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3(3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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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3일 아침이다. 다리가 뻐근하다. 이틀 동안 걸은 피로가 누적된 것 같다. "놀멍, 쉬멍 걷는 코스"가 실제로는 그렇게 놀면서 쉬면서 걸을 수 있는 코스는 아니다. 나름대로 서둘러야 하루에 한 코스를 걸을 수 있다.
<제 3코스 온평포구 — 당케포구: 22km>
오늘 걷는 코스는 22키로다. 내 평생 하루에 22키로를 걸어 본 적이 없다. 작년 지리산에 갔을 때도 가장 긴 코스가 15키로 정도 되었을 것이다. 전날 걸은 거리가 17키로이니까 어제보다도 5키로를 더 걸어야 한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3코스의 출발지이자, 어제 2코스의 종착점인 온평 포구로 나갔다. 지난 밤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바닥이 젖어 있다. 바람 또한 세차게 분다. 하늘에 갈매기가 파도 위로 낮게 나는 것은 아마도 먹이감이 파도에 휩쓸려 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리라.
눈을 들어보니 멀리 등대 아래서, 한 사람이 낚시질을 하고 있다. 문제는 심한 바람으로 높은 파도가 그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몰아치는 파도를 피해, 등대를 방패 삼아 몸을 겨우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채만한 파도에 언제 휩쓸려 내려갈지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몰아치는 바람을 맞아가며 나는 십여 분 동안 그가 어떻게 되는지 흥분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가 파도에 쓸려가면 현장을 촬영하여 방송국에 보내면 특종이 되지 않을까하는 개뼉다구 같은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파도는 흰 거품을 뿌려대며 훈련받은 개 물고 늘어지듯 집요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나는 자리를 떴다. 그날 밤 TV 뉴스에는 제주도에서 사망사고가 있었다는 말은 없었다.
<등대 아래에 몸을 피하고 있는 사람. 방파제 위로 집채만한 파도가 그를 둘러쌌다.>
간밤의 비로 도처의 도로가 물에 잠겨있었다. 비켜갈 만한 마땅한 옆길도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생각났다. 물 속의 경치가 아름다웠던 것이다. 반사되는 나무와 산이 아름답게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겨우 한 곳을 피해가면 또 이와 비슷한 곳이 나타나서 이래저래 고생이 심했다. 더 황당스러웠던 것은 안내 표시가 있는 곳이 물에 잠겨, 표시나 신호를 놓치고 그냥 통과한 것이 세 번이나 되었다. 1, 2 코스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 길을 100-150미터 가는 동안 아무런 표시를 발견하지 못하면 무조건 뒤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화살표든지 리본을 본 장소에서 다시 출발하여 다시 방향 표시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올레길 찾는 첫 번째 원칙이다. 어떻든 세 번이나 되돌아 가는 바람에 약 30분을 낭비했다.
<어떤 곳은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았다.>
특별한 풍경이 없이 잔잔한 길을 걷는다. 난산리라는 마을을 통과한다. 어디가나 사람이 없다. 얕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집안에도 사람이 없고, 들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제주도 농민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전날은 무 밭에 무를 그냥 버렸었는데, 오늘은 아예 뽑아서 버린 무가 더미를 이루었다. 버려진 것은 비단 무뿐만이 아니었다. 감자, 당근, 귤이 무차별적으로 버려져 있었다. 나는 시험삼아 버려진 귤 더미에서 하나를 골라 먹어 보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들이었다. 도대체 제주도 사람들은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버린 자식 돌아보는 어머니 심정으로 길을 가면서도 자꾸 눈이 그쪽으로 갔다. 아까워서 그런다 아까워서.
9키로는 걸어야 통오름이라는 조그만 산에 도달하게 된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내 생애에 이렇게 센 바람은 처음 경험한다. 어떤 곳에서는 아무리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 구역도 있다. 바람이 셀 것 같아서 둥근 챙이 있는 모자(hat)를 쓰고 황토방을 나선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나 모자의 끈을 턱 아래에 매고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너무 세니까 턱끈이 벗겨져서 모자가 바람에 날라갔다. 땅에 떨어지더니 흑탕물에 덩벙 빠지고 말았다. 물에서 건진 모자를 돌돌 말아 배낭에 넣고 직사광선을 맞으면서 걸어야 했다. 그날 그리고 그 뒤 며칠 동안, 바람 때문에 모자를 쓰지 않고 걸었다. 그 바람에 내 생애 가장 빠른 기간에 가장 심하게 얼굴이 탔다. 서울에 왔을 때, 얼굴 탄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마누라로부터 "아프리카에 갔다왔냐?", "없어 뵌다" "주름이 짜글짜글 해졌다"는 둥 내 평생 들을 싫은 소리의 10분의 9를 들었다. 10분의 1은 남겨둬야지.
9시 반부터 걷기 시작한 나는, 11시 반이 되어서 통오름 정상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 놓여있는, 묘지 주위에 쌓아 놓은 돌더미에 잠시 바람을 피했다. 연속해서 두 방 이상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바람에 사진기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위로 들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통오름 정상 부근은 사방에 말똥이 널려 있었다. 마치 분화구처럼 중앙이 푹 파여 있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이 산으로 들어오는 입구만은 트여 있었다. 저 멀리 말 몇 마리가 세찬 바람을 맞아가며 마른 풀을 뜯고 있었다.
<통오름에서 바라본 북쪽: 촬영당시 초록색 마늘밭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평범한 사진이다.>
어디가나 비슷하듯이 넓은 대지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고, 가끔 여기저기 솟아있는 자그마한 오름이 여기가 화산섬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따라 올레꾼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모든 올레꾼이 같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올레꾼은 많이 볼 수 없다. 풍림 리조트에서 만난 올레꾼에 따르면, 그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보았는데, 실제로 올레꾼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통오름: 반대 쪽 산불감시 초소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자세히 보아야 할 듯.>
안내판에 따르면 독자봉은 발발굽 모양이라고 하나, 걷는 입장이 되면 숲속을 걷게 되므로 말발굽인지 쇠발굽인지 알 수 없다. 단지 길거너 방금 지나온 통오름이 훤히 보일 뿐이다. 대부분의 오름은 목장의 일부다. 따라서 사람들이 문을 무심코 잠그지 않아 말이 도망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노란 ㄷ 자 모양의 철 입구가 설치되어 있다. 사람은 이 ㄷ 자 모양의 철제 울타리를 들어가고 나올 수 있지만, 아마 말은 좁아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말의 등치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말의 지능이 낮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 ㄷ 자 모양의 울타리는 최신 아이디어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발라 놓은 시멘트를 보면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ㄷ 자 모양의 문. 말이 빠져 나올 수 없다>
<농산물 시험장인듯>
14키로 떨어진 김영갑 갤러리에 도착한 것은 거의 한 시쯤 되어서다. 시간과 거리로 미루어 보아 시속 평균 4키로의 속도로 걷고 있는 셈이다. 내가 김영갑씨의 제주도 사진을 처음 본 것은 약 일년 전이다. 물론 인터넷으로 보았다. 첫 느낌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내 영혼을 사로잡는 사진이었다. 제주도라는 땅 자체가 이국적인데다가 그곳을 방문한 것도 아니고 아예 그곳에 살면서 사 계절, 아침 저녁 좋은 빛을 찾아서 찍었으니 얼마나 좋은 사진을 많이 찍었겠는가? 그의 사진은 가슴이 후련하기도하고 가슴을 막히게 하거나 쥐어짜기도 한다. 정말 살아 움직이는 사진이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그런 사진이다.
내가 감명을 받은 많은 사진 작가 중에, 김영갑씨 이외에 어떤 스님 사진 작가가 있었다. 이름은 잊었지만, 그 스님이 찍은 사진은 정말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사진이었다.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그곳에 살면서 좋은 때를 기다려 찍었다는 것이다. 사진을 기다림의 미학이라고도 하고, 또는 빛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때를 기다려 좋은 빛, 좋은 피사체일 때 그 자리에 사진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기술도 중요하겠지만, 오늘날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사진기로 찍는다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작가의 아류(亞流) 정도는 찍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지런하고 많이 찍어 본 사람이 잘 찍는다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물론 선천적인 감각이나 많은 경험 또는 공부도 중요하겠지만, 최고의 사진이 나올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사진사가 현장에 있는 노력 또는 행운이, 좋은 사진을 결정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제주도에 한 일년 살면서 좋은 빛을 기다려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그런 날이 올지 오지 않을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김영갑 갤러리>
<3000원을 내고 김영갑 갤러리에 들어갈 때 사진 한 장씩 준다. 그것을 스캔해서 올린다.>
한참 동안 사진을 보고 음악을 듣다가 김영갑 갤러리에서 나왔다. 길옆 외양간에서 소들이 귀에 무슨 노란 딱지를 붙이고 일 열로 앉아 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나를 재미있는 놈이라고 볼까? 알 수 없지만, 아마 내가 그들의 적인지 친구인지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도망치든지 나에게 공격할 준비를 할 것이다. 소가 등장하는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있다고 한다. 소가 사람보다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불교는 잘 모르지만 어찌하여 저들은 소로 태어나고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평생 일만하다가 결국은 사람들의 먹이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그들 아닌가? 하기야 인간보다 좀더 똑똑한 존재가 인간을 본다면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기 싫은 공부해야 하고, 인간관계 원만해야하고, 직장을 못 얻기도 하지만 설령 얻었다고 하더라도 기계적으로 비의도적으로 다녀야 한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가 병이나 사고로 죽든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면 정말 소의 한 평생이나 사람의 한 평생이 뭐가 다르랴? 어떤 면에서 별 생각없이 되는대로 먹고 자는 그들이 더 행복한지도 모른다.
<길 옆 외양간의 소>
우물안 개구리라는 레스토랑에 도착한 것은 거의 2시가 다 되어서다. 그 동안 사실 배도 많이 고팠다. 무엇을 사 먹으려 해도 사 먹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3 올레 코스는 몇 시간 동안 음식점이 없기 때문에 사전에 잘 알아두었다가 적절한 준비를 해야 한다. 내 뒤에 이 3 코스를 걸은 사람의 말에 따르면 중간에 그런 내용의 현수막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안내판을 보지 못했다. 하여튼 올레 길을 걸을 때는 신호, 표시, 안내판을 자세히 읽으면서 가야한다.
우물안 개구리는 고급스런 식당이다. 통나무로 지어진 2층 집인데, 실내도 아담하고 벽난로에 붉은 빛을 내며 장작이 타고 있다. 술집과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데, 흠이라면 음식 값이 비싼 것이다. 가장 값이 싼 해물뚝배기의 값이 만원이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우물안 개구리" 2층에 앉아 세찬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를 창 너머로 바라본다. 바다 중간에서 만들어진 파도가 세력을 더해 굴러오다가 바닷가에 부딪치며 안개처럼 날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해물뚝배기를 먹는다.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서 술을 먹는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이다.
오늘 약16키로를 걸었으므로 몸이 피곤할대로 피곤했다. 버스를 타고 황토방으로 돌아갈까라고 생각도 했다. 왜냐하면 "놀멍, 쉬멍, 걸으멍"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뼛속에 사무친 목적 의식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우물안 개구리를 나와 다음 목적지인 바다 목장 올레길로 우물안 개구리처럼 천천히 엉금엉금 허부적 거리며 기어갔다.
<우물안 개구리에서 바라본 바다. 앞에 보이는 초록색 집은 양식장>
남쪽으로 걸어 약 5분만에 바다에 도착했다. 왼쪽으로는 끝없는 바다요, 오른 쪽으로는 끝없는 목장이다. "그래, 이래서 제주도가 제주도인거야!"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하루 종일 산 속만 걷다 와서 그런지 가슴이 찢어질 듯 하다. 몸을 지탱하기 힘든 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걸었다. 오른쪽에 방목된 말을 보며, 왼쪽으로 집채만한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을 본다. 갈지자로 걷는 것은 두려우면서도 흥미로웠다.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바람에 밀려 바닷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 역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전인자가 피 속에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른 쪽으로 말이 한 두 마리 보이더니 이제는 여러 마리가 보인다.
<바다 목장: 해변에 붙어 있다.>
<바다 목장 옆에 있는 바다>
그런데 목장을 나가려는 문 앞에 말 한 마리가 문 앞에 턱 버티고 서서 길을 내어 주지 않는다. "야, 너 왜그래. 빨리 비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말에 다가가기도 겁이 났다. 말의 성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언덕 밑 자갈 밭에서 잠깐 쉬다가 말이 자리를 뜬 뒤에 갈 길을 재촉했다.
출발 지점에서 20키로 정도 되었다. 배고픈 다리까지 왔다. 다리 이름이 "배고픈 다리"라! 보니 알 수 있었다. 배가 고파 배가 푹 꺼져 있었다. 문제는 지난 밤에 온 비로 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제주도 일주도로로 나와서 다리를 건넌 후, 다시 배고픈 다리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동네로 들어가면서 수퍼에서 물도 사고 티슈도 샀다. 수퍼에 동네 사람들이 졸인 명태에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올레꾼이요?"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예."라고 나는 대답한다. "음, 말로만 듣던 올레꾼이네." 올레꾼은 항상 정해진 코스로만 다니기 때문에, 코스에서 조금 이탈한 곳에 사는 주민들은 실제로 올레꾼을 구경하기 힘든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서 다시 배고픈 다리로 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술 취한 두 사람이 서로 가르쳐 주겠다고 난리 법석을 피웠다.
<목적지인 표선 해수욕장>
<표선 해수욕장의 모래>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표선 해수욕장은 물이 빠져 넓디 넓은 모래 바닥을 들어내 놓았다. 바닥을 걸으니 단단한 모래여서 발이 빠질 염려는 없었다. 모래 바닥에 전에 본 적이 없는 모래 무늬가 교묘하고도 신묘했다.
다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정강이 뼈가 아팠다. 무릎이 묵지근했다. 허벅지가 군대 의장대 있을 때 빳다 스무 대 맞은 느낌이었다.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평생 해 본적이 없는 일을 하는 나를 내 몸이 이해하고 적응을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황토방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또 사람들에게 물어서 시외 버스가 어디에서 서는지 찾아가야 한다.
폭풍에 버금가는 바람으로 바닷가에는 개미 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시내를 향해가면서 눈에 띄는 것은 신혼부부로 보이는 몇 쌍의 젊은이 뿐이다. 휘날리는 모래 바람 속에서 웃으며 사진 찍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에너지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역시 사랑은 어떤 역경이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다. 이 에너지는 너무 강해서 방향을 잘 못잡으면, 사고나 사건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살인이나 자살로도 이어진다.
나도 한창 사춘기일 때는 사랑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견지했었다. 짧게 굵게 사는 것이 마땅히 취해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삶은 평범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high thinking)"을 미래의 삶의 길잡이로 생각했었다. 일요일 개그 콘서트에 나오는 개그맨 박영진의 말대로 이런 것들은 "그건 사춘기 때 생각이구!"로 치부해 버린지 오래 되었다.
지도상에 나와 있는 오늘 걸은 거리는 22키로다. 그러나 길을 잃어 되돌아 온 것, 다리에 물이 넘쳐 새 길을 찾아 걸은 것, 버스에서 내려 황토방으로 걸어 들어간 것을 합치면 오늘 걸은 것은 무려 25키로는 될 것이다. 문제는 하루하루 피로가 쌓여간다는 것이다. 모래 바람으로, 보이지 않는 눈, 천근만근이나 되는 두 다리, 부르튼 입술, 멍한 정신 상태 —현재 나의 모습이 바로 몇 년 뒤의 나의 모습일 것이다. 근사체험(近死體驗)이나 근로체험(近老體驗)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과연 어떨까? 아마 거울을 보며 할 말은 딱 한가지 뿐일 것이다. "미쳤어!" "바람 속의 한 줌의 먼지(Dust in the wind)"에 불과한 인생을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2009년 3월 2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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