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청도에서 둔황까지>
제 3부
구경은 안 하고 기차만 타는 겨?
A: 구경은 안하고 기차만 타는 겨? B: 그려. 기차만 타다가 판나는 겨. 뭐 인생 별거 있어.
A: 오늘이 5일째인데, 도대체 본 것이 뭐가 있어? B: 글쎄 말여.
A: 신장 간다더니만, 아직도 신장에 못 온겨? B: 맞어. 그건 그렇고 신장 위의 신발이나 잘 간수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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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역 대합실>
칭다오에서 서안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 기차를 타기 위해 칭다오 기차역에 들어섰다. 겉은 작아 보여도 대합실은 사방에 나누어져 있었다. 서울역 대합실의 몇 배처럼 보이는 대합실의 의자는 이미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7월의 태양에다가 사람들이 내품는 열기로 인해 푹푹 찐다는 말을 실감하기에 충분한 그런 막장 더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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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역의 광고: 수해로 연착되니 멀리 가지 말고 공고판을 자주 보라는 내용이다.>
우리가 타기로 되어 있는 7월 26일 12시 청도발 서안행 기차는, 수해로 인해 오후 6시로 늦춰졌다는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역시 알 수 없는 것이 중국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금부터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본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담긴 전광판을 보면서 무거운 짐을 가지고 복도로 나왔다. 대합실보다는 복도의 온도가 1-2도 정도는 낮은 것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 팀의 가장 큰 특징은 앉으면 술이요, 해가 지면 술이요, 기분 좋으면 술이요, 기분 나빠도 술이다. 무엇을 하면 술이요, 아무 것도 안 하면 또 술이다. 아니 술이 아니라, 맥주다. 칭다오 맥주는 술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술처럼 목을 타고 넘어갔다가 곧바로 몸 안에서 물이 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KC는 역내 수퍼에서 냉장 맥주를 한 아름 안고 나오면서, 얼굴을 뒤덮고 있는 수염 사이로 흰 이빨을 들어내어 웃었다. "마시는 것 빼면 뭐 남습니까?" 그러더니 병 하나가 땅바닥에 쓰러져 쨍그렁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서 있던 맥주 병이 그냥 90도로 넘어졌을 뿐인데, 병이 그렇게 산산조각이 날 줄이야 내 어찌 알았으리오.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지고, 맥주 거품이 사람들 얼굴에 튀고, 누런 맥주는 예비군 담벼락에 소변 보듯 흘러 흘러, 추풍 낙엽처럼 사람들이 혼비백산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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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역에서 술을 먹는다. 옆에 옷을 벗고 피서를 하던 사람은 자리를 우리에게 빼앗겼다.>
한 잔씩 걸친 대원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본래 여행은 이런것여라고 말하는 듯이, 땅바닥에 누워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옆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피서를 즐기던 중국 청년이 견디다 못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도망치고 말았다. 아니, 우리의 혐오 작전에 의해 그를 먼 곳으로 내 쫒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눈에 띄는 또 한 가지는 어린 아이들이 바지 가랭이가 터진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런 옷은 소변과 대변을 보기에 아주 편리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옷을 내리거나 올릴 필요 없이 앉으면 그냥 화장실에 온 것이나 똑같은 상황이 된다. 나도 어렸을 때, 이런 바지를 입고 자랐다.
그 옆에는 젖을 아기에게 물린 젊은 어머니가 있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차마 사진기를 들이댈 수가 없어서 찍지 못했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고 숭고하기까지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여기는 중국이라는 것을 새삼 느껴야 했다.
옆에 3 명의 고등학생이 있었다. 이들은 방학을 맞이하여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5박 6일의 일정으로 칭다오에 놀러온 학생들이었다. 서안에서 칭다오까지는 기차로 약 23시간이 걸린다. 바다 한 번 보기 위해 5박 6일이 필요한 나라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대전에서 서해 바닷가에 가는데는 1.5시간이면 충분하다. 언젠가 몽고에서 온 노동자가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에 가서 난생 처음 바다를 보고는 "아이구, 저것이 바다구나, 저것이 바다여." 하면서 밤새 잠자지 않고 보고 또 보고 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복받은 민족인줄 알아야 한다. 중국 땅이 넓다고는 하나,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고원지대나 사막도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며칠씩 계속되는 사막을 보고 혀를 내두른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이겠는가?
그런데 이 고등 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닌가? A형은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 마디 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이 나라 문화를 관찰하러 온 것이지, 이들의 버리장머리를 뜯어 고치러 온 것이 아니다. 젊은이의 여러 가지 면 중 왜 하필이면 담배 하나만 가지고 사람을 따지는가? 중국인의 수 많은 요소 중 오로지 그들이 더럽고 깨끗한 것만을 기준으로 판별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시끄럽고 조용하고만을 기준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 어떤 사람은 새치기를 하는지 안 하는지를 기준으로 그 나라 국민성 전체를 판단하려는 사람도 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오면 족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문명 생활에 "오염"이 되어 있다. 자연에 좀더 가까운 생활은 야만이고 미개인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문화인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날에 학교에 있을 때, 새 학년이 되면 아이들과 면담을 한다. 그러면 의례 묻는 말이, "아버지 직업이 뭐냐? 어디 사냐?" 등으로 시작되는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 어떤 책에서 "아버지 노래 잘 하시냐? 아버지 낭만을 즐기는 분이시냐?"를 물으라는 말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는 이미 나의 환경의 노예고 나의 문화의 노예다. 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나를 좀더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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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역에서의 고등 학생들>
기차는 저녁 6시 30분에 서안으로 출발했다. 기차 안은 통로로 사용되는 복도가 있고, 그 안에 3층으로 되어 있는 침대가 죽 나열되어 있는 형태였다. 아이들은 침대에 오르고 내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어른은 이것을 사진 찍기 위해 뻔질나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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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 모습>
<기차 안 모습>
내 자리 앞 쪽에 "닝시아 회족 자치구"에서 온 선생님이 있었다. 말을 해보니 우리 나라의 전문대와 비슷한 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칭다오에 출장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중국인과 이야기를 해보니 다음과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1)중국인과 중국인이 중국말을 하면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2)중국인이 나에게 중국말을 하면 나는 알아듣기도 하고, 못 알아 들을 수도 있다. 3)내가 하는 중국말은 중국인은 모두 알아들었다.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를 나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1)중국인이 하는 말은 단어의 수준이 너무 높아, 다시 말하면 나의 수준이 너무 낮아 알아듣지 못한다. 2)나의 중국어 발음이 전체적으로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알아 듣는다. 다시 말하면 길을 찾아가고,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식사를 주문해 먹는 등의 고정된 표현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이를 벗어난 일상생활의 중국어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짐작했던 일이어서 놀라지는 않았지만, 9월부터는 다시 중국어 고삐를 다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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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시아 회족 자치구 인추안에 산다는 선생님. 여러 한국 여인들이 그의 주위에 달려들어 상당히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
창밖에는 안개와 비를 동반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우리 나라의 풍경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런 풍경이 몇 시간이고 흘러갔다. 어떤 곳에서는 최근에 내린 비로 수해를 입은 강이 목격되기도 했고,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노동자들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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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왔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수해를 복구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전날 오후 6시 30분에 칭다오를 출발한 기차는 23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후 5시 30분경에 서안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오는데 더위가 흉물스런 짐승을 손에 잡듯 물컹 느껴졌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도 많다냐? 대합실은 물론이고 역앞에 있는 광장 건물 아래 그늘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떼거리로 앉아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짐보따리와 자루 포대는 저리 많이 가지고 다닌다냐? 아이에게 혼내는 사람, 성질 부리며 싸우는 사람, 그 중에서도 웃는 사람도 있고, 물론 우는 사람도 있다. 인생이 본래 저런 것인가 아니면 중국이라는 나라가 본래 저런 것인가? 서안역을 빠져 나오는 단 몇 분 동안 숨이 막히고 머리가 질끈질끈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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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기차역 앞. 여기서 중국어로 기차역은 버스역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기차역은 화차잔이라고 한다.>
<서안 역 앞에 사람들이 끝없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안의 최고의 볼거리는 당연히 병마용이다. 병마용을 보리라고 결심을 했던 사람들은 실망과 수심이 겉으로 보이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병마용은 꼭 봐야 하는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병마용 사진 찍어다 보여준다고 했는데." "야, 서안에서 병마용을 못보고 가다니, 올 겨울 병마(病魔)가 찾아오겠네."
어제 정해진 시간에 출발했다면 오늘 아침 충분히 병마용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중국이다"라는 말 한 마디에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못한다. 언젠가 교회에 좀 나가 본 적이 있었다. 목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라고 말을 했었다. 그러면 아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었다. 참 편리한 말이구나! 나에게도 이런 편리한 말 한 마디만 내 손에 쥐어져 다오. "세상이 본래 그런 거여. 인생이 본래 그런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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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호텔에서의 저녁 식사>
오랜만에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호텔 음식을 먹고 또 맥주도 한 잔 걸쳤다. 이 밤이 가면 또 내일 아침 일찍 돈황으로 출발해야하는 몸이다. 그렇다면 서안의 밤이라도 구경해야 했다.
호텔에서 나와 약 10분 걸으니 기와집 모서리를 전기불로 장식하고 화려하게 밝혀 놓은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문제는 더위였다. 서안의 더위를 너무 얕잡아 보았나 보다. 더위와 맥주의 위력이 겹쳐져 당장 10미터 이상을 걸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죽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경이고 나발이고 그만두고 당장 호텔로 향했다. 오면서 만난 몇 사람은 양꼬치를 파는 시장에 간다고 했다. 양꼬치보다는 목숨이 먼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작정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말을 들어보니 그 사람들은 새벽 2시까지 술집에 있었다고 한다.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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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시내의 야경>
<서안: 아침에 산보하다가 만난 장면들>
다음 날 7월 28일 9시 45분에 호텔에서 나왔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 1위엔(200원)주고 기차역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모두들 짐은 크고 무겁지, 출퇴근 시간이지 땀깨나 흘리면서 기차역에 도착했다.
서안발 둔황행 기차에서 내 앞에 마침 할머니와 어떤 꼬마가 함께 타고 가고 있었다. 나이가 5살이라고 하는 이 아이의 말도, 또한 할머니의 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아이가 할머니와 장기를 두는데 번번이 할머니를 이겼다. 몇 번 살펴보다가 나와 함께 뒤어 보자고 했다. 졸이나 말 등이 가는 길이 좀 달랐으나 대충해보았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내가 이기고 말았다. 어떻게 내가 이겼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머리를 득득 긁더니, 울상을 지었다. 마침 지나가는 공 장사가 있어서 15위엔(3000원) 짜리 공을 하나 샀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본래 그것은 2000원짜리라고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이어서 그냥 3000원 주고 샀다. 그 공 하나로 그와 나는 갑자기 친한 친구가 되었다. 공은 이리 튀고 저리 튀고, 공 자체에 불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는 사진을 찍으라고 우스꽝스런 표정까지 지어 보여주었다.
얼마 후, 캄캄한 밤 중에 차장이 할머니와 꼬마를 깨우면서 내리라고 말했다. 중국은 차장이 내릴 때 미리 알려주는 것이 특징이다. 꼬마는 번쩍이는 공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2층에 있는 내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한참 그러고 있는 동안에 할머니에 이끌려 그 아이는 자리를 떴다. 내가 준 그 공과 내 눈을 바라보면서 나의 꼬마 친구는 그렇게 기차를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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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에 친구가 된 꼬마>
<서안을 지나서 나타난 풍경>
<열차에서 먹었던 주먹 밥>
한 여자가 덜덜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물어보니, 배가 아프고 열이 난다는 것이다. 아내를 깨워 펜잘을 주라고 말했다. 하나를 먹고, 다섯 시간 이후에도 통증이 있으면 또 하나 먹으라고 또 하나를 주었다. 약을 먹고 약 20분 후 그녀는 정상인으로 변해 있었다. 펜잘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다.
그녀는 한국인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한국인 중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어떤 한국인은 나쁜 사람이고, 어떤 한국인은 좋은 사람이다. 마찬 가지로 어떤 중국인은 나쁘고 또 어떤 중국인은 좋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 동안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영어를 하려고 하면 자꾸 중국어가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예컨대 "나와 나의 아내"라는 말을 하려고 하면 "아이 앤드 마이 와이프"가 아니라 "워 허 마이 와이프"라고 영어와 중국어가 반반씩 나왔던 것이다. 중국어가 내 뇌 속의 일본어 영역을 점령하더니 급기야 영어 영역도 점령하는구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 한국에 가면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둔황 사람으로 북경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제 방학이 되어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이메일을 보내볼 생각이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몇 번 이런 경험이 있지만 답장을 받은 것은 딱 두 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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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에서 맞은 편에 앉은 중국인>
할머니와 꼬마가 내린 자리에 머리를 빡빡 깎은 젊은이가 올라왔다. 그는 나보고 두통약이 없는지 물었다. 그는 아스피린을 달라고 했다. 왜 중국인 중에는 그렇게 머리가 아픈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는 아스피린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났다. 고맙다는 말을 또 여러 번 했다. 그는 가방을 열더니 어떤 서류를 보여 주었다. 회사 직원으로 정수기를 파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말은 다른 사람과는 좀 달라서 내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스피린에 대한 답례로 담배 한 갑을 주었다. 이 담배는 계속 내 가방에 있다가, 한국인에게 건네 졌고, 너무 독해서 피울 수가 없어서, 다시 중국인에게 넘어가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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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역>
다음 날 10시경 드디어 볼거리 기대되는 둔황역에 도착했다. 햇살은 찬란히 빛났고, 사람도 별로 없이 한산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자동차 유리창으로 막고굴과 명사산을 알리는 광고판이 보였다. 키 작은 건물 사이로 넓은 호수가 보이더니 바로 그 옆에 있는 호텔이 내가 묵을 호텔이었다. 맹자의 명언이 호숫가 돌에 드문드문 새겨져 있었다. 아직도 신장에 오지는 못했지만, 뭔가 있을 기대감에 하늘을 나는 새처러 가벼운 마음으로 호텔 문을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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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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