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코스 2
|
3월 12일 아침에 눈을 뜨니 동창(東窓)이 훤히 밝았다. 오랜만에 보는 밝은 동창이다. 아마 어렸을 때 이렇게 동창이 밝을 때까지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면 할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창을 여니 향긋한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고등학교 때 배운 시조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실력이라고 할 것도 없는 허접한 나의 국문학 실력은 모두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이다. 그 뒤에 국문학에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고, 또 그쪽 방면으로 노력을 해 본 적도 없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 ---"로 시작하는 세종어제 훈민 정음을 지금도 암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등학교 때, 대학을 가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거의 40년전 이야기다. 아니, 이런 국어책에 적혀있던 것들은 어쩌면 머리 속에 하나의 상처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좋은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만, 나쁜 기억은 상처로 남아 오래 기억 속에 존재한다고 했으므로.
<3월 12일 걸은 제 2코스: 광치기 해안 - 온평 포구: 17.2km>
<황토 민박집 내부>
내가 묵었던 황토방은 펜션 또는 콘도식 별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펜션은 큰 방 하나와 큰 거실로 구성되어 있다. 거실에는 부엌이 있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있게 되어있다. 큰 방에 2층 침대 두 개, 거실에 2층 침대 두 개를 놓아 모두 8명이 한 펜션에서 잠 잘 수 있게 꾸며져 있다. 본래 이 집을 지을 때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니고, 올레꾼을 위해 기존의 펜션을 개조한 듯이 보였다.
잠을 깨보니 내가 잔 곳은 2층 침대였다. 아래 층을 보니 이미 원로 올레꾼 두 명이 일어나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3 코스를 완주한 그들은 4코스를 걷기 위해 오늘 이곳을 떠난다고 한다. 거실에서 잠자고 있는 두 젊은이는 어젯밤 12시가 넘어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아직도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마도 지난 밤 술 때문이리라. 어지럽게 빈 맥주캔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원로 두 분과 나는 옆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밖에 나와 서쪽을 보니, 정상 부근이 흰 눈에 싸인 한라산이 멀리 보였다. 수십 개의 황토방으로 구성된 이 펜션 단지의 황토빛 벽에, 붉은 아침 해가 자신을 불살라 시선을 자극하는 명암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얇은 자갈로 지붕을 이은 황토방 지붕은 모자이크로 장식한 김삿갓의 삿갓 그 자체였다.
<아침에 일어나 본 서쪽: 정상에 한라산의 눈이 보인다.>
<황토 벽에 비치는 아침 햇살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2층 식당에서 본 황토마을 지붕: 김삿갓의 삿갓 그 자체다>
식당에 들어서니 어제 밤에 갈치국을 준비해 주었던 아줌마가 반갑게 맞이한다.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이 아줌마는 햐얗게 분칠을 하고, 빨간 립스틱 입술에 항상 미소를 짓는 황진이도 울고갈 절세의 미인이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탁자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나는 아침에 집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특히 좋아한다. 싱그러운 풋사과의 상쾌함과 한 여름의 콩밭에 작열하는 뜨거운 기운을 모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지까지도 보여주는 섬세함과 식탁에 드리우는 긴 그림자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성게탕>
오늘 아침에 먹어보는 것은 성게탕이다. 미역국에 얼마나 많은 성게를 넣었는지, 또는 얼마나 적은 성게를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리저리 뒤집어 보아도 미역 이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하지만 혀와 입천장을 돌면서 적셔주는 감칠맛은 정말 일품이다. 또 한 가지, 맛있는 고사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식당 주인의 어머니가 손수 뜯어 왔다고 하는 고사리는 내가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고사리였다. 이 고사리를 된장국에 넣어 끓이거나, 고기 국물에 넣고 매운탕을 끓이면 아마 최고의 해장국이 될 것이다. 봄이면 이 일대 전체가 고사리 밭으로 변하니 봄에 와서 고사리를 뜯어 가라고 주인 아저씨가 귀뜸해준다.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원로 두 분은 4코스를 걷기 위해 약 20키로 떨어진 표선이라는 곳으로 떠난다고 했다. 표선에서 남원(전라도의 남원이 아니다)까지가 4코스다. 아직도 어제의 취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잠자리에 누워있는 젊은이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함께 주인 아저씨의 지프에 몸을 실었다. 중간에 있는 온평 초등학교에서 그들은 버스를 타고 표선으로 갈 것이다. 주인 아저씨는 펜션에서 약 3키로 떨어지 광치기 해안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주인 없을 때, 여기 유채꽃 좀 많이 찍어요."하면서 사라진다.
<유채꽃 단지>
유채꽃 밭은 이른 아침인지라 주인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무주 공산(無主空山)이다. 유채꽃 사진 몇 방 찍고, 어제 말(馬)이 활주한 도로를 건너, 왼쪽에 바닷물 호수를 끼고 걷는다. 다시 말하면 왼쪽에는 저수지와 방조제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유채꽃이 바람에 잔잔한 꽃물결을 이루어 펄럭이는 상쾌한 길을 내가 걷는 것이다.
뚝방을 지나 다시 내륙으로 들어서기 직전 몇몇 동네 사람들이 해초를 자루에 꾹꾹 눌러 담고 있다. 전라도 영광으로 가져간다고 하는 이 해초의 이름은 듣자마자 곧 잊어 버리고 말았다. 요즈음은 뭐든지 적어 놓지 않으면 듣는 순간 잊는다.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하고 있으면 무엇하나? 노래 가사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신세다.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미자나 나훈아, 조미미, 남진 노래 가사를 거의 암기한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신비로 남을 만하다. 그 당시 중학생이나 초등학생 쯤 되었을 텐데, 겨울에 발(인삼밭 위에 얹어 인삼에 햇빛이 들지 않게 하는 일종의 돗자리)을 엮으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한 두 번만 들으면 그냥 그 노래를 모두 암기 했었다. 세월의 무서움,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어부들이 어떤 해초를 자루에 담고 있다. 전라도 영광으로 가져간다고>
일본이 침입했을 때, 군량미로 위장했다는 식산봉 정상에 오르니, 나무 위의 까치가 반갑게 맞이한다. 정상에 장군을 닮은 바위가 있다는 안내 책을 보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마침 한 올레꾼 아가씨가 올라왔다. 나와 이 아가씨 두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바위 하나 없다. 서울 흑석동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이 아가씨는 광치기 해안 근처의 여성 전용 민박집에서 숙소를 정했다고 했다. 하루 25000원에 아침,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고 한다. 내가 사먹는 음식 한끼의 값이 6천원-8천원인 것을 생각하면 결국 하루에 쓰는 돈은 그녀나 나나 마찬가지 금액이다. 그녀가 정한 숙소가 여성 전용이라고 해도, 실제로 어디나 가보면 여자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어디가나 모두 여성 전용 숙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자리를 뜨면서 같이 내려가겠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조금 더 있다가 내려가겠다고 했다. 아마 나하고 함께 다니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부분의 총각 선생님들이 겪는 일이겠지만, 옛날 30대나 40대에는 내 주위에 여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었다. 해가 져도 집에 가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았었다. 나를 보기 위해 교무실 창문에서 기웃거리는 아이들도 많았었다. 그런데, 한 순간— 그 때가 아마 오십이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다—아무도 내 곁에 여학생들이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가 내 인생의 새로운 고비였고, 늙는다는 것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던 때였다. 그 뒤로 여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들 눈에 주책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상책인 듯 했다. 하지만 일단 술을 먹으면 모든 것이 달랐다. 그래서 아마 지금도 술을 자주 먹는지도 모른다. 최백호의 말대로 "잃어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리라.
<오조리 마을 입구>
오조리 마을로 들어간다. 들어가기 직전 왼쪽에 갈대밭으로 둘러싸인 바다에 수많은 오리와 기러기가 놀고 있다. 도처에 철새를 보호하기 위하여 탐방길 일부를 제한한다는 현수막이 보인다. 현수막이 나타나도 무조건 들어가라는 펜션 주인의 충고를 따라,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그냥 들어간다. 참 희안한 길을 많이 걷는다. 정말 이런 코스를 만들어 놓지 않았으면, 밭 주인 이외에는 아무도 가보지 못했을 그런 곳을 들어가 본다. 탁 트인 바닷가, 새들이 지저귀는 울타리,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그리고 물길과 물길 위로 놓아진 다리, 이 모든 것이 시골이라는 느낌으로 적셔 온다. 또한 갑자기 나타나는 목장, 발자국 소리에 놀라 하늘을 나는 새 떼, 때로는 끝없이 때로는 듬성듬성 나타나는 유채밭을 지난다. 나는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눈물도 조금 났다. 그리고 걷고 또 걸었다.
<오조리 마을이 끝날 무렵 왼쪽 좁은 길로 꺾어 들어가면 보이는 목장>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이런 길을 걷는 즐거움 대단하다.>
길을 걷는데, 말 두 마리가 마치 복제한 듯이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목 주위에 난 털, 그리고 말의 코에 씌워둔 코두레(nose ring)의 색만 다를 뿐이다. 그들의 모습이 나에게 예사롭지 않듯이,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갑자기 나타난 내가 이상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나 보다. 나와 그 말 중 누가 더 오래 상대방을 째려보는지 눈싸움을 하다가 내가 져주고 말았다.
<나와 눈싸움을 하다가 나에게 패배를 안긴 말들>
고성리 읍내에 들어와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점심을 먹지 못하면 3시까지 점심을 먹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내책에 나와있는 "동서네 해장국"집에 갈까 "아바이 순대"집에 갈까 망설이다가 동서네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두 남자가 막걸리에 해장국을 먹고 있었는데,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들리는 것은 "~쑤까?"뿐이었다. 예를 들어 "갔습니까"는 "갔수까?"가 된다. 줄여서 말을 하니 참 경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댜"체다. "그 사람 내일 온댜."를 풀어쓰면 "그 사람 내일 온다고 합니다."가 된다. 무려 네 자나 줄어든다.
<대수산봉 가는 길에 중얼대는 어떤 사람>
성산에서 가장 높은 대수산봉에 올라가는 중이었다. 어디서 큰 소리가 들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昌大]하리라." 자세히 살펴보니 한 여인이 길가 의자에 누워 성경의 한 구절을 읊고 있었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글자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음성이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지, 이번 주에 있을 교회에서의 설교를 연습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의 개는 냄새를 맡고 돌아다녔고, 도취된 자아 때문에, 내가 다가가는지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나는 "창대하다"는 말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일상생활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전파사를 하는 내 친구가 전파사의 이름을 "창대 전파사"로 하려고 했었다는 말이 갑자기 떠 올랐다.
"창대"라는 말은 내가 서울에 올 때까지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사전을 찾아 보았다. "창대: 창대하다의 어근"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창대하다를 다시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창대하다: 세력이 번창하고 왕성하다."
(여기서부터는 영어 선생님만 읽으시길 바람.)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창대하다는 영어로 무엇일까 궁금했다. 도대체 영어의 어떤 단어를 번역자는 창대하다로 번역했을까? 집에서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욥기의 8장 7절에 나와 있었다. "Your beginnings will seem humble, so prosperous will your future be." prosperous를 창대하다로 번역한 것이다. prosperous는 "번성한, 융성한"이란 뜻이다. 즉, "너의 시작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너의 미래는 번성하고 융성할 것이다."란 뜻이다. 나는 이 구절을 번역한 사람은 prosperous의 적절한 어휘를 찾아내려고 아마도 몇 달 또는 몇 년을 고민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성경이 너무 어렵게 번역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한, 영어의 prosperous는 일상생활에 흔히 쓰이는 단어다. "창대하다"는 말은 아마 성경이 아니었다면 평생 들어보지 못하고 땅에 묻힐 그런 단어이리라. 너무 어렵게 쓴 글은 캄캄한 밤에 윙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여 윙크하지만, 상대방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가 또 so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so가 연결 부사나 접속사 정도로 생각하여 "그런 식으로, 그래서"라고 아무리 말을 꿰 맞추려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은 "so는 very의 뜻으로 prosperous를 꾸며줄 뿐, 이 문장에서 두 절 사이의 접속사는 없다"는 쪽으로 결론내고 말았다. 그리고 성경의 번역자는 의미상으로, "역접"인 "그러나"를 넣어 번역했다고 생각했다. 성경 우리말 번역에, "심히 창대하다"로 되어 있는 것에서 so가 "심히"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어떤 사람을 만나면 "야, 잘 될거야"라는 말 대신 "그대의 미래는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한 마디 해 줘야겠다. 그러면 그는 아마, "뭐 나의 큰 창자가 어떻게 됐다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영어 선생을 했다는 것이 참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대수산봉 정상에서 본 일출봉. 그 옆에 우도가 보인다.>
대수산봉 정상에 오르니 멀리 성산봉이 보이고 그 옆에 우도가 달걀처럼 놓여 있었다. 눈 앞에는 더 이상 가지 말고 돌아가라는 선명한 파란색 U-turn 표시가 눈길을 끈다. 정상에 외롭게 놓여 있는 의자하나, 마치 어떤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한쪽 방향으로는 한라산이 멀리 보였고, 또 한 쪽으로는 섭지코지가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산불 감시원 아저씨께 부탁하여 내 사진 좀 찍어 달라고 했다. 아무리 내 자신의 사진에 관심이 없어도, 적어도 하루에 한 장씩은 나의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산불 감시원에게 부탁하여 찍은 대수산봉에서의 사진: 멀리 한라산이 조금 보인다.>
<섭지코지도 보인다.>
<혼인지: 고, 양, 부 삼신인이 벽랑국에서 찾아온 세 공주를 맞아 혼인한 곳>
2코스는 유난히 아스팔트 길이 많다. 제주 올레 길이 좋기는 하지만, 최대의 단점이 바로 아스팔트 길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한 원로 올레꾼이, "그 놈의 아스팔트 길 지겹다, 지겨워"라고 말하면서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이 떠 올랐다. 정말로 앞으로 수백 년 아니면 영원한 명품 제주 올레 길을 만들려면, 흙을 밟고 걸어가는 길을 더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경치가 좋고, 볼 것이 많고, 공기가 좋아도, 흙길을 밟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어디를 가나 도처에 버려진 무: 사전에 따르면 "무우"는 틀린 표현이라고 한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무 밭에 무가 너무 많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일단 뽑아 놓고 나중에 가지고 갈 무라고 생각하여 감히 들어가서 먹어 볼 생각을 못했다. 나중에는 결국 이것들은 버려진 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작거나 조금이라도 상처가 있으면 무조건 무는 버려진다. 이런 사실을 알고부터는 아예 배낭에 칼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심심하고 피곤하면 즐비하게 버려진 무를 깎아 먹었다. 하루에 두 개 내지 세 개 정도 먹었을 것이다. 제주도의 무가 얼마나 맛있는 지는 생으로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평소에 우리는 집에서 무를 많이 깎아 먹는다. 우리 집에는 채소를 썰어 놓은 유리 그릇이 있는데, 보통은 그 속에 무, 양배추, 파프리카, 양상추 등이 들어 있다. 냉장고에 넣어 놓고 틈만 나면 먹는다.
드디어 목적지인 온평 포구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찼다. 비도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가 많아서 그런지 무릎도 아플대로 아팠다. 사진을 찍으면서 바닷가를 걷는데, 한 식당의 아주머니가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빗방울로 범벅이 된 유리창을 통해 희미하게 보인다. 나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소라의 성이라는 그 식당에 들어갔다. 나이든 할머니가 방에 앉아 있고, 그 옆에서 며느리가 해물 음식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며느리의 딸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나의 주문을 기다리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며느리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소주 한 병에 알맞은 안주로 해삼을 만원짜리로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안주 준비에 들어갔다. 연로하신 할머니는, 사정없이 몰아쳐 때려대는 빗방울로 모자이크 된 유리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나머지 두 여인은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칼과 도마를 뚝딱거리더니 순식간에 감추듯 붉은 해삼과 우렁이를 요리해 내왔다.
삼 일 굶은 시에미 팥죽 먹듯이 소주 한 병을 날렸다. 안주가 조금 남았다. 남은 안주를 먹기 위해 또 소주 한 병을 주문해야 했다. 소주를 먹다 보니, 아주가 또 떨어졌다. 5천원어치를 안주를 더 주문하니 안주와 소주가 거의 비슷하게 맞아 떨어져 끝났다.
식당 아줌마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술을 잘 팔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괜히 술 먹다가 외부에서 온 사람하고 싸움이라도 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함을 건네주면서 아줌마는 인터넷에 그 집이 대단히 유명한 집이라고 자랑해댔다.
허기진 몸에, 소주 두 병의 위력은 대단했다. 술김에 할머니가 사라는 한치 뭉터리를 덥석 사 버렸다. 또한 민박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나를 모시러 오라고 큰 소리도 쳤다. 와이퍼가 심하게 움직이는 지프를 타고 민박집 주인이 나타났다. "아니, 술을 드시려면 나를 불러서 같이 먹어야지. 이건 규약 위반입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너털 웃음과 더불어 문을 열고 들어 온다.
민박집에 들어와서도 또 식당으로가서 식당 아저씨와 또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술을 먹으면 그 다음날 항상 후회했었다. 하지만 내일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물 좋고, 산 좋고, 공기 좋은 이 곳에서의 이틀간의 여행이 나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싸나이"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술기운 속으로 나를 감싸고 돌았기 때문이다.
<붉고 싱싱한 해삼, 멍게, 조개, 그리고 미역 안주: 지금 보아도 군침이 돈다.>
<며느리와 함께 장사하는 할머니: 옛 젊은 시절을 생각하는 걸까?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2009년 3월 24일 작성>
|
'Kore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올레 4(Jeju Olleh 4) (0) | 2012.07.29 |
---|---|
제주 올레 3(Olleh Course 3) (0) | 2012.07.29 |
제주 올레 1(Jeju Olleh course 1) (0) | 2012.07.29 |
소백산 등산기(Sobaek Mountain) (0) | 2012.07.29 |
백암산 등산기(Baegam Mountain) (0) | 2012.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