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6(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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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8일이다. 6코스를 걷기 위해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셔틀 버스를 탔다. 탄 사람은 모두 3명이다. 풍림리조트에서 약 17키로 떨어진 6코스 출발점 쇠소깍까지는 30분 걸려, 8시 반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개미 새끼 하나 얼씬 거리지 않았다. 쇠소깍에 대한 전설이 적혀있는 안내판을 보고, 그 아래로 내려갔다. 그 아래 바다에는 세상에서 가장 느리다는 배 "테우"가 외롭게 떠 있다. 선원도 없고 승객도 없다. 아마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운행할지도 모르겠다. 기막힌 물빛을 보고 그 자리를 떴다.
<제 6코스: 쇠소깍~외돌개 14.4km>
그 자리를 뜨면서 도대체 그런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궁금했다. "쇠소깍, 외돌개, 거우개" 등등의 이름이 있다. 내가 이름 모를 아프리카의 마을에 도착했다. 그 추장이 "우리 마을 이름 하나 져 주시오."라고 했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생각이 떠 오르지 않는다. 아프리카니까 "아프리"라고 마을 이름을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모기가 날아간다면 "모기리"라고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곰곰이 생각해도 모르니까 "모르리"라고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적절한 마을 이름은 창작할 수가 없다. 어떻게 "쇠소깍"이나 "외돌개"가 나오겠는가? 이름 짓는 사람들—인명이건, 지명이건, 아니면 물건의 이름이건 간에—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쇠소깍 전설 비>
한참을 가다보면 제지기 오름이라는 산이 있다. 상당히 가파르기는 하나, 조금 걷다보면 금방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간단한 체육 시설이 있었고, 그 동네 청년들이 만들어 놓았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서귀포 시내가 훤히 보인다. 바닷가쪽으로는 소나무 사이로 섭섬이 모습을 드러 내놓고 있다.
저 멀리 해녀들이 해물을 채취해와 거래하는 장면이 보였다. 좀더 가까이 찍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치 싸움이라도 하는 듯 그들의 모습이 자못 진지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해녀는 더 많은 금액을 받으려 하고, 구매자는 덜 주려고 하는 승강이일 것이다. 바라보는 나의 입장으로는 그저 저 조개인지 전복인지를 삶아서 술안주나 했으면 하는 생각 뿐이다.
<궁도장>
길을 가다보면 궁도장이 있다. 세 명이 활을 쏘고 있었는데, "올레꾼 환영합니다.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무료입니다라."는 안내판이 있다. 잠깐 쉬며 차 한 잔 마셨다. 맨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의 활쏘는 자세가 가장 좋지 않았는데, 기록 또한 그러했다. 과녁을 맞추면, 스피커에서 쿵 소리가 나고, 맞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없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항상 꿀먹은 벙어리였다. 순간 스포츠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곳을 지나면 칼 호텔과 파라다이스 호텔을 관통하여 걷게 된다. 칼 호텔은 1982년 내가 신혼여행 갔던 곳이다. 그때 오고 오늘 처음 온다. 그러나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30년이 지난 뒤에 나 혼자 이곳을 내가 다시 찾을 줄이야!
조금 걸어가면 소 정방 폭포에 도달한다. 글자 그대로 소규모의 폭포다. 이 폭포는 바로 바다로 물이 떨어진다. 아담한 폭포 가에 앉아 잠시 지친 몸을 쉰다. 소정방폭포에서 조금 가면 바로 정방 폭포다.
<소 정방 폭포>
<정방 폭포>
모두들 정방 폭포는 여러 번 가보았으리라. 길 위에서 아래로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멀리서 아줌마들이 해산물을 팔고 있다. 그 옆에 좀 나이를 먹은 신랑과 신부가 신혼 여행을 왔다. 택시 운전수로 보이는 사람이 이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 포즈를 취하세요. 신랑, 신부 뽀뽀하세요."등 온갖 주문을 다 한다. 신랑은 뽀뽀를 하려고 하나, 신부가 쑥스럽다고 자꾸 뒤로 뺀다. "신부, 이러다가 해 넘어갑니다. 택시비 더 나와요."라는 말을 듣더니, 그냥 키스를 해 버린다. 순간 택시 운전사 너털웃음을 웃는다. 운전수는 자신의 술수에 많은 신랑신부가 넘어가는 것을 즐겨왔던 듯 하다. 공교롭게도 이 신랑신부는 서울로 돌아가는 날 제주 공항에서 또 한 번 나와 만난다.
<서복 전시관 옆의 건물>
제주도에 관한 것을 전시한다는 서복 전시관을 지나면 소낭머리 전망대라는 곳이 바로 옆에 있다. 바다가 보이는 조그만 전망대다. 여기는 관광객이 많았다. 길을 건너 일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또 해물탕이다. 손님이 없어서 혼자 먹었다. 그때 WBC 야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베네즈웰라와 한국의 시합이었는데,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쉬면서 1회에 5점 내는 것을 지켜 보았다.
<서귀포 초등학교>
여기서부터는 서귀포 시내를 돌고 돌아 이중섭 화랑으로 찾아가는 길이다. 서귀포 초등학교에서 우회전하여 계속 간다. 서귀포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인조 잔디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것이 보기에 좋다. 교문 안으로 들어가 한참 구경했다.
이중섭 화백 화랑은 자그마하고 아담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이화백이 얼마나 많은 그림을그렸는지 모르지만, 화백의 작품은 많지 않았다. 집 앞에는 서귀포 칠십리라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그 노래를 들어보려면 단추를 누르라는 안내문이 있다. 안내판 오른쪽에 있는 단추를 누르니 왼쪽의 돌모양의 스피커에서 서귀포 칠십리라는 노래가 나왔다. 알고보니 이와 유사한 노래가 몇 곡 되었다. "서귀포 칠십리", "서귀포를 아시나요", "서귀포 바닷가", "서귀포 사랑" 등이다.
<왼쪽 흰 돌이 스피커. 안내판 오른 쪽 하얀 단추를 누르면 노래가 나온다.>
밀감향기 풍겨오는 가고 싶은 내 고향
<화랑 앞에 있는 석상>
화랑 앞에 이화백이 살았던 초가집이 한 채 있다. 그 초가집의 부엌에는 이 화백의 사진 한 장과 "소와 말"이라는 시가 초라하게 걸려있다. 그 초가집에는 현재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한 할머니가 고통에 찬 얼굴로 마루에 앉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할머니의 집인지 모르겠다. 이 화백은 불행한 삶을 산 것으로 보였다.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여 많은 세월을 떨어져 살았고, 결국은 한국에서도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다가 죽은 후, 다른 사람에 의해 그가 이화백으로 밝혀졌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다. 또한 부인과 떨어져 살면서 서로 주고 받은 편지가 가슴을 울린다. 문학이건 그림이건 많은 천재들이 불행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말이 새삼 떠 올랐다. "소월"이나 "이상" 등이 그 예가 아니랴.
<이 중섭 화백이 거주했다는 집의 부엌>
<이 중섭 화백의 집: 아마도 할머니가 집주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또한 널직한 시 공원도 있다.>
시 공원을 지나 마지막 종점인 외돌개 찻집인 "솔빛 바다"로 간다. 내려가는 코스이므로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을 필요도 없다. 불과 두 달 전에 다녀왔던 외돌개다. 파란 연기가 솟는 시골스런, 그러면서도 우아한 분위기 만점의 찻집이다. 안내 책에 있는 천하일색 양귀비와 같다는 주인은 어디 가고 그 아류의 여인이 맥주를 팔고 있었다. 우도에서 사온 땅콩 안주로 캔 맥주 하나 마셨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하나 더 마셨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내 얼굴을 유심히 본다. 성산 황토방에서 함께 묵었던 원로들이다. 해외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도 더 반가웠다. 손을 잡고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그분들은 11코스를 모두 걸었다는 것이다. 둘 중 한 사람은 힘들어 죽는 시늉을 했다. 어디서 여자 동료를 사귀어 하루 종일 같이 다녔다고 자랑을 해댔다. 여자 아줌마도 예쁘장하니 그럭저럭 데리고 다닐만 한 듯이 보였다. 한참 이야기하니 풍림 콘도 셔틀버스가 왔다. 원로 동료와 아마 영원히 만나지 못할 작별을 고했다. 버스에 타니 승객은 나 혼자였다.
<외돌개 솔빛 찻집>
<외돌개>
다음날 즉 19일 아침에 조금 남은 7코스를 끝마치고 서울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오후 2시 비행기로 예약해 두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비도 부슬부슬 오고, 몸도 걸을 형편이 못되어 그냥 오전 내내 리조트에 머물렀다.
11시에 리조트를 떠나 공항 셔틀 버스를 타고 제주시로 향했다. 버스에 외국인 부부가 어린아이와 함께 타고 있었는데, 제주시로 오는 한 시간 내내 그 아이가 울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엄마가 우는 아이를 달래 놓으면, 반드시 남자가 데려다가 울게 만들었다. 그러면 또 여자가 달래 놓고, 다시 남편이 애를 울리고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애기 울리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공항 2층에 멋있는 한식 식당이 있었다. 공항 근처에는 식당이 없으므로 공항 내 2층에서 식사를 하라는 것은 올레꾼에게 중요한 정보다. 낚지 볶음을 시켜 먹었다. 조그만 식당에 종업원이 손님만큼이나 많았다. 입구에서 인사하는 사람이 세 명, 안내하는 사람이 여러 명, 또 주방에 여러 명이 있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무슨 종업원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이해가 안 갔다. 물론 실업자 수를 줄여주는 주인이 고맙기는 했지만.
비행기를 타니 웬지 감회가 새로웠다. 집에 가는 것이 쑥스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흥분이 되기도 했다. 고향에서 타향으로 가는 느낌도 들었다. 제주에서의 9일간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여행이라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시작도 끝도 없고, 해답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1. 너무 많은 준비를 해 간 것이 잘 못이었다. 등산과 똑 같은 준비를 해 간 것이다. 등산과는 달리 제주 여행은 조금만 걸으면 항상 사람사는 곳이 있으므로 최소한의 준비로 가볍게 떠나야 했다.
2. 제주도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대한 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은 운임이 좀 비싸지만, 진 애어나 제주 항공, 그리고 이스타 항공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요금이 48000원이다. 이스타 항공의 경우 요일별로 또는 시간대별로 요금이 다르지만 최소 요금은 4만원대 초반이다. 부산 요금보다도 더 싸다. 여러모로 생각해서 교통 수단을 골라야 할 것이다.
3. 젊은이나 체력이 강한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매일 20키로 정도를 걷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적절히 쉬고 노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본래 올레 여행이 의도한 대로, 걷고 싶으면 걷고, 놀고 싶으면 놀고, 느슨하게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꼭 무엇을 보러 다니지 말고, 집을 나와 한가롭게 새로운 환경에 내가 있다는 생각을 즐겨야 할 것 같다.
4. 여행이 모든 사람에게 다 즐거운 것은 아닐 것이다. 여행은 정말 많은 노력, 수고, 고생, 그리고 경제력이 필요하다. 텔레비전에서 "집나오면 개고생이다."라는 광고문이 자꾸 나온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개고생"은 글자 하나 바꾸면 "개고기"도 되고 "중고생"도 된다. 개고기는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으로서 어떻게 개고기를 먹느냐는 사람도 있다. 중고생은 인생의 최고의 시절이라는 사람도 있고, 중고생 때 공부하느라고 지옥 같았다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여행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필요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단순히 즐겁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5.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다.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모르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종교적, 철학적, 또는 심리적 측면에서 그 의미가 서로 다를 것이다. 어떤 면이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알려는 노력 중의 하나가 여행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자신을 알고 모르고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알아서 어떻게 하며 몰라서 어떻게 할 것인가?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인가? 몇만 키로 상공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어떤 외계인의 입장에는 우리 모두는 땅 위에 우글거리는 수많은 개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개미도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단지 생각하는 개미일 뿐이다. 삽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당장 땅을 파 보라. 땅속에도 역시 여러 벌레가 살고 있다. "이 넓은 우주에 내가 살고 있다. 내가 살 날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게 살겠다." 어떻게 보면 빈칸을 채워줄 부사(副詞)를 찾아보는 일이 여행인지도 모른다.
(끝)
(2009년 4월 3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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