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비엥: 루앙프라방의 1/5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도시. 루앙 남타와 비슷하다. 바로 옆에 강이 있고, 주위의 산과 들이 대단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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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여행
라오스와 태국은 여행자 천국 답게, 아무나 여행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도처에 산재해 있는 여행사를 찾으면 모든 것이 그곳에서 해결되게 되어 있다. 방비엥에 붙어 있는 위의 광고판을 보자. 예를 들어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을 간다고 치자. 무엇을 타고 가느냐에 따라서, 10만킵에서 15만킵까지 있다.(1만킵=1400원). 계산해 보면 대체로 약 16,000원 정도 된다고 볼 수 있다. 비엔티엔에서 태국의 방콕까지는 약 4만원에
갈 수 있다. 숙박비는 성수기는 10만킵이하는 거의 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평균 하루에 2인용 방 하나에 약 1만원-2만원정도가 된다. 물론 찾아보면 이보다 훨씬 더 싼 방도 있다. 한끼 식사비는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1천원- 5천원 정도이다.
하루 활동비는 얼마나 될까? 23일 예로 들면, 아침에 동굴까지 태워가서 동굴 탐험하고, 점심 먹고, 카약 약 3시간 타고, 집으로 오는 비용이 일인당 약 2만원된다(확실한 기억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대체로). 안마비는 약 6000원정도 된다. 극기훈련 식으로 여행한다면, 그래서 그것에서 희열을 느낀다면, 위에 제시된 금액보다 훨씬 더 저렴한 방법으로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이 여행다우려면 - 이것은 상당히 주관적이므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너무 아끼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쓰듯이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것 먹고(물론 술도 포함) 가고 싶은데 가면, 하루에 약 3만원 정도 될 것 같다.
위의 비용은 학생이라면 부담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직장인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껴서 살더라도 여행까지 가서 너무 돈을 아낀다면, 여행이 고역이지 무슨 재충전의 기회가 되겠는가? 좋은 추억보다는 나쁜 추억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이것은 쓰라린 상처가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오래 추억에 남게 하려면 생고생 실컷 해야 하고, 정말 멋있는 여행을 하려면,
돌아오는 순간 잠깐 생각하고 미소를 지으며 모든 것을 잊는 여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떻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모든 것은 본인의 판단하에 결정할 일이다. 라오스에 가서 10일 동안 30만원 내고 잘 먹고 잘 놀다 왔다는 소리 입에서 나올지 안 나올지는 본인이 판단할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인지,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펑펑 돈을 쓰다가도 해외에 나가면 짠돌이가 되는 사람이 있다. 각자의 소비 성향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진정한 나의 여행, 나의 삶을 위하여 무엇이 옳은지
잘 생각해 보고 여행길에 오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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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솽반나, 라오스, 태국 여행기
제 7부: 방비엥
<루랑프라방에서 방비엥을 가다가 만난 아이들>
7월 22일 아침 7시 30분 루앙프라방을 출발하여 방비엥으로 향했다. 전에 차를 탈 때와 비슷한 길과 비슷한 사람들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하지만 루앙남타에서 루앙프라방 올 때의 길보다는 확실히 좋아서 1시경 방비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중국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이 주는 음식 받아 먹는 것을 좀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먹을 것을 중국인에 주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여기서는 무엇이든지 받는 것을 좋아한다. 옛날 미군들이 우리에게 껌을 주면 좋아했던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주기를 바라고, 또 받으면 고마워한다. 방비엥으로 오는 중에 아이들을 만나 과자 풍선 등을 좀 주었는데,
마지막 한 아이가 받지 못했다. 빈 손을 바라보는 그 아이의 서운해하는 모습이 지금 이 시간에도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마음이 짠하다. 라오스를 여행할 사람은 간단한 먹을 것에서부터, 놀이감 예를 들어 풍선 등을 좀 많이 가져 가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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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잠깐 쉰 어떤 시장 풍경>
<방비엥 가는 중 만난 아름다운 산>
<방비엥: 한적한 작은 읍 정도의 도시: 방학 때는 중국인들로 붐빈다고 한다.>
오후 1시경 방비엥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수박을 사서 먹고,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대부분은 자전거를 빌려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나는 4시경 게스트하우스를 출발하여 그림처럼 아름다운 강과 산이 있는 쪽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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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비엥의 "쏭강">
강가에 오니 물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고, 그 강물에 아이들이 미역을 감고 있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아이를 보고, 1950-60년대 어릴 적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강으로는 가끔 카약이 지나가고, 투망을 던져 고기를 잡는 사람도 보였다. 강가에서 소가 풀을 뜯다가 물을 먹는 모습이 보였고, 소가 물속의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지 한 참 동안 물끄러미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외나무 다리를 건너 산을 향해 계속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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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나오는 스위스의 풍경이었다. 저 멀리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작은 집이 성냥갑처럼 서 있으며, 소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라오스 사람들이 저 먼 산으로 등산을 가거나 트레킹을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곳에 분명 트레킹 코스가 있을 것이다. 며칠 이 곳에서 머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분명 여기가 "천국이리라."
"동굴 가는 길"이라는 팻말을 보고 계속 걸었다. 나 이외에도 드문드문 여행객이 보였다. 서양인들은 윗통을 벗어 제끼고 걸었다. 태양은 서서히 지고 있었고,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불을 피워, 연기가 하늘로 꾸물꾸물 올라가고 있었다. 막상 가보니 동굴은 무슨 동굴, 그냥 웅덩이었다.
다행이 그 동굴에서 계속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돌이 하도 뾰죽하여 마치 칼날과 같았다. 약 15분 땀을 흘리며 올라가 보니, 서양인 몇 사람이 바위에 올라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 꼭대기 깃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깊은 호흡을 했다. 천지가 훤히 보였다. 방비엥도, 이름 모를 산도, 그리고 지는 해도 한 모두 내 발 아래에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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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양철 지붕 아래 원두막에, 서양인 몇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심심해서 인지, 바람이 가끔 허리를 툭툭 치는 이 들판 모서리에, 모든 것을 잊고 한가롭게 놀고 있는 그들이 마치 신선놀음하는 듯이 보였다. 정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는 것 같았고, 가만히 보니 들판 원두막 기둥이 썩어 내려앉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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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은 아마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날이리라. 이번 여행 중 구경의 하이라이트가 루앙프라방이라면, 활동 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방비엥에서의 오늘일 것이다.
8시 반에 뚝뚝이차를 타고 동굴 탐험에 나섰다. 우리 8명 일행에 외부인이 단 한 사람 타고 있었다. 아래 사진 중 오른쪽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은 안내자이고, 그 옆에 있는 여자가 바로 혼자 와서 우리와 합세한 관광객이다.
이 관광객에 대해 좀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여인은 한 마디로 대단한 여자였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에서 2 가지 직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에서 시작하여 4개월 여행을 계획하고 돌아다닌다고 했다. 3개월은 여기 동남아를 돌아다니고, 마지막 4개월 째는 호주로 가서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이스라엘로 돌아간다고 했다.
한 시도 입을 가만두지 않는 이 여인은, 혼자 사는데 자기 개가 그렇게 좋다고 말하면서 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디서 버림받은 개를 주어왔는데, 이 개가 등치가 크고 아무나 보면 으르렁 거려서(not friendly) 항상 조심을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카약을 타고 내려가면 중간에 "그네처럼 타고 왔다갔다 하다가 물위로 떨어지는 장치"가 있다. 이것을 sling shot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기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냥 옷을 훌러덩 벗고 풍덩 물 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우습지 않은 상황이, 나에게는 너무나 우습게 느껴졌다. 칼을 가져오기는 가져 왔으나 싸울 수가 없어서 호박이나
찔러보려는 장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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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탐험을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중에, 동양인 아이들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일행 중 저 아이들을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한국의 양산에 있는 어떤 대안학교의 학생이었다. 일년 일정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체험을 하는 아이들이었다. 대안학교는 보통 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학생이 가서 체험 위주의 학습을 하는 학교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일년이나 해외 체험을 한다면 비용도 엄청날 것이고, 체험이
어떤 체험일지 궁금했으며, 그 이외의 학습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것에 우리끼리 대해 난상토론이 벌어졌는데, "그냥 학교에 있었으면 버려졌을 아이들이 저렇게라도 하니까, 개성을 살려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라고 여기는 그룹이 있었다. 한편, "그래도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배우는 정규과정을 배워야지, 저런 체험만 한다고 무슨 뾰죽한 방법이 있겠냐"는 그룹이 있었다. 많은 말이 오고간 뒤, 결론이 났다. 결론은 "지내봐야,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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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동굴은 물 속에 있었다. 물과 동굴 사이가 너무 협소해서 보통의 방법으로는 동굴에 들어갈 수가 없다. 쥬브를 타고 누워서 줄을 잡아 당겨서 안으로 들어간다. 동양인은 대체로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고, 서양인은 옷을 벗고 들어가는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전등불을 달고, 정신 바짝차리고 무조건 앞 사람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쥬브에 앉는 방법에 따라 편안한 사람이 있고, 목이 뻘쭘하게 나와서 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30분 간을 머리를 쌩으로 받치고 있으니 벌 중에서도 상벌이요, 말을 못해서 그렇지 생욕이 나올 판이다. 나중에는 "목 빠져 사람 죽네." 소리 동굴 속에 메아리 친다.
동굴 속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그저 동굴만 있을 뿐, 구경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안내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갔지만, 이것도 일종의 극기 훈련으로 기록해도 좋을 것이다. 중간에 내려서 쥬브를 들고 갔다가 다시 타고 끝까지 간다. 나올 때는 들어갈 때와 역순으로 나온다. 쥬브를 타고 가다가 물 속에서 한 번 내려 보았는데, 물 속 바닥은 연한 진흙이어서 약 20-30센티 정도 발목이 빠졌고, 어떤 곳은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곳도 있어서, 바닥이
상당히 울퉁불퉁함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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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밖으로 나오면 고기와 과일을 불에 구운 요리와 볶음밥을 준다. 점심을 먹고 나오면 바로 옆에 동굴이 있고, 그 안에 부처상이 있다. 이 굴이 코끼리 동굴이라고 하는데, 한쪽 면에 코끼리를 닮은 바위가 떡 버티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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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카약을 타는 시간이 왔다. 나는 영월에서 래프팅을 해 본 적은 있어도 카약은 처음 타본다. 장난감 같은 작은 배에 두 명이 타고, 강을 따라서 내려가는 것이다. 출발하기 전 간단한 학습을 하는 데, 오른쪽을 저으면 배는 왼쪽으로 가고, 왼쪽을 저의면 배는 오른쪽으로 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실제로 노를 젓다보면, 자꾸 방향을 잊어 먹어 헷갈리기 일쑤다. "배가 뒤집혀도 키가 넘도록 깊은 곳은 없으니 안심하라는
것", 어찌 보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지도 모른다.
카약은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슬슬 방향만 잡아주면 자기가 알아서 배는 떠 내려갔다. 가끔 돌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는데, 중심을 잡고 가만히 있으면 그것도 배가 알아서 내려갔다. 처음에는 쫄았다가 나중에는 휘파람이 나올 정도였다.
Row, row, row your boat
Gently down the stream,
Merrily, merrily, merrily, merrily,
Life's but a dream.
배를 저어라
강을 따라서 부드럽게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인생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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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쉬면서 지금까지 무사한 것에 대한 승리주를 마신다. 위스키 한 잔이다. 술 한 잔 마신 김에 다른 사람들이 타는 기구를 타보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시수앙반나에서 이미 타보기로 결심했던 일이기도 하다.
높은 사다리에서 뛰어내리려니 오금이 절여서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술먹은 김에,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심정으로 뛰어 내렸다. 휙 멀리 가면, 이쪽에서 줄을 잡아당겨 다시 오게 하고, 다시 줄을 놓아주어 멀리가게 하는 그런 식이었다. 공중을 왔다갔다 하니 시원하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는데, 문제는 어느 시점에서 뛰어 내려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단 몇 초 동안 공중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수
많은 생각이 머리 속으로 기어왔다가 사라졌다. 잘 못 뛰어 내렸다가 사다리에 부딪치는 것은 아닐까? 아래 물 속에 바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떨어지는 소리가 대포 쏘는 소리 같겠지? 하여튼 네 번인가 몇 번 왔다갔다하니 팔의 힘이 빠질대로 빠졌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아무데서나 손을 놓고 말았다. 그 뒤에 펑하는 굉음 이외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물 속으로 한 없이 들어갔다. 코속으로 귀속으로 물은 다 들어가고 입으로 물먹고, 허부적대다가 던져주는 줄을 잡고 간신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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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우리의 호프 KC. 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뒤를 보니 KC가 혼자 허부적대는 것이 아닌가? "내 모자, 내 모자!" 다급한 목소리 들린다. 모자가 물에 빠져 건지려다가 배가 뒤집혀 버린 것 같았다. 모자 잡으려다가 돈 지갑 물에 풍덩 빠지고, 핸드폰 물에 잠기고, 바위에 부딪쳐 무릎이 까졌다. 모든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다른 모든 사람 대신 혼자 온갖 고초를 당한 KC에게 위로와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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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돈을 말리며 씁쓸해하는 KC. 말릴 돈이라도 있으니 다행, 나는 돈이 씨가 말라서 그만. 옆에 있는 바케쓰(bucket)라는 술이 없었더라면 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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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30분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흘러온 길 돌아보니, 참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별거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순간, 아무리 보아도 방비엥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우뚝우뚝 솟은 산 아래 초목이 무성하고 소가 풀을 뜯는다. 말없이 흘러가는 "쏭강"에 지는 해가 부서지고, 몇 조각 떠 있는 나뭇잎 배, 바람에 서걱거린다. 저 산은 왜 벌써 가느냐고 뾰루퉁해하고, 시냇물은 좀더 가자고 졸라댄다.
카약을 타고 내려오면서 계속 "먹는 집"이 강 양쪽으로 눈에 보였다. 여름 우리나라의 유원지 같이 물가에 포장을 치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서, 낮 바람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우리는 그들을 보고, 서로 손을 흔들며 만났다 헤어진다. 강가를 따라서 게스트 하우스도 많이 보였다. 다음에 온다면 강가의 게스트 하우스를 빌려 낮에는 보트 놀이하다가 라오 맥주 마시고, 밤에는 별을 보고 노래하다가 잠이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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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 경우님 촬영>
<방비엥에도 탁발승이 계신다.>
이 이야기를 하고 이 글을 끝내려 한다. 위 사진을 보면 오른쪽에 한 남자가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뒷 모습이 보인다. 이 사람은 22일에 우연히 길에서 만났고, 23일에도 우연히 길에서 만난 한국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어떤 책방이다. 이곳 책방은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 안내도 하는 곳이다. 그는 한국말로 종업원에게 물었다. "루앙프랑방 가는 것 맞어." 종업원이 뭐라고 말하면, "아니 그것이 아니고, 좀 싼 걸로
말여." 놀라운 것은 그래도 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왔다는 그는 "70이 되면 여행은 못한다고 해서, 큰 맘 먹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겉보기에 60이 좀 넘었으리고 생각되는 그는, 서울에서도 혼자 산다고 했다. 무작정 혼자 태국으로 와서, 버스를 타고 이곳 방비엥까지 왔다고 했다. 나도 내 나름으로 모험을 즐긴다고 하지만, 나는 그래도 대충 영어는 어느 정도 하니까 가능한 것이지, 이 사람처럼 막무가내식으로 오는 사람은 사실 처음 본다.
여행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루앙프라방으로 갔다가 하노이로 가서 하롱베이로 갈 겁니다. 그런 다음 인도로 갔다가, 네팔까지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면 언제 한국에 돌아 갑니까?" 내가 물었다. "한국행 비행기표 값만 남았을 때, 그때가 바로 돌아가는 시점입니다.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는 모릅니다." 4개월 일정으로 돌아다니는 이스라엘 여인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이 사람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어를 거의 못하는 사람이 이런 대담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이스라엘 여인보다도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그와 나는 말이 없었다. "카메라 조심해요."그가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예, 부디 안녕히 잘 다녀 오세요."내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그 뒤 여행 내내 그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과연 그가 그 이후에 어떻게 돌아다녔으며, 어떻게 생활했을까? 이럴 줄 알았다면, 그의 주소라도 알아둘걸. 왜 항상 일이 끝난 후에 생각이 미치는 줄 모르겠다.
그날 밤에 거리에 나와 헤어진 그를 생각하며 거리를 걸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며,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왔다가 또 저 세상으로 가는 걸까?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기 전에 왜 저런 일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무엇이 인간다운 삶이며, 무엇이 진정한 삶인가?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걸어가고 있을 그를 생각하며 새벽 1시 잠에서 깼다. 지금 시각이 새벽 5시, 나는 4시간 동안 이 글을 쓰며, 대부분을
그에 대한 생각으로 보냈다. 아직도 밖은 어둡다. 저 어둠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뒷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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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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