바닷가재와 소주가 상 위에 놓여졌다. 상상해보라. 이국의 넘실거리는 바닷가에,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라고 부르는 한국 아줌마들의 젓가락 장단에, 소주와 바닷가재를 맛본다는 이 일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우리는 누가 술을 더 먹는 사람이 없는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되었고, 결국은 그럴 필요도 없이 모두 흥건히 취하여 입이 삐뚤어지고 혀가 꼬부라지게 되었다.
한국인 아줌마들은 이제는 아에, 바닷물 옆에 바짝 다가갔다. 빙빙 둘러 앉아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모기에 물려가며 구경꾼들은 몰려들고 또 몰려들었다. 구경꾼이 모이면 모일수록 아줌마들은 더 힘이 솟는 듯 했다. 서커스 배우들을 데리고 다닐 것이 아니라, 한국의 아줌마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포장을 쳐놓고 입장료를 받으면, 떼부자 되는 것은 시간 문제리라.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난 필리핀 관광객>
우리 테이블 옆에 필리핀 여행자 부부가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무슨 말을 해서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남자의 영어 발음이 미국식 발음인 것으로 보아 회사의 좀 높은 직책의 사원인 듯했다. 하여튼 무슨 말을 한 20분간 했는데, 그도 술이 취하고 나도 술이 취해서 우리가 한 말은 전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날, 시내에서 점심을 먹는데, 누가 어깨를 쳐서 돌아보니 그가 또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마치 떨어져 있던 형제가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호텔로 오는 길에 청바지를 위 아래로 입은 여자가 오빠라고 부르며 나에게 달라 붙었다. 직감적으로 게이임을 느꼈다. 그녀는 "오빠"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왔다. 자기 집으로 가든지, 나의 호텔로 오겠다는 것이다. 나는 미련없이 No라고 했다. 그녀는 10여미터 따라오다 제 풀에 기가 꺾여 돌아갔다.
다음날 우리는 트라이시클을 두 시간 대절해서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북쪽 푸카 비치에 갔다. 트라이시클에 돼지를 싣는 것이 흥미로웠다. 트라이시클은 때에 따라, 화물차가 되고, 때에 따라 자가용이 되기도 한다. 상점에 걸려있는 조개와 옷의 색이 환상적이다. K형은 집의 거실에 둔다고 큰 조개 껍질 하나 샀다.
<돼지를 끌고가서 트라이시클에 태웠다>
그 뒤에 디니위드 비치를 거쳐, 블라보그 비치를 지나, 가장 높은 산인 루호산에 갔다. 거기에는 전망대(view deck)가 있었다. 여기저기 둘러볼 필요 없이 이 전망대에서는 보라카이 섬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방을 둘러보며 끝없이 셔터를 눌렀다. 세계의 아름답다는 항구를 모아 놓은 듯, 방향을 조금 틀 때마다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전망대에서 본 바다>
그곳을 구경했으면 보라카이 구경은 다 한 셈이다. 우리는 어제의 랍스터의 맛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시장에 가서, 사먹어 보기로했다. 약 2키로 트라이시클을 타고 어시장으로 왔다. 그런데 갑자기 L형이 선글라스가 없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망대에다 두고왔다고 한다. 이미 시간은 20분이 지났다. 나는 얼마짜리인지 물었다. 싸구려면 그냥 내비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태리제 30만원짜리라는 것이다. 나는 무조건 가보라고 했다, L형은 트라이시클을 타고 전망대로 갔다. 얼마 뒤 L형은 만면의 미소를 띄고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다. "필리핀 사람이 이리도 착하나? 내가 가니까 주려고 손에 들고 있더군" L형의 말이다.
기왕에 잃어 버린 물건에 대해 이야기하나 더 한다. 저녁에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데 L형은 호텔 열쇠를 가지고 나왔다. 열쇠를 어떻게 할까하다가, 주머니에 넣고 수영을 하다 없어졌다. 키가 없어졌다고 소리를 지르니 주위에 있던 외국인 열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모두 "키, 키, 키,"라고 외치면서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열쇠 수색 작전에 돌입했다. 모두들 "키"라고 외치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kbs 개그 콘서트의 이수근이 나온 "키 컸으면, 키컸으면"이라는 프로를 보는 듯 했다. 결국 열쇠는 찾지 못했고, 열쇠 비용으로 2만원을 내라는 것을 간신히 만원으로 깎아 호텔에 지급했다.
우리는 어시장에서 가장 큰 바닷가재를 샀다. 몇 키로 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4-5키로 될 것이다. 그것을 사들고 근처의 요리집으로 갔다. 그곳도 노량진처럼 어물을 사들고 가면 요리해주는 집이 따로 있다. 요리를 해서 가져왔는데, 너무 크다보니까, 무슨 멧돼지를 삶아 놓은 것 같다. 산미구엘 맥주와 불볕 더위와 더불어 한 동안 먹었다. 우리는 먹다가 쉬다가 먹다가 쉬다가 했다. 결국은 조금 남기고 왔다.
<결국은 다 먹지 못하고 남기고 온 바닷가재: 솔직히 말해 구렁이 삶아 놓은 것 같다.>
호텔에 와서 다음날 마닐라에 갈 비행기를 예약했다. Asian Spirit라는 경비행기다. 그런데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려는데, 대화가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큰일 나기에 나는 호텔의 후론트 클락에게 전화를 받아 보라고 했다. 그는 따가로그를 사용하여 대화했다. 잠시 후 그는 나에게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1)예약을 받기는 받으나 다른 사람이 돈을 들고 오면 그 사람에게 표를 먼저 판다는 사실, 2)시간대 별로 요금이 다르다는 사실, 3)그러므로 빨리 와서 표를 사는 것이 좋으리라는 내용이었다. 위에 있는 1)번과 2)번은 통상적인 개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이해를 못했던 것 같다. 또한 필리핀 영어를 사용하는 그녀의 발음에 내가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의사소통에 문제로 작용한 것 같다. 결국 내가 주어진 상황을 이해할 때, 영어 회화가 가능한 것이지, 그 내용을 모르면 영어를 잘하건 못하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다음 날 공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K형이 산 조개를 기내에 가지고 갈 수 없으니, 가방에 넣어 짐으로 부치라는 것이었다. 짐으로 부치면 깨질 것이 뻔한 K형은 기내로 가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때, 갑자기 수갑을 가진 경찰관이 나타났다. 벽을 가리키면서, This is an endangered species(멸종위기 생물)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불법이니 체포한다고 했다. 깨지건 말건 짐으로 부쳤으면 이런 일이 없을텐데라고 생각하며 모두 초죽음이 되었다. 그 경찰관이 가르키는 벽에는 그 조개를 가져가면 불법이라고 그림과 영어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 경찰관은 수갑을 K형의 손목에 갖다 댔다. K형을 포함한 우리는 침이 꼴깍 넘어갔다. 결국 사정사정하여 그 물건을 포기하고, 닭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심정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체포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지만, 끝이 나쁘면 다 나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씁쓸한 맛은 어쩔 수가 없었다. 휴게실에 앉아 TV를 보았지만,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옆에서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맛사지를 해주는 곳이 있었다. 기분 전환으로 맛사지를 권유했지만, K형은 기분이 상했는지 맛사지도 받지 않았다. 멍하니 하늘만 보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더디게 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중에서 "쾍영여"라는 말이 몇 번 방송에서 나왔다. Kwak Youngeul을 "쾍 영여"라고 발음했던 것이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가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 우리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타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호출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가방을 갖고 냅다 뛰었다. 내 평생 가장 빠른 속도로 뛰었으리라. 날뛰는 세 필의 말(馬)에 의자가 몇 개 우루루 넘어졌다. 넘어진 의자를 세우고 가려다 그냥 또 뛰었다. 헐떡이는 우리를 비행기 검표원은 필리피노 특유의 밝게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좌충우돌, 5박 6일 보라카이 배낭 여행은 우리의 가슴에 애잔한 추억을 남긴채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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