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제 5부: 트루판에서 남산목장으로
"울어라 열풍아!"
(지도 1: 투루판에서 남산목장(백양구)으로: 우리가 들른 곳. 트루판 교하고성→화염산→토욕구→백양구)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가장 유행한 노래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울어라 열풍아"였다. 수업을 하다보면 선생님이 복도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지나가고, 교실에 있던 일부 아이들이 따라 불렀다. 열풍이 무엇인지 알고 그 노래를 했는지, 아니면 모르고 했는지 모르지만 이미자씨는 놀랍게도 "불어라 열풍아"라고 하지 않고, "울어라 열풍아"라고 했다. 열풍이 무엇인지를 겪어본 사람은 아마 "불어라 열풍아"라는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으리라.
트루판역에서 트루판 시내로 가려면 약 1시간 버스를 타고, 풀 한 포기 없는 들판을 지나야 한다. 이때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열풍"이다. 버스의 에어컨을 가동시켰으나 너무 더워 차라리 버스 창문을 여는 것이 낫겠다고 누가 말했다. 버스의 창문을 여는 순간 후끈거리는 매마른 바람이 얼굴에 부딪쳤다. 순간 모두들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은 "아이구, 빨리 닫아."였다. 고추보다도 더 매운 맛을 보는 순간이었다. 헤어 드라이어를 얼굴에 갖다 대는 것보다 더 했다. 아예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안했다.
(트루판역에서 트루판 시내로 가는 버스 안: 날은 덥지, 짐은 많지 아무도 말이 없다.)
(중국 모형도)
그러면 트루판이 왜 이리도 더운가? 우선 위에 있는 지도를 보자. 이 지도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실제 모형 지도다. 높은 산은 실제로 높게, 낮은 지역은 실제로 낮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우루무치에 있는 신화 서점에서 산 지도인데, 한 눈에 어느 곳이 높고 어느 곳이 낮은지 알 수 있는 지도다. 이 지도를 자세히 보고 있으면 구태여 지리 공부를 하지 않아도 턱 보면 척하니 대체적인 기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우선 (A) - (C)를 잇는 천산 산맥 중간 고갯 마루에 우루무치가 있다. 이 천산 덕분에 우루무치는 사막이 되지 않고 사람이 살기에 적절했고, 옛 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B) 지점 왼쪽에 트루판이 있다.
트루판은 좁은 지역이 푹 파여, 마치 제주도의 산굼부리처럼 되어 있다. 바다 표면 보다도 165 미터가 낮다. 그러니 더운 공기가 들어와서 빠져 나기지 못하고 독 안에 든 쥐처럼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낮은 함몰지형이며,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역이라고 하는데, 최고 기온은 49.6도이었다. 49.6도라!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날 버스를 타고 트루판 시내로 갈 때 온도가 몇 도 이었을지 정말 궁금하다. 아마 40도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이 지도를 보면 (E)지점(사천)까지가 낮은 지역이고 이 지역을 벗어나면 서쪽은 높은 고지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F) 지점(곤명)은 알맞게 높은 지대에 있어서 비록 대만과 같은 위도 있으면서도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따뜻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리 선생님들은 한 번 들으면 금방 잊어먹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암기시킬 것이 아니라, 이런 지도를 보여주고 어떤 지역이 왜 덥고 추우며 교통이 발전하고 공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학생 스스로 추측하도록 하는 공부 방법을 사용해야할 것이다.
신장은 공식 명칭이 "신장 위그르 자치주"이다. 안내책자에 따르면 9세기에 위그르족의 조상들은 그들의 본토인 몽골에서 쫒겨나 그중 한 집단이 마침내 트루판의 고창(까오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위그르족들은 결국 유목민에서 농부로, 마니교도들은 불교로, 그리고 결국에는 이슬람교도로 개종하였다.
트루판 호텔에서 잠시 쉰 뒤, 택시로 교하 고성에 갔다. 교하고성은 트루판 시내에 있고, 고창 고성은 좀 먼 곳에 있어서 우리는 교하 고성에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고성을 보기 위해서는 입구를 통과하여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입구 근처의 얕은 물 속에 오리 몇 마리가 놀고 있었다. 구경이고 뭐고 제일 부러운 것이 물에서 수영하는 오리였다. 날이 너무 더워 입구에서 다름 사람들이 구경하고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같이 돌아올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집을 나온 이상,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의무이고 권리다. 더군다나 여기가 신장 첫 여행지가 아닌가? 나는 선크림을 바를 수 있는 최대의 양보다도 조금 더 바르고 구경을 시작했다.
우선 입구에 있는 벽에, 거대한 안내 지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강렬한 햇빛에 빛이 바래 노란색이 황토색이 되어가는 이 지도를, 몇 사람이 응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곧 이어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양쪽으로 진흙으로 보이는, 허물어지다 남은 건축물의 잔재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진흙이 아니라 돌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 한 나라 때 요새 마을로 지어진 이 고성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6500명이 살았다고 함),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잘 보관된 고대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는 구경하도록 만들어 놓은 길 끝 부분에서 눈이 미치는 지점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황토색 구조물을 보고는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교하 고성>
<교하 고성>
이 지역은 기후가 건조하고 비가 오지 않는다. 이 고성은 벽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파내려 가는 방법으로 터를 만들어서 실제로 진흙인지 돌인지 구별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길이 1700m, 폭 300m인 성 안에는 관청터가 있고 집터와 절터가 있다. 주도로 옆으로는 거미줄 같은 사잇길이 있어 서로 연결되었다. 구경하는 길 마지막 부분에 어린아이를 묻었다는 묘지까지 있다고 안내자는 말한다.
다음으로 간 곳이 칸얼징이라는 곳이다. 위그르 족들은 산에서 눈 녹은 물이 모이는 좀 더 높은 지대에 "윗 우물"이라는 뜻의 칸얼징을 팠다. 그리고 이 물을 마을 농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긴 지하 터널을 만들었다. 위에서 보면 거대한 개미탑처럼 보이는 이 일련의 우물들은 터널의 길목 20미터마다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물은 전적으로 중력에 의해 채워지고, 지하로 난 수로들은 증발로 인한 물의 손실을 큰 폭으로 줄여준다고 한다. 트루판에는 1000개 이상의 우물과 총 길이가 5,000키로에 달하는 믿어지지 않는 규모의 수로가 있다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칸얼징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입장료(8,000원)에 비해 턱없이 형편없는 구경거리였다. 아래에 보이는 왼쪽의 붉은 불빛 아래에 있는 수로가 우리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볼 것 없다"는 말이 모든 사람의 삐뚤어진 입에서 옥수수처럼 툭 튀어 나온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며 볼 것 없는 곳에서도 볼 것을 찾으려고 하는 나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고, 구경 거리는 없고, 각종 상품 판매대만 삐까번쩍 하였다.
(칸얼징의 내부: 왼쪽의 수로를 타고 물이 흐른다.)
<저녁 식사 양꼬치>
사람들의 입에서 이제는 제발 양꼬치좀 안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기억이 있는 한, 지금까지 대부분의 저녁 식사는 양꼬치가 들어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안내자인 KC에게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듯 했다. 내가 연장자이니 KC에게 말좀해서 양꼬치좀 안 먹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도 입장이 어정쩡해서 결국은 말하지 못하고 말았다. "울며 겨자 먹기"라는 표현은 이제 "울며 양꼬치 먹기"라는 표현으로 바뀌어야 할 듯 했다.
<우리가 먹던 옆집에서 끓고 있는 알 수 없는 음식. 겉보기에 마치 우리 나라의 조개탕 같다.>
<분수가 스크린으로 바뀌었다. 흰 분수가 화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화염산>
다음 날 즉 8월 1일 아침 일찍 화염산(火焰山)으로 떠났다. 한낮에 보는 산이 불꽃 즉 화염과 같아서 화염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아 나무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산이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원숭이 손오공의 마법 부채를 사용하여 이 화염산의 불을 잠재웠다. 이 이야기와 비교되는 위그르 버전에는 주인공 영웅이, 산속에 사는 어린이를 잡아먹는 용을 칼로 베고 8 조각으로 잘랐는데, 그 각각이 산의 골짜기 하나하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화염산이 시작되는 지점에 가면 입장료를 내고 화염산을 촬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곳을 통과하여 한참 간 후, 한적한 곳에 내려 거대한 화염산의 다른 쪽을 볼 수 있었다.
(화염산)
화염산을 돌고돌아 얼마를 더 가면 낙타를 타고 화염산의 중턱까지 올라갔다 오는 곳이 있다. 일부는 걸어서 올라가고, 일부는 낙타를 타고 올라갔다. 몇 년전 이집트에서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 낙타를 타보았던 나는, 이번에는 진짜 낙타를 타고 올라가 보기로 했다. 낙타는 아마 모르면 몰라도 평생 목욕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똥냄새와 오줌 냄새와 털냄새가 코를 찌르고 손바닥과 엉덩이에 냄새가 묻었다. 낙타는 흔들흔들 거리며 위쪽으로 올라 갔다.
과연 화염산의 경관은 대단하였다. 끝없이 이어진 벌거벗은 화염산은 둔황의 명사산과는 다른, 거친 서부 사나이를 연상시켰다. 마침 우리 팀 중 한 사람이 저 멀리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히말라야 산을 올라가는 등반자보다도 훨씬 더 외롭고도 고독한 사냥꾼처럼 보였다.
(화염산)
(우리 팀 중 일원이 화염산의 한 봉우리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흔적이 인상적이다.)
화염산을 지나 다음으로 간 곳이 토욕구(투위꼬우)라는 곳이다. 트루판에서 유명한 곳이 포도구라는 곳인데, 내가 가지고 간 "로운리 플래니트"라는 책에서 강력히 추천하는 곳이 바로 이 토욕구이어서 포도구 대신 가보기로 했다.
투위꼬우는 수 세기 동안 이슬람교도들의 순례지였고, 독실한 신자들은 이곳에 7번 순례를 한 것을 성지에 1번 간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문화혁명시기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순례자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때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태양은 펄펄 끓어 단지 몇 분만 피부가 노출되어도 화상을 입기 쉬운 그런 날이었다.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 1분 정도 가자마자 한 할아버지가 손짓을 하며 어디로 가자고 한다. 노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니, 흙벽에 구멍을 파고 방을 만들어 놓은 집이었다. 커튼을 열자마자 노인은 돈을 내라고 했다. 얼마냐고 하니까, 2000원을 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밖으로 나와 버렸다. 같이 간 어떤 사람이 얼마의 돈을 건네 주었지만, 우리는 노인이 사기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밖에 나와보니 나무에 한 팻말이 걸려있었다. "10위엔(2000원)"이라고 쓰여있었다.
이 마을 한 가운데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개울을 중심으로 토담 집이 불규칙적으로 지어져 있었고, 위쪽에는 마을 보수 공사를 하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골목길에서 보니,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쉬고 있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밥을 먹는 곳도 있었다. 한 집에 들어가 수박을 먹는데 머리를 빡빡 깎은 어린아이가 아주 귀여워 보였다. 사람들은 이 아이와 사진을 찍으려고 벌떼처럼 달려 들어 차례를 기다렸다. 골목에는 간단한 식품을 파는 골목 슈퍼가 있었는데, 허접하기 그지 없었다.
(투위꼬우 마을 한 곳에 앉아 있는 노인)
(골목길)
토욕구를 지나 점심 식사를 하러 떠났다. 역시 양쪽으로 화염산이 이글거린다. 가끔가다 어린아이들이 태양을 무시하듯 몸을 들어 내놓고 걸어가기도 한다.
(토욕구에서 점심식사하러 가는 중에 보인 산. 하여튼 이 일대 전체가 붉은 산으로 이어져 있다.)
점심을 먹으러 어떤 음식점에 들렀다. 일단의 사람들이 나간 곳에는 식당인지 쓰레기 장인지 모를 정도로 아무데나 마구 버린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오는 사람이나 가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먹고, 버리고, 그리고 자리를 뜬다. 그러면 청소할 겨를도 없이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다.
한 가족 전체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보이는 이곳은 부엌을 아무나 볼 수 있게 개방해 놓았다. 중국 음식은 많은 고기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 듯이 보였다. 한 쪽에서는 열심히 국수 가락을 빼면 이것을 삶아서 그릇그릇 내 놓고, 국수에 넣을 양념을 준비하여 어떤 사람이 밖으로 가지고 나온다. 큰 소리를 지르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 표정에 긴장감이 흐르고, 땀이 송글송글 솟은 얼굴은 돈을 벌려는 욕구가 잘 배합되어 나타났다.
(남산 목장 가다가 보이는 장면들)
여기를 벗어나면 남산 목장으로 향한다. 남산 목장은 우루무치 남쪽의 산에 있는 서울의 정릉 같은 곳을 말하는데, 한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간 곳은 백양구(白杨沟:바이양꺼우)라는 곳인데, 백양 나무가 많은 것으로 보아, 백양은 "백양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였다. 구는 꺼우라고 읽는데, "개울, 또랑"이란 뜻이다.
버스는 처음에는 황량한 들판을 가다가, 점점 푸른 빛을 띄는 산골짜기로 향하더니, 드디어 백양나무가 늘어선 곳에 들어선다. 길가에 양쪽으로 늘어선 백양나무는 글자가 뜻하는대로 나무 줄기가 흰 색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백양나무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이 길이 끝날 때쯤에는 더웠던 트루판은 어디로 간 곳 없고, 시원하다 못해 춥다는 느낌이 드는 우루무치의 남산목장에 다다르게 된다.
(길 옆의 백양나무)
(남산 목장 가는 길 풍경)
조금 더 가면 당나귀를 끄는 사람도 보이고, 손수레를 끄는 사람도 보인다. 그러다가 여기가 정말 산골인가 싶으면 여지없이 형형 색색의 들꽃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스팔트 길이 끝나면 비포장 도로가 나오고, 비포장 도로가 끝나면 또 아스팔트 길이 나온다. 길에는 큰 돌과 작은 돌이 무차별적으로 섞여있어서, 이를 피하려 운전수는 핸들을 우로 좌로 땀방울을 흘려가며 돌려댄다. 버스의 속도는 걸어가나 차를 타고 가나 마찬가지가 되고, 기사의 한숨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백양구 입구다.
(들꽃이 질펀하게 핀 것이 눈에 띈다.)
드디어 백양 풍경구라는 거대한 입구가 보인다. 사람이 몇 사람인지 확인하더니 우리 일행이 18명인데도 10장만 표를 사라고 한다. 그 말을 한 아주머니가 우리 버스를 다시 타고 자기 가 운영하는 몽고빠오가 있는 곳으로 버스를 안내해 간다. 아주머니는 어디로 전화를 건다. 내가 듣기로는 18명이 오는데, 저녁 식사는 우리가 해 먹을 것이므로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몽고빠오 두 개만 준비하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중국말의 억양이 무슨 경상도와 전라도 말을 섞은 것 같아서, 중국인 운전수도 웃고 그녀 주위에 있는 사람이 모두 웃는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드디어 해는 졌는지 어쩐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모두들 앞뒤로 짐을 메고 버스에서 내린다. 멀리 높은 산에 쭉쭉 뻗은 침엽수가 하늘을 찌르고, 마지막 석양이 산 꼭대기를 비춘다. 우리가 온 방향은 긴 햇빛이 드리워져 하루의 마지막을 알린다.
눈을 조금 앞으로 돌리면 40-50개의 몽고빠오가 개울 양쪽으로 앙증맞게 자리잡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난로를 피우는지 초록색 들판을 배경으로 파릇한 연기가 꼬리를 물고 피어오른다. 카자흐스탄 사람이라고 하는 코가 큰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그의 아들이라고 보이는 꼬마는 우리가 칭다오에서 보았던 것처럼 터진 가랑이 사이로 아무데나 배설을 한다.
드디어 누가 저녁 식사를 준비할지 1, 2 조로 나누어 시합을 한다. 약 30미터 되는 곳을 갔다 오는 릴레이인데, 바톤 대신 물병을 사용하기로 했다. 남녀 배율을 적당히 맞추어 시합이 시작되었다.
(이것들이 노인을 뭘로 보고!)
진행되는 도중 한 사람이 넘어져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준비 운동도 없이 달리다가 넘어져서 나는 분명 쌍코피에다가 다리 하나 부러졌으리라 확신했다. 밥을 하면 하고, 설거지를 하면 하는 거지 왜 시합이라고 하면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다. 특히 남자들은 무슨 6.25때 뒤에서 인민군이 따발총을 갈겨 혼비백산하는 것처럼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뛰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고 했지만,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든 넘어지고, 모자가 날라가고, 입에서 쇠소리가 나도록 뛰어서 승패가 났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기 차기 순서가 되었다. 1회로 끝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날이 샐 때까지 차는 사람이 있었다. 편이 잘못 짜여졌느니, 노인과 젊은이를 함께 묶어놨느니, 오늘따라 감기 기운이 있다느니 어쩌니 말이 많았지만, 식사 준비팀은 결정이 되었다.
(아야, 내가 제기를 다 차네.)
개울물은 얼음물처럼 차고, 씻어야할 채소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처음에는 전등의 도움이 필요 없었으나, 18명이 먹어야 할 채소는 양이 많아 어둠이 몰려와서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대로 협동정신을 발휘하여 모든 저녁 준비가 끝났다. 옛 사람들이 강가에 나가 고기 잡아 천렵할 때 느끼는 그런 기분이었다.
오늘 저녁 만찬 준비는 마치 불나방이 불에 타 죽을지도 모르면서 불 앞에서 즐거움을 맛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일이 끝없이 이어져, 지겹도록 쌀을 씻고, 채소를 씻고, 불을 피우고 설거지를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이때까지 아는 사람은 아마 안내자 KC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전등이 없는 산골의 밤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였다. 하늘의 별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그 옆에 또 다른 별이 나타나고, 그 옆에 또 다른 별이 친구를 불러왔다. 바라보는 시간에 비례해 별의 수는 늘어갔다. "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별"이 거짓이 아님이 판명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누가 말했다. 저것이 북두칠성, 저것이 카시오페아, 저것이 은하수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별을 본 후, 이 얼마만이냐!
바로 오늘 아침에 더워 주겠다던 우리는, 단 몇 시간만에 가져온 옷은 모두 껴 입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 언제 우리가 덥다는 말을 했던가? 언제 우리가 열풍이라는 말을 했었던가? 아침에 떠난 트루판이 영겁의 세월만큼 떨어져 있었다.
술은 술을 부르고, 이야기는 이야기를 부르면서 밤이라는 기차가 긴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더 이상 추위를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몽고빠오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서는 난로가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추위와 피로를 견딜 수 없었던 몇 사람은 여기저기 반쯤 들은 쌀자루 넘어지듯 고꾸라져 잠에 빠지거나 피로를 이기지 못해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일단의 젊은이는 추위를 피해 몽고 빠오 안으로 들어와 다시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12시가 좀 넘었을 것이다. 이름도 낯선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국땅에서 오랜만에 산골 얼음물에 얼린 술을 보고 잠을 잘 수가 없었으리라. 쏟아지는 별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쉬웠으리라. 여행은 지금부터라는 꿈에 부풀었으리라. 아니, 다시는 와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백양나무 개울가에서 바라보는 별이 쏟아지는 밤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리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윤동주의 별헤는 밤)
(2010년 8월 2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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