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2 "설악산 주변 자동차 여행"
다음 날, 즉 10월 24일 — 지난 밤 술에도, 불구하고 무슨 연유인지 5시 반에 눈이 떠졌다. 백담사 입구에 나의 차가 있으므로 그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외버스를 타야 했다. 캄캄한 밤 하늘에 술기운을 내뿜으며, 꼬리 잘린 용처럼 엉금엉금 반쯤 기어서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에는 이미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잡담을 하거나, 좌석에 앉아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속초에서 백담사행 버스는 6시 10분에 첫차, 그 다음이 9시에 있었다. 버스비는 7500원, 더구나 이 버스는 간성을 거쳐 진부령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6시 10분에 출발한 버스는 8시나 되어서야 백담사에 도착할 것이다.
어정쩡한 마음으로 버스표를 사가지고 나오는데, 한 택시 기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백담사까지 합승하여 일인당 8000원에 가자는 것이었다. 버스비와는 겨우 500원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이미 두 명은 확보되었으니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다. 단돈 500원 차이로 2시간에 갈 거리를 20분만에 가게 되는 기회이니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또 한 남자가 백담사로 간다고 했다. 그는 7500원에 가자고 했다. 운전수는 8000원을 내라고 했다. 500원 때문에 운전사와 승객의 흥정은 감정 싸움이 되었고, 결국 그 승객은 "에이, 드럽다"라고 말하면서 저만치 멀어져 갔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한 사람당 만원씩 내서 세 명이 3만원에 가게 되었다. 계산해 보면 결국 운전수는 2000원을 손해 보게 되었고, 나를 포함한 승객 세 명 또한 일인당 2000원을 손해 보게 되었다. 결국 손해는 8000원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득을 본 사람은 누구인가? 한 참을 생각해보니,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생떼를 쓴 손님은 500원의 이득을 보았고, 버스 회사가 7500원의 이득을 본채로 복잡하면서도 처절한 속초 새벽의 흥정은 끝나버렸다.
캄캄한 밤길을 택시는 시속 120키로로 달렸다. 너무 빨리 달려 간이 콩알만해졌으나 그렇다고 운전수에게 천천히 가자는 말이 안 나왔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내가 먼저 옆 좌석에 있는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약 20명 정도가 타는 경비행기를 타고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비행기 운임은 일인당 약 9만원, 왕복 약 18만원이다. 그들은 내가 등산한 코스 즉, 백담사-오세암-마등령-설악동 코스를 등반할 예정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설악산 등산을 하려면 교통비만 최소한 20만원, 그 다음 숙박비와 식사비가 든다. 이것저것 더하면 30-40만원이 기본 경비인 셈이다. "설악산 보기 위해서 너무 경비가 많이 드는 것 아닙니까?"라는 나의 말에 그들은, 그래도 비행기가 있으니 천만다행이지 버스로 온 다면 몇 시간이 걸릴지,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말을 했다.
<다음 날 새벽: 백담사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서 있다.>
백담사 입구에 도착하니 6시 반쯤 되었다. 백담사 가는 첫차가 7시인데 백담사행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의 줄이 몇 바퀴 돌고돌아 밖으로 나와 길게, 길게 늘어져 있었다. 7시나 8시, 아니면 그 뒤에 도착할 서울에서 올 사람들이 몇시에나 백담사행 버스를 탈지는, 전혀 관계도 없는 내가 오히려 더 걱정이 되었다.
<10월 24일 코스>
6시 반에 한계령으로 향했다. 미시령보다는 한계령이 훨씬 한가롭다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양양으로 가기보다는 직접 속초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계령에 도달하니 이미 주차장이 만원이어서 주차할 공간이 없다. 뿐만 아니라 정상 근처는 완전히 주차장이었다. 차를 몰고 계속 아래로 내려오다가 오른쪽 필례약수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여기에도 차들이 길 양쪽으로 주차해 있어서 겨우 차 한 대가 통과할 수 있는 공간만 남아 있었다. 그 빈 공간을 이용하여 찌개를 끓여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계령: 필례 약수 가는 길에서 바라본 것임)
<필례약수>
필례약수에 도착한 것은 아침 8시 50분이다. 약수 좀 떠 가려하였으나 한 사람이 물통을 무더기로 가져와서 물을 뜨는 바람에 물뜨는 광경 좀 구경하다가 근처의 단풍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의 단풍이 절정이었고, 아직 단풍이 덜 든 곳이 듬성듬성 보였다. 개울가 단풍나무 아래서 캠핑용 자동차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이 보였고, 그 옆에서 햇볕을 쬐는 사람도 보였다. 하늘은 청명하기 이를데 없고, 필례식당 은비령이라는 식당이 아침 햇살을 받아,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저것이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리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가을 단풍으로 눈을 씻은 후, 돌아갈 코스를 잠시 생각했다. 남전리를 경유하여 홍천, 그리고 양평으로 해서 서울로 갈 생각을 했다.
하추리(지도의 C 지점)에 오니 먼 곳의 산이 너무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다리를 건설하고 있던 한 사람이 다가와 나의 사진기를 만져보자고 했다. 만져보게 했더니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그도 왕년에 카메라로 사진 좀 찍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200미리 렌즈가 달린 카메라에 눈을 갖다 대고 여기저기 찍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러면서 이 길로 가지 말고 다시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넘어진 나무 군락"이 있으니 반드시 거기 가서 사진 찍고 가라고 했다. 나는 여기까지 온 마당에 다시 돌아가기는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자동차의 길을 막고서는, 돌아가서 반드시 넘어지는 나무 군락을 보라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 하겠다고 말하니 자동차의 갈 길을 허락하는 것이 아닌가? 별꼴 다 본다.
마침 그곳에 포도 열매와 아주 비슷한 큰 나무가 있었는데,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웬 나무에 포도가 달려있는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라는 그의 말에 고맙다는 말을 하고, 넘어진 나무 군락으로 향했다.
<모양은 포도이나 실제는 나무>
<넘어지는 나무>
과연 그의 말대로 넘어진 나무 군락이 나타났다. 무슨 나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기운 나무도 있답니다."라고 말하는 듯, 너나 가릴 것 없이 넘어져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으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와 덩달아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떠난 후, 카메라를 들고, 산 밑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마침 집 한 채가 나타났는데, 집의 진입로 왼쪽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고, 오른쪽으로 저 멀리 자전거 두 대가 놓여있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이런 사진을 본 적이 있어서, 사진을 찍으면 멋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꽃길에 싸인 집 마당>
남녀 두 아이가 있었는데, 불도 없는 아궁이에서 무엇인가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땅만을 보고 걷고 있고, 여자 아이는 오빠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꽁무니를 잡고 따라다녔다.
그집 벽에는 이상한 시커먼 자루 같은 것이 사방 벽에 걸려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아이들은 땅만 쳐다보았다. 별 집이 다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안에서 또 다른 아이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즉시 안으로 들어가 방을 살펴보았으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참 이상도 하구나! 혹시 귀신에 홀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자동차가 있는 큰 길로 나왔다.
<수줍어 하는 아이들>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하늘: 귀둔리에서 진동리로 넘어 가는 새로 난 길>
차를 몰고 가다가 왼쪽에 점봉산 귀둔리 마을이 보였다.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시골 마을치고는 좀 큰 마을인 듯, 음식점도 보이고 교회도 보였다. 여기서 아침 식사를 할까하다가 망설이는 사이 차는 앞으로 계속 달렸다. 끝 부분에 도착하니 한 노인이 약수를 마시고 있었다. 노인의 말대로 정말로 좋다는 약수 한 통 약 20리터를 퍼 담아 차에 싣고 자리를 떴다.
온 길로 가지 않고 새 길로 간다는 것이 어쩌다가 지도상에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의 대부분은 완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공사는 진행중이었고 내 차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점봉산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무엇보다도 그 하늘이 푸르름이라니! 더 이상 파랄래야 파랄 수가 없는 그런 가을 하늘이었다. 10미리 렌즈로 찍으니 어림잡아 120도 정도되는 광각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하얗다 못해 푸르름을 머금은 듯이 보였다. 먼 곳에 노랗게 물들어가는 원뿔 활엽수가 "나도 단풍이요"라고 외치는 함성이 나의 고막을 뚫고 뇌리를 때린다.
계속 가니 진동 계곡이 나타났다. 조침령으로 가는 길이요, 근처에 방동약수가 있다. 지난 번 여름에도 속초에서 이 길을 통해 집으로 간 적이 있다. 인제의 기린면을 향해 달린다. 가다가 길가에 꽃이 너무 아름다운 집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식당이었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집이었으나 길에서 보이는 반대쪽에 넓은 마당이 있는 춘천 막국수 집이었다. 12시가 되었는데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서, 막국수를 시켰다. 지금까지 먹어본 집 중에서 가장 맛있는 집으로 기억되는 그 집은 418번 도로의 오류동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런 맛있는 집에 왜 그리 간판이 허름한지 물었다. 주인은 한 번 온 사람은 꼭 오기 때문에 손님을 끌어들이는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돈 버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는 말로 들려서, 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31번 국도를 따라 인제 쪽으로 오다가 노전동, 봉덕동이라고 팻말이 붙은 마을이 있어 들어가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지도상의 F 지점). 좁은 마을길로 접어들어 산모퉁이를 돌자 사람들이 감자를 캐고 있었다. 옛날처럼 호미로 감자를 캐는 것이 아니라, 경운기로 땅을 파 뒤집으면, 이삭을 줍는 형식으로 감자를 주워 박스에 담고 있었다. 나의 200미리 백통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던 한 농부가 나보고 사진 작가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간단히 끝났을 것을, 괜히 아마치오 사진 작가라고 했다가,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묻고, 내가 횡설수설 대답을 하고 어영부영 그러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나는 부모님이 편찮아서 빨리 가봐야겠다는 참으로 엉성한 이유를 대고 그곳을 빠져 나와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인제군 봉덕동>
얼마를 가니 더 이상 차가 들어 갈 수 없는 곳에 멈추게 되었고, 바로 옆에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다. 한 할머니가 깨단을 운반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이곳에 사시는지, 혼자 사시는지 물어도 나를 한 참 바라보고는 다시 일을 하고, 또 한 숨을 쉬다가 또 일을 했다.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기 보다 그 노인의 처지와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던 나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하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
<인제군 원대리>
"원대한 꿈, 원대로 펼치는, 원대리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다. 원대리 마을을 통과하여 왼쪽으로 들어가 정자리 고개를 넘어 인제군 남면으로 가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 생각을 바꿔 원래대로 남전리로 향했다. 원대한 꿈을 펼칠 어떤 곳이 없나 하고 가고 가다가 마침내 간 곳이 "동아실"이라는 곳이었는데, 하필이면 인제군 공동묘지였다. "아이구 원대한 꿈 펼치려다가 원귀를 만나 원망스러운 일만 생기는구나. 차라리 원두커피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계곡을 빠져 나왔다.
<소양호에서 양구까지>
남전리에서 나오니 새로 생긴 인제 38대교의 모습이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38대교는 2009년 10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1년 전에 완공된 것이다. 인제38대교가 들어선 인제 남면 부평지역은 한때 인제군 최고 번화가로서의 화려한 시절을 누렸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양강댐의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산골마을인 고향을 떠났고 이들이 누리던 삶의 터전은 소양호의 물속으로 그 모습을 영원히 감추어 버렸다고 한다. 지난 73년 소양강 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인제군 등 3개군 6개면 38개리 일부 또는 전부가 소양호 물속으로 잠겼다는 것이다.
인제는 한때 6만7000명이던 인구가 최근에는 3만2000명선으로 감소해 겨우 군(郡) 체면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인제군 인구의 절반이 넘는 주민들이 조상의 뼈를 묻고 자식의 태를 묻으며 대(代)를 이어 가꾸어 오던 문전옥답을 수장시키고 낯선 타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그 당시 강원일보는 전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덧붙이고자 한다. 앞으로 얼마 안 있으면 부산에서 거제도를 잇는 도로가 곧 개통된다고 한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의 가덕도에서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구간을 연결한다고 한다. 부산에서 거제도까지 140km에서 60km로 줄고, 시간은 3시간 30분이 걸리던 연결거리를 40분 대로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전에 TV에 한 어민이 나와 큰 한 숨을 쉬면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전에는 관광객이 배를 타고 와서 하루고 이틀이고 자다가 갔었는데, 이제 이 다리가 완성되면 모두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가 버릴 것이고, 아무도 배는 타지 않을 것이니, 이 근처 어민은 모두 굶어 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그 어민이거나, 우리 부모님이 그곳 어민이라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일이다. 개발의 이면에 속타는 이 사람들을 위로해 줄 방법이 없을까?
<인제 남전리와 양구를 잇는 "인제 38대교">
<소양호>
양구군 관대리를 지나 양구읍으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소양호에 비치는 산이 대칭을 이루면서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내뿜고 있었다. 먼 곳에서 고기 잡이 배가 소리 없이 물결을 뒤에 끌고 달려온다. 순간 던져진 어망의 물결이 사방에 퍼지면서, 지는 햇빛을 받아 찬란한 석양을 난반사하고 있었다.
<양구 파로호>
파라호에는 몇 년 전에는 없던 다리가 생겨 사람들이 그 다리 위로 어딘가 가고 있었다. 한반도를 닮은 섬이 있다는 것이다. 그 섬보다는 그 섬으로 가는 길이 아름다웠고, 하늘의 구름을 반사하는 호수물이 더 아름다웠다. "고색창연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리는 그런 호수물이다. 몇몇 젊은이 쌍과 휴가 나온 군인들이 헤적거리며 다리 위를, 그리고 한반도 섬 위에서 걷고 있었다.
나는 이 땅이 정말로 한 반도 모양으로 보이는지 보기 위해 잘 보인다는 전망대로 향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 불을 켜고 차를 몰았다. 전망대라고 하는 곳은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찬 바람만 휑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반도 섬은 정말로 한 반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른쪽이 한 반도의 남쪽이요, 왼쪽이 북한 땅이다.
(한 반도 모양이 잘 나타난다. 인공섬인지 모르지만 제주도도 보인다.)
가던 길이나 가보자고 양구읍 공수리, 월명리로 향했다. 그날의 마지막 붉은 빛이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호숫가를 배경으로 멋있게 보여야할 저녁 노을은 길가의 나무에 가려 호수인지 어디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도 가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월명리를 향해 가면서 춥고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마치 전투기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닥쳐왔다. 그 순간, 목적지도 없이 가고 있는 내가 한 없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간다고 해도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이다. 갑자기 "문패도 번지 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쿠려"라는 노래가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노래가 반도 끝나기 전에 그 다음 가사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처음부터 다시 부르고 또 다시 불렀다. 마치 끝 없는 사막 한 가운데를 돌고 도는 길 잃은 방랑자처럼,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깊은 산 속을, 나는 그렇게 차를 몰고 달렸다 — 칠흑같이 어두운 달도 별도 없는 그 밤에...
문패도 번지 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 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쿠려
능수버들 채질하는 창살에 기대여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애절쿠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번지 없는 주막" 1절: 배호, 2절: 나훈아를 반반씩 합성했음.)
(2010년 11월 1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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