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Essays

어떤 쪽지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9. 10. 4. 12:18

 


어떤 쪽지


 


 


어제(2019. 10.3일)는 대학 동창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종로 3가 5번 출구 옆에 있는 송해 동상 앞에서, 사람들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송해 동상 바로 옆에 놓여진 의자에,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앉아서 졸고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본래 이 의자는 송해 동상 옆에서  사진 찍을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송해 동상>


 


나는 "이 노인이 사진 찍는 사람 배려도 없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으니, 참 낯짝도 두껍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투덜댔습니다. 그 노인 앞에는 무엇인가 뺑뺑하게 들어 있는 허름한 검은 가방이 있었습니다. "뭐, 쓰잘데기 없는 물건으로 가득찼겠지."라고 노인을 무시하는 태도로, 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동창생들이 다 모이지 않아, 일찍 모인 사람끼리 근처에 있는 탑골 공원이나 가보자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노인이 일어나서, 우리 일행에게 뭔가를 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으려고 하니, 그는 무슨 연유인지, 꼭 나에게 전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전해 준 쪽지를 받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노인이 건네준 쪽지: 이름 및 전화번호 흐림 처리"


 


 


"건축 공사 운반 일 구함.  전화번호 _____________, 망원 2동 성명 ____________"


 


 


건축 공사 장에서 운반 일이라는 것은, 아무런 기술이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아마도 이 분야에서는 최저 임금을 받는 일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거기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이미 늙어 힘이 없는 노인으로서는, 건축 공사장에서 운반하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었기 때문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그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허름하고 불룩한 가방에는, 아마도, 누군가가 일을 시켜주었을 때, 즉시 입고 일을 할 수 있는 노동 복장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머리가 둔탁한 몽둥이로 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속으로 욕을 했던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면서도, 내 마음은 질퍽한 수렁을 걸어가는 듯, 여기 빠지고 저기 빠지며 갈팡질팡했습니다.


 


 


조금 걸어가니, 탑골 공원 벽을 따라서 노인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모두들 무료 점심 급식을 받으려고 서 있는 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좀더 현실적인, 직접적인 체험을 하고자, 거기 서 있는 노인들 꼬리에 붙어 무료 음식을 먹어볼까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 했습니다.  


 


 


그 뒤, 파고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송해 동상으로 오니, 아까 자리에 있었던 노인은 없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일자리를 연결해 주어서 공사판으로 갔을 수도 있고, 무료 급식을 받으려고, 길고 긴 노인의 행렬에 합류했을 수도 있겠지요.


 


마침내, 동창생들이 모두 모여 근처 돼지 불고기 집으로 갔습니다. 일인 당 1만원이 조금 안 되는 "숯불 돼지고기"를 시켰습니다. "먹는 게 남는 거다. 먹는 게 인생이다."  소주를 겯들이며 떠들썩하게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어쩌다 살다보니, 그 노인과 같은 처지가 아닌 것이, 누구에게 고마워해야할지 모르지만, 너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 순간, 지금쯤 어디선가 심하게 구부러진 등 위로 벽돌을 운반하며, 흙 묻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노인이 생각났습니다.   


 


집으로 오는 전철역 안에서, 씁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다리가 휘청거리기도 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두 노인 - 늙어가는 나와  송해 동상옆의 그 노인 - 의 인생이 함께 소리 없이 남산 너머로 구름처럼 흘러가는 오후였습니다.


 (2019년 10월 4일  12시 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