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설명: 8월 6일 (A)지점인 청수하를 출발하여 다시 싸이리무호수로 갔다. 거기에서 점심을 먹고 쿠이둔시를 거쳐 (B)커라마이시를 조금 지난 지점 (C)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8월 7일 아침에 (D)지점인 마귀성에서 내려 구경하고 계속 차를 타고 (E)부얼진에 도착했다. 부얼진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F)지점이라고 여겨지는 강가에서 역시 텐트를 치고 잤다. 신장 이야기 9부는 8월 6, 7일 이틀 간의 이야기다.]
중국 신장 여행기 제 9부
"그대, 이게 얼마만인가?"
8월 6일 아침에 일어나 칭수웨이허 시내를 걸어서 한 바퀴 돌았다. 특별히 인상 깊은 도시는 아니었다. 저녁에 보았던 것처럼 무슨 탄광 지역이거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살 곳을 찾아 떠난듯한 인상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한 곳에서 수염이 50cm나 되는 노인이 염소를 잡아서 걸어 놓고 팔고 있어서 그를 촬영하려다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기가 죽어 촬영도 못하고 그냥 왔다. 요즘 들어 내가 왜 이리 용기가 없는지 모르겠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찍어야 하는데, 프로정신이 나날이 감소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싸이라무 호수와 칭수웨이허를 연결하는 312번 도로 건설이 한창이다. 양쪽에서 다리를 만들어 나오다가 중간에서 다리를 서로 잇는 공법이다.)
(싸이리무 호수)
싸이리무 호수는 날씨가 맑아서인지 어제보다 한결 깨끗하고 시원해 보였다. 푸른 물 위로 흰구름이 쭉쭉 뻗다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흰 구름 너머로 천산의 다른 자락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구름 위로 솟은 산에는 듬성듬성 흰 눈 덩어리가 뿌려져 있었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모여들어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떠난 자리에 소떼가 몰려와 싸이리무의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물을 마셨다. 소가 떠난 자리에 소년 몇 명이 말을 몰고와 또 "치마, 치마"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싸이리무 호숫가의 점심식사)
우리는 바로 이 호숫가에서 닭고기 삶은 물에 수제비를 떴다. 얼마만의 닭국물에 수제비인가? 옛날에 시골에서 잔치가 있을 때는 닭을 잡아 끓인 물에 국수를 말아 손님을 대접했었다. 동네에 잔치가 있는 날은 어머니는 으레 "잔치집에 가서 먹고오라"고 말씀 하셨다. 아이들과 떼를 지어 가서 한 번 얻어 먹는다. 잠시 뒤에 같이 가는 동무를 바꿔서 다시 간다. 한참 놀다가 또 한 번 간다. 그때는 동네 아주머니가 여지없이 알아차리고는 국수를 주지 않았었다. 아무리 처음 와서 먹는 것이라고 떼를 써도 머리가 비상한 아주머니들은, 동네 거지를 부엌에서 내쫓듯,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나와 우리를 쫓아 버렸었다. 세 번 얻어 먹지 못한 것이 하도 분해서 뒷산에 가서 참나무를 잡고 엉엉 운 적도 있었다. 그런 닭국물을 보니 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세월이라는 말밖에 생각이 안 났다.
점심을 먹고 싸이리무 호수를 출발한 것은 오후 3시 반이었다. 잘 알겠지만 중국은 그 큰 국가를 단일 시간 체제로 운영하는 곳이다. 따라서 경도상으로 보아 현재 시각에서 2시간을 빼야 대충 현지 낮과 밤이 맞아 돌아간다. 따라서 3시반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오후 1시 반쯤 되는 시각이다.
우리가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 쿠이둔까지 돌아가서 북쪽으로 꺾어 돌아가야 한다. 쿠이둔까지는 그야말로 끝 없는 평원이고 사막이었다. 쿠이둔에 접어들면서 사람이 사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쿠이둔은 우리나라의 읍 정도에 해당되는 도시로 그 도시를 통과하는데 채 10분이 걸리지 않은 듯했다.
(중간에 돼지를 싣고 가는 사람이 돼지를 막대기로 계속 때리고 있다.)
쿠이둔에 접어든 우리 버스는 곧 먼지로 가득 찬 길을 따라 태양을 바라보고 한참을 갔다. 먼지가 자욱한 거리는 역광으로 비쳐 나의 시야를 가렸다. 그러더니 다시 사광(斜光)으로 해바라기 밭이 보였다. 어느 사이 다시 안개처럼 감싸고 도는 먼지를 뚫고 태양을 향해, 버스는 또 달렸다.
해는 이미 넘어가려고 했다. 토마토를 가득 실은 트럭이 사이를 두고 몇대 지나갔다. 붉은 토마토가 붉은 햇살을 받아 더욱 붉어 보였다. 우리 나라 같으면 상자에 넣어서 차곡차곡 쌓은 뒤 단단한 포장지로 차를 덮어서 출발했을 것이지만, 이것은 여기 식인 듯 하다.
그러나 트럭은 불안하게도 아무런 대책없이 거리를 달렸다. 혹시 저 차가 넘어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사람이 죽고 살고를 떠나서 "한번 구경할 만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문세는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면 슬픈 그대 얼굴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는 계속 노래했다.
"고개 숙이네, 눈물 흘러,
이문세의 반만이라도 감상에 젖었으면 좋겠다. 그래 이 먼 이국 땅에 와서 토마토 트럭이 넘어져서 질커덕 거리는 거리를 걸어다니면 행여나 참 좋겠다! 장화를 신어야겠지. 옷도, 손도, 발도, 얼굴도 모두 피투성이처럼 되겠지. 낫만 하나 들어봐라. 지옥의 저승사자는 저리가라일 것이다.
나는 세상에 왜 나같은 놈이 다 있는지 세상을 원망하며 내 옆에 있는 운전 기사를 바라보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운전기사의 눈은, 마치 폭파 임무를 띠고 적의 전선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죽음을 앞둔 병사처럼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너도 미치고 나도 미치고 모두 미친 날인가보다.
(기사님)
커라마이를 지난 후 어떤 작은 도시에서 차는 잠시 멈췄다. 맥주 몇 박스와 이런저런 저녁거리를 샀다. 마침 옆에 장기를 두는 사람이 있었는데, 장기 알이 무슨 메주 덩어리만큼 컸다. 하도 커서 근시건 원시건 장님만 아니면 누구나 뒬 수 있는 장기였다. 나라가 크니 장기도 큰가 보다.
길을 조금 벗어난 지점에서 차는 멈추었다. 그리고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또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저녁으로는 라면을 끓였다. 라면의 맛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모두들 굶어죽지 않기 위해 먹는 도리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몽고빠오에서 잠을 잤었지, 텐트 생활은 오늘이 처음이다. 침낭도 가져가지 않았고, 땅도 딱딱하여, 아내와 나는 버스에서 자겠다고 했다. 운전 기사는 버스 맨 뒤에 널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불을 깔더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아내와 나는 각각 버스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앉아서 잠을 청했다. 모기 몇 마리가 번갈아 가며 우리를 공격했다. 나는 그저 당할 도리밖에 없었다. 조금 앉아 있으니 허리가 아팠다. 누워보았더니 가운데 통로에 허리 부분이 와서, 허리가 공중에 떠 있었다. 다시 일어나 앉아서 잤다. 이러기를 몇 번,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에 가야되는데, 잠자는 기사를 깨울 수가 없었다. 운전석 옆에 있는 여러 스위치를 눌러보았지만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빈병을 찾아 실례를 할까하다가 그래도 체면이라고, 꾹 참고 또 참았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지 않아도 새벽은 왔다. 동쪽에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얼마만에 보는 노을인가? 이문세의 붉은 노을은 이런 때 불러야 했다. 정말 저 붉은 노을을 바라보면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날 것이다. 검은 들판을 배경으로 태양은 구테타를 일으킨 장군의 군화처럼 무서운 속도로 쑥쑥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천지를 붉게 물들였다. 모두들 "어, 어, 어" 하는 사이, 태양은 시뻘건 군화로 우리의 땅을 그렇게 점령하고 말았다.
아내와 함께 근처에 무엇이 있나 구경 나갔다. 이 새벽에 저 멀리서 두 사람이 밭을 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찾아가 어디에 사는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동네에 사는 사람인데 잡초를 뽑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을 이야기 하더니 그는 나보고 따라오라고 했다. 밭 모퉁이에 조그만 수박 밭이 있었는데, 그는 몇 개의 수박을 따 주면서 가서 먹으라고 했다. 내가 돈을 지불하려고 했더니, 친구로서 준다고 했다.
사실 중국 사람들 중에는 미꾸라지 같은 뺀돌이가 있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뜯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어떻게든지 도움을 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세상은 어디가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정을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입만 열면, "중국놈들은 더럽고 시끄럽고----"라고 말하고, "일본놈들은 맨날 겉치레로 아리가또만 연발하고 ----," "베트남 놈들은 교통질서 안 지키고, 끈덕지게 물건 팔아먹으려고 달려들고 ---"등등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훌륭한 한국 사람들도 많지만, 동남아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 산다고 떵떵거리고, 거짓말하고, 멸시하는 한국 사람들을 나는 가끔 보아왔다. 그런 사람일수록 미국에 가면 야코가 팍 죽어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돌아온다. 윗 사람에게는 강아지처럼 아부하고, 아랫 사람에게는 기고만장하게 군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존경하고 존중해본 적이 있을까?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 또는 존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대방이 어느 나라 사람이건, 잘 살건 못살건, 나이가 많건 좋건, 잘 생기건 못 생기건, 남자건 여자건, 초등학교만 나왔건 대학원을 나왔건, 무조건 상대방의 현 상태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와 너희들을 구별하기 이전에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값어치가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문화, 정치, 종교, 사상" 등 모든 것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내가 싫다고 해서 그들까지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존대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상대방이 20대 청년이건, 그는 항상 존대말을 쓴다. 존경의 기본은 말부터 시작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로부터 "말을 놓으라"라는 말을 그는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존대말을 쓴다. 존대말을 쓰면 죽인다고 해도 아마 그는 존대말을 쓸 것이다. 나도 그를 닮으려고 노력한다.
이러다 보니 이 글이 기행기가 아니라 잡기가 되어가고 있다. 나도 모르겠다. 이 글이 가고 싶은대로 가게 내버려 둘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전에 유행했던 허무 개그 하나 한다. "붉은 노을"을 부른 이문세가 등산을 갔다. 이문세 앞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이 바위 위에서 줄을 잡고 있고, 그 아래에 이문세가 줄을 잡고 올라가고 있었다. 위에 있던 노인이 뒤를 보니 이문세가 아닌가? 그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 이문세씨 아니십니까?" 이 말을 들은 이 문세가 말했다. "아이구, 저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말 놓으세요."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줄을 놓아 버렸다. 그래서 이문세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 [*이문세의 별명이 말(馬)이다.]
(중간에 가다가 사 먹어 본 밥)
(석유를 펌프질 하여 퍼내는 장치)
부얼진으로 가는 들판은 한참 동안 석유를 퍼올리는 기계로 덮혀있었다. 먼산 보고 절하는 디딜 방아처럼, 위에 매달아 놓은 막대기는 계속 상하 운동을 반복했다. 아마 퍼서 올리면 바로 옆에 있는 파이프를 통해서 원유 처리 시설로 옮겨가는 듯 했다. 이렇게 많은 석유가 나니까, 중국이 무력으로 점령한 이 신장과 티벳을 독립을 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조금 가면 마귀성이라는 곳이 나온다. 날이 얼마나 더운지 금방이라도 머리가 벗겨질 것 같은 곳이다. 숨이 막히고 땀이 비오듯 했다. 한참을 기다려 코끼리 열차를 타고 흙으로 빚어진 황량한 들판을 달린다.
한참을 가면 차는 잠시 멈추고 사진 찍는 곳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 낙타는 깨끗한 쌍봉낙타다. 그러나 이 더위에 누가 낙타를 탈 것인가? 우리 팀 중에는 아무도 낙타를 타는 사람이 없었지만, 중국인들은 너도 나도 낙타를 타고 소리지르고 사진을 찍었다.
많이 돌아다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마귀성은 그렇게 인상적인 곳은 아닌 듯 했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고, 트루판의 교하고성은 인공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마귀성과 교하교성이 주는 이미지는 상당히 비슷했다. 단지 해가 질 무렵이나 뜰 무렵에는 붉은 흙과 태양이 환상적인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 낮의 태양 아래서는 그저 단순히 들판에 서 있는 평범한 구조물 정도로 보였다.
(마귀성)
(마귀성)
(중간에 점심 식사를 한 곳)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허름한 회교식 음식점이었다. 마침 그곳에서는 이미 다 뜯어 먹어 뼉다구만 남은 양 머리 뼈를 빨면서 맥주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더위에 긴팔 옷을 입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술이 좀 취했는지 비틀비틀 걸으면서 왔다갔다 했다. 그들 중에는 이미 다 먹어 버려서, 먹을 것이 전혀 없는 뼉다구 속을 박박 칼로 긁어낸 고기를 먹어보라고 우리에게 건네 주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인의 정은 이런 곳에서도 나타난다.
(점심 식사 한 곳의 아이들)
식당 아주머니가 있었다. 첫 인상이 마치 영화배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캄캄한 무대에 스포트 라이트가 들어오면 멋들어진 캉캉 춤을 추면서 무대를 휩쓸고 지나갈 것 같은 식당 아줌마다. 눈과 눈 사이에 검은 점이 유난히 돋보이는 이 아줌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할 것 같은 비싸보이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여장부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장난기 넘치는 개그우먼 같았다. 저 아줌마가 세상을 잘 못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머물다 지나갔다.
(식당 아주머니: 세피아 색으로 바꿨다.)
(소가 길을 막고 걷고 있다.)
(부얼진)
우리가 부얼진에 도착한 것은 6시 반이었다. 부얼진은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로 며칠 머물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우선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은 먼지 하나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새빨갛게 입술을 칠한 빨간 지붕이었다. 에로 배우가 붉은 입술을 뽐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지 뾰죽한 것은 성기를 상징한다는 프로이드 강좌도 생각났다.
(부얼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부얼진에서 북쪽으로 간다.)
북으로, 북으로, 버스는 달렸다. 부얼진을 벗어나자 다시 사막이 나타났다. 물이 흐르는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은 사막으로 보였다. 들판에 꾸불텅 거리는 아스팔트 길이 긴 뱀처럼 길게 길게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 가지 말고 적절한 곳에서 멈추라는 우리 안내자 KC의 말을 듣고도, 마치 고집센 황소처럼, 우리 기사 아저씨는 달리고 달렸다. 어제도 좋은 장소 놓치고 가더니 오늘도 또 놓칠 판이라고 KC의 걱정이 태산같다. "나이 먹은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난감하네."라고 KC가 말한다. 아마 젊은 운전수라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그러나 칼 쥔 놈이 장땡이라고, 운전수 마음대로 아닌가?
(텐트 친 곳에서 가까운 길: 필터 처리 했다.)
목적지는 길에서 한참 벗어난 강가였다. 사막 한 가운데 이런 강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시퍼렇다 못해 검푸른 강물이 어둠 속을 뚫고 쏜살같이 흘러가는 것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어젯밤 텐트 생활로 인해 세수를 못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어떤 사람은 발을 씼었다. 그리고 또 코펠을 씻고 채소를 씻으며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오늘의 요리는 돼지 불고기다. 신장 사람들의 대부분이 회교도이어서 돼지고기를 구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사실 돼지 고기를 사기 위해 몇 사람이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녀 구해 온 것이었다. 또 누군가가 젓갈을 준비하여 즉석 배추 김치를 담근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빠질 수 없는 맥주와 더불어 시원한 강바람이 몸을 한 바퀴 돌고 지나갔다. 강바람은 이내 시원했다가 서늘해졌다. 그러다가 불이켜지자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잠자리였다. 10시가 넘으니 추위가 서서히 옷 속으로 들어오더니 피부를 타고 들어왔다. 나는 침낭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도 버스에서 자려고 했다. 그런데 "큰 형님은 독방 침대에 주무셔야 한다"면서 우리 둘을 위해 쳐 놓은 텐트를 가리켰다. 사실 우리는 비록 어젯밤 버스 속이 불편하기는 했어도 그런대로 만족해하면서 하룻밤을 보냈었다. 아침에 버스에서 내리면서 우리는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은 버스가 생각보다 좋다. 좋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덩달아 우루루 버스에 몰려들터이니, 버스 생활이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자." 그런데 우리에게 독침대를 준비해 놨다니, 벅벅 우기고 버스로 간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텐트에서 자기로 했다.
밤 12시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얼마나 추운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내가 가져간 모든 옷을 입었다. 위에 런닝셔스 1개, 반팔 티셔츠 2개, 긴 와이셔츠 2개, 그리고 가을용 얇은 파카 등 모두 6개를 입은 셈이다. 바지는 두 개를 입었다. 그러나 바닥에 있는 깔개는 얇았고, 덮을 이불이 없으니 보온을 하려는 모든 노력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뛰기라도 해볼까 했으나, 풀이 우리 키만큼 자라 있고 철조망이 사방에 쳐져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들부들, 부르르 떨었다. 시간은 가지 않고, 몸은 오그라들고, 강가의 한기는 뼈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내를 끌어 안았다. "그대, 이게 얼마만인가?" 아내를 부등켜 안고 잠을 자는 것이. 아내도 가져온 옷은 모두 입은 상태라 마치, 눈 사람에게 여름 옷 걸쳐 놓은 듯, 옷 위로 차가움이 스며 나왔다. 우리는 번데기 말아 놓은 듯, 새우 두 마리가 등을 구부리고 사랑 싸움을 하는 듯, 그야말로 결혼 주례사가 말하는 일심동체가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온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이빨이 오도독 소리를 냈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마 다시는 나를 따라서 여행을 안 오겠다고 하겠구나! 아내는 이빨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여보, 다음에는 좀 더 추운데 가서 텐트치고 자보자." 전대 미문의 내 인생 최대의 개그 콘서트가 한밤 중 부얼진 강가에서 열리고 있었다.
(2010년 9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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