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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중국 시솽반나-라오스-방콕 4 "멍한, 멍라, 그리고 라오스로"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1. 16:21

 

 

시솽반나, 라오스, 태국 여행기 4부

 

"멍한, 멍라, 그리고 라오스로 "

 

 

김형, 우리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 뚜껑보고 놀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엔양에서 징홍으로 올 때, 일반도로를 이용했다가 희한한 경험을 한 이후로, 고속도로가 아닌 도로는 겁부터 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징홍에서 멍한(지도의  A지점)까지는 고속도로는 아니어도 길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멍한에서 고속도로를 타는 지점까지(위 지도의 A에서 B까지)의 도로 사정이 어떨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A - B 구간의 길이 나쁘다면 다시 징홍으로 나와야 하며, 그럴 경우에는 큰 짐을 징홍에 두고 멍한에 갔다가 다시 징홍으로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길이 좋다면 징홍에서 모든 짐을 가지고 멍한으로 가서 하룻밤을 묵고 A-B 구간을 이용해 멍라로 가면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고민과 이야기가 오가다가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되든 모든 짐을 싸가지고 멍한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2011년 3월 16일 아침. 호텔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내 책자를 보고 택시를 타고 남부터미널로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정보는 이미 옛날 정보여서, 남부터미널에는 멍한으로 가는 차가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반나 터미널로 갔습니다.

 

 

반나 터미널에서 멍한행 시외버스는 9시쯤 출발했습니다.  밖에 비는 계속 내립니다. 자동차는 시내를 빠져나가더니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란창강변을 따라서 느릿느릿 꼬불꼬불 지나갑니다. 그래도 위엔양에서 올 때보다는 아주 편한 길입니다.

 

 

버스 속에 50대로 보이는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창밖을 보거나 졸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시간 반 동안 단 1초도 쉬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운전수를 포함하여 누구하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 한 사람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육군의장대장의 "받들어 총" 목소리보다도 더 컸습니다.

 

 

버스는 10시가 조금 넘어서 멍한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방을 잡고 배낭을 호텔에 두고 바로 나왔습니다. 주차장에서 다이족 마을까지는 약 1키로 정도되는데, 우리를 태워갔던 시외버스 운전수는 한 사람당 1위엔(170원)을 받고, 정문앞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Lonely planet에는 입장료가 50위엔으로 되어 있는데, 이미 100위엔(17,000원)으로 올라 있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급변하는지, 한국에서 나온 안내책자를 들고 돌아다니면 맞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김형,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입장료 할인을 받아 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60세 이상은 50위엔, 60세 이하는 100위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거해라, 그것은 하면 안된다, 몇 시까지 어디로 와라,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해라, 돈을 아껴라" 등등 온갖 잔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저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잔소리 좀 들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사는 것은 지금 나이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하여튼 그날 이후로 "반표(1/2표)짜리는 저리 가시오, 반표짜리는 따로 노시오."라는 말을 골백번도 더 들으며 따라 다녔습니다.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들어가보니 마침 결혼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청에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앉아있고, 그 안쪽에 신랑신부로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잡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례처럼 보이는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신랑의 손목에 실을 감아주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시골 총각이 장에 가는 듯한 복장, 즉 안에는 T셔츠를 입고 밖으로는 콤비를 걸쳤습니다. 신부는 일반 예식장의 신부와 마찬가지로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를 했으며, 짙은 화장 냄새가 사방에 풍겼습니다. 신부는 젊디 젊었고, 신랑은 고생 깨나 한 듯한 그런 인상이었습니다. 신랑에게, "당신 저런 신부 얻어가는 것, 복받은 줄 아시오."라는 말을 중국어로 할 수 있었다면, 분명히 말했을 것입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2-3명이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고 있었는데, 유독 파란 눈의 한 외국 여성이  신랑 신부 바로 앞에서 다소곳이 앉아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신부보다도 더욱 신부다워 보였습니다.

 

 

 

 

 

밖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결혼식이 끝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각종 음식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하나 먼저 먹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결혼식장에 가보면, 식이 진행되기도 전에 미리 식당에서 자리를 잡는 것에 익숙했던 저는 이 장면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기왕에 잔치집에 왔으니, 우리도 축하금을 내고 다이족 음식을 먹어보자." 한 아주머니에게 말을 해보니, 그 아주머니는 신부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음식이 차려진 식탁으로 갔습니다. 음식 먹는 것을 바라보던 그 아주머니는 축하금을 줄 때는, "아무에게 주지 말고, 반드시 신부나 신부의 어머니를 주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조금씩 돈을 걷어 붉은 봉투에 담아 신랑신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아름다운 신부와 건장한 신랑이 용감하게 웃으며 걸어옵니다. 신부의 환한 웃음에 조금은 어색해하는 신랑, 한국에서 왔다는 여행객겸 축하객을 보고 놀라와 하는 그들의 모습, 모든 것이 신비로웠으며, 마치 제가 결혼하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KC가 신부에게 붉은 봉투를 건네줄 때, 우리는 모두 입이 닳도록 "꽁시, 꽁시"라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들은 "시에, 시에"를 연발하며, 마치 내 어렸을 적 설빔으로 검은 양복을 받아 기뻐하듯, 그렇게 즐거워했습니다.

 

 

다이족 음식은 우리가 먹기에 알맞은 음식이었습니다. 니끼하거나 기름기가 많은 음식이 아니라, 우리 입맛에 아주 딱 들어맞는 음식이었습니다. 고기 요리와 각종 야채 요리가 있었습니다. 넓적한 대나무 잎 속에 들어 있는 쌀밥은 마치 시루에 찐 찰밥 같아서, 조금씩 입으로 베어 먹을 때마다 대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쓰면서도 침이 넘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여튼 예정에 없던 전통 예식을 구경하고, 팔자에 없는 전통 다이족 음식을 먹어 본 것, 바로 그것이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태족원에는 여러 사찰과, 각종 기념품 가게, 식당, 공연장 등이 있었습니다. 마침 한 곳에 갔더니, 새(bird)를 온몸에 뒤집어 쓰고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손에 먹이를 들고 있으면 사방에서 새들이 날아와 손에 든 음식을 먹게 되고, 음식이 다 없어지기 전에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잔치집이 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본 것이 신부집, 지금 본 것이 신랑집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 저나 허리가 부러지게 먹은 후라, 음식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건듯건듯 맛 볼 것은 맛을 보고, 잔치에 온 사람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여기저기 거닐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물뿌리기 축제가 거행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음악에 맞추어 사방에서 입장합니다. 물가를 빙글빙글 사뿐사뿐 걸어 돌면서 분위기를 띄웁니다.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는 관광객은 분수대 주위에 설치한 천막 안에 있는, 비가 맞지 않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일 주스 하나씩 시키고 자리를 잡아 느긋하게 구경하려 했고, 눈 앞에 펼쳐질 기상천외한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에 아가씨들은 목욕탕 바가지 하나씩 들고,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허공에다 대고 물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물싸움은 상대가 있어야, 쫒고 쫒기면서 재미가 있을 터인데, 자기들끼리 분수에다가 물을 뿌려대니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들도 재미가 없었는지, 제풀에 꺾여 하던 짓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던 중 한 초록색 옷을 입은 여자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포즈를 취하는 겁니다. 카메라에 보이는 그녀는 초록색 나무를 배경으로 마치 청개구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씽긋 웃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여튼 저는 절벽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는 그녀의 가슴을 보면서 숨막혀 죽는 줄 알았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뿌리기 축제 뒤의 무대 공연)

 

 

 

 

 

 

다음 날, 17일입니다. 시솽반나의 지방도로를 다시 시험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바짝 긴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역시 실제로 현장에 가 봐야지, 아무리 온갖 추측을 해도, 추측은 추측일 뿐, 실제는 다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전세로 대절한 봉고차는 몇 군데 관광지를 둘러서 멍룬열대 식물원 앞에 왔습니다. 정말 모든 열대식물이 모두 있다는 하이라이트 명소라고 알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들어갈지 말지 다수결로 정했습니다. 결국 다수결에 의해, 이미 징홍에서 볼만큼 보았으니 그냥 가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번 여행 중 아쉬운 대목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어차피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으니 포기할 때는 깨끗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인지도 모릅니다.

 

 

 

 

멍라에 있는 붕기호텔(펑지호텔)에 도착한 것이 오전 11시 반경, 비는 억수같이 뿌렸습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맞이하는 아가씨가 한없이 예뻐보입니다. 호텔도 아마 지금까지 들어가 본 호텔 중 가장 깨끗하고 잘 정돈된 곳이었습니다. 비가 오건 말건, 기분이 거뜬합니다.

 

 

 

 

 

 

왕티엔슈징취(望天树景区:망천수경구)에 도착한 것이 오후 한시 반쯤 되었습니다. lonely planet에 따르면, 망천수는 영어로 Chinese parashorea라고 되어 있고, 현지인들이 "망천수"라고 부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나무의 특징은 빨리 자라고, 키가 큰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 망천수는 고유명사로 나무의 이름입니다. 실제로 숲에 들어가면 나무가 하도 커서 나무 전체는 볼 수가 없고, 줄기나 잎 중 하나만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찍힌 사진도 모두 줄기만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입구에 따이족의 속담이 있는데, 중국어의 도움 없이도 그냥 이해가 되는 글입니다.

삼림이 없으면 물이 없고

물이 없으면 경작지가 없고

경작지가 없으면 식량이 없고

식량이 없으면 생존할 방법이 없다.

 

 

 

 

 

 

 

여기에 유명한 출렁다리가 있습니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공중 다리를 건너보려고 이곳에 옵니다. 이 공중 다리는 높이가 약 40미터, 길이가 약 500미터입니다. 그런데 이 다리를 건너보려고 하니, 입장권을 보자는 것입니다. 입장권을 보여줬더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장할 때, 저는 경노표(30위엔, 약 5000원)을 사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정식표(약 1만원)를 주고 들어온 사람만 공중 다리를 건너보는 영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고, "돈 굳었다"하고 체념하고 말았습니다.

 

 

 

 

 

이 풍경구 안에는 배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설도 있었는데, 비가 와서 인지 흙탕물에  배 한 대가 청승맞게 떠 있었습니다. 몇 사람이 타고 가는 것이 보였는데, 별로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노란 부처상이 바라보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습니다.

 

 

다시 멍라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각자가 헤어져 자유시간을 가졌습니다. 저 혼자 우의를 걸치고 시내를 둘러보았습니다. 멍라 시내에도 여기저기 왕천수가 쭉쭉 뻗어 있었습니다.  잔잔한 건물들, 한가하게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트럭 위에서 비를 맞으면 북을 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신장에서 와서 신장식으로 양고치를 팔고 있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양념 고춧가루를 위에다가 살살 뿌린 양고치가 정말로 맛이 있었습니다. 작년 신장에 갔을 때 먹은 양고치는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뻣뻣했었는데, 이 사람이 파는 것은 정말 단물이 죽죽 입으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꼬치를 사먹으러 온 사람들이 "저 사람은 신장에서 왔다. 신장식 꼬치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멍라 지도를 사려고 책방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한 외국 여자와 책방 종업원이 무슨 이야기를 서로 하고 있는데 대화가 되지 않는 겁니다. 외국인은 영어는 할 줄 알아도 중국어를 못했고, 종업원은 중국어는 해도 영어를 못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들어보니 그 외국인은 라오스의 펑사리로 가는 길이 나와있는 지도를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영어와 중국어로 그럭저럭 통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난생 처음 2개 외국어로 통역을 해본 것입니다. 참 세상에 별이 다 많습니다.  

 

 

저녁에 안마를 받으로 갔는데, 무슨 기업형 안마시술소 같았습니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집인데, 그 작은 도시에 무슨 이렇게 큰 안마집이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자주 한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만, 이 사람들도 한국 사람을 만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 종업원이 저에게 말하기를 "한국에서 왔다고 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행운입니다."라고 말을 하더군요. 나올 때 1달러의 팁을 주었는데, 죽어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무전기를 든 종업원이, "그것은 한국인들이 감사해서 주는 돈이니 받아라."라고 말을 하니까 그때서야 받았습니다. 혹시 다음에 다시 시솽반나를 올 일이 있으면, 다른 데는 몰라도 저는 멍라에서는 며칠 동안 머무르고 싶습니다. 아담한 이 소도시가 저에게는 낯설지만 많이 와 봤었던 그런 곳처럼 푸근해지고 정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 18일입니다. 7시에 출발하여 소형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약 1시간 뒤에 모한에 도착합니다. 라오스와의 국경이 접한 도시여서 인지, 중국의 다른 도시와는 전혀 다른 이국적인 느낌이 짙게 묻어납니다. 우선 라오스 돈으로 바꾸라는 소위 딸라 장사들이 달라붙기  시작합니다. 중국돈 100위엔(17000원)을 바꾸니 라오스 돈으로 120,000 깁이 됩니다. 정신이 혼란스럽습니다.

 

 

1키로 되는 출입국 사무실로 걸어갑니다. 모두들 중국을 벗어나는 기분이 묘한 듯, 자꾸 뒤를 돌아봅니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 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새 봄이 오기 전에 잊어 버렸나. 고향에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나도 모르게 나훈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꾸 중국쪽을 바라봅니다.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 하고, 라오스의 새로운 도전을 우리는 또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모한>

 

 

출국수속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여권을 받아서 무슨 기계에 넣으면 출국 카드에 자동으로 모든 내용이 적히게 되고, 우리는 서명만 하면 모든 수속이 다 끝납니다. 밖으로 나오면 반대편, 즉 라오스 가는 길로 연결됩니다.  

 

 

<노란색 국경선을 넘기 직전>

 

 

몇 발자국 걸어가면 노란색 선이 나타납니다. 이 선이 바로 국경선입니다. 이 선을 넘으면 라오스 땅을 밟는 것입니다. 김형,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이렇게 쉽습니다. 우리도 백두산 갈 때, 여기 노란 색 선을 넘듯이 그렇게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가서, 자동차로 한 없이 달려야 백두산에 가볼 수 있는 것일까요? 통일은 먼 훗날 된다고 해도, 서로가 왕래할 수 있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제 생애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빨리 올 수도 있을 지 모릅니다. 김형,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 "짜요(加油)!"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2011년 4월 5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