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7일 타이완 화련 6.0 지진 "생생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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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7일 지진이 발생한 타이완 화련의 위치>
보물섬 여행사를 통해, 우리 일행 12명이 대만 패키지 여행을 떠난 것은 2018년 2월 6일 아침 9시였다. 당일 오후 현지 타이페이 관광을 마치고 저녁 6시 비행기로 타이페이를 출발하여 화련에 도착하니 저녁 7시쯤 되었다.
화련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하러 큰 식당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렇게 넓은 식당에 우리를 제외하고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거, 참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들자, 문득 이틀 전 이곳에 지진이 있었다는 뉴스를 본 것이 생각났다. "아, 지진 때문에 이곳에 관광객이 오지 않는구나!" 순간 벼락은 같은 장소를 두 번 내려치지 않는다(Lightning doesn't strike twice), 라는 영어 속담을 상기했다. "이미 땅속에 있는 압력은 이틀 전 지진으로 해소가 되었기에 다시 이곳에 지진이 나지 않을거야" 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빼갈 한 잔을 콩나물 안주로 벗삼아 유쾌한 저녁을 보냈다.
<우리가 숙박한 화련 푸롱 호텔: 인터넷에서 다운받음>
그날 밤 화련 푸롱 호텔(福容大饭店)에 돌아와 바로 잠을 청했다. 별로 피곤한 일을 한 것도 없는 데, 그냥 골아 떨어진 것이다.
한참 잠을 자는데 어디서 "따당, 쾅쾅, 우르르----, 쾅쾅" 소리가 들리면서 침대 위에 있는 내 몸이 이상하게 들썩거렸다. 처음에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군대 있을 때, 곤히 잠자고 있는데, 고참이 술먹고 들어와서 "간나 새끼들, 고참이 들어왔는데, 자빠져 자? 이 섀끼들, 다 집합시켜! 짜식들이 빠져가지고 . . . . 집합해!"라는 말과 함께, 나를 포함한 졸병들의 머리통을 구두발로 찼던 무시무시한 고참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다음 분명히 전쟁이 났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진이면 몸만 흔들려야 하는데, 몸이 흔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천둥과 같은 따발총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짧은 시간에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 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배가 기울어 점점 바닷물에 잠기고 닻에 매어둔 쇠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핑핑"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윽고 몸이 들썩거리고 이리저리 흔들려서, 하는 수 없이 침대 맡에 있는 전등의 불을 켰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이 이리저리 나뒹굴며 컵이 탁자에서 방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바로 옆 침대에서 잠자고 있는 아내에게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내는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밖에서 으르렁 대는, 호랑이 보다도 더 큰 지진 소리로 들으며, 나는 "지진"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정말로 지진인지 뭔지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피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짐을 싸야 하는지,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옷장에 숨어야 하는지, 화장실 욕실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걸어서 여행 백이 있는 곳으로 가려니 다리가 흔들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여행 가방에 뭔가를 넣었다 뺐다 했지만, 귀신이 하는지 내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평소에 훈련을 해봐서 훈련한 대로 행동해야지, 그런 대비가 없으면, 허둥대기만 할뿐, 헛발질만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순간 여기가 한국이 아니고 타이완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지진의 한 중심부에 있다는 믿기 어려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바로 그때, 아래 층에서 자고 있던 가이드가 뛰어와, 지진이니, 귀중품만 챙겨서 빨리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귀중품이라? 뭐가 귀중품이야? 우선, 돈과 여권 생각이 났다. 그러나 짐을 풀어 놓아 사방이 오방난신에다가, 물건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서, 돈과 여권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을 찾느라 30초는 허비했겠지만, 이 30초가 30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핸드폰도 귀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핸드폰을 찾는데 또 30초가 걸렸을 게다. 이 30초는 300년은 되는 듯 길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니 복도에는 천장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들로 널부러져 있었다. 복도 오른 쪽에 세워져 있던 정수기가 넘어져, 연결해 두었던 수도관이 터지는 바람에, 물이 분수처럼 쏟아지며 복도는 이미 한강을 방불케 했다. 같은 12층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이미 탈출을 했는지 모르지만, 호텔 각 방의 문이 모두 열려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나도 모르게, 지진이라고 외쳤다. "침착, 침착, 침작"이라고 속으로 다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침은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서 꾸역꾸역 소리가 났다. 겁에 질려 오히려 입안이 말라 있었던 것이다! 여진은 또 한번 호텔을 뒤 흔들며 나는 극도의 공포감에 빠져들었다.
<지진을 피해 건물 밖에 있는 공터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걸어서 내려가라는 가이드의 처절한 외침을 들으면서, 내가 달릴 수 있는 최대한도의 속도로 계단을 밟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바닥은 벽에서 떨어져 나온 하얀 부스러기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순간, "야, 이 장면과 이 상황을 광각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뛰어내려 온다면 특종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늙으니 노망이 들어 별 미친 생각을 다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뒤를 잇고, 그 다음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냥 계단을 덜컹덜컹 밟으며 내려갔다.
12층에서 몇 층을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아래 쪽으로 내려오면서 계단의 벽이 금이 간 것이 보였다. 바닥에는 어떤 사람의 피묻은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아마도 너무 급한 나머지, 신발을 신지 않고 내려가다가 바닥에 있는 유리조각이나 돌 조각에 발에 상처가 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2층이 왜 이리 높은지,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었다. 적군이 뒤에서 따발총을 갖고 나를 추격한다는 생각으로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뛰어도 뛰는 게 아니었다.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속도임에 틀림없었다.
얼마나 내려왔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내려갈 계단이 없었다. 프론트 데스크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일이지 허둥대며, 출구를 찾았다. 알고 보니 너무 내려와 나는 이미 지하 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다시 올라가 무조건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와 공터가 옆에 있는 큰 길 옆에 도착하여 "어쩌지, 어쩌지" 하면서 발만 동동 굴렀다.
<밖에 있다가 다시 들어가서 잠시 쉬었던 호텔 응접실>
길 옆에서 기다리는 데 어디서 개 두 마리가 나타나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치 산토끼를 쫓는 사냥개처럼 날뛰고 있었다. 누군가가,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지진이라는 것을 알아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호텔 앞에는 2층 정도의 민가가 여러 채 있었다. 주민 서, 너 명이 밖으로 나와 서 있었지만, 다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고,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 이미 모두 대피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가 멈추었다. 운전수는 무슨 말을 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경찰차가 와서 경찰관이 한 두 마디 말을 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파출소에 가 있어도 된다고, 가이드가 말해주었지만, 파출소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수건을 뒤집어 쓴 채, 같은 자리에 서성거렸다.
호텔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길보다는 호텔 안 1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 들어가 보니 이미 20명 정도의 사람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잠시 뒤에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중국말로 무슨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이 모두 시에시에(고맙다)라는 말을 하였다. 얼마 뒤에 대만 사람들이 밖에 나가 빵 조가리를 들도 들어왔다. 책임자의 말은, 배가 고프면 빵이나 음료수를 갖다 먹으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체육관에 설치된 이재민 수용소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뒤, 사방으로 연락을 취하던 가이드는 12층에 있는 짐을 가지고 다른 호텔로 가겠으니, 모두 짐을 챙겨서 내려오라고 말했다. 순간 망설여지고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불난 집에서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잊은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죽었다는 기사를 본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내가 12층으로 짐을 챙기러 간 그 사이에 제 2의 지진이 발생하여 건물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별 말없이 계단을 향해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12층이라는 계단을 내 평생 이렇게 빨리 올라간 기억도 없을 것이다. 모두들 쉬지 않고 올라가 12층 복도에 도착했다. 호텔 직원들이, 지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정수기를 이미 세워 놓았고, 복도로 내뿜던 수도도 막아 놓은 것이 보였다. 호텔 직원들은 바닥에 있는 물을, 수건을 이용해 제거하고 있었다. 내가 직원이었다면,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저들처럼 청소를 하고 있을지 도망을 쳤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섬주섬 챙긴 여행 가방은 직원들이 받아서 엘리베이터에 싣기 시작했다. 그 사이이 우리는 또 한번, 계단을 통해 신속하게 내려왔다.
<체육관 이재민 수용소>
그때 버스가 도착하여, 짐을 싣고 좀더 안전한 호텔로 이동했다. 그러나 막상 목적지의 호텔에 도착해보니, 호텔 주위에 건물 부스러리가 널부러져 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어서, 여기가 더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마침 또 여진이 일어나서, 버스가 흔들리고, 우리가 들어갈 새 호텔에서 부스러기가 또 떨어졌다. 호텔 안에 있던 사람들이 패닉 상태로 밖으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이 빠져 나오는 호텔에 우리가 들어간다? 가이드는 어디로 연락을 취했다. 즉, 우리가 들어갈 호텔의 현장 사진을 찍어 상급부서에 보고 하고 여기가 들어갈 만한 호텔이 아님을 알렸다.
우리는 일단 버스를 타고 호텔에서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공터에서 대피하고 있었다. 여행사 사장과 연락하던 가이드는, 여기 호텔도 안되겠으니, 임시 수용소가 설치된 체육관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마침내 우리는 화련 현지인들이 대피해 있는 체육관에 앞에 도착했다. 어떤 사람은 버스에 남아 있는 것이 좋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지만, 가장 중요한 화장실 문제 때문에 체육관에 들어가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체육관 이재민 수용소: 신문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
체육관은 아직 이재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2층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대만인 자원 봉사자가 와서 아래 층으로 내려가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먹는 음식과 이불과 담요가 속속 도착하였다. 각자가 필요한 만큼의 깔개와 이불을 가져다가 마루에 깔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음식을 갖다 먹으라고 강요하다시피 했고, 불편한 점이 없는지 수시로 물어왔고,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마치 안달이 나 있는 듯 했다. 어떤 사람은 와서 안마를 해 주었고, 어떤 사람은 마사지와 지압을 결합한 듯한 의술을 시행하였다.
또 어떤 여자는 나에게 다가와 영어와 중국어로 된 종이 쪽지를 주고 읽어 보라고 하였다. 주된 내용은 마음이 통하면 세상이 통하여 하나가 된다는 약간은 심령술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 쪽지대로 내가 글을 읽도록 시켰고, 내가 읽는 동안 눈을 감고 내 가슴과 등에 손 바닥을 대고 중얼중얼 거렸다. 이 여인이 좀더 예쁘거나 좀더 젊었다면, 나의 심장의 심박수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여인이 여러 면에서 몇 %가 부족했다.
자원봉사자 중에 석미령(石美齡)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한국에도 와 봤고, 북한에도 두 번이나 가봤다는 이 여자는 한국말의 발음이 정확했고,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빈틈없고, 침착하였다. 북한을 갔다 왔다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북한의 실정을 물어보았다. 북한 사람들의 실상은 그야말로 불쌍한 정도라고 말하는 그녀는, 지금도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 떠 올랐는지, 한 동안 눈을 감고 그 때를 회상하는 듯 했다. 하여튼 이 체육관을 떠날 때까지 석미령이라는 자원봉사자는 밀착하여 극진하게 우리를 보살폈다.
체육관에서도 1-2시간 간격으로 4-5도의 여진은 계속되었다. 지진이 있을 때마다 체육관 철제 천장이 으르렁 대며 흔들렸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초조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밖보다는 여기가 더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여진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면 지진 1도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사실은 평소에도 궁금했었는데, 현장에 있던 과학 선생님 말은 지진이 1도 올라갈 때마다 20-30배의 강도가 올라간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도 차이가 이렇게 큰 차이라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인터넷을 뒤져 지진 1도의 차이가 얼마인지 알아보았다. 과연! 지진이 1도 올라감에 따라, 30배의 TNT 폭발력이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규모 |
발생하는 에너지의 |
지진의 에너지에 해당 |
TNT의 무게에 |
0 |
6 x 10^11 |
600 g |
작은 물건을 쓰러뜨릴 수 있는 힘 |
1 |
2 x 10^13 |
20 kg |
작은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힘 |
2 |
6 x 10^14 |
600 kg |
채석장에서 사용되는 폭약의 힘 |
3 |
2 x 10^16 |
20 t |
대규모 채석장에서 사용되는 폭약의 힘 |
4 |
6 x 10^17 |
600 t |
소형 원자폭탄의 위력 |
5 |
2 x 10^19 |
20,000 t |
표준형 원자폭탄의 위력 |
6 |
6 x 10^20 |
6 x 10^5 t |
소형 수소폭탄의 위력(대만 화련 지진) |
7 |
7 x 10^22 |
2 x 10^7 t |
대형 수소폭탄의 위력 |
8 |
6 x 10^23 |
6 x 10^8 t |
대형 수소폭탄 30개의 위력 |
9 |
2 x 10^25 |
2 x 10^10 t |
전세계에서 5년간 사용되는 |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아마도 여행객은 우리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인인 듯 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데려온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짓거나 끙끙거리지 않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저 개들이 소변이나 대변을 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순간 훈련을 잘 받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흰 개와 눈이 마주치는 정면 사진을 한 장 찍어보려 했으나, 그 개는 단 한 순간도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고, 나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본 이야기에 나오는 석미령(石美齡)이라는 자원 봉사자: 왼쪽 여자. 오른 쪽 남자는 환자에게 안마 시술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제공된 음식 중의 한 가지>
<인터뷰 장면>
그날 , 즉 7일 오전에 TV 기자와 신문 기자들이 여러 명 몰려와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뉴스 거리를 찾다가 한국에서 온 사람을 발견하고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조금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나 뿐이어서 내가 인터뷰를 했는데, 중국어 인터뷰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어 인터뷰도 해본 적이 없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연하고 난감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중국어로 말을 하는 순간에도, 내가 지금 하는 이 말은 틀린 말이고, 단어 선택이 틀렸고, 문장을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지금 엉뚱하게 말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즉각, 즉각 깨닫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중국어 인터뷰를 하면서, 중국어 선생님이 되어, "이 말은 잘 못 했고, 이렇게 말해야 했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이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이중 삼중으로 내 머리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질문을 해왔다. 각 기자마다 약 1-3분간의 인터뷰를 몇 차례 하면서, 나는 중국어가 일취월장이(日就月將) 아니라, 분취분장(分就分將) 나아지는 것을 보고 소그라치게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외국어를 공부할 때는 수 많은 상황을 가정해 놓고, 그 상황에 맞는 대화를 나누어보아야 실력이 느는 것이지, 특수한 상황이 없이 그저 나와 관계 없는 내용의 글만 읽어서는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외국어는 결코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인터뷰 하는 기자의 말솜씨였다. 나는 평소에 티비 기자들이 인터뷰할 때는, 한 손에 대본을 적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하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몇 분 되는 리포트를 아무런 대본 없이 즉석에서 진행하였다. 즉, 나로부터 6-7미터 떨어진 곳에서 말을 계속하다가 나에게 다가와 질문을 하고 또 멀어지면서 혼자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는 그들의 순간적인 임기응변(臨機應變 *임기웅변이 아님)과 총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본래 7일 낮 12시 50분 화련에서 타이페이로 기차를 타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가이드는 더 빠른 열차가 있는지 알아본다고 기차역으로 떠났다. 그는 그전의 열차가 있으나 입석뿐이 없다고 하면서, 입석이라도 타고 떠나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기왕에 늦은 것, 본래의 기차를 타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결국 우리는 12시 50분 기차로 한 많은 화련에서 티아완의 수도 타이페이로 떠났다.
다음 날 우리는 스펀(十份)이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는 커다란 붉은 등의 네 면에 자기의 소원을 적고 가운데 빈 공간에 불을 붙여 하늘로 날려보내는 곳이었다. 저마다, 건강이나 자식이 잘 되기를 빈다는 소원을 등에 적었다. "나는 다음 지진에도 절대 죽지 않으련다!"라고 썼다. 이것이 소원인지, 결심인지, 운명인지, 헛 소리인지 뭐가 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어제의 지진의 공포가 여전히 내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이 붙은 붉은 등은 그 속에 있는 불의 영향으로 압력이 팽창하면서 하늘로 훨훨 솟아 올랐다. 순식간에 하늘로 솟은 붉은 등이 공중에서 이리 훨, 저리 훨 몇 번 재주를 넘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네 인생이,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살다가 한 평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꼭 그렇게.
그 다음 날, 즉 2월 9일, 3박 4일 여행을 마치고, 타이페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는 전전 날의 지진 방송이 이어지고 있었다. 버스 내에 장착된 텔리비젼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호 활동을 시작한지 33시간 째. 현재 9명이 사망하고, 26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실종 62명. 오늘 오전 8시 45분에 화련에 4.8 규모의 지진이 다시 발생했으며, 진앙지는 약 7.6키로 떨어져 있다."
인천 공항에 가까이 오자 비행기 창 너머로 흰 부유물이 보였다. 바다 얼음이 녹아 부서지면서 생긴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그 얼음을 깨면서 한 척의 배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기억에 가장 추운 겨울로 기억되는 올해의 매서운 추위도 서서히 그 세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타이페이 고궁 박물관의 병풍>
하마터면 병풍 뒤에서 향내를 맡으면서 친구며, 친척이 와서 나에게 두번씩 절하는 모양을 지켜볼 뻔 했다. 그랬다면 나의 시체는 뜨거운 불에 태워지고 부숴져서 결국 한 줌의 재가 되어 꽃 무늬 사기 그릇에 담겨져 어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거나, 땅속에 묻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타이완 고궁 박물관의 도자기>
방송에서 본 뉴스 하나가 퍼뜩 떠 올랐다. 어떤 사람이 자살하려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렸는데, 마침 그 밑에서 걸어가던 사람에게 떨어져서, 두 사람 모두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왜 자살하는 사람이 떨어질 그 순간에 왜 하필 그곳을 지나갈까? 일부러 시간 대를 맞추려고 해도 거의 불가할 일이 아닌가? 나도 그 많은 날 중 왜 하필이면 그 날짜에 타이완에 갔으며, 왜 또 지진이 일어날 그 시간에 화련의 호텔에 있었을까? 평소에 대만을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사건의 현장에 덩그러니 내가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정말로 이미 모든 사람은 운명지워진 대로 살다가 죽는 모양이다. 살아있는 자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지, 우리 모두는 운명대로 살다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다. 운명을 고친다고 하지만, 고친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미래를 모르고 미래의 또 다른 이름인 운명을 모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사는 몇 십억의 사람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설마 내가 죽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처럼, 우리 앞에는 예측 불허한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그 운명의 강을 따라, 우리는 바로 앞에 닥칠 죽음이라는 폭포를 향해 배를 저어 내려갈 뿐이다!
<현지 티비 방송 기자와 중국어 인터뷰 동영상>
*우리 여행 팀 중 3명의 경상자가 있었다. 한명은 침대에서 떨어져 얼굴에 멍이 들었고, 또 한 사람은 가슴에 타박상을 입었고, 마지막 한 사람은 대피 도중 발목이 접질려 간단한 치료 후 팀에 합류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사진 및 동영상은 함께 여행한 분들이 촬영하여 보내 준 사진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안병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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