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China

중국 시솽반나-라오스-방콩 2 "쿤밍에서 위엔양까지"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1. 15:14

 

 

시솽반나란 어떤 곳인가?

 

 

시솽반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시솽반나가 어떤 곳인가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의 행정구역은 "한국-충청남도-금산군"과 같은 체계로 되어있다. 중국의 경우, "중국-운남성-시솽반나주 - 징홍시" 과 같은 체계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운남성과 "징홍시" 사이에 다른 행정구역 하나가 더 들어가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운남성 자체가 우리나라 면적보다 넓기 때문에 그 사이에 "주"를 하나 더 둔 것이다. 시솽반나주의 공식 명칭은 위의 지도에 나와있듯이 "시솽반나다이족자치주"이다. 시솽반나주의  면적은 한국의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다. 중국에서 유일한 열대지역으로 남쪽으로는 라오스와 미얀마와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시솽반나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내가 배운 중국어 발음으로는 "시슈앙반나"가 원음에 더 가깝다.

 

 


 

 

 

시솽반나, 라오스, 캄보디아 여행기

 

제 2부: 얼마나 멀고 먼지 그리운 징홍은

 

 

녹춘에 가려면 녹초가 되어야 하고, 강성에 가려면 강성 노조지부장 같은 불굴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징홍은 징을 치며 흥얼대며 가는 곳이 아니라, 징홍은 징징거리며 홍역을 치루듯이 가야하는 곳이다.   

 

 

여행이란 집을 떠나는 것 자체이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여행도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2011년 3월 12일, 13일 우리는 꼬박 시외버스 속에서만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치자면 대전보다 조금 더 먼 길을 거의 20 시간에 걸쳐서 갔다. 2시간에 갈 거리를 10배나 걸려서 간 것이다.

 

 

버스는 1-3분에 한 번씩 여지 없이 급 커브를 휘감아 돌았다. "어" 소리를 내면서 앞 좌석을 잡으면, 그 팔의 힘이 빠지기도 전에, 또 다른 방향으로 힘을 주며 "어" 소리를 내야했다. 하여튼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길을, 출고된지 수십년도 넘었을 버스는 귀신처럼 알아서 달렸다.

 

 

P형은 징홍에 도착한  다음 날, 아예  밖에 나오지 않고 하루를 호텔에서 쉬었다. 나중에 이유를 들어보니, 얼마나 차멀미가 심했는지, 이러다가 한국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식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비행기는 어떻게 되고 등등 , 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있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볼까 생각하다가 참고 참았다고 했다. 그때 또 한 번 시솽반나의 지신(地神)이 외치는 소리 들렸다. "니덜이 시솽반나의 산길을 어떻게 보고 감히 도전을 해, 고이한지고."

 

 

위엔양에서 징홍으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다시 쿤밍쪽으로 돌아가서 좋은 도로를 타고 "건수"를 거쳐서  "보이시"를 경위하여 가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옆길로 빠져 "보이시"를 거쳐서 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택한, 힘들지만 짧은 길을 택하는 방법이다. 하여튼 우리가 택한 방법은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원히 추억에 남을 방법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 그런 길이었다.

 

 

우리가 이 길, 즉 "위엔양 - 녹춘 - 강성 - 징홍"을 택한 이유는, 출발 전날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길이 있으니 한 번 가보라"라는 말을 듣고 별 생각없이 택한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다. 우리가 앞으로 갈 시솽반나, 라오스, 방콕까지의 노정은 안내자 KC를 포함한 나머지 7명, 그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었기에 그 만큼 호기심이 갔고, 또 일말의 불안이 도처에서 우리를 엄습하고 있었다.

 

 

12일 아침 날이 밝기를 기다려 위엔양 주차장으로 갔다. 이미 우리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좌석이 차 있었다. 용감한 여자 차장과 중국인들이 무슨 말이 오가더니 결국 뒤에 앉아 있던 여자 두 명이 내려야 되었다. 몇 사람은 가운데 통로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그러자 통로에 앉은 사람과 차장이 무슨 말이 오가더니 차장이 얼마만큼의 돈을 내주는 것으로 보아, 통로에 앉아가는 사람에게는 몇 푼인가를 돌려주는 것 같았다.

 

 

10미터 앞을 내다보기 힘든 길을 운전사는 몸을 휘청거리며 달렸다. 코너를 돌 때마다 경적을 울리더니 나중에는 그냥 달렸다. 앞이 보여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장님이 경험과 직감에 의해 길을 가듯, 그렇게 차를 모는 듯이 보였다. 커브가 하도 많아 앞에서 오는 차와 부딪칠 뻔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앞에 큰 트럭이라도 가면 왼쪽으로 나왔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차 때문에 다시 트럭 꽁무늬에 붙고, 또 나왔다가 다기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추월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창밖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안개, 안개, 안개였다. 문득, 현미인지 일반미인지 어떤 가수가 불렀던 밤안개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밤 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 거리,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 안개,

님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나는 간다.

 

 

임 생각에 하염없이 안개 속을 걸어간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을 걸고 가슴을 졸이며 징홍을 찾아간다.

 

 

밤안개가 가득히 답답한 이 산길,

낮이 되어도 온통 무심한 이 안개,

궁금함에 징홍 찾아 헤매는 이 마음,

해가 지도록 하염없이 나는 간다.

 

 

 

 

지도상으로 "라오멍"이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차가 나가지를 않았다. 가는 차와 오는 차가 좁은 길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장날인지 모르지만 좁은 길 양쪽으로 사람들이 득시글 거리며 무엇인가를 팔고 있었다. 이방인은 거의 찾아가지 않을 그런 작은, 우리나라의 "읍" 정도되는 곳이었다.

 

 

아주머니들이 채소 몇 포기 갖다 놓고 팔리기를 기대하며 "안개 걷히기를 기다리는 현미처럼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품을 하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졸고 있었다. 앞에 있는 물건을 다 판다고 해도 한국 돈 2000원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설령 내가 채소를 사주려고 해도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줌마들 중에서 누구의 채소를 사줘야 한단 말인가? 피차간에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이다.  그러지 말고 2-3명이 팔고, 나머지는 뒤에 가서 쉬고 낮잠이나 자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것이 그들의 생활 방식인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한편 생각해보니, 그들은 돈 벌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심심해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좌석 근처에 5명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대부분은 담배를 계속 피워댔으며, 어떤 젊은이는 우리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서는 차마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담배 개피를 손에 잡았다가 귀 뒤에 끼웠다가 하면서 안절부절 했다. 어떤 젊은이는 다른 사람이 기침을 하건 말건 계속 담배를 피워대고 침을 내 뱉었다.

 

 

이들은 녹춘에 도착하기 직전에 내렸는데, 버스 위에서 자신들의 짐을 내리는 장면이 마치 영화촬영을 하는 듯 멋들어지게 보였다. 위에서 집어 내리면 중간에 선 사람이 땅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한 사람이 바닥에 짐을 쌓았다.

 

 

그들이 내리고 차가 출발하여 채 10분도 못가서 중국 공안의 검열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몇 사람 찍어서 검사를 하고, 우리의 여권은 모두 가져가더니 한 참이나 되어서 돌려주었다. 검열을 기다리면서 생각나는 것은, 아까 내린 젊은이들이 검열을 피해서 미리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12시 30분 도착 예정인 우리 버스는 1시가 넘어서 녹춘에 도착했다. 우리를 기다렸다가 출발 예정인 녹춘발 강성 버스도 이미 30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녹춘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했던 우리는, 점심은 고사하고 숨도 돌리지 못하고 강성행  버스를 타야만 했다.

 

 

<녹춘에서 원주민이 걸어가고 있다.>

 

 

아담한 녹춘 시내를 버스가 빠져 나온다. 아마 우리 나라의 읍보다 조금 작고, 면보다는 조금 큰 그런 규모의 도시다. 녹춘이나 강성, 이런 지명을 보면서 중국인들이 도시 이름은 참 잘 짓는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녹춘(綠春: 뤼춘)이라. 정말 어디를 가나 녹색의 봄인 도시다. 강성(江城: 지앙청)이라. 밤에 도착해서 밤에 떠난 도시라 잘 모르지만, 강과 성이 있거나, 강 모양이 성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한자는 배우기는 어렵지만 일단 배우고 나면 기가 막힌 글자다. 글자 자체에 뜻이 있기에 사전이 별로 필요없는 글자다. 글자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어서 글자만 보면 그냥 그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세계에서 글자에 뜻이 있는 글자는 한자(漢字)밖에 없을 것이다.

 

 

 

 

차가 얼마를 가더니 으슥한 모퉁이에서 멈췄다. 서 있던 아저씨 한 명과 아주머니 한 명을 내리라고 했다. 그러더니 버스는 한 참을 달려 가서 멈추고 손님을 내리게 하고, 아까 내려주었던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원보다 더 많이 태우고 검문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을 피해가는 방법이다.  기다리는 사람도, 헐레벌떡 걸어오는 두 사람도, 아무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다시 버스는 출발했다.

 

 

나중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려서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멀었다. 그래서 검문소만을 태워주는 오토바이나 경운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중국인이 개발한 기막힌 틈새 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분도 서 있기에 힘든 버스 속에서 얌전하게 보이는 여인이 죽을 힘을 다해 의자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나의 배낭에서 깔개를 꺼내 여인에게 건네 주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깔개를 중국 여인이 버스에서 깔도록 배려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조금은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나의 깔개를 깔고 앉아 있는 여인>

 

 

한참을 가다보면 대흑산(大黑山)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겉보기에는 길가에 집 몇 채만 보였다. 그런데 운전수가 차를 길 옆에 세워두고 떠나지를 않는다. 한 참을 기다리니 버스 두 대가 와서 또 정차를 한다. 운전수들끼리 이야기하더니 돈이 건네진다. 세 차의 인원이 결국은 두 차로 해결되고, 버스 한 대는 빈 차가 되어 돌아갔다. 차는 정원을 초과하여 서 있는 사람이 많고, 앉아 있는 사람도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린다. 그래도 중국인 중 누구 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다.

 

 

대흑산에서 강을 하나 건너자마자 나타나는 비포장 도로는 흙먼지에다가 움푹패여 비틀 거리는 버스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용트림을 하면서 지나간다. 정말 심해도 너무 심하다. 대흑산에서 이게 무슨 일이냐? 가수 이미자는 육지가 너무 그립다는 "흑산도 아가씨"를 불렀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 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그러나 여기 대흑산에서는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기사는 작당하여 돈을 버는데

못견디게 괴로운 이내 육신을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대흑산 아가씨"

 

 

나는 흑산도 홍어에 탁주나 앞에 놓고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뜨거운 햇볕과 먼지를 감내하며 앞 의자를 움켜쥐고 신음할 도리밖에 없었다.

 

 

<강성의 조형물>

 

 

강성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점심도 먹지 않고 꼬박 11시간 버스를 탄 셈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길 옆 빈관에 짐만 맡기고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찾아도 식당이 없었다. 얼마 후 조그만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조금은 옹삭한 식당, 뿌연 어항 속에 이상한 물고기 몇 마리가 허부적 대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긴 대나무 통을 연결하여 코로 숨을 쉬는 물담배인지 뭔가가 몇 개 놓여있었다.

 

 

잠시 뒤에 초등학교 3-4학년으로 보이는 식당집 딸이 와서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았다. "총 한궈라이더(한국에서 왔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와" 하면서 놀라는 그 눈빛, 별 사람 다 있다는 그 표정과 얼굴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그 뒤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그 아이에게 주려고 가방을 뒤지니 아무 것도 없었다.

 

 

점심도 굶었겠다, 피곤도 하겠다, 밤도 되었겠다, 하여튼 그날 엄청나게 마시고 먹어댔다. 맛사지도 받았다. 맛사지를 하는 아가씨도 한국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대단한 흥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류 덕분에, 한류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는다.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을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라는 케네디의 말이 생각났다. 적어도 CD를 살 때, 정품은 사줘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13일 아침 7시에 출발한다더니 갑자기 6시 반에 출발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허둥지둥 짐을 꾸려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리 좌석만 남겨놓고 가득찬 버스.  엄청난 짐을 들고 메고 들어가는 우리를 중국 승객들이 호기심 있게 바라본다.

 

 

채 10분도 가지 않아서 버스가 멈추고 사람들이 내렸다. 알고 보니 기사 뒤에 있던 아이가 멀미를 해서 토해 버렸던 것이다. 운전수에게 토하고 운전수 좌속에도 토해서 이를 닦아 내야 되었다. 운전수는 휴지로 닦아 창밖에 아무 데나 버리더니,  밖에 나가 물을 길러다가 또 닦고, 걸레를 빨고 또 닦았다. 아마 20분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운전수나 손님이나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로는 중국인들은 "우리가 죽는 한이 있어도 불평은 하지 맙시다"라고 선서한 사람같았다.

 

 

<시외버스 안: 시도 때도 없이 먹고 죽 늘어선 쓰레기 통에 버린다.>

 

 

강성에서 징홍까지는 그리 나쁜 길은 아니었다. 자동차는 대체로 순탄하게 달렸다. 버스는 몇 번 더 사람을 태우고 내렸다. 산은 여전히 열대 우림으로 덮여있었고, 작은 개울이 우리를 따라왔다, 멀어져 갔다.

 

 

 

 

 

아마 같이 간 일행 중에 위에 있는 아가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계속 서 있다가 어느 지점부터 내 옆에 앉았던 이 아가씨는 우리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너무 기뻤다고 했다. 한국 가수 "비"가 온 것만큼은 안 되어도, 엄청나게 반가워했음은 틀림없다. "보이"에  자기 집이 있다는 이 아가씨는 본래 보이는 "쓰모"인데 보이차가 너무 유명하여 지명을 아예 "쓰모"에서 "보이(푸얼)"로 바꿔 버렸다고 했다.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에게 바나나와 무슨 과일 그리고 무슨 씨앗 같은 것을 사 주었다. 그녀에게 아무런 줄 것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같이 간 K형이 그녀 사진을 찍어 휴대용 프린터로 인쇄해 그녀에게 전달할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중간 지점 멍룬에서 점심을 먹었다.>

 

 

열대 식물원이 있는 "멍룬"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은 것이 2시 반. 이후로 버스는 고속도로를 타고 쏜살 같이 달렸다. 갑자기 좋은 길에다가 위에 언급한 아가씨와 또 다른 아가씨가 합세하고, 우리의 기분을 알았는지 운전기사가 쿵꽝거리는 음악을 틀어 주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와" 소리를 지르게 되었고, 버스 안에 있는 손님들이 깜짝 놀라 우리를 쳐다 보았고, 놀라는 그들을 보고 우리가 놀랐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리하여 길고 긴 징홍으로의 여행은 끝났다. 우리에게 과일을 사준 아가씨는 끝까지 우리를 안내하여 택시를 잡아주고 그리고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니 아무런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하고 보낸 것이 내내 아쉽다.

 

13일 오후 3시 30분, 징홍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는 말 한 마디만을 남기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내 방으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힘들었지만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경험을 한 하루, 그것이 12, 13일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2011년 4월 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