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솽반나, 라오스, 태국 여행기 제 5부
"라오스 루앙남타에서의 1박 2일"
2011년 3월 18일 오전 9시 30분, 중국 라오스 노란 국경선을 넘어 라오스 땅에 발을 디뎠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니 지금 한창 건설중인 황금색 탑이 우리를 맞이한다. 중국과 전혀 다른 느낌의 라오스, 조용하고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중국이 경제대국이라면, 아직 한참 먼 미개발된 라오스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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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입국수속을 하기 위해 발을 멈춘 라오스 출입국 관리사무소가 마치 허름한 창고같은 인상을 준다. 줄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 아주머니 자꾸 새치기 한다. 내 차례가 되어 여권을 건네주고 사무실을 바라보니, 먼지가 3년이나 쌓인 듯한 컴퓨터 자판에 독수리 타법으로 열심히 내용을 입력하는 사무원이 마치 철공장 노동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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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속을 마치고 봉고차에 올라 루앙남타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라오스의 시골 모습이 보인다. 집이라고 할 것도 없고, 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건축물이다. 기둥 몇 개 세워놓고, 대충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깔개를 깔아 놓은 것이 전부다. 전에 라오스나 베트남에서의 전쟁 영화를 볼 때, 세트장이 너무 날림이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곳을 배경으로 만드는 영화의 세트장은 "날림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현실과 똑 같은 세트장"이라는 확신에 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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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10시 30분(중국시각 11시 30분, 한국시각 12시 30분) 루앙남타에 도착했다. 시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쭉 뻗은 아스팔트 양쪽으로 상가와 관공서 그리고 게스트 하우스가 약 1키로 뻗어 있다. 듬성듬성 차가 다니고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거리를 활주한다.
우리가 묵을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도를 한 장 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갑자기 중국어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영어로 기록되어 있고, 의사소통은 무조건 영어로 한다. 잘하건 잘 못하건 영어를 배운 경험이 있는 한국인은 아마 중국보다 라오스가 여행하기에 훨씬 편할 것이다.
지도를 한 장 사려고 했다. "니 요우 띠투마""라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함은 당연하다. 나는 얼른 영어로 "Do you have a 띠투?" 하다가 드디어 "Do you have a map?"으로 고쳐 말했다. 사람이 얼마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지, 내가 나를 보고 놀라게 된다. 단지 10일 동안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 벌써 나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제 중국어를 쓸 일이 없으니, 라오스와
태국을 떠나는 10일 후에는 중국어는 전혀 생각이 안 나고 영어가 생각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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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있다가, 라오스로 여행 온 한국이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일년에 한 번 라오스에 와서 한 달 정도 있다가 간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은 즉, 이곳은 경쟁이 없고 느슨하고 항상 따뜻하고, 사람들은 순박하며 물가가 아직도 싸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오스에서 비자 없이 머물 수 있는 기간은 15일, 따라서 그들은 15일 지나면 바로 옆에 있는 캄보디아나 베트남 또는 태국에 갔다가 다시 라오스로 돌아와서 15일 머무는 식으로 여행을 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라오스에 오기 전까지 "라오스는 독재정권이 있어서 경직되어 있고, 감시가 심하며, 미개하여 불편하고, 치안이 불안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라오스만큼 여행하기에 좋은 나라가 없는 듯 하다. 그 순간 라오스 말을 좀 배워서 다음에 개별적으로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직 한국에서는 미얀마 여행은 그리 활성화되지 못한 것 같다. 미얀마도 다녀온 사람 말을 빌리면, 미얀마 사람들이 순박하고, 착하고, 치안도 안정되고, 물가도 싸다면서 반드시 가볼 것을 권한다.
하기야 말하면 무엇하나? 어떤 서양인이 한국에 간다고 하니까 그의 어머니가 "한국은 북한과 툭하면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죽으려고 가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항상 정통한 정보보다는 부정확한 첩보가 더 사람을 사로잡는 것 같다. 하여튼 남의 말은 반만 믿는 지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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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아줌마들이 장난감을 만들고 있다.>
점심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돌려고 밖으로 나왔다. 세 사람이 돼지를 자동차에 싣고 있었다. 돼지가 얼마나 무거운지 돼지 발목 사이로 끼워져 있는 쇠 막대기가 휘청거렸다. 돼지는 죽겠다고 소리지르지, 돼지는 무겁지, 세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린다.
우리도 옛날에 돼지를 팔 때에는 돼지를 사갈 사람이 오기 전에, 돼지에게 물을 빵빵하게 먹인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무게를 많이 나가게 하기 위해서다. 돼지를 묶을 때는 돼지는 돼지 목청따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래서 돼지의 발목을 묶고 주둥이를 묶어서 돼지 목따는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인다. 문제는 주둥이를 묶으니 돼지코도 함께 압박받아, 돼지가 코로 숨을 쉬는 것이 어려울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식식 거리는 돼지 코에 거품이 바울방울 붙어 있던 장면,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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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안 쪽으로 가면 학교가 나온다. 잔디밭 위에 세워진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에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빽빽히 앉아 있다. 컴컴한 교실에, 아이들은 떠들고, 여자 선생님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그중 몇몇 아이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들고, 밖에서는 학부모가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떠들고 있고, 나는 짧은 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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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에 교문을 빠져 나오는 학생들은 더 이상 명랑할 수 없을 정도로 휘파람을 불면서 재잘거린다. 재미있는 것은 여학생들의 복장이다. 상의는 아마 자유복인 듯 했다. 그러나 하의는 모두 검은 치마를 입었는데, 치마 끝에 흰빛이 도는 천을 둘렀다는 것이다. 나중에도 많이 보았지만, 어른의 경우에도 치마 끝을 다른 천으로 장식한 치마가 아마 라오스의 전통복인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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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언덕에 노란 절이 있다. 중국과는 달리 여기 절은 노란색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 듯 했다. 주위를 한 바퀴 돌고보려고 하는데, 스님이 손짓을 하며 들어가 보라고 한다.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는데, 들어가 보라고 하니 하는 수 없이 들어가려고 하는데, 돈을 내라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돈내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보니, 비가 와서인지 음침하고 칙칙하고 별로 볼 것도 없다. 채 1분도 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마침 한 사람이 계단에 앉아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상해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프에토리코 사람이었다. 1 개월 일정으로 라오스를 여행하고 있는 그는 한국에도 가봤다고 했다. 어디를 가봤는지 물어보니, 서울 속초 경주에 가보았다고 했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설악산이었으며 그 웅장함에 감동되었다고 했다. 올 6월 달에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는 그에게 내가 물었다. "한국에 다시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가보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은 너무 춥습니다."그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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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 바라본 루앙 남타 전경>
다시 마을로 내려와, 길 반대편 쪽으로 가보았다. 한 곳에서 이상한 악기를 연주하며 시끌벅적한 곳이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방에 이상한 장식과 돈이 걸려있고, 절을 하고 가는 사람도 있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드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위의 사진 오른쪽 끝에서 사진 찍는 사람)에게 이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서 몇 년 후 그 영혼이 다시 집을 찾아오는 날이 있는데,
그날이 마침 내가 찾아간 그날이었던 것이다.
저녁이 되자 조그만 야시장이 열렸다. 좁은 야시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사방에 먹을 것을 요리하는 포장마차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맥주와 안주를 먹었지만, 식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한 쪽에 있는 재래시장에는 값싼 일상용품 가게들이 불빛을 밝히며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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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디를 가나 개가 그리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개떼, 저기서도 개떼, 개떼가 개판을 쳤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을 한 입에 받아 삼키고는 침을 꼴깍거리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뒷발로 목 주위와 아랫배를 듣득 긁고, 다른 개와 또 으르렁거리다가 배가 고프면 또 옆에서 눈이 빠지게 음식을 기다렸다. 그 누구도 개를 쫓아내거나, 혼내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것을, 그것이 설령 사람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기
있고 싶은 곳에 있도록 내 버려 두는 나라, 이곳이 바로 전국민의 대부분이 불교를 믿고 있다는 라오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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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를 데리고 다니면서 비디오를 찍던 서양인. 이 사람은 루앙프라방에서도 자주 만났다.>
<서양인들은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날 밤도 술깨나 마셨다. 한 아주머니가 자꾸 모자를 사라고 했다. 아내는 필요가 없으니 사지 말자고 했다. 나는 무조건 사라고 했다. 내가 사면 한 두 번 써보고 버릴 것이다. 나도 평소 멀쩡한 정신일 때는 필요없는 것을 사지 않는다. 하지만 술이라도 조금 먹었으니 "그까짓것 사주라"고 큰 소리쳤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노점에서 파는 물건은 값을 깎지 말고 사라고. 그들이 남으면 얼마나 남겠나? 대신 좋은 물건을 살 때,
예를 들어 200만원짜리 살 때, 150만원에 사라고. 그런데 어떤 사람은 200만원짜리는 그냥 사면서, 1000원짜리를 800원에 사려고 애를 쓰고, 어떤 사람이 700원에 샀다면 배가 아파서 일주일 동안 속이 뒤집히는 사람도 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을 이런 곳에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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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은 게스트 하우스 주인: 위쪽에 본인이 젊어서 결혼한 사진이 걸려있다. 지금도 멋있지만, 젊었을 때는 마치 영화배우라도 되는 듯이 멋있어 보였다. 오른쪽은 우리를 루앙프라방으로 운전해 데리고 간 기사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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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우리를 태우고 루앙프라방으로 가기로 한 운전수는 현대봉고차를 갖고 있었다. 곧바로 루앙프라방으로 가지 않고 동네를 한 바퀴 돌더니 길옆에 차를 세웠다. 거기가 바로 자기 집이었던 것이다. 말이 없는 이 기사는 아내에게 간단한 몇 마디 하더니 다시 차에 올랐다. 남편을 잘 만나 잘 사는 것으로 보인 곱디고운 이 아주머니는 우리에게도 인사를 하고 남편에게도 인사를 하고 멀리사라져가는 우리에게 한 동안 서서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루앙남타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순탄하게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공사를 해서 한 참 동안 서 있어야 했고, 아스팔트가 손실되어 없어진 부분이 많았다. 여기서도 터널 하나 없이 산길을 가야하니, 길이 얼마나 꾸불텅거릴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지도에 보면 그래도 이 길이 두 도시를 연결하는 이 나라의 고속도로와 같은 곳인데, 나머지 시골길은 물어 무삼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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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잠깐 쉰 곳에는 "숭실대학교 해외"까지만 보이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숭실대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 대학생들이 이곳에 와서, 한글을 가르쳤는지, 아니면 청소를 하고 갔는지, 아니면 아이들하고 놀다갔는지 모르지만, 낙후된 곳일수록 의료봉사단이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주민들은 어디 아파도 죽기 전까지는 병원이라는 곳을 가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프면 참으면 되고, 이빨이 아프면 빼면되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바나나 따먹으면 되는 사람들에게 의료봉사 외에 무슨 봉사가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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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물고 있는 아이>
오후에 한 마을에서 잠깐 또 멈추었다. 재봉틀로 무엇인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옆에서 한 아이가 큰 부엌칼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머니는 아이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 버려 두는 것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풍선을 꺼내 주었다. 그 순간 우리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열심히 나무를 깎고 있던 아이가 칼을 내동댕이치고 풍선을 입에 갖다대는 것을 보고 말이다. 어머니의 입에서도 드디어 미소가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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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닐 시간이 있었다. 어디가나 아이들이 많았다. 잘 살지 못하는 나라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못사는 집에 자식만 많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天不生無祿之人, 地不長無名之草라.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새끼는 낳아 놓으면 어떻게든 굶어죽지는 안는다.
어떻든 아이들에게 장난감이란 흙과 막대기뿐인 듯 했다. 하지만 이이들은 그것만 가지고도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너무 더럽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더럽고 깨끗하고는 수많은 판단의 기준 중에서 단지 하나일 뿐이다. 왜 사람을 만나면 더럽고 깨끗하고가 먼저 눈에 들어올까? 이미 그런 문화에 물들어서일까?
하기야 나도 어렸을 때는 겨울 내내 목욕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손에 때가 더덕더덕 붙어서, 소 여물 끓이고 남은 물에 손을 담갔다가, 돌로 벅벅 문질러 때를 벗겨내기도 했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않고 자라는 저 아이들은 내 눈에는 불쌍할지 모르지만, 자신들은 대단히 행복할지도 모른다. 중국의 서커스 단원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말했더니, 자신들은 대단히 행복하다고 말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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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에 루왕남타를 출발하여 오후 6시 반에 루앙푸라방에 도착했다. 루앙남타에 비해 루앙프라방은 활기차고 혼잡하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찾아들어간 게스트하우스의 종업원이,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혼자 한국말을 배웠다는 그는 사실 인사말 이외에는 아는 말이 없다고 하면서 껄껄 웃었다. 앞으로 3일간 보낼 르앙프라방, 옛 라오스의 수도였다는 르앙프라방에 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잠시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친다. "기상, 아침 식사 하러 갑시다." 나는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려 하면서, 헐레벌떡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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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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