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해수욕장의 야경: 10월 9일 부산 한화콘도 31층에서 촬영했다> |
밀양에서 부산까지
10월 8일 새벽이다. 창녕의 부곡에서 밀양으로 출발했다. 밀양 영남루 계단 앞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뜨기 시작했다. 영남루에 올라가는 돌 계단이 이채롭다. 계단으로도 갈 수 있고, 계단 없이도 갈 수 있는 이중 계단으로 되어 있다. 맨 처음 이것을 고안한 사람의 창의성이 놀랍다.
<계단 모습이 신기하다>
정문을 들어서니 마당에 이제 물들기 시작한 나무 몇 그루가 나를 맞이한다. 역광에 비친 영남루는 비와 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을 지내왔지만, 그 위풍당당함은 내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마루에 아침해가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이 곳에서 선비들이 500년 동안 시와 노래를 했으리라. 눈을 아래로 돌리니 대나무 숲 위로 밀양강이 보였다. 안개에 싸인 밀양강은 신선이 놀던 옛 정취를 그대로 들어내 보여주었다. 교교히 달이라도 비추는 밤이면 조용히 흘러가는 밀양강에 아랑의 모습이 보일 듯 하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정든님이 오셨는데 인사도 못해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영남루 내부>
<박시춘의 시비와 그가 태어난 집이 옆에 있다. 또 그 옆 안내판에는
<영남루에서 본 밀양강. 노래에 나온 남천강은 밀양강의 일부인 듯>
"남천강 굽이쳐 영남루를 감돌고"라는 노래말이 입에 맴돈다. 밀양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멀리 밀양강이 안개와 햇빛에 아롱진다. 선녀의 흰 옷이 바람에 나부낀다. 선녀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간다. 나는 환상에서 빠져나와 오늘 등산하기로 되어 있는 천황산으로 향했다.
10월 9일 날이 어두울 때 모텔을 나섰다. 내가 묵은 곳은 울산의 진하 해수욕장이다. 진하 해수욕장에서 약 5키로 내려가면 서생이라는 곳에 간절곶이 있다. 간절이란 말은 먼 곳에서 이곳을 보면 마치 간짓대(장대)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곶이란 육지가 뾰족하게 바다로 돌출한 부분을 기리킨다. 간절이나 곶 모두 순수한 우리말인데 한자를 빌려다가 간절곶(艮絶串)이라고 쓴다.
<간절곶의 일출: 약간 붉은 색을 입힌다는 것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간절곶 동산>
<거지 패션이다. 새벽에 아무 것이나 입고 간다고 한 것이 이렇게 되었다.>
산뜻한 날씨가 아니어서 그런지 일출을 보러 온 사람, 사진 찍는 사람 합쳐 모두 6 명이다. 해는 천치를 잠시 붉게 만들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대했던 일출을 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간절곶은 등대가 있는 공원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연자방아 같은 둥근 돌 표석과 몇 개의 석상, 그리고 큰 우체통이다.
<내가 계속 바라본다고 신경질을 낸 낚시꾼>
다시 진하 해수욕장으로 왔다. 낚시꾼 두 명이 낚시질을 하는데, 1분에 한 마리씩 잡는다. 무슨 고기인지 물었더니 모래무지라고 한다. 구경을 좀 하는데, 낚시가 엉켰다. 엉킨 낚시 바늘을 손톱깎기로 잘라내려고 했는데, 내가 계속 바라보아 신경이 쓰였는지, 바늘 대신 원줄을 잘라내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나보고 신경질을 내며 저쪽으로 가라고 호통을 쳤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면 기운이 날 때도 있지만, 신경이 쓰여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나 보다. 혼이 난 나는 바다를 따라 걸었다. 바로 앞에 명선도라는 섬이 보인다. 명선도의 일출이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뜨는 태양이 없는 명선도는 그저 평범한 섬에 지나지 않았다.
31번 국도를 타고 계속 내려 온다.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멀리 왼쪽으로 보인다. 큰길을 빠져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일광해수욕장을 지나 계속 들어가니 죽성 초등학교가 나온다. 초등학교 앞 항구에 작은 배가 눈길을 끈다.
조금 내려가니 기장읍 대변항이 나타난다.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대변하니까 소변 생각이 난다. 옛날 고등학교 때 상업 시간에 대변과 차변이 나올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대변 초등학교가 눈에 띈다. 마침 운동장을 인조 잔디로 깔아서 첫 운동회를 한다고 한다. 동네 방네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구경꾼이 학생의 수의 다섯 배는 많다. 한 유지라고 보이는 신사차림의 남자의 연설이 너무 길다. 날은 덥지, 연설은 길지, 보다 못한 한 사람이 몽둥이를 가지고 가면서 "애-세-뭐"라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 사람들이 그를 말린다. 나는 "애-세-뭐"가 무슨 말인지 옆 사람에게 물었다. "애들 세워놓고 뭐하는 게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그 연설자는 준비해온 원고를 끝까지 다 읽고, 아이들보고 박수를 치라고 하고, 내려가서 이 사람 저 사람 악수까지 하고, 하여튼 온갖 "읜병"을 다 떨고 외제차를 차고 자리를 떴다.
<대변 초등학교. 아이나 선생이나 지겨워 죽는다>
<대변항>
오후에 자갈치 시장에 갔다. 마침 자갈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라는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도 연기와 냄새를 품어대며 적사 위에 구워지는 꼼장어에 소주를 보니 입에 침이 고인다. 먹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진다. 눈을 들어보니 고래고기 집이 보인다.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고래고기. 오늘도 역시, 꼼장어도 고래고기도 먹어 보지 못하는구나! 옆을 보니 기네스 북에 도전한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생선회 접시가 눈길을 끈다.
<자갈치 시장 공연>
<고래고기 집>
샛길을 지나 바닷가로 나오니 영도다리가 보인다. "영도 다리가 꺼떡인다"라는 김상국의 쾌지나 칭칭 노래가 생각난다. 그 옆에는 구경꾼으로 가득찬 공연장이 있었다. 터져라며 쳐대는 북소리에 시장 손님 자리를 뜨지 못한다. "징검다리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라는 이미자의 심정으로 온갖 음식점과 잡상인으로 들끓는 자갈치 시장을 떴다.
<광안리 회센타>
<광안리 해수욕장>
<광안리의 야경>
광안리다. 멀리 광안리 불빛이 폭약을 터트린 양 휘양찬란하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빛은 강도를 더했다. 나는 해수욕장 모래 밭을 걸었다. 불야성을 이루는 건물과 불타는 광안대교가 나를 휘감고 있다. 나는 불타는 시월의 설악산 천불동 계곡을 걷는다. 손도 붉고, 발도 붉고, 옷도 붉다. 바닷물에 비치는 네온사인 불빛에 어지러워 정신을 잃고 숨을 쉬지 못한다. 광안리는 그야말로 광란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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