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설명: 싸이리무호수에서 탕부라까지: 탕부라(오른쪽 빨간 글씨)를 찾아 간다고 갔지만 되돌아 오고 말았다. 실제로 우리가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싸이리무호수(A)를 출발하여 이닝(C)까지는 분명히 갔으나, 그 이후의 행방은 사진과 지도를 근거로 추측해본 노선이다. 추측의 근거는 중간 중간에 찍어 두었던 안내판과 도로 표지판이다.
(D) 또는 (D-1)지점이 삼거리인데, 바로 여기서 경찰에 탕부라 가는 길을 물어본 지점이다. 또 다른 파출소인 (E)지점근처에서 파출소에 끌려 갔다가 되돌아왔다. (E) 지점은 탕부라와 아주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F) 또는 (F-1)지점이 텐트를 치려고 했던 지점으로 보인다. 찍은 사진의 시각을 보면 우리가 길을 물어본 삼거리는 (D)보다는 (D-1)에 가깝다.
그날 밤 잠을 잔 곳은 (B) 지점인 淸水河(청수하-칭수웨이허)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이야 (D)건 (D-1)이건 무슨 상관이며, 내가 쓰는 이 글이 쓰잘데기 없는 넋두리로 들릴 것이다.]
제 8부
탕부라? 뎀부라? 난몰라!
8월 5일이다. 싸이리무호수를 뒤로 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탕부라를 향해 출발했다. 위 지도 상에 나온 312번 도로는 지도상으로는 고속도로가 완성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지금 한창 건설 중이어서 먼지가 사방에서 일고 정체가 심했다. 산길을 내려가면서 왼쪽을 보면 높은 산에 눈이 간간히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산에 터널을 뚫어 길을 내는 장면이 보였다.
버스는 계속해서 구불텅거리는 언덕길을 한참 동안 내려갔다. 가면서 오른쪽으로는 양떼가 가끔 보이기도하고, 민둥산이 보이기도 했지만, 왼쪽으로는 계곡물이 숨가쁘게 흘러갔다. 계곡은 길대로 길고 도로는 비포장에다가 차들이 몰려들어서, 천산을 내려가는데 시간이 보통 걸리는 것이 아니다. 아마 1-2년 뒤에 왔었더라면 지금 건설되는 도로가 완성되어 여행하기에 한결 편했을 것이다.
(싸이리무호수에서 출발하자마자 아래로 내려뻗는 꼬부랑 길이 나온다. 내려가면서 나타나는 도로 건설장면)
(도로를 건설하느라 먼지 투성이다.)
(왼쪽으로는 아직도 산에 눈이 남아 있다. 이 산의 높이는 아마 3000미터가 넘을 것이다.)
일단 천산을 내려오면 평지가 나타난다. 다른 곳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황무지가 나오거나 옥수수밭이 나왔다. 계속 가면서 먹을 곳도 없고, 구경할 곳도 없었다. 그냥 시골 길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목적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디로 해서 어떻게 가는지는 운전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듯 했다. 나는 계속 운전 수 옆에서 있었는데, 아마 운전수도 확실한 길은 잘 모르는 듯했다.
(평지에 내려와 이닝시로 가는 중에 보이는 장면)
(삼륜차를 타고 가는 할아버지)
(중간에 가다가 만난 길가의 과일 시장)
이닝에 도착한 것은 2시경이었다. 이닝이 어떤 도시인가? 1997년 2월 위구르 농부와 실업 청년 등 1천여명이 폭동을 일으킨 곳이다. 그 당시 중국 정부는 이 사태로 9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다쳤다고 밝혔지만, 망명 위구르인들은 실제 사망자가 80~9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던 곳이다.
사실 폭동이라는 것도 중국정부의 입장으로 보면 폭동이지만, 이닝 사람들의 입장으로 보면 일종의 독립운동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하의 3. 1일 운동이 우리의 입장으로 보면 독립운동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으로 보면 폭동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닝에 도착했을 때, 겉보기에는 아주 평온한 도시처럼 보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상가로 들어가 채소 등을 파는 쇼핑센터로 들어갔는데, 중국의 다른 작은 도시와 별 차이가 없었고, 특이한 점도 별로 없었다. 음식을 사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어렵게 찾은 국수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의 국수는 뜻밖에도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외국인은 3성급 이상의 호텔에서만 투숙을 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전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장이나 티벳처럼 실제로 중국이라고 할 수 없는 곳에서는 이것이 철저히 지켜지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루무치의 여행사에 문의해본 결과, 탕부라로 가는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가는 것이므로, 우리가 갈 수 없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은 일이었다.
(역시 같은 곳: 이닝 시장)
이닝시를 조금 벗어나니 도로 표지판이 나왔는데, 곧장 가면 신원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터커스라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를 보니 대체로 맞아 돌아가는 것 같았다. 도시는 한가했고, 삼륜차가 더러보이고 날이 더워서 그런지 걸어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닝시를 벗어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똑바로 가면 신원, 오른쪽으로 꺾으면 터커스라고 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위치를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오른 쪽에 백양나무 가로수 길이 보인다.)
얼마를 갔을까? 전에 폭동이 났건 어쨌건, 양쪽으로 쭉쭉 뻗은 백양나무 길이 나타났다. 백양나무가 얼마나 높이 솟아 있는지, 마치 하늘이 너무 낮다고 뽐내는 듯이 보였다. 백양나무 아래에도 길이 나 있어서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걷거나 경운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2층 트럭에 염소를 싣고 간다.)
(경찰관에게 탕부라 가는 길을 물어본 지점.)
한참을 가다가 삼거리가 나왔다. 지도상의 (D) 또는 (D-1)으로 짐작되는 지점이다. 탕부라 가는 길을 알지 못했던 운전수는 버스에서 내려,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경찰에게 탕부라 가는 길을 물었다. 우리 안내자 KC도 내려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사실 여기에서만이라도 외국인이 탕부라를 갈 수 없다는 것을 경찰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더라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도 몰랐는지, 아니면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경찰이 알려주는대로 좌회전하여 탕부라로 향했다. 이때가 오후 4시 경이다.
(같은 파출소 앞의 장면. 왼쪽 간판 "니러커현은 당신을 환영한다"는 말로 보아, 현 지점이 니러커현 시작점으로 보인다. 지도에도 니러커 시가 나와 있다.)
한참을 가다가 검문소가 나타났다. 운전수가 차를 멈추고 검문소로 가더니 잠시 뒤, 우리 가이드도 오라고 했다. 그러더니 모든 사람의 여권을 가져오라고 했다. 약 10분 후에, 경찰이 나오더니 우리 버스에 탔다. 그리고 그 경찰과 함께 우리는 계속 길을 갔다.
나는 앞쪽에 타고 있는 경찰을 바라보았다. 경찰이 입고 있는 옷이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옛날 월남의 베트콩이 입고 있던 복장 같았다. 허름한 옷에 헐렁한 벨트, 배싹 마른 몸, 검은 얼굴, 허접거리는 바지, 얼굴은 작고 모자는 커서 모자가 머리를 한 바퀴 헛돌 기세였다.
버스는 출발하여 약 10분 정도 가더니, 우리와 함께 버스에 탔던 경찰은 우리 차를 길에 세웠다. 그러더니 운전수를 데리고 어디로 갔다. 잠시 뒤에 우리 안내자 KC도 불려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너무 오래 걸려서 나는 내려서 이곳저곳 사진을 찍었으나 시골이라는 것 이외에는 특이한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특이하다면 한 농부가 길가에서 양 고기를 팔고 있었는데, 고기에 벌이 달라붙어 고기의 육즙을 빨아먹고 있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농부가 고기를 팔고 있는 바로 옆 철조망 속에 오늘 죽어 나갈 양이 음매음매 하고 있었다. 지금 매달아 놓은 고기가 팔리면, 아마 그 자리에서 그 양을 죽여 다시 판매할 것으로 보였다. 자기의 죽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 양은 발광까지는 아니었지만, 좁은 철조망 안에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어찌할 줄을 몰랐다.
(가운데 군복입고 가는 사람의 왼쪽에 작은 파출소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파출소 근처의 양고기 파는 길가. 벌이 고기에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잠시 후 모두 버스에서 내려 파출소로 들어 오라는 연락이 왔다. 죄지은 것은 없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왜그런지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마치 큰 죄를 짓고 교무실에 불려가는 학생처럼 터덜터덜 걸어갔다. 단지 믿는 구석이 있다면, 나 혼자가 아니고 단체로 가는 것이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생각뿐이었다.
파출소 안에서 어찔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경찰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해댔다. 안내자 KC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지금 경찰이 탕부라를 못 가게 하는데, "왜 여행사가 그런 것도 모르고 갈 수 있다고 말했는지", 우루무치에 있는 여행사에 항의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우리 가이드가 우루무치 여행사로부터 온 전화를 경찰에게 바꿔줬다. 아마도 우루무치 여행사에서는 "우리는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인 듯 했다. 그러나 그 전화를 받은 경찰은 더욱 핏대를 올리며 자기들은 여행사건 뭐건 모르는 일이며, 허가증이 없으면 탕부라에 못들어 간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는 계속 되고, 날은 덥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아서, 천둥이나 번개가 쳤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안내자는 파출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파출소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거나, 태양을 피해 허적거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경찰 한 사람과 내가 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그들의 의심을 풀어볼 생각으로 "우리 대부분은 학교 선생님으로 방학을 맞아 왔다."고 말했다. 그를 비롯한 나머지 경찰들은 우리에게 흥미를 갖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고, 나는 그 동안 배운 말로 그럭저럭 대화를 이끌어 갔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났다. 경찰 중 한 사람이 밖에 나가 수박을 몇 통 사왔다. 그들은 수박을 칼로 자르더니 우리에게 먹으라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먹서먹하던 분위기는 이 수박 사건을 전환점으로, 마치 처음 선본 남녀가 술 한 잔 마신 것처럼 술술 잘 풀리는 듯 했다. 날도 덥고 시장기도 돌던 김에 우리는 "이게 웬떡이냐"는듯, 한 사람 당 몇 조각을 먹었다. 수박의 양이 많아서 결국은 다 먹지 못하고 몇 조각 남았다.
한층 기분이 좋아져서 이제는 뭔가가 잘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희희낙낙하고 있는 데, 경찰 중 한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경찰 5-6명과 우리 18명이 모여 아주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여러 방찍었다. 우리 팀 중의 몇 사람은 한국 돈 1000원 짜리를 기념으로 그들에게 주었고, 사탕도 그들에게 건네 주었다. 그들은 그런 물건을 상당히 호기심 있게 보더니 이런 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어디서 구했는지 한국돈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 파출소장으로 보이는 젊고 건장한 경찰은 끝까지 1000원짜리 한국 돈을 받지 않았다. 아마 뇌물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기쁜 마음으로, 아주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그들과 작별을 고한 후 버스로 돌아왔다. 잠시 후 버스에 돌아온 가이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왔건만 결과는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 팔자였다.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격이다.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우리는 차를 되돌릴 도리 밖에 없었다. 한 가지 방법은 이닝시로 다시 돌아가 시정부로부터 허가증을 받으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다고 해서 허가증을 받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역시 같은 파출소 근처: 소가 길가를 그냥 돌아다닌다. )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차를 되돌려 아까 삼거리에서 좌회전 했던 지점, 즉 다른 파출소까지 왔다. 운전수의 말로는 운전수가 아는 쪽으로 가면, 물도 좋고 경치도 좋은 텐트를 칠 만한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할 말도 없었고, 아무도 말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조금 가니 급물살이 흐르는 강이 나타났다. 저것이 틀림없이 탕부라 계곡에서 나오는 물일 것이라고 KC는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흐르는 물을 보니, 아쉬운 마음이 또 솟구쳤다.
얼마 간 뒤 운전수가 차를 세운 곳은 아무 것도 없는 민둥산 한 구석이었다. 폭 약 30센티의 개울이 있었는데, 그 개울은 잡풀이 덥혀 있었다. 그 물을 이용해서 오늘 저녁 먹을 식사를 준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를 해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머나먼 중국 땅끝에 와서, 이런 허접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1)경치가 좋든지, 2) 텐트칠 자리가 좋든지, 3)물이 좋든지, 4)근처에 무슨 상점이 있든지 뭐든지 한 가지는 있어야할텐데, 아무 것도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일부는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고, 일부는 버스에 타고 있고, 일부는 버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일부는 좀 더 좋은 자리가 있는지 위쪽으로 가본다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사이에 한 사람이, 이런 여행이라면 차라리 우루무치로 가겠다고 배낭을 짊어졌다. 어차피 탕부라로 갈 수 없으면 이닝의 호텔에서 잠을 자야지 이게 무슨 경우냐고 따졌다. 어떤 사람은 오늘은 본래 야영을 하게 되어 있으니, 야영을 하는 것은 맞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야영을 하는 것은 탕부라로 갔을 때 이야기지, 그곳에 가지도 못하는 마당에 무슨 텐트 생활이냐고 맞받아 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안내자 KC는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근처에 호텔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이닝에는 3성급 호텔이 이미 만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럴리가 없으니 일단은 무조건 이닝시로 가자고 누가 말했다. KC는 막무가내로 갔다가 잠자리가 없으면 안되니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 좀 멀더라도 다른 도시에 3성급 호텔이 있는지 물었고, 여행사는 얼마 뒤에 다시 연락을 해 준다고 했다.
그들이 버스 근처에서 앉아 있는 사이에 나는 근처의 대지가 좀 높은 곳으로 가서 지역을 살폈다. 근처에 경치가 좋은 곳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넓은 평야 지대로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늪지대로 보였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텐트를 치기에 적절한 곳은 없는 듯 했다.
얼마 시간이 흘렀을까? 이닝은 아니지만 좀더 먼 곳에 숙박할 곳이 있다는 전화가 왔다. 모두들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버스에 탔다.
버스는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닝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다. 버스는 온 길을 다시 가더니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어떤 시내로 들어갔다가 빠져 나와 계속 달렸다. 시속 80키로 이상을 절대로 달리지 않던 버스 기사는, 오늘의 분위기를 아는지 시속 110키로까지 밟았다.
(잠잘 곳으로 오다가 중간에 목격한 사고 장면)
사고가 났는지 길이 막혔다. 서로 가려고 난리가 났고, 운전수 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답답한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있었다. 차가 무조건 달리는 도로 위로 아이들이 소를 몰고 길을 건넜다. 이곳도 양보라는 것을 모르는 양, 상대편 쪽에서 오는 차만 계속 오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의 차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참다못한 우리 운전 기사가 재빠르게 끼어들어 빠져 나갔다. 그 순간 "자동차와 여자에게는 먼저 들이미는 놈이 장땡이다."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8월 5일 10시 30분쯤 칭쉐이 호텔에 도착했다. 간판의 중간에 있는 Shui에서 S가 떨어져 나갔다.)
날은 어두워졌고 사방은 고요했다. 도시는 폐허와 같이 불이 켜져 있지 않아서 을씨년스러웠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칭쉐이 호텔" 앞이었다. 100키로 이상을 달려왔다.
10시 반이 넘었다. 배낭을 호텔 방에 두고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낭만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녁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길은 어둡고 바닥은 파헤쳐져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황천길로 가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거리를 장님 살얼음 걷듯 걸었다.
얼마를 걸어가니 양꼬치를 주로 파는 가게가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오늘은 사건도 많고 몸도 피곤하니 무슨 색다른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폐혜처럼 어둑어둑한 거리에는 그 동안 먹을만큼 먹었던 양꼬치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 마당에 또 양꼬치야?" "그래, 그렇다. 이 놈아. 네가 여기 신장에 있는 동안은 너는 내 손안에 있어."라고 양꼬치가 말하는 듯 했다.
(여전히 늦은 저녁이지만 양꼬치는 빠질 수 없는 것 같다.)
어두운 길 가에 앉아 메마른 양꼬치를 딱딱한 빵조각 씹어 삼키듯 먹으면서 내일은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더 이상 나쁜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좋은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십중팔구는 내일은 텐트 생활을 할 것이다. 몽고빠오 생활을 하고 이제 텐트 생활로 접어드는 것이다.
맥주 한 잔 들이키니 식탁으로 가져온 양꼬치가가 뎀뿌라를 꿰 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 탕부라를 가려고 하다가, 뎀부라를 먹고, 내일 일은 모르는 인생이구나!" "탕부라 - 뎀부라 - 난몰라!"
그때 "이제 내일을 위해 호텔에 가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옆에 있는 아내였다. 내일 뭐가 있다고 내일을 위해 호텔에 가나? 하기야 그래도 가기는 가야지. "탕부라 - 뎀부라 - 난몰라". 호텔로 터벌터덜 걸어오는 동안 내내 머리 속에 맴돌던 말이다.
(2010년 9월 3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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