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China

신장 4 "둔황에서 트루판으로" (Xinjiang 4)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7. 31. 21:42

 

 

<둔황에서 트루판으로>

 

신장 여행기 제 4부

 

길어서 기차? No
기가 차서 기차? Yes

 

 

 

7월 29일 아침 11시경 둔황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 근처의 작은 식당 몇 군데로 헤어져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다. 나와 아내는 묽은 죽과 빈대떡 비슷한 음식을 주문했는데 일인당 약 1500원 정도가 나왔다.

 

 

우리보다 조금 더 늦게 한 여인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식당 문으로 들어왔다. 아침 햇살처럼 눈부신 여자다. 사방을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우리 두 사람이 시키는 것보다도 조금 더 많이 시켜 먹더니, 우리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 먹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자리에는 신문지가 한 장 있었는데, 그 신문지에는 큰 뱀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 그녀의 사진을 보니 팔뚝이 이상하게 생겼다. 그녀는 혹시 뱀의 화신이 아닌지 모르겠다. 좀더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녀가 들어올 때 뭔가 싸늘한 느낌과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고 나중에 아내는 말했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고, 이것이 귀신 이야기도 아니니, 여기에서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끝내야겠다.

 

 

 

 

 

 

처음으로 간 곳이 막고굴이다. 실크로드하면 누가 뭐래도 둔황의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둔황 시가지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명사산 기슭에 있다. 산 비탈에 벌집처럼 1000여 개의 석굴이 뚫려 있는데, 이 때문에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의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이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 막고굴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불교가 둔황에서 꽃피운 결과물로, 1000여 년 동안 수많은 승려·화가·석공·도공들이 드나들며 쌓아간 종교예술의 극치라고 안내 책자에 기술되어 있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어떤 석굴이든 벽면은 모두 채색 벽화로 덮여 있으며, 채색된 조각상이 놓여 있다고 한다. 벽화는 건식 프레스코 화법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으며, 석가 일대기나 극락과 해탈을 열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벽화를 한 줄로 전시 한다면 그길이가 54Km 에 이른다고 한다.

 

 


둔황 석굴사원에서 빼놓은 수 없는 것이 ‘둔황 문헌’이다. 1900년 제17호 굴에서 경전·문서·자수 등이 5만 점 이상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방대하여 이를 연구하는 ‘둔황학’이 탄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발견자 왕원록이 외국 사람들에게 헐값에 팔아 넘겨서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6천여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막고굴 앞의 탑 모형>

 

 

 

 

<둔황의 막고굴>

 

 

 

 

<막고굴>

 

 

 

 

<막고굴>

 

 

실제로 이곳에 가면 자유롭게 들어가지 못하고 몇 명이 모이면 한 안내자가 온다. 그를 따라서 몇 개의 굴을 구경하는 것으로 관람은 끝난다. 그날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약 50세로 보이는 조선족 중국인이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설명하여 우리로부터 박수도 많이 받고 자신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본 굴의 대부분은 이미 다 도굴된 상태였고, 벽화도 거의 다 없어졌었다. 곡괭이로 벽을 다 찍어 놓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외국인 도굴군이 거의 대부분을 가져갔으며, 이 막고굴에서 스페인 군사들이 주둔한 적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거의 대부분의 굴을 폐쇄할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말하기를, 외국인들이 다 가지고 가서, 이렇게 형편없이 되었다고 하고, 이를 가져간 외국인들은, 중국인들이 관리를 잘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가져가서 지금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니까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지 만약 그대로 두었다면 문화혁명기에 아마 다 없어졌을 것이라고 외국인들은 말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말을 새삼 되새겨 보게 된다. 그리고 역사 유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보물이겠지만,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드려 자손 만대 잘 먹고 잘 살게하는 최적의 보물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굴을 보여주며 바로 저기에서 혜초가 쓴 두루마리 글이 발견되었다고 조선족 안내자는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둔황 유적을 연구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제공한 또는 안내한 서류로 글과 책을 썼다고 말했다. 전에 간첩혐의로 5년간 감옥살이한 정수일이라는 사람에게도 자료를 제공했다고 안내자는 말했다.

 

 

나는 이곳에 가기 전에 정수일씨가 번역한 왕오천축국전을 읽어보았다. 그 당시의 입장으로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겠으나 지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려운 작품인 듯 했다. 참고로 "왕"은 "간다" , "오"는 "다섯", "천축국"은 "인도"를 말한다. 따라서 왕오천축국전은 "인도의 다섯 개의 나라를 갔다와서 쓴 글"이라는 뜻이다. 왕오천축국전의 "남천축국전"에 그의 시 한 수가 눈을 끈다.

 

달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일남: 남쪽지방 또는 베트남
*계림: 신라

 

 

사실 우리가 어떤 지방을 가봐도 극히 일 부분만을 볼뿐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한다. 여기 막고굴에서도 그저 수박 겉핥기식이지, 솔직히 말하면 안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내부에서는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여 뭐하나 남는 것이 없다. 나는 너무 답답하여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아래 그림에 보이는 것과 같은 몇 가지 막고굴의 벽화를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막고굴의 벽화다.

 

 

 

 

 

 

<인터넷에서 찾아 본 막고굴의 벽화: 실제로 우리가 가면 볼 수 없다.>

 

 

모두다 아는 것이지만 축구 시합을 잘 보려면 TV를 통해 보는 것이 제일이다. 한 번 현장에 가보라. 사람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더구나 replay가 없어서 한 번 지나가면 끝이다. 그러면,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직접 축구장에 가는가?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기 위해서다. 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곳에 가서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그곳에 살면서 일년 내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과 어떻게 경쟁이 되겠는가? 내가 현장에  가서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 봐도, 다른 사람이 잘 찍어 놓은 비디오를 따라가지 못한다. 제주도의 김영갑 갤러리에 가 본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사진이 얼마나 초라한지 금방 안다. 그러면 편안히 집에 앉아서 비디오만 보지 무엇하러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서 그곳에 가는가?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다.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다. 덤으로 그곳의 물건을 보고 구입하고, 또 그곳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다.

 

 

 

 

<둔황의 명사산>

 

 
막고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명사산이 있고, 명사산 입구에서 조금 걸어가면 월아천(月牙泉: 중국어로는 "위에야취앤")이라는 조그만 연못이 나온다. 미인의 눈썹처럼 곱게 휜 모양이 더없이 아름다우려니와 천 년 넘게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신비의 샘물이라고 전한다. 둔황이 메마른 사막으로 변하자 이를 슬퍼한 천녀가 흘린 눈물이 오아시스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깃든 곳이라는 안내 책자의 기록이 보인다.  명사산(鳴砂山)은 바람에 모래가 흘러내릴 때마다 나는 소리 때문에 '모래가 운다'는 '명사(鳴砂'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곱고 흰 모래로 이루어진 명사산은 일출과 일몰 장면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가 갔던 날은 약간 구름이 끼고 한낮이에서 신비로운 색감은 느낄 수 없었다. 일부 젊은 사람은 모래를 밟고 산 정상으로 올라갔으나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아 올라가지도 못했다. 여행은 좋은 계절, 다시 말하면 봄이나 가을에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애석하다.

 

 

 

 

<둔황의 명사산>

 

  

 

 

 

<둔황의 명사산>

 

 

 

 

<명사산에 있는 월아천: 조그만 연못이 초생달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

 

 

 

 

 

<둔황의 명사산>

 

  

 

 

 

<둔황의 명사산: 모두 낙타를 타고 간다. >

 

 

캐러밴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광경을 말하나 보다. 끝없는 낙타 부대의 행렬. 아마 과거 실크로드 시절에 저랬으리라. 가끔 하늘을 나는 이름 모를 새와 그리고 혼자 타는 놀이용 비행기가 그들을 구경한다. 낙타를 타는 것이 옛날에는 삶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겠지만, 지금은 유람과 놀이로 변했다. 과거에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피땀 흘렸던 것들이 지금은 박물관의 구경거리로 변하거나 오락으로 변했다. 활이나 총을 쏘는  것이 오락으로 변했다. 자동차와 배와 비행기가 물자의 운송 수단이기도 하지만, 오락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음식은 배고파서 먹는 사람도 있지만, 먹어보기 위해 존재하는 음식도 많아졌다. 세월이 그렇게 변했다.

 

  

 

 

<저녁 노천 식당: 우리가 먹던 집 옆>

 

  

노천 식당에서 양꼬치를 먹고 호텔 앞 호숫가를 걸었다. 호수 주변과 그 안의 여러 곳에 불을 매달아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둔황 막고굴과 같은 개념으로 치장한 것으로 보였다. 주위에서 낚시질하는 사람도 더러 보였으나 잡는 고기는 송사리 새끼였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호수는 마치 천상의 선녀들이 노니는 호수처럼 신비로운 여운을 남기며 밤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호텔 앞의 야경>

 

  

 

 

 

<강둑의 한문. 눈에 익은 표현이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다음 날 그러니까 7월 30일, 일부분은 지질 공원에 갔다. 나머지는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 몇 사람은 둔황 고성에 가보기로 했다. 택시로 약 30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 택시 운전수는 우리가 나올 때까지 한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우리를 다시 둔황 시내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둔황 고성>

 

 

둔황 고성은 그야말로 날림판 작품이었다. 뭐 세상에 이런 허술한 집이 있나 싶었다. 구경꾼도 별로 없었다. 가끔가다 관람온 중국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성 안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병헌이 나오는 영화를 촬영했다는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병헌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었다.

 

    

 

 

 

<중국인 관광객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려는데, 아까 성 안에서 함께 찍은 중국인들이 하미과를 먹어 보라고 주었다. 맛있게 먹고 있으니 둥근 딱딱한 빵을 또 먹어 보라고 주었다. 그리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뭐 줄 것이 없나 싶어서 사탕 몇 개를 그들에게 건네 주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중국인들은 사탕을 싫어하는 것 같다. 중국에 온 후, 몇 번 주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좋아 반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작은 인형이나 풍 같은 것을 가져 갔어야 했다.

 

 

 

 

 

<"둔황(돈황)", "유원"역은 깐수성(감숙성)에 있고, 트루판부터 신장성(신강성)에 속한다.>

 

 

다음 목적지인 트루판을 가기 위해서는 유원역이라는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둔황에서는 서안으로 가는 기차는 있어도, 우루무치 쪽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없게 되어 있다. 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둔황역에서 유원역까지는 약 2시간 걸린다.

 

  

 

이번에는 기차를 믿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갔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로 바뀌고 말았다. 8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 기차는 10시 20분에 출발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이미 연착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일단 밖으로 나와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표소의 아가씨와 승객>

 

 

대기실 바로 옆에 매표소가 있었다. 그런데 이 매표소 아가씨가 순하게 생긴 인상과는 달리 뭔가 큰 소리로 종놈 몰아치듯 큰 소리 땅땅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사태의 추이를 계속 살폈다. 그러나 매표원은 더욱 기고 만장해했고, 손님은 뭔가 사정조로 말을 했다. 순간 "참 매표원도 공무원 직책이라고 저렇게 떵떵거리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공안원의 권력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일개 매표원이 저러니 공안원이야 오죽하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진 둬 방 찍고 밖으로 나왔다.

 

 

역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디가나 골목 구경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누가 뒤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도 한국어가 아닌 중국말로 말이다. 돌아보니 아까 본 매표원이었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내가 누구며 사진을 왜 찍었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인이며 취미가 사진 찍는 것이어서 찍었다고 했다. 그는 찍은 사진을 보자고 했다. 보더니 지워 달라고 했다. 아마 그녀는 고발하려고 찍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가 지우는 것을 보더니 그녀는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돌아갔다. 비록 작지만 또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그 사진이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이다.  

  

 

한 시간쯤 서성이다 돌아오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밤 10시로 연기되었던 기차 시각이 내일 아침 6시 30분으로 다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라면 당연히 밖으로 나가 호텔에서 자고 6시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빨리 자리잡자"라는 구호 소리와 더불어 사람들이 대합실 한 쪽으로 배낭을 가지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깔개나 침낭을 여기저기 깔기 시작했다. 깔개도 없고 침낭도 없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순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배낭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배낭 여행은 이렇게 하나보지? 나는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말을 되새기며 구석에 내 자리를 잡았다.

 

 

 

잠을 자다가 깨기를 거짓말 보태서 100번은 했을 것이다. 밤새도록 기차는 왜 그렇게 자주 경적을 울려대는지 사람 환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몰려 들어갔다. 겉 보기에 잘 자는 듯한 사람들도 몸을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다. 잘은 모르지만 사람들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닭 우는 소리도 들렸었던 것 갔다.

 

 

5시 반쯤 일어나 6시 30분에 올 기차에 승차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6시 30분에 가기로 되어 있는 기차가 8시로 다시 연기되었다는 전광판이 보였다. 모든 사람들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왔다. 다시 눕는 사람도 있고 화장실에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역전이나 구경하려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역의 문지기가 나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내가 타려는 기차가 지금 출발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와 말도 안되는 중국어를 하면서 실랑이를 벌렸다. 그리고 돌아와 보니 8시에 떠난다는 기차가 다시 6시 45분에 출발한다고 전광판에 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워야 할지 몰랐다. 나는 안내자인 KC를 깨워서 자초지종이야기를 했다. 잠깐 어디 갔다 온 안내자는 지금 출발하니 모두 일어나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화장실에 간 사람을 다시 불러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행이 모두 제 시간에 승차할 수 있었다. 도깨비에 홀려도 이런 홀림은 없을 것이다. 문득 "어제 둔황 식당에서 본 여인이 부린 술수 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사실 그 여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유원역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다.)

 

  

 

트루판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모두다 잠에 골아 떨어졌다. 어제 기차 대합실에서 못잔 잠을 이제야 편하게(?) 자보려는 욕구가 눈에 이글거렸다. 옆에 그리고 앞에 있던 중국인들이 말을 걸었다. 어설픈 중국어로 말을 했지만, 대화보다는 졸음이 앞섰다. 갑자기 앞에 있던 사람이 윗통을 벗었다. 중국인은 조금 더우면 그냥 위통을 벗는 것이 일상화된 듯 했다.

 

 

 

 

(기차역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들)

 

  

얼마를 지났을까? 트루판 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드디어 신장이라! 7월 31일 오후 3시 반이었다. 유원역을 출발한지 9시간 만이요, 신장을 가기 위해 한국의 인천항을 출발한지 8일 만이다.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6일이 필요한 나라, 신장을 여행하기 위해 8일이 필요한 나라다.

 

 

아야, "이판 사판"도  무섭고 "개판"도 무섭지만, 중국의 "기차판"만큼 무서운 판이 또 있을까? 그러나 앞날을 누가 알랴? "트루판"이 떡 버티고 있으니! 나는 "트루판"이 "사이판"이기를 바라면서, 열풍이 몰아치는 트루판 역을 말 없이 빠져 나갔다.  

 

 

(2010년 8월 2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