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11부: 다시 우루무치, 그리고 천산 천지로
8월 10일이다. 8월 14일 한국으로 떠나기 되어 있으니 내가 앞으로 머무를 기간도 3일 남았다. 오후 3시 카나스를 출불하여 우루무치로 향했다. 하늘은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며칠 전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부얼진까지 가야 한다.
부얼진까지 길은 그저 단순히 사막으로 둘러싸인 길이다. 가는 차도 별로 없고 오는 차도 별로 없다. 사방이 조용하듯 버스 안의 사람들도 모두 조용했다. 중간에 잠깐 멈춰 옥수수를 사 먹은 것 이외에는 그저 평범한 그런 노정이다.
끝없니 펼쳐진 사막 지대를 오다가 부얼진 근처에 오니 초원지대가 나타나고, 해바라기 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표시다. 사막을 헤매이던 목마른 방랑자가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반가웠다. 지난 번에 정차한 바로 그 지점에 버스는 멈췄다. 사실 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적절한 시간 간격을 두고 화장실 앞에 정차하는 것이다.
정차한 곳은 바로 인민 의원 앞이다. 인민하니까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인민"이나 "동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상당히 좋은 단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 단어를 쓰기 때문에, 우리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인가 국어 교과서에 링컨의 연설 중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으로 번역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또한 어렸을 때, 우리는 어깨 동무를 하고 다니면서 "어깨 동무 씨 동무"라고 외치면서 골목을 휘젓고 다녔었다.
이와 같은 이유 또는 다른 이유로 단어의 의미는 변한다. 그러나 이런 단어가 다른 나라로 가면 그 의미는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컨대 우리는 중국에서 한자를 갖다가 썼다. 언제 한자가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한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올 때 그 의미를 지금도 우리는 그대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는 캐캐 묵은 몇 천년 전의 중국 한자이다. 하지만 모국어인 중국에서는 그 의미가 많이 변했다. 예컨대 성실(誠實)이란 단어를 우리는 "정성을 다하고 열심히 함"으로 사용하지만, 이 단어가 중국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음"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변하지 않은 중국의 고대 글을 배우기 위해 중국 학자들이 한국으로 배우러 온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부얼진을 떠나 동쪽으로 버스는 달렸다. 해가 기웃기웃 넘어 가려고 하자, 버스는 왼 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한 시간 달렸다. 그때가 오후 8시 40분이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우룬구후(乌伦古湖:오륜고호)다. 안내책자에 따르면 이 호수는 총 면적 827㎢의 호수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는 4개의 호수로 구성된다. 이 중 다하이쯔(大海子)인 부룬퉈하이(布伦托海)는 염수호이며, 남동부의 샤오하이쯔(小海子)인 지리후(吉力湖)는 면적 60㎢의 담수호이다. 약 20여 종의 희귀 어종이 서식하고 있다. 북쪽 연안의 모래사장에는 해수욕장 등 각종 오락시설이 마련되어 있다고 되어 있으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 호수의 동쪽인지 북쪽인지 불분명했고, 관광객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대에 대한 첫 인상은 사람들로 버림받은 호수라는 생각이었다. 길가에 나지막한 몇 채의 집이 있었으나, 정작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몇 채 없는 것 같았다. 산 아래에 늘어서 있는 집들은 반은 부서지고, 빛이 바래 있었다. 개는 여기저기 짖어대고 빗방울은 찬 바람과 함께 또다시 드문드문 날리고 있었다. 근처를 수소문해서 한 할머니를 모시고 그녀가 운영한다고 하는 호숫가의 몽고 빠오로 갔다.
우리는 몽고빠오 두 개를 빌렸다. 호숫가에 위치한 허름한 몽고빠오 안에는 이미 제 철이 지났는지 의자니 식탁이니 하는 것들이 너저분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한 쪽에 정리하니 몇 사람이 누워 잘 만한 공간이 생기기는 생겼으나 바닥은 축축하고 빗물이 들어와 엄섬한 분위기였다. 도저히 그곳에서 잘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것을 본 순간 나는 오늘 저녁은 버스에서 잔다고 마음 먹었다.
한쪽에 모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덜덜 떨면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카레라이스와 짜장밥 그리고 김치찌개를 준비했다. 마치 어둠을 뚫고 석탄을 캐기 위해 막장으로 들어가는 광부처럼 이마에 등불을 밝히고 요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영화배우처럼 멋있게도 보였다가,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요리학원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참을 더 바라보니, 타이타닉 영화에서 물에 빠진 사람들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장면이 떠 올랐다. 날이 추워서 인지 사람들은 맥주보다는 백주(고량주)를 선호했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의 술을 마셔서 없애 버리겠다는 막장 의지와 투지로 마시고 또 마셨다.
그때 갑자기 마지막 저녁 노을이 기적같은 환상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붉은 빛이 온 대지를 감싸더니 몽고빠오로 들어오고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파고 들었다. 모두들 분위기에 넋 놓고 있는 동안 "어" 하는 사이 단 2-3분 사이에 노을은 여우꼬리처럼 자신을 감추고 말았다. 추위와 바람과 비와 그리고 노을까지 합쳐져 우리가 인생에서 겪어야 할 모든 것을 단 몇 분에 다 겪는 그런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고 뭐고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차가 출발한지 일분도 안 되어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간밤에 비가 많이 와서 지반이 약해졌던 것이다. 모두들 내리고 몇 사람이 밀어도 버스는 헛바퀴만 돌았다. 운전수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밀었다. 여전히 헛바퀴만 돌다가 조금 앞으로 가더니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운전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만약에 차가 가지 못한다면 부얼진으로 전화하여 견인차를 불러와야 할텐데, 시간상 금전상 엄청난 손해가 날 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여기있다"고 소리쳤다. 마침 옆에 양어장이 있었는데, 양어장 가장자리를 시멘트로 만들어 놓았었다. 그 가장자리를 부셔서 시멘트 조각을 가져왔다. 자동차는 시멘트 덩어리를 부시면서 그것을 밀치면서 "쓰윽" 빠져 나왔다. 모두들 기뻐서 박수를 치고 춤을 춘 뒤에 남는 것은, 버스를 밀었던 자신들이 진흙 투성이가 된 것을 발견하는 일뿐이었다. 물로 씻고 풀에 문질러서 겨우 사람인지만 알아볼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이런 것이 오랜 추억으로 남는다고 누가 말했다.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상처로 남겠지" 내가 나에게 해 본 소리다.
그 이후 버스는 사막을 뚫고 계속 달렸다. 중간에 점심 먹은 것을 제외하면 그저 하루종일 버스만 탔다. 6시쯤 되었을까? 우루무치에 있는 천산 중 최고의 봉우리인 "보고다봉"이 바로 앞에 보였다. 한 여름인데도 만년설로 뒤덮인 보고다봉은 하늘에 닿아있다는 듯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산 전체가 훤히 보이는 곳에서 버스 좀 세워달라고 운전기사에게 말했지만, 고집 센 우리 운전기사는 달리고 달려, 모든 이들이 실망하기 적절한 전봇대 바로 앞에서 차를 세우고 말았다. 아, 최씨 고집 세다고 하지만 마(馬)씨고집 엄청 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마이티앤(麥田) 유스 호스텔이다. 홍산공원 근처에 위치한 이곳은 2인실, 4인실, 다인실 등이 있었는데, 우리는 부부라고 하여 특별히 2인실로 배정받았다. 안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이 따로 있고 침대도 두 개가 있어서, 지난 밤 버스에서 잠을 잤던 우리는, 이 방이 마치 최고급 호텔처럼 생각되었다. 홀에는 이미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술을 마시거나 컴퓨터로 채팅을 하고 있었다. 잠시 앉아 있다가 저녁 식사 장소로 갔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야시장이 모여있는 곳인 우위에화(五月花)로 갔다. 역시 입구에서 폭팔물을 가지고 들어가는지 가방 검사를 했다. 그리고 북쩍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지난 번 양꼬치에서 이번에는 양 바비큐를 시켰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음식보다도 맛이 있었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중에도 계속 잡상인들이 다가와서 과일을 사라, 휴지를 사라는 둥 집적거렸다. 지난 번에 한 번 이런 것을 잘못 샀다가 바가지를 된통 뒤집어 쓴 우리는, 두 번 다시 걸려들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무참히 그들을 무찔러 밖으로 내 보냈다. 근처에는 다른 마른 과일 특히 건포도 진열대가 있었는데 수북수북 쌓인 건과가 등불을 받아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신비스런 색깔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너무 맛있어 보였지만 그냥 지나쳐 왔다.
다음 날 봉고차를 대절하여, 천산(天山)의 천지(天池: 티엔츠)를 가보지 않은 사람만 천지로 갔다. 사람들로 들끓는 천산천지는 입장료를 받고, 또 케이블카 비를 따로 받는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천지로 가는 길이 S자를 여러 개 나란히 놓은 듯, 구불텅 거렸다. 그날따라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맑았고, 아침이라 그런지 약간의 운무가 보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약 10분간 올라가니 드디어 천지가 나타났다. 천지 표석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삼면이 깎아지른 듯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지는 위풍당당하고 장엄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저 멀리 맞은 편 쪽에 산과 산이 겹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눈에 덮힌 보거다봉이 면사포를 쓴 여인처럼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오늘따라 하늘의 구름도 내 이전에 보지 못한 구름이라. 뭉글뭉글 피어오르며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새하얀 솜털 구름은 순식간에 학이 되고 토끼가 되고 선녀가 되었다. 탁 트인 호수와 겹겹이 감싸고 도는 산 자락, 그리고 목화송이처럼 피어있는 뭉게구름 — 멋들어진 삼박자의 리듬이 내 가슴에 메아리쳤다. 이제 구름은 하늘로 뻗고 뻗더니 이내 자신을 불살라 한 줌의 하얀 재로 변하고 있다.
한쪽 무대에서는 민속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젊은 청년들의 힘찬 율동이 있은 후, 초록 옷으로 치장한 멋들어진 여자가 나와 알 수 없는 중국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중들은 가수와 함께 소리 지르고 박수 치며 스스로를 분위기에 빠뜨리면서 이 분위기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앙가슴을 치고 있었다.
한 꼬마가 있었는데, 원더걸스의 "Nobody nobody but you ~"를 부르면서 엄마를 따라가고 있었다. "아니 저것은 한국 노래인데"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아이는 바람처럼 날라서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때 바람처럼 보트 한 대가 S자를 그리면서 다가오고 있었고, 또 한 대가 저 멀리 어슴프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배가 만들어내는 물결은 사방으로 퍼지고 퍼져 호숫가에 출렁였고 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출렁거렸다.
물가 바로 옆에 전통복이, 작열하는 태양 빛을 받아 원색의 빛을 뽐내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한 번씩 입어보고 사진을 찍는다. 부부로 보이는 한 중년 남녀가 있었는데, 남자가 얼마인가 돈을 내고 옷을 빌렸다. 그런데 여자는 굳이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몇 번 더 여자에게 입어보라고 하던 그 남자는, 어쩔 수가 없었는지 자기가 그 여자 옷을 입었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저 멀리 달아나 있었다. 나는 남자가 취할 태도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저 만큼 달아나 있지, 카메라는 여자가 가지고 갔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옷을 벗어, 옷 주인에게 가지고 갔다. 주인이 뭐라고 말을 하자 성질을 냈다. 아마 내 생각에 "사진을 못 찍었으니 돈을 할인해 달라"고 했었던 것 같다. 거절 당하자 그는 옷을 땅에 내동댕이 치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호숫가를 걷다가 한 표지판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푸르싱싱한 녹초를 밟아주지 마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한국이라면 "풀을 밟지 마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밟아주지 마십시오"라는 말도 이상했다. "밟아 주세요"는 괜찮지만 "밟아주지 마세요"는 이상했다. 그냥 "밟지 마시요"가 더 적절한 말이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모국어가 한국어인 내가 느끼는 감으로 해 본 말이다. 언제 한국 어디에 가서 이런 말을 한 번 해 볼 것이다. "푸르싱싱한 녹초를 밟아주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볼 것이다.
호수 옆에는 아주 멋들어진 도교 사원이 있었다. 보통 도교 사원과 마찬가지로 긴 촛대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그 아래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기원을 하고 있었다. 대체로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안내자의 말을 들으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사원 입구에서부터 사원까지는 길 양쪽으로 열쇠고리처럼 생긴 빨간색 리본이 잘 장식되어 있었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타려고 약 30분간 기다렸다. 우리 옆에 아주 귀여운 아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그 아이의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너무나도 수줍은 그 아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더니 결국 두 눈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날 밤 숙소 근처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저녁 만찬이 있었다. 후어궈(火锅)라는 음식인데 중국 신선로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가지인 소스를 본인이 직접 가져다가 끓는 물 속에 고기를 익혀서 그 소스에 찍어 먹는다. 한 쪽은 맵고 다른 한 쪽은 맵지 않은 음식이다. 사실 한국 사람으로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단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 향 때문에 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고수나물(胡菜)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삭힌 홍어처럼 냄새가 지독해서, 웬만한 사람은 냄새를 맡기 힘들다. 그러나 이 고수가 없으면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베트남과 중국 사람이 좋아하는 채소인 것 같다.
우리 옆에 갑자기 Happy birthday to you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의 생일인 것 같은 종업원들이 와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Happy birthday to you."만 불러 댔다.
그들이 떠나더니 한 종업원이 밀가루 반죽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긴 밀가루 반죽을 땅에 대지 않고 늘릴 수 있는지를 자랑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1~2미터, 점점 늘어 나더니 땅에 닿을 듯 했다. 그러더니 옆으로 돌리고 위로 쳐 올려서 7-8미터는 됨직한 국수 사리를 쳇바퀴 돌리듯 돌려댔다. 그 모양이 마치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황진이가 부채를 잡고 무대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습과 흡사했다. 무대 위의 황진이와 젊은 청년의 자아 도취적인 밀가루 춤이 겹쳐 보이면서, 서서히 달아오른 취기와 더불어 우루무치의 밤은 단 하루만 남겨 놓은 채 쓸쓸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2010년 10월 2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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