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China

중국 시솽반나-라오스-방콕 8 "비엔티엔 그리고 방콕으로"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1. 21:19

 

 

 

<비엔티엔 중심부: 우리가 묵은 게스트하우스 Soukchaleun Guesthouse>

 

 

 

*본 여행기를 일단 7회에서 끝냈으나, 끝맺음을 해달라는 몇 분의 독자가 계셨고, 제가 볼 때도 뚝 짤라 먹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앞으로 2회 정도 더 쓸 예정입니다.

 

 

시솽반나, 라오스, 태국 여행기

 

제 8부: 비엔티엔 그리고 태국으로 출국

 

2011년 3월 24일 7시 30분. 비엔티엔을 향해 방비엥을 출발했다. 운전기사는 아주 젊은 사람으로 말은 안 해봤지만 명랑하고, 쾌활하고, 건들건들 해 보였다. 특이한 것은 차에 타자마자 헤드폰을 끼고 운전을 했다. 내가 배운 운전면허 시험 문제에는 헤드폰을 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는데, "이 나라의 운전법은 헤드폰을 써도 문제가 없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헤드폰에 경쾌한 음악이 나오는지 고개를 꺼떡꺼떡 하면서 차는 도로 사정에 비해 엄청 쌩쌩 달렸다.

 

 

 

 

차에서 보이는 길 양쪽 풍경은 농촌이었고, 가끔씩 나타나는 상점과 그 앞에 웅성거리고 앉아 있는 몇몇 사람이 눈에 보이는 대부분이었다. 사람을 가득 태우고 차 위에 물건을 싣고, 그곳도 모자라 자동차 뒤에 매달려 가는 것이 옛날 내가 어렸을 때 경험한 비슷한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중학교에 가려면 10리나 걸어가야 했었다. 천천히 달리는 트럭에 운전수 몰래 올라타고 학교에 가 본 적이 몇 번 있었는데, 타고 나서도 "괜히 이러다가 내가 제명에 죽지 못하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몰래 탄 트럭이 이상하게도 거꾸로 쑤셔 박는 것이 아닌가? 차가 하늘로 기어올라가는 것이었다. 트럭에 기중기가 있어서 앞 부분을 들어 올려 짐을 뒤로 쏟는 장치가 있던 차였다. 운전수가 "이놈들 혼 좀 나봐라" 하면서 달리는 트럭의 앞 부분을 들어 올렸던 것이다.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모두 뒤로 밀려 밖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때 트럭이 서서히 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빨리 달렸더라면, 나는 지금 이 글도 쓰지 못하고 이미 수 십년 전에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자동차는 계속 달렸다. 고삐없는 소가 지나가기도 하고, 고철 장사에게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경운기가 많은 사람과 물건을 싣고 잘도 달렸다. 학생들이 학교 가는 모습이 가장 많이 보였고, 일반 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구니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라오스 수도인 비엔티엔 시내 중심가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차 운전수가 경찰에 걸렸다. 왜 걸렸는지 모르지만, 짐작에 헤드폰을 썼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운전수가 내려 호주머니에서 몇 푼의 돈을 경찰에 전달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그 뒤 운전수는 울상으로, 경찰은 기분 좋은 상으로, 현장을 떠나는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비엔티엔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 바로 That Luang이다. 모두들 큰 짐을 맡기고, 뚝뚝이를 대절하여 사찰로 향했다. 약 4키로 떨어진 탓 루앙은 먼 데서 보아도 과연 훌륭한 사찰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겉보기에는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듯이 보였으며, 하나하나 모두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곳에서는 스님이 안에 앉아 사람들에게 종교 의식을 행하고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스님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계신다. 우리는 대충대충 보고, 사진을 찍고, 날이 얼마나 더운지 더 이상 구경할 수 없을 때, 왼쪽에 있는 큰 건물 옆 나무 밑에서 한참을 쉬었다.

 

 

이 탓 루앙 사찰은 안내책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That Luang":  높은 담과 작은 창문을 가진 사원이 45m 높이의 탑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원의 입구에는 탑을 건축한 셋타티랏왕의 동상이 있다. 탑의 바닥은 신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각 층을 돌아가면서 통로가 있다. 각 층은 계단으로 연결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을 기호화한 것들이 층마다 다른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파탓루앙은 19세기 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으나 1935년 복원되었다. 탑에는 부처의 유발과 가슴뼈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라오스 전통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불교도와 라오스 독립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라오스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물로 여겨진다."

 

 

 

 

 

 

 

 

 

날은 더워 죽겠는데, 입구에는 불상을 실은 트럭에서 스님이 쉰 목청을 돋구며 무슨 말을 되풀이, 되풀이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데, 애처로운 스님 목소리만 메아리치다 제자리에 돌아와 기침을 콜록콜록 해댄다.

 

 

 

 

 

That Luang에서 뚝뚝이를 타고 약 5분 정도 도심쪽으로 오면 파투싸이(Patuxay)라는 건축물이 나타난다. 라오스어로 파투(patu)는 "문, 아치" 라는 뜻이고, 싸이(xai)는 "승리"를 뜻한다니, 우리말로 하면 "개선문"이 된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라오스가,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서 "독립문"을 만든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하다. 날이 더워서인지 개 문 주위에는 그저 사진 찍는 몇 사람과, 사진찍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진사들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길을 따라 메콩강쪽으로 걸어오면 대통령궁이 있고 그 뒤 쪽에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원이 있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돈이라도 한 푼 벌겠다고 장난감 풍선을 주렁주렁 매달고 거니는 아가씨가 애처로워 보인다. 그 옆에 수많은 뿌리를 땅에 박고 있는 나무 아래 그 뿌리를 의자 삼아 앉아 있는 꼬마가 위태위태하면서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한참을 쉬면서 수박을 사서 먹고 걸어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저녁은 한국식당에서 했다. 이상하게도 어디나 가면 한국식당이 있다. 여기에서도 한국 식당이 있었는데, 거의 모든 음식이 한국에서 먹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된장 고추장은 말할 것도 없고, 새우젓이나 젓갈 등도 어디서 가져오는지 한국에서 먹는 것과 거의 같았다. 그날도 소주와 라오맥주 엄청나게 마셔댔다. 날이면 날마다 먹는 파티다. 여행에서 정말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그 여행의 즐거움은 반에서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내일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모레는 어떤 음식을 먹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려진다.

 

 

식당에서 나오는데 현관에 붙은 대사관 공지문이 눈길을 끈다. 노상강도 사건이 발생하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가방을 나꿔채간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방이나 카메라 등 귀중품은 항상 길에서 보아 안쪽 즉, 오토바이 강도가 채갈 수 없도록 길에서 먼 곳에 휴대하고 다녀야한다.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고서는, 사진기를 넘겨 받으면 도망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조심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방에 들어와 잠을 자려고 하니, 오늘이 라오스의 마지막 밤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밖으로 나와 술집을 찾았다. 아내를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한 여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무슨 말을 해댔다. "밤의 아가씨"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No 하고, 계속 걷는데, 이 아가씨가 계속 따라왔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원지점으로 돌아와서 아내와 다시 술집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요소요소에 정말 늘씬한 미인들이 서서 얼씬 거렸다. 아마 아내만 없었으면 또 달라 붙었을 것이다.

 

 

이 아기씨들을 피한 것이 잘한 일 같기도 하고, 잘못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하여튼 그날 그 일은 그렇게 되었다. 사방에 불빛이 찬란한 집에 외국인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맥주를 시켰다.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와서 심심하다는 듯, 사람을 툭툭 치고 다녔다. 모기는 다리를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졌다. 팝송 "Are you going to San Franciso?"가 늦은 저녁 비엔티엔 하늘에 울려퍼졌다. 그런데 10시가 넘어서 인지 맥주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손님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물밀 듯이 빠져나갔다. 몇 사람이 남아 있었으나 이미 파장의 분위기를 탔다. 조금 전의 북적거리는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샹하이 투이스트가 있었다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터인데"라고 생각하며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손님을 구하지 못한 그 멋있는 "밤의 아가씨"는, 사냥감을 찾는 포수처럼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비로 쓸 듯이 이곳 저곳 낱낱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걸음 지나면 또 다른 포수가 먼 지평선에서 물체를 식별하려는 듯  때로는 허공을, 때로는 지평선을 넘나들 듯 두리번 거렸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는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남자를 찾으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여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나는 오늘도 이 거리를 거닐며 밤의 적막을 내 안으로, 안으로 삼킨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일부 바꿈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카메라를 메고 거리로 나갔다. 어제 그 아가씨가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러 나간 것이 아니다. 라오스의 마치막 찬란한 아침 빛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이다.  

 

 

아침해가, 사원의 붉은 지붕으로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아침해가, 흰색과 검은색으로 조화된 건물에 신선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침해가, 아름답게 단청한 이층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건물은 바로 아래 사진에서 보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나무 숲 속에 자리 잡은 이 건물 벽에 아침해가 숭성숭설 뚫인 나뭇잎 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흰색의 벽에, 갈색의 창문에, 그리고 무성한 나뭇잎 위에, 아침 햇살이 얼룩덜룩 무늬를 수 놓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집벽 위에 펼쳐진 빛의 무늬와 조화에 정신이 팔렸고, 환상적인 이 빛의 향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바닷가로 나가는 중 연기가 나는 곳이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이 살 수 없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쓰레기 장을 방불케하는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니 놀랍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넓은 탁자가 여러 개 있고, 파는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있어서, 이곳은 라오스 서민의 식당이요 수퍼마켓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사회주의건, 세상은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으로, 그리고 하루가 즐거워 너무 짧은 사람과 하루의 삶이 너무 길어 고달픈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 하다. 어차피 죽어서도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이놈의 악연은 정말 끈질기고도 끈질긴 인간에 채워진 영원한 족쇄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메콩강으로 나왔다. 강의 오른쪽은 라오스, 강의 왼쪽은 태국이다. 꼭 국경을 넘으려면 지키는 사람도 없는 저 강을 밤에 쥬브를 타고 넘으면 될 것인데, 실제로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사실 이들 동남아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거의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잘 대접해 준다고 한다.

 

 

한참을 가다보니 한 학교 마당에 내가 와 있었다. 교실을 들여다 보니 주번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이 실내를 정돈하고 있었다. 칠판 위에는 누군지 두 명의 남자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 사이에 라오스 국기가 붙어 있었다. 루앙남타의 교실보다는 훨씬 깨끗해서, 이런 곳이라면 공부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교실을 기웃거려 보았다. 칠판에 뭔가 써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산수 공부를 했던 교실 같았다. 어떤 수를 100으로 나누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학습하는 것 같았다. 400÷100=4, 623÷100=6.23, 34260÷100=34.260 ----. 끝없는 같은 내용의 반복이었다. 교육학적인 또는 교육과정의 측면에서 끝없이 100으로 나누는 연습을 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그 옆에 벽에는 학생들이 만든 꽃과 동물 모양의 색종이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교실 밖에는 조그만 운동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다가 얼마 후, 내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무슨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여자 아이들은 무슨 공놀이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한 여자 아이가 갑자기 치마를 들어올려 깜짝 놀랐는데, 그 속에는 우리나라 할머니들이 입는 빨간 내의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슬리퍼를 던지고 이를 막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던지는 슬리퍼는 엄청난 속도로 빙글빙글 돌면서 시멘트 바닥위를 미끌어져 상대방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저게 뭐가 재미있을까 했는데, 한참을 지나니 얼마나 재미있는지 나도 모르게 정신이 팔려서 내가 뭐하는지도 모르고 구경하게 되었다. 정말 아이들은 무엇이나 놀이로 만드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바구니. 집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써 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나는 기왕에 아침 조회도 구경하기로 했다. 좀 키가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떠들던 아이들이 무슨 신호에 의해 갑자기 말이 없었다. 아이들은 집단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그 뒤에 무슨 노래를 하고, 체조를 했다.

 

 

 

 

 

체조가 끝난 후, 교장선생님인지 풍채가 그럴 듯한 여자 선생님이 앞에 나타났다. 그 선생님은 위풍당당하게 느껴졌으며, 가끔 어떤 아이를 불러내서 무슨 말을 했고, 그 말을 듣고 아이들이 웃었다. 선생님은 왼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는데, 말을 하다가 핸드폰이 울리면 전화를 받고, 또 말을 이어가다가, 또 핸드폰이 울리면 전화를 받았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핸드폰을 받건말건 대체로 조용히 서 있었다. 이런 조회가 진행되는 중에, 오토바이에 태워 아이를 데려오는 학부모가 있고, 손목을 잡고 아이를 데려오는 어머니도 보였다. 조회의 끝 부분에 큰 소리로 몇 마디 외치더니 아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것이 내가 30분간 관찰한 결과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동료들을 만났다. 마침 어제 밤에 침대에 있었던 벌레가 생각이 나서 그 이야기를 했다. 빈대처럼 생긴 벌레가 있었는데, 잘 도망가지 않았다. 죽여보니 몸에서 피가 나왔다. 내 기억에, 오랜 전 언젠가, 한국의 어떤 지방의 여인숙에서 밤에 가려워 일어나 불을 켜니 수 많은 빈대가 사방으로 쏜살같이 도망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 곤충이 도망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는 빈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별 곤충이 다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른 방에 있었던 J형 방에도 그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빈대라고 말했다. 피를 너무 빨아먹어 움직이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샹차이와 똑같이 비린내가 나잖아요. 그게 빈대예요." 자세히 살펴보니 침대시트 사방에 붉은 피자국이 조금씩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도 피좀 빨렸겠구나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의 간판을 다시 확인했다.  

 

 

 

 

 

 

우리의 게스트하우스 뒤쪽에 라오스 박물관이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건물과 건물 사이에 아름다운 나무와 꽃 그리고 뭉게 구름이 있는 하늘이 인상적이다. 40분 뒤에는 점심 시간이어서 그 안에 나와야 한다고 안내원이 말했다. 여기는 모든 가방을 다 맡기고 들어간다.

 

 

박물관 안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약간의 역사 유물이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점령했을 때의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독립운동을 했던 점을 부각시키려는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미국과 프랑스라는 단어 앞에는 제국주의자라는 말이 항상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imperialist Americans, imperialist French people), 이들 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근처 슈퍼에서 간단한 먹을 것을 사와 먹으려고 하니, 밖에 있는 탁자에서 먹으라고 한다. 마침 라오스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어서 같이 먹게 되었다. 그는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라오스가 어떠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라오스 음식이 어떠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또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는 일본인이었다. 내가 일본말로 해보려고 하면 그는 영어로 말을 했고, 또 일본어로 말해보면 또 영어로 이야기 해서, 나중에는 그냥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는 전에 비즈니스맨이었는데, 몇 년 전에 퇴직했다고 했다. 결혼을 해 본적이 없으며 세계에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은 나라를 가봤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도 가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목포, 낙지, very good!"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젓가락에 돌돌 말아 먹어보았다는 것이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라오스 사람들은 예의가 없다. 라오스 음식은 맛도 없다. 라오스 음식이랄 것도 없다. 일본이 지진을 당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도, 이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라오스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일본에 돌아가지 않느냐?" 그는 대답했다.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이곳에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씁쓸해하는 그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대통령 궁을 지나서 한참 가면 어떤 절이 또 나온다. 라오스에는 절을 많이 보아서 아무리 유명하다해도 모두 그 절이 그절인 것 같다. 원숭이가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 먹는 것, 큰 새가 성큼성큼 걸어다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앞으로 결혼하리라고 보이는 두 남녀에게 노승이 무슨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무릎 꿇고 앉아서 합장하는 두 젊은이의 표정에 무한한 감사와 복종의 표정이 보인다. 주위에 더운 날씨에도 라오스식으로 빼입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돌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모두 꽃을 들고서 사원에 입장한다.

 

 

 

 

 

중간에 꿀을 파는 아줌마가 보인다. 꿀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먼저 떠 오른다. 큰 양동이에 벌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벌집에서 빼낸 꿀이리라. 공업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 라오스에서 가짜 꿀을 제조하는 기술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2,400원 주고 꿀 한 병 샀다. 한국에 와서 몇 번 먹어 보았는데, 향기가 짙게 배어있고 단 맛이 특이했다. 아마 이번 여행 중 가장 잘 한 일은 바로 이꿀을 사온 것이다!  

 

 

 

 


 

 

 

 

 

 

3시에 우리를 태워 태국의 국경지대까지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3시 15분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3:30분에 트럭을 개조한 뚝뚝이 차가 우리 앞에 멈추었다. 이미 그 차에는 외국인이 여러 명 타고 있었다. 그 많은 짐을 여기저기 쑤셔 넣고, 밀착해서 앉았다. "저렇게 시원찮은 타이어가 이 무게를 지탱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펑크가 나고 말았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되자, 결국 비슷한 다른 뚝뚝이가 와서 차를 바꿔 타고 출발했다.

 

 

 

 

 

내 앞에 두 남녀가 있었다. 자꾸 키스를 하고, 껴 안고 난리 법석을 부려서,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이스라엘 여자였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 여자를 자주 만나는지 모르겠다. 날씬하고 가무잡잡한 이 여인에게, 얼굴에 털 투성이인 남자가 잘 어울리는 듯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에 숭성숭성 나 있는 수염에 석양이 비치니 더욱 선명하게 털끝이 살아 움직인다. 놀랍게도 태국의 방콕에서도 또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내 책자에 여행 코스가 나와 있어서 누구나 비슷한 코스를 따라 여행하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방법은 조금 복잡하다. 기차표를 두 장을 받게 되는데, 왜 두 장이 필요한지는 후에 밝혀진다. 우선 차에서 내리면 출국의 과정을 밟게 된다. 여기를 통과하면 태국의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표 한 장을 낸다. 약 30분 뒤에 태국의 농카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여기에 내려서 다시 태국에 입국하는 절차가 진행된다. 일단 입국이 되면 기차역 밖으로 나간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시 남은 표 한 장을 내고 방콕행 기차를 타게 된다. 이때가 저녁 6시 20분이었다.

 

 

 

<태국의 농카이 역>

 

 

 

중국의 침대차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 침대차는 2층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침대번호가 11, 13, 15, 17 --- 등으로 모두 홀수로만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홀수는 2층이고 짝수는 1층이다. 1층은 공간이 넓어 편하고, 2층은 천장이 낮아 죄지은 놈처럼 항상 고개를 땅에 박고 있어야 한다. 알고보니 2층이 1층보다 값이 저렴했던 것이다. 돈이 저렴하다는 것이 여기서는 고통과 마찬가지였다.

 

 

 

 

 

 

기차에서 파는 음식은 보통 식당에서 먹는 음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새우 튀김에 가지나물 볶음 그리고 국 두 가지다. 1층에 앉아 밥을 먹으니 1층에 앉아 갈 사람이, 왜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지 묻는다. 밥을 먹고 올라갈 것이라고 손짓발짓으로 말하니, 껄껄대며 웃는다. 곧 이어 라오 맥주가 돌아가고 누군가가 오징어를 돌려서 또 술은 거나하게 취하게 되었다.

 

 

 

 

 

 

칠흑같은 밤을 뚫고 기차는 달렸다. 아마 낮에 여행했다면 그래도 볼 것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본래 버스를 타고 중간에 1박하고 방콕으로 가려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길의 사정을 알 수 없으므로 불편하리라는 생각에 기차를 탔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다. You can't eat your cake, and have it too 아마 영어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써 본 것이다.

 

 

잠을 자는둥 마는 둥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었다. 날이 밝아 온다. 기차는 벌써 태국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6시 20분에 도착 예정인 기차는 7시 40분 방콕역에 도착했다. 한 없이 넓은 대합실을 빠져 나왔다. 우리는 이제 카오산으로 간다. 외국인이 득시글 거린다는 서울의 이태원격인 거리다. 중국, 라오스, 태국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 방콕, 설레는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카오산, 카오산"이라고 말했다. "카오산?, 오케". 더듬거리며 택시 기사 기분 좋게 응답한다. 이제 막 출근 시간이 시작되려는 방콕 시내를 택시는 쏜살같이 달린다. 3일간의 방콕 일정이 눈 앞에 스치면서, 기대와 아쉬움이 몰려왔다 몰려간다.

 

 

<아침 7시 30분의 방콕 시내>

 



 

(2011년 4월 17일 작성)