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Korea

속리산 등산기 1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1. 11:21

 

 

 

속리산 등산기

 

 

여태까지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는 여러 번 갔어도 정작 속리산 등산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법주사에 처음 가 본 것은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먼 곳,  즉   금산에서 보은으로 차를 타고 갔던 흥분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말티 재를 넘어 갈 때, 끊임없는 갈지자(之) 길에 가슴을 얼마나 쓸어내려야 했는지 모른다. 법주사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 닿을 듯한 부처님 상을 보고, "불상을 저렇게도 높게 만들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깜짝 놀랐었다.

 

 

말이 나온 김에, 중학교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가는 경주인지 설악산인지로 수학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갈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수학 여행을 가지 않는 학생의 집으로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다녔는데, 금산읍에서 10리나 떨어진 우리 집에도 선생님이 오셔서 나를 수학 여행을 보내라고 하셨다. 그러나 왜 그런지, 아니 너무 당연하게도, 그 당시에는 먹고 죽을래도 돈이 없었다. 쌀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할텐데, 먹을 쌀도 없는데 무슨 쌀을 시장에 갖다가 파나? 그렇다고 집안 식구 누구 하나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하여튼 돈이라는 것을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수학여행을 나만 못 간 것이 아니라, 내 주위 다른 아이들도 못 갔기 때문이다. 아니, 나보다 더 가난해서 아예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도 주위에 수 없이 깔려 있었다. 중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큰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여튼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산은 다 가볼 수 없지만, 적어도 국립공원에 있는 산은 모두 가보자고 결심을 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있듯이 국립 공원은 심심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진대, 분명 그곳에 있는 산은 한국에 있는 다른 산보다 특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국립공원의 산은 지금까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이제 내가 가보지 못한 마지막 국립공원 속리산에 가는 것이다.

 

 

<2010년 10월 29일 아침 서울 강변역 근처의 하늘>

 

 

2010년 10월 29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희고 검은 구름이 아침 노을을 받아 붉으족족하게 떠 있었다. 상쾌한 마음으로 길 양옆에 펼쳐진 단풍을 보면서  차를 운전한다. 그리고 이런 날씨에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음을 한 없는  행복으로 여겼다.

 

 

내비게이션은 음성이나 괴산에서 보은으로 안내하지 않고, 중부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대전 근처에서 경부고속도로와 합류한 후, 다시 왼쪽으로 청원-상주 고속도로로 가라고 지시했다. "문의-회인-보은-속리산"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인데, 내비게이션은 "속리산  고속도로 출구"가 아닌 "보은 고속도로 출구"에서 나가라고 알려주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내비게이션 말대로 "보은" 고속도로 출구에서 빠져 나갔다.   

 

 

<등산 코스>

 

 

9시가 좀 넘어서 법주사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너무 일러서 인지 내 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동차를 볼 수가 없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사방을 한 바퀴 돌아보며,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 겨울에 속리산에 왔을 때, 눈이 많이 와서 나가지도 못하고 며칠을 묵었던 기억이 떠 올랐다. 온 천지가 눈으로 덮였는데, 해가 떠 올라왔었다. 이리저리 날리는 떡가루 같은 눈부신 눈을 보면서, 여기가 지상인지 천국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었다. 이제 그 추억을 고스란히 안고 속리산 등산을 시작한다.

 

 

<속리산 주차장>

 

 

법주사 매표소부터 법주사까지 조그만 개울이 흐른다. 그 물에 나뭇잎이 떨어져 하늘이 되비쳐 보인다. 물 속에는 하늘이 있고 나무가 있고 산이 있다. 나뭇잎으로 반쯤 덮인 곳도 있고, 아주 깨끗하게 하늘을 반사하는 곳도 있었다. 언젠가 백양사 앞에서 가을 빛을 머금은 개울을 보고 감흥에 젖어, 말이 되건 말건 시라고 생각되는 것을 읊어 본 기억이 떠 올랐다. 분명 그때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을임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정취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물에 비친 법주사 앞의 가을>

 

 

법주사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등산길이 시작된다. 조금 올라가면 왼쪽으로 호수가 보이고, 호수를 지나자마자 바로 왼쪽에 가게가 보였다. 가게 아줌마가 동동주 마시고 가라고 손짓한다. 아침부터 웬 술인가라고 생각하는데, 그 시간에 거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이 실제로 보인다. 음악 소리 또한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술은 오늘 저녁을 위해 남겨두고, 아줌마의 권유를 뿌리치고 앞으로, 앞으로 나간다.

 

 

약 50분 정도 평평한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문장대와 비선대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도 음식점이 있는데, 아침부터 막걸리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정말 우리 나라 사람들 술 많이 마신다. 돌아다녀 보면 아침부터 시골 수퍼마켓 앞에서 소주 잔 기울이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된다.

 

 

 

 

왼쪽으로 접어들어 10분 정도 가면 "이 뭣고 다리"가 나온다. 참으로 신기한 이름을 가진 다리다. 이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 공부한 중국어로 풀이하면 이렇다. 다리 오른 쪽에 "이 뭣고 다리"라고 쓰여있고, 왼 쪽에 "시심마교(是甚橋)"라고 되어 있다. 이는 현재 중국인들이 쓰는 보통화로 옮기면 是什么桥(스 션머 치아오)가 된다. "是=이다, 什么=무엇, 桥=다리"가 되고, 우리말로 옮기면 "<무엇인가> 다리"란 뜻이 된다. 맨 앞에 있는 是가 "이 시"이어서 "이 무엇고=이 뭣고" 다리로 번역한 듯하다. 그러나 적어도 중국어로는 "this what"이 아니라, "be what"이다. 아마 이 다리를 건너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뜻인 것 같다. 하여튼 나는 "중국어를 공부하니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우쭐해진 기분이었고, "좀 더 중국어를 공부하여 더욱 빛을 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기고만장하여 날뛰고 싶은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뭣고 다리>

 

 

<이 뭣고 다리 근처의 경치>

 

 

산의 중턱까지는 계속 아름다운 단풍으로 이어진다. 나의 등산 속도가 느려서 인지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계속 추월당한다. 등산객 한 사람이 왜 혼자 등산을 하는지 묻는다. "등산은, 여행은, 놀이는 당연히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 예상 밖으로 많음을 보고 나는 종종 놀라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 문화나 전통의 노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런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문화에 함몰되어서 그저 어제와 오늘과 내일 똑 같은 생활을 한다. 매일 똑 같은 생활에 만족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말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그 폭이란 하늘과 땅 차이도 넘는 것 같다. 이런 말이,  글을 쓸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나도 이런 생각에 빠져 있어서 다른 생각을 못하는 노예같은 작자인지도 모르겠다.  

 

 

<문장대 마지막 가게>

 

 

마지막 휴게소라고 써 붙여진 가게에서 국수를 시켜 먹었다. 옆에는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짧은 줄로 묶어 놓아서 움직이기도 어려운 그런 환경이었다. 개는 얼마나 스트레스에 쌓였는지, 아무나 보는대로 짖고, 앞에 있는 나무 토막을 사정없이 물어 뜯었다. 주인에게 알랑 방귀를 뀌며 주인의 품속에서 행복한 삶을 향유하는 도시의 개가 있고, 여기 개처럼 죽지 못해 사는 개도 있고, 컴컴한 토굴에서 햇빛 한 번 못보고 길러져 그냥 보신탕집으로 끌려가는, "개팔자만도 못한 개"도 있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평등한가 생각해 보게 된다. 철학적인 생각도 필요없이, 당장 하루 종일 신문지를 수거하고, 빈 박스를 수집해야만이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나는 아침에 중국어 학원에 가기 위해 을지로 입구역 지하철 역에서 내린다. 을지로 입구 지하철 역에는 거지가 득시글 거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G20 정상회의를 한다고 그곳을 아예 봉쇄해 버렸는데, 그곳에 있던 그 많은 집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또한 종각 역에도 매일 어떤 사람이 한 모서리에 누워서 잠만 잔다. 그러다 어느날,  그는 머리를 빗으며 계속 웃다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해 댔다. 나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여, 아마 그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을 때까지 종로 근처의 중국어 학원은 계속 다녀야 할 것 같다.   

 

 

<운장대 바위로 올라가는 계단>

 

 

문장대에 도착한 것은 12시 40분.  철 사다리를 따라 한 참을 올라가면, 정상에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넓은 공간이 나타나게 되는데, 50명 정도가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을 듯한 공간이다. 해발 1054미터라고 하는데, 어떻게 산 정상에 이렇게 높은 바위가 있으며, 바위 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수 많은 세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올라, 자신의 과거와 앞날을 생각했을 것인가? 끝없이 펼쳐진 대 자연의 정상에 올라 "나 이제 여기 올라왔노라. 보라. 나 여기 올랐노라."외쳐 댔을 것인가?

 

 

8

<문장대 바위 위의 정상>

 

 

<문장대 바위 위: 10미리 렌즈로 찍어서 광활한 느낌을 준다.>

 

 

<문장대에서 바라 본 주변>

 

 

<문장대에서 바라 본 주변: 천황봉 방향>

 

 

<신선대에 있는 가게>

 

 

천황봉을 향해 능선을 따라 가면서 계속 뒤를 보고 사진을 찍었다. 얼마 가지 않아 신선대라는 조그만 안내판이 보이고 어김없이 가게가 보인다. 마침 그곳에는 어떤 회사에서 온 듯한 젊은이 약 20명이 쉬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그곳에서 생수 한 병을 샀다. 값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바가지 씌우는 놈들은 잡아 가두어야 한다."고 몇 차례 말을 했다. 그가 얼마를 주고 물을 샀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물을 갖다 놓기 위해 세 시간 물을 지고 올라오는 수고를 그는 너무 얕잡아 본 것이 아닐까? 비싸다고 그가 비난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 물이 없었다면 그는 목숨을 잃지는 않아도 등산의 쓰라린 맛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신선대에서 내려오다가 보이는 장관>

 

 

<"차라리 날 죽여줘, 죽어도 못 걸어.">

 

 

한 참을 내려오다 보니 저 멀리 우뚝 솟은 바위가 보이는데, 어떤 사람은 임경업 장군 바위라고 한다. 피로를 견디다 못해 큰대자로 누워서 "아이구, 나 죽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피로가 밀려오고 무릎이 욱신거렸지만 지팡이로 버티고 걷는 중이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Please, take a photo"라고 했다. 그는 홍콩에서 왔다고 했다. 한국에 온지 3일이 되었다고 말한 그는, 팥죽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기 친구들은 아래에 있지만, 자기는 등산을 너무 좋아하여 혼자 쉬지 않고 올라왔다고 했다. 그는 자기 친구 몇 명과 함께, 안내책자를 참고로 무작정 한국에 배낭 여행왔다고 했다. "한국의 산하가 정말 아름답습니까?"라고 내가 물었다. "Sure, it is."라고 대답했다. 눈뜨면 보이기에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내 눈을 다시 맑은 물에 씻어야겠다.

 

 

<관음암 입구: 가운데 벽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철계단을 조금 내려오는데, 한 스님이 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옆에 넘어져 있는 안내판을 일으켜 세우며, 누가 자꾸 안내판을 뽑아 버린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조금 가면 좋은 경치가 있으니 가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따라 들어가 보니, 바위 사이에 좁은 길이 있었다. 길을 지나 조금 가니 컴컴한 굴 속에 물이 나오고 있었고, 곧 계단을 올라 위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위에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 관음암이라고 이름 붙여진 암자에 누가 있나 두리번 거리는데, 아까 나를 이곳으로 가보라고 한 그 스님이 내 뒤에 따라왔다. "여기가 스님의 절입니까?" 내가 물었다. "예, 여기 들어온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생활하십니까?" "예, 지나가는 사람들이 먹다 남은 쌀을 주기도 하고, 어떤 신도들이 주기도 합니다."

 

 

방 안에 있는 부처님 상에 삼배를 한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와 마루에 앉았다. 나는 그 스님과 한 참을 이야기했다. 그가 왜 거기에 왔는지, 거기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삶이 무엇인지 그런 이야기를 그는 스스로 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식 생각과 불교식 생각의 차이점을 자기 나름으로 논리 정연하게 펼쳐 나갔다. 나는 그의 생각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도대체 인간이 뭐길레, 그런 벼랑끝에서 머리 깎고 허름한 옷 한 벌에 만족하며 추운 겨울을 지낸단 말인가? 무슨 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삶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거기에 온 그 스님을 보면서, 정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관음암>

 

 

<관음암에서 바라본 아래 쪽의 탑>

 

 

 

내려오면서 이미 해는 서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지는 태양을 받아 마지막이 될지 모를 2010년의 가을 단풍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가게 마당에 펼쳐 놓은 우산 색깔이 주변의 가을 빛과 잘 어울려 펼쳐져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젊은 남녀 쌍이 우산 아래 앉아서 술 한 잔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이미 저런 때는 지났어도, 그 기분, 그 생각, 그 정신은 지금도 내 마음에 있다. 단지 세월이 가다보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 뿐 ...   

 

 

 

 

다시 법주사에 도착하니 오후 5시쯤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고  지는 태양이 속리산 정상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두둥실 흰 구름은 저녁 노을을 받아 붉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역광으로 보이는 부처님 상이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또 있었던가? 그저 위압적이고 무섭기만 했던 부처상은 자비로운 본래의 모습으로 내 마음을 훑고 지나가며 긴 여운을 남겼다. 참 삶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싯다르타도 저 저녁 노을을 보았을까? 이 우주의 크기를 지구와 같다고 했을 때, 지구의 크기는 모래알보다도 작은 원자의 크기만 하다고 한다. 지구가 모래알보다 작다면 그 지구 위에 있는 나는 도대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런 인간이 신이 어쩌고, 인생이 어쩌고 하는 것이 참 가소롭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죽어 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 천당이 어떻고, 지옥이 어떻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주차장에 오니 날이 어두웠다. 차를 몰고 주차장 근처의 동네를 빙빙 돌았다. 왜 이다지도 먹고 마시는 집에 많은지 모르겠다. 이 많은 사람들이 속리산과 법주사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을 보면 경치를 떠나서도 속리산은 대단한 산이며, 또한 관광이란 대단한 사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서 한 아저씨가 오라고 손짓을 한다. 가보니 바로 앞에 식당이 있었고 식당 위에 모텔이 있었다. 1박에 얼마인지 물으니 4만원인데 혼자이므로 3만원에 주겠다고 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또 한 사람이 명함을 건네 주었다. 노래방 명함이었다. "노래방에 오라구요?"라고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러면 술 한 잔 먹고, 여자 불러 신나게 놀다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꿈도 야무지군. 글쎄, 희망 사항일뿐." 속으로 말하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와 동동주 하나에 국물이 있는 어떤 음식을 시켰다. 노란 동동주가 노란 자기그릇에 담기어 나왔는데, 동동주 위로 바가지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순간 침이 꿀꺽 넘어가더니 내 눈에서 번쩍 불이 켜지는 듯 했다. 또 다른 순간,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것을 다 마셨다가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잔, 한 잔 들어가는 술은 멈추지 않고 계속 들어갔다. 한 투가리의 술을 순식간에 다 마시고 나도 모르게 밖으로 나왔다. 왜 나왔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나왔을 것이다. 내 발은 어떤 수퍼에 와 있었다. 조껍데기 술을 찾고 있었다. "조껍데기 술이 바로 동동주입니까?" 내가 물었다. "글쎄, 여기 조껍데기 술을 사다가 술집에서는 동동주라고 하면서 만원씩 받데요." 나는 조껍데기 술과 무슨 안주를 사서 손에 들고 거리를 걸었다. 조껍데기인지 씨껍데기인지 모를 묵직한 것이 내 손에서 덜렁거리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멀쩡하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흔들리는 듯 했다.

 

 

아까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은 노래방 명함은 어디 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길 옆 아무 노래방에나 들어가 보았으나 주인도 없는 적막강산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묵을 모텔 1층 식당으로 들어오는데, 식당 아줌마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보고 웃었다. 내 입에서 아무 말도 안 나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조껍데기 술을 따르고, 오징어를 물어 뜯어 오물오물 거리다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아마.

 

 

 

 

 

다음 날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바쁜 일도 없는 몸이라, 아무 데나 가고 싶은 데로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상주 쪽이 덜 가본 데였다. 상주 쪽으로,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작은 도로를 골라서 가기로 했다.

 

 

처음 나타난 것이 유명한 정2품 소나무다. 전에 듣기로는 다 죽어간다는 말을 들었으나, 여러 보약을 먹어서 인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사방에 지지대를 받쳐 놓았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다. 아마 몇 년 뒤에는 건강하게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가다보니 삼가 저수지라는 작고도 아름다운 호수가 나왔다. 산이 호수면에 되비쳐 고요한 가을 아침의 정취를 흠뿍 담고 있었다. 길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니 구병산 입구가 나왔다. 전에 금산 향우회 사람들이 등산갔다 온 곳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구병리에서 좌회전하여 차를 몰았다.  4년전에 구입한 나의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길이 뚫려있었다.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가는 길인 셈이다. 아름다운 풍경이란 이런 것이다!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이란 이런 것이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엷은 안개가 대지를 살짝 가리고 있었고,  가끔 가다 나타나는 동네의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옆에는 장작이 집채만큼 쟁여져 있고, 아직도 논에는 수확되지 않은 벼가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빨간 사과가 길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위로는 까치가 날면서 무엇인가 자기들끼리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우산리라는 마을이 보이더니 한약 특성화단지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오른 쪽으로 틀어서 한 참을 가다가 지도를 보고, 상주의 경천대라는 곳을 가보기로 했다.

 

 

 

 

가다가 보니 정기룡 장군 사당인 충의사가 나타났다. 잘 가꾸어져 경치는 아름다웠으나 경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CCTV 촬영중이라는 문구가 사방에 붙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마을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마당과 지붕에 풀이 무성했고, 을씨년스럽다 못해, 귀신이라도 곧 나올 것 같았다.

 

 

 

 

 

 

경천대 입구에 도착하니 주차 관리 요원이 수십 명은 되었다. 오늘 세계 대학생 승마대회가 열리니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상주시에서 승마장을 만들어 세계 대학생 승마대회를 하는데, 하필이면 경천대 옆에 승마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 오늘 승마 대회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나는 차를 멀리 두고, 약 1키로 떨어진 경천대 입구까지 걸어갔다. 오전 11시가 되었지만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서 근처의 중국음식점에 들리었다. 음식점 주인은 저 승마대회 때문에 손님을 하나도 받지 못한다고 투덜거렸다. 승마장을 만든 것도 엄청난 돈이 들었는데, 참가한 모든 사람에게 공짜 대접을 하고, 더구나 승마 대회가 끝나면 저 시설을 어떻게 할지, 상주시장보다도 더 걱정을 했다. 하염없이 담배만 피워대는 주인 앞에서 짜장면을 먹으니, 나도 체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더운 물 한 잔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경천대는 일종의 큰 공원이었다. 우선 전망대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시골 노인들이 전세 버스를 빌려 타고 왔다. 별로 높지도 않은 전망대를 갈까말까 망설이는 사람부터, 15미터를 남겨두고 숨이 차서 올라가지 못하는 노인까지 다양했다. 한 노인은 다른 동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망대를 10미터 앞에 두고, "아이구, 여기까지 왔으면 다 본거나 마찬가지지."하면서 그냥 내려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10미터를 못가고 그냥 내려갈까? 몇 년 뒤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에 올라가 사방을 훑어 보았다. 멀리 상주 시내가 보이고 낙동강이 굽이쳐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전망대 아래서는 어떤 사람이 수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곳의 역사와 지리를 소개하고 있었다. DSLR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눈에 보였다. 아마도 무슨 단체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다.

 

 

 

 

전망대에서 한참을 내려가면 낙동강가에 경천대가 나타난다. 강가에 우뚝 솟은 대(臺)다. 툭 터진 전망이 천하 일품이다. 유유히 강변을 감아 돌아가는 낙동강이 한 척의 배와 더불어 그야말로 그림 같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온다.

 

 

일단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명찰을 보니 서울의 강남에서 온 4대강 사업 반대자들의 모임에서 온 것 같았다. 바로 앞에서 모래를 퍼내는 자동차가 연락 부절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제가 여름 장마철에 왔었는데요. 모래를 계속 파냈는데, 비가 조금 왔어요. 그곳이 다시 도로아미 타불, 옛날처럼 되었어요. 조금 비가 와도 그런데, 비가 많이 오면 어차피 똑 같을텐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푸념을 한다. "다른 데 돈 쓸 곳도 많을텐데 이 정부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한 노인이 어디에서 바람처럼 나타났다. "왜 당신들은 정부에서 하는 일에 못 마땅해 합니까? 저기 모래를 파내고 배를 띄웁니다. 그리고 저기에 유원지를 만들어 사람들이 와서 놀고, 스트레스 풀고, 이 동네 사람들은 돈 벌고, 얼마나 좋아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놈들." 노인은 입에 거품을 품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강의 모래를 파내야 강산이 산다."라고 말하고, 또 한 쪽에서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다 한국의 산하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어떤 경우든 비 인간적이므로 안 된다."라고 말하지만, 한 쪽에서는 "때려서라도 올바르게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들도 모두다 교육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집이 없이 전세나 월세를 살더라도 쓸 것은 써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허리띠를 졸라 매고 먹고 싶은 것을 참아서라도, 집부터 사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모두 다 "잘 살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한다. "잘 산다"는 말은 그야말로 생각하기 나름인 것임에 틀림없나 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대시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돈과도 관계없는 것이 행복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을 위해 산다."

 

 

 

 

구불구불 이어진 낙동강을 따라 문경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한 없이 넓은 낙동강 바닥에는 물을 막는 보 건설 사업이 한창이었고, 트럭이 물 속의 물고기 수만큼이나 많았다. 강가에는 갈대가 끝 없이 펼쳐져 있었다. 차를 몰고 내려가서 사진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배추 값이 비싸서 중국에서 수입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배추밭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강에서 물고기를 노려보는 백로와 오리들이 한가롭다 못해 처량하게 보였다.  

 

 

 

 

 

본래 갈 곳도 없고 가지 않을 곳도 없는 이번 여행이었기에, 내 마음 내키는대로 가볼 작정이었었다. 상주를 거쳐 안동으로 그 다음 울진으로 갈 생각도 해 보았다. 아예 부산으로 빠질 생각도 해 보았고, 금산에 가서 친구를 만나 소주 한 잔 걸칠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파 헤쳐져 흉물스럽게 놓여진 낙동강을 보면서, 또 이것을 놓고 서로 다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냥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지 마음 한 곳이 뚫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거리 신호등에 막혀 잠시 대기하는데 어디서 "사과 사이소, 마"라는 소리가 들린다. 길가에서 아주머니가 사과를 팔고 있었다. 차를 대놓고 66개가 들어 있는 사과 한 상자를 35000원에 샀다. 알은 작지만 사각거리는 맛이 죽여준다는 말을 믿었던 것이다. "아주머니, 저기 써 있는 '달빛 사랑 축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옆에 보이는 현수막을 보고 내가 물었다. "왕건 촬영장에서 하는 축제인데예, 엄청 좋다고 하데예. 한 번 가 보이소." 아주머니의 말을 반신반의 하면서 어두워진 문경을 뒤로 한 채, 왕건 촬영장으로 차를 몰았다.  

 

<처녀 뱃사공>

1.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 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2.
낙동강 강바람이 앞 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 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2010. 11.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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